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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줄다리기 ‘김종곤’ 편 (1) - 공부를 몬 한다는 것
작성일 : 2022-12-06 조회수 : 940
(줄 땡글기 직전 징 소리)
(사람들 영차영차, 함성, 풍물놀이 등 현장음)
외롭고 슬프면 하늘만 바라보면서 맨발로 걸어왔네 사나이

김종곤 육성 // 어쩔 수 없는 허무죠. 내 인생에 가장 좌절이 컸던. ‘공부를 해야만 나는 내 스스로도 성공을 할 것이다.’ 이렇게 작정하고 있었는데 공부를 몬 한다는 것은 본인이 성공을 할 수 없다는.. 그때 좌절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 이후로 내 생활에 암흑기니까 약 십 년. 목적이 뭔가 하는.. 목적을 상실한, 빗나가기 시작하는 그런 아마 계기가 그때부터가 계기가 된 거 같습니다.


나레이션 // 다큐드라마 문화가 된 사람들.
영산줄다리기, ‘김종곤’.
제1화, 공부를 몬 한다는 것

나레이션 // 이 프로그램은 국립무형유산원에서
구술 채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EBS가 오디오 자서전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절에 불공을 드려 낳은 자식이라꼬>
#1. 1938년,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죽사리 집

(갓난아기 울음 소리)
(여닫이문 열고 나오는 소리)
아버지 // (다급하게 묻는) 어무이, 뭐가 나왔습니까?
할머니 // 지가 세상 나왔따꼬 신고하는 기 못 들었나?
우는 기 장군감이라!
아버지 // (좋아서) 그라믄 아들이라예? 아부지, 좋습니까?
할아버지 // 하모. 조상한테 면목이 섰지.
1938년 오늘은 김해 김가 삼현파 70대손이 태어난 날이다.
할머니 // 에미도 낳자마자 부처님의 은공이라꼬 울대예.
아버지 // 그레 아들 낳겠따꼬, 지극정성으로 불공드리더니 다행입니더.
그라믄 사촌형님하고 상의해서 지어주신 그 이름, 있지요?
‘김.종.곤’이라꼬 지을랍니다.

(유랑마차 / 박인수)
김종곤 육성 // 저는 나기는 영산면 죽사리에서 나서 제가 어릴 때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해방되기 전에 이 터로 영산에 주산이 영축산이라꼬 하는데, 저 산이 영산 사람들이 정기를 받았다꼬 합니다. 그래가지고 3.1 독립운동도 일으키는 그런 의절이 나오기도 이랬는데, 비교적 아주 작은 야산들로 동네를 에워싸고 있죠.

<천지가 만세소리로 진동을 했어>
#3. 1945년, 영산면 죽사리

(”대한독립 만세!“ 함성 소리)
(누나와 종곤이 대문 팍 열고 들어오는 소리)
누나 // (뛰어들어오며) 아부지!
종곤 // (뛰어들어오며) 엄마! (숨차서) 엄마, 해방이 됐대요.
어머니 // (나오며) 그래, 소식 듣고 뛰어왔구나.
누나 // 저기 영산 로타리에선 솔잎으로 문을 만들고 있대요.
어머니 // 아부지도 소나무 해갖꼬 벌써 나가셨다.
해방 축하하는 솔문, 그거 만든다꼬.

(소년행진가)
김종곤 육성 // “어른들이 산에 가가지고 솔 나무를 엄청 크게 솔문을 직각으로 세웠습니다. 하루종일 밤늦게까지 ‘만세! 만세!만 부르고, 아마 시장통으로 해서 영산 변두리를 삥삥 돌면서 하루종일 따라다녔습니다. 그때는 고단한 거 피곤한 것도 없었어요. 국기를 막 이래 흔들면서 팔을 흔들면서 수십이 아니라 수백 바퀴를 돌고 그랬쟈.”
(소년행진가)
김종곤 육성 // “그때 따라 부르던 노래가 < 무쇠팔뚝 돌주먹 소년 남아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만세 만세 독립 만만세. 만세 만세 독립 만만세. >
이걸 하루종일 하고 영산을 돌아다녔어. 내 나오는 눈물이 감격의 눈물이 그때 감격이 아직도 충전돼가 있는 겁니다.”


<참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요>
#4. 1951년, 피난길

(6.25 전쟁 총성, 포격 소리)
청년 종곤 // 6.25 전쟁이 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식량을, 어머니는 밥할 재료를 들고 막둥이까지 업었습니다.
누나와 저, 남동생, 여동생까지 모두 짐을 나눠지고 피난을 갔지요.

어머니 // 창녕 지나 길곡으로 가라고예?
아버지 // 거도 안 되겠단다. 부산 쪽으로 가잔다!
어머니 // 그람 다음엔 어디로 갑니까?

김종곤 육성 // “이 동네에서는 제일 멀리 갔습니다. 김해 비행장까지 갔으니까. 가다가 중간에 아는 친척집도 없제 하니까 흘러 흘러서 그까지 갔죠. 학교 건물 안에 거처를 정하고 거 가니까 나무가 우선 떨어졌으니까.. 9월 아마 중하순 쯤까지 약 2달 가까이 있었습니다..”


#5. 1951년, 죽사리 고향집

(내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 명국환)
소년 종곤 // 아부지, 그 사이 우리 집 벼가 누렇게 익었어예!
남동생 // (좋아서) 와! 그럼 이제 쌀밥 먹나?

청년 종곤 // 폐허 속에서도 우선 먹을 곡식이 있으니
어린 마음에 좋았습니다.
그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저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지요.
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장남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동네형님 // 야~~ 우리 종곤이가 또 일등했다며?
아버지 // 형님, 우리 종곤이만 생각하면 웃음이 납니다.
공부 잘 하제, 일도 야무지게 잘 하제,
저 놈은 반드시 될 낍니다.
소작농에서 벗어나가, 공무원 시켜야하지요!
동네형님 // 아이 그러지~~

김종곤 육성 // 그런 기억밖에 없습니다. 전 중학교 때 열심히 공부벌렝이처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학교 성적을 그때 의식한 거는 아니지만 공부가 와 하기 싫은지, 싫은 사람이 나중에 있는지 그런 걸 내가 모르겠어요. 나는 공부가 싫지를 안 했어. 초등학교부터 계속 우등상 심지어 개근상까지를 다 타고 이랬습니다. 주위에서나 어디에서나 “공부 잘하는 학생이다.” 동네에서는 ”일 잘하는 아이다. 공부뿐 아니라 일도 잘하는 아이다.” 이렇게 알려졌습니다.

(부모 / 유주용)
어머니 // 종곤아, 그거 갖곤 양이 안 차제? 이거 더 가가 먹어라.
종곤 // 그람 엄마는예?
어머니 // 난 걱정말거래이. 저기 밥 더 있다. 도시락도 가꼬 가라.

김종곤 육성 // “자기는 밥을 굶으면서도 나를 멕일라고 그런 거는 내가 알거든요, 지금도. 엄마한테 받은 영향은 너무나 많지요. 참 온갖 고생을 다 하는데 어그 고생 프라스 배고픔까지도 참고 살아가는 자식을 위한 희생, 그것이 아마 내가 살아가는 강인한 정신력을 기른 토대가 엄마한테서 나온 게 아닌가, 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닌가 이리 생각이 듭니다.”


<채소원예 선생님 조성국 // 과의 만남>
#6. 1950년대 초, 영산중학교

(교실 문 드르르 여는 소리)
(중학생들 떠드는 소리)
조성국 // 자, 주목! 다 떠들었나?
학생들 // 네! (깔깔 웃는)
조성국 // 내 이름은 조성국이고, 채소원예 과목을 가르칠 끼다.
중학교 3년 지나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이 과목을 배워야 한다.
그카니까 우리 잘 지내보자! 재미나게 가르쳐주께.
학생들 // 네! (깔깔 웃는)
조성국 // 오늘은 이론 쪼매 하고 배추 모종 실습 나갈라꼬 하는데
반대할 사람 있나?
학생들 // 없어요! 없습니다! 좋아요!

(청춘의 꿈 / 김광남)
청년 종곤 // 중학교 시절, 전 공부 아니면 집안일만 했습니다.
소꼴을 뜯어 소를 멕이고, 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하고,
논과 밭일을 하고서는 새벽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 고단한 하루 중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조성국 선생님의 채소원예 시간이었어요.
4년이나 배웠어도 담임선생님으론 만나지 못했는데
훗날 더 큰 인연으로 이어질 줄은 그땐 몰랐습니다.


<공부를 몬 한다는 것>
#7. 1954년, 영산농업고등학교

(학교 종소리)
선생님 // 자, 오늘부터 1학년 2학기 기말시험 본다.
다들 열심히 공부했제?

청년 종곤 // 고등학교 1학년 말, 지는 엄청난 좌절을 겪었습니다.

선생님 // 그리고, 김종곤 니는 시험 안 봐도 된다. 오늘부터 김종곤이는
영산농업고등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황성옛터 / 배호)
김종곤 육성 // “1학년 2학기 12월 달에 시험 칠 때 등록금을 못 내서 시험을 몬 칩니다. 제적이라카죠. 55년 1월 달이 부산으로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공부를 몬 하면은 내 인생을 끝났다고 그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참 엄청난 실망을 했죠. 마음속으로는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8. 1955년, 부산

(기차 소리)

청년 종곤 // 더 이상 전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에 있고 싶지 않았어요.
열여덟 살이 되던 1955년 1월, 부산으로 갔습니다.

(재봉틀질-드르르르 박는 소리)
종곤 // 저, 여기가 한국사, 맞습니까? 김상희 소개로 온 김종곤입니다.
사장 // 김종곤이. 아, 맞다맞다. 영산서 자수 놔서 납품하는 김상희 동생! 반갑네.
여기가 군복 마크 맨들고 교복 이름표 새기는 덴줄은 알제?
자네 재봉질 좀 하나?
종곤 // 처음이라예.
사장 // 맞나? 그라믄 견습공으로 시작해야제.

청년 종곤 // 열심히 배웠습니다. 기술을 4개월 만에 익히고 나니
근처에 잘한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뜻한 바가 있어 부산까지 왔는기라 결단을 내렸습니다.

(꿈이여 다시 한번 / 현인)
종곤 // (속말) 공부할 기회가 안 있겠나 싶어 온 거지,
일만 할라꼬 온 건 아니지 않나?
쪼매라도 일찍 끝나는 직장으로 옮겨야겠다.
야간고등학교라도 다녀서 대학 갈라카믄 지금이 기회다!


#9. 1959년, 죽사리 고향 집

(대문 여는 소리)
종곤 // 엄마! 아부지!
어머니 // (좋아서) 아이고, 우리 큰아들, 왔냐?
아버지 // 그래, 장하다! 대학교에 입학했다꼬?
종곤 // 네, 함남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동아대학교 법학과에 시험쳤는데 합격했습니다.

(종이 꺼내는 소리)
종곤 // (종이 꺼내며) 이게 입학허가증입니다.
어머니 // 보자보자. 입학허가증! 제2부! 이름 김종곤!
김종곤 // 그기 2부라 카는 건 야간부라는 뜻입니다. 일도 해야지요.
아버지 // 야간이면 어때?
우리 집안에서 대학생이 나오다니 이기 꿈이가 생시가!

(무정열차 / 김광남)
청년 종곤 // 하지만 결국 졸업까지는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2학년 1학기를 끝으로 제적이 돼부렸어요.
명찰기술자 월급으론 대학 등록금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김종곤 육성 // “그기 두 번째 큰 좌절이지. 법학과를 들어갈 때는 아마 부모님들도 믿었을 겁니다. 저놈 머리가 괜찮으니깐 판검사 될 거 아니냐! 저도 그런 목적으로 들어갔지만 그걸 이겨내질 못했습니다. 경제적 이유로.”

청년 종곤 //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공부를 몬 한다는 것,
연이은 두 번의 좌절은 슬픔을 넘어 분노로 쌓였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배움의 길, 운명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마무리 코너- 덧붙이는 이야기 >

(징소리)

나레이션 // ‘덧붙이는 이야기’

김종곤 보유자의 고향인 영산은
경상남도에서 가장 먼저 3.1 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1961년부터 3.1민속문화제를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중단됐던 영산줄다리기가 현재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계기는 3.1 민속문화제였습니다.
경주대학교 허용호 교수로부터 영산줄다리기의 유래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배경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허용호 // 한마디로 근현대 격동기, 38년부터 사실상 50년대 중반, 후반까지는 그 어떤 종목도 제대로 전승이 되지 못하던 시기인데 영산 역시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줄다리기가 있었는데 그것들이 기억 속에서만 남고 중단되어 있다가 1961년에 영산의 유지들, 그다음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옛 전통들, 아니면 예전에 우리 지역에서 했던 대동놀이를 다시 한번 되살려보자는 움직임들이 나타났어요.
영산 지역은 또 3.1운동 때 주도적으로 나서도 피해도 많이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자랑스러워하는 지역이 영산 지역인데 우리의 전통유산들을 되살리자는 분위기랑 아까 3.1운동 때 앞장섰던 영산의 분위기 이게 결합이 되면서 1961년에 영산 3.1 민속문화제라는 게, 그러니까 지역축제죠. 그게 만들어지면서 다른 지역하고는 달리 영산은 ‘우리는 우리의 민속이나 대동놀이를 중심으로 한번 이 축제를 해보자.’라는 식으로 전개가 됐고요.
2회 때, 그러니까 1963년에 영산줄다리기가 복원이 돼서 진행이 된 거죠.

나레이션 // 영산줄다리기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될 때 초대 보유자인 조성국은 줄의 정신을 애살, 신명, 몰음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인 허용호 교수로부터 영산줄다리기의 기본정신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허용호 // 사소한 짚 하나를 오랜시간 동안에 인간의 지혜가 온축되어 온 여러 가지 지혜를 이용해서 줄을 꼬고 만들어서 거대한 줄을 만들어내죠. 만들어내고 그걸 사람들이 남녀노소가 다 함께 어우러지는 하나의 대규모의 축제이자 놀이이자 제의로 한바탕 놀고 마무리를 하는 게 줄다리기이기 때문에 이 자체 속에서 줄다리기의 가치이자 힘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요.
또 하나는 짚을 모으고 줄을 꼬고 그다음에 줄을 튼튼하게 만들고 그 무거운 줄을 당기는 세종시까지 옮기고 당기고 끝나고 난 후에 줄을 태우거나 끊거나 하는 그 과정이 다 공개돼 있고, 모든 사람들이 다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죠. 이게 줄다리기가 갖는 정신, 아니면 하나의 가치라고 생각이 되고요.
모든 것이 다 공개되고 공유된다는 것과 더불어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여야만 가능하다는 것들이죠. 그러니까 여럿이 힘을 합할 때의 우리의 밝은 미래, 아니면 미래 전망도 가능하다는 걸 줄다리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 그러니까 그걸 공동체 정신, 아니면 대동정신이라고도 얘기를 하지만 이 두 개가 결합된 게 줄다리기고, 무형유산으로서 우리가 왜 줄다리기에 주목하는가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두 가지에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나레이션 // 다큐드라마 문화가 된 사람들,
영산줄다리기, 김 종 곤. 첫 번째 시간.
지금까지 극본 김정인, 연출 권윤혜,
출연 류다무연, 전해리, 이민규, 한만중, 이한솔, 김단, 김혜령,
음악 윤아성, 음향효과 이용문, 기술 조중희였습니다.

나레이션 // 이 프로그램은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의 제작비 지원,
국립무형유산원의 자료 지원으로 EBS가 기획, 제작하였습니다.
요약정보

마크 기술자와 농사꾼 그리고 영산의 대동놀이인 영산줄다리기를 지키고 전승하는 '줄꾼'으로 살아간 영산줄다리기 보유자 김종곤의 생애가 담긴 오디오 다큐드라마

* 국립무형유산원의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채록사업’에서 확보한 자료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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