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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이야기

탕건장 김혜정
발행일 : 2021-01-22 조회수 : 3424
탕건장 김혜정

1946. 10. 18 ~ | 보유자 인정: 2009년 9월 25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탕건장 김혜정

국가무형문화재 탕건장
Master Artisan of Horsehair undercap making skill Holder

둘째양반은 뿔관(정자관)을 쓰고 셋째양반은 감투(탕건)를 쓰고 부채를 들고 병신 걸음으로 등장. 새맥시는 노란저고리에 붉은 치마에 전복을 입고 족도리를 썼다. 춤을 추면서 장내를 한 바퀴 돌고 중앙에 오면 말뚝이가 난데없이 등장한다.

- 은율탈춤 제4과장 양반춤 중에서

남자의 품격, 탕건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머리를 보호하고 상투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하였는데,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쓰는 모자로 독립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탕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탕건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평상시에 관을 대신해 썼는데 속칭 ‘감투’라고도 하며,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의 탕건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벽화나 고대의 관모에서 변화된 것인지 밝히기가 어렵지만,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의 최치원이나 고려시대 인물인 이색, 정몽주 등을 그린 고려 후기의 초상화에서 쓰고 있는 모자가 탕건모양과 같기 때문이다. 이 모양은 조선전기까지 이어진다. 탕건의 재료로는 말총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제주도의 조랑말총은 말총이 가늘고 질기며 부드럽고 매끈하기 때문에 최고의 재료로 꼽혀 탕건은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제주도는 본래 육지보다 시국이 안정되고 조용한 곳이어서 관모공예가 성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제주도에서 좋은 말총이 생산되어 제주도 부녀자들이 차분히 앉아서 가내공업으로 탕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말총은 흠이 있으면 도중에 끊어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안된다. 짧은 것보다는 긴 것이 좋다. 제주도 말총은 대부분 노란 것이 많아서 작품이 완성된 후 까만 염색을 한다. 만들기 전에 염색을 하면 신축성이 없고 부드럽지 못해서 쓰기가 불편하다. 한편, 탕건은 홑탕건과 겹탕건, 바둑탕건으로 분류된다. 모두 형태는 같으나 겹으로 또는 2중, 3중으로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바둑탕건은 사각무늬를 놓은 것인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 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된 것이다. 정자관은 정자[程子, 중국 송나라의 정명도(程明道, 1032~1085)와 정이천(程伊川, 1033~1107) 두 형제를 말하며 이(二)정자라고도 한다]가 창안하여 만들어 썼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고려시대 선비들이 많이 사용했으며 모양이 탕건과 비슷하고 만드는 방식도 같았다. 정자관은 가장 높은 관직이 사용하던 3층 정자관부터 2층, 단층까지 3종류로 나뉜다.

조선시대의 관제에는 정자관 외에도 동파관, 충정관 등이 있었는데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개성에 맞는 관을 선택하여 즐겨 썼다. 위의 세봉우리는 터져 있는 형태인데, 대체로 지위가 높을수록 층이 많은 것을 썼다. 탕건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신분적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됐으나, 1894년 단발령 이후 그 제작과 생산이 줄어들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모녀간 전승되는 제주 여인의 삶, 2대 탕건장 김혜정 선생

국가무형문화재 탕건장 기능보유자인 김혜정 선생은 어머니인 김공춘 선생(탕건장 명예보유자)으로부터 10여 세 전후의 어린 나이부터 탕건 제작 기술을 배웠다. 탕건장 1대 기능보유자인 어머니의 성정과 솜씨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탕건을 만들어 왔다.

15살쯤 되었을 때 탕건청이라고 부르는 일청에서 여럿이 일을 했다. 그때부터 탕건 하나를 거뜬하게 짜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조천읍과 화북동, 삼양동 등지에 밀집되어 있던 탕건청은 오늘날의 공예촌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을 했다고 한다.

선생의 집안은 증조할머니부터 집안 대대로 탕건을 짜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7살 때 고모님께 탕건을 배웠고 김혜정 선생은 어머니인 김공춘 선생의 솜씨를 물려 받은 것이다. 1950년대 이후 제주도에서 말총공예가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탕건 한 개의 값이 쌀 1되가 못되었다고 한다. 1986년에는 15일에 한 개를 만드는 홑탕건과 겹탕건이 한 개에 6만원, 바둑탕건은 한 개에 7만원 정도를 받았다.

“부드러운 것만을 골라서 손질한 말총이 머리카락 같지요? 이게 이렇게 가늘고 부드러워도 엄청 질겨요.”

말총의 성질은 형태가 뒤틀어지지 않아 관모 제작에 무척 적합하다. 게다가 말총은 가볍고 땀을 잘 흡수할 뿐만 아니라 더러움이 잘 타지 않아 위생적이기까지 하다. 말이 제공해 주는 질 좋은 말총을 허투루 보지 않았던 선조들의 지혜를 새삼 깨닫게 한다. 이처럼 말총을 재료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탕건은 앞은 낮고 뒤는 높으며, 중간에 턱이진 모양으로 결을 내는 방법에 따라 ‘홑탕건’과 ‘겹탕건’으로 나뉜다. 여기에 더 섬세한 작업으로 아름다운 바둑문양이 들어간 바둑탕건이 있다. 이와 같은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제작기법이 오늘날 김혜정 선생의 손을 통해서만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어머니인 김공춘 선생이 명예보유자로 인정되면서 2009년 국가무형문화재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탕건일은 다시 보유자 집안의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딸이 객지생활을 고집하지 않고 탕건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제주 여성들이 간직했던 솜씨를 이어가는 탕건장 김혜정 선생이 조선시대의 관모 문화와 제주가 낳은 말총공예의 내일을 다시 선생의 딸과 함께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작품

1_ 정자관 / 36x27cm

정자관은 벼슬이 높고 격식을 갖춘 재상들이 집에서 망건과 탕건 위에 덧쓰던 관으로 위는 터지고 세봉우리로 되어 있다. 말총으로 세 개의 관을 각각 만든 후 연결시켜서 완성한다.

1_ 정자관 / 36x27cm _ 01
1_ 정자관 / 36x27cm _ 02
2_ 바둑탕건 / 20×17cm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이며 집에서도 의관을 정제하기 위해 간편하게 착용하기도 하였다.

2_ 바둑탕건 / 20×17cm

제작과정

탕건 제작은 홑탕건과 겹탕건은 탕건을 엮어 나가는 방법에 따라 홑으로 1번만 엮어나가면 홑탕건, 2중·3중으로 엮어 나가면 겹탕건이 된다. 또 겹으로 엮어 나가면서 문양과 모양이 달라진다. 홑탕건이란 엮어 나갈 때 홑겹으로 하는 것을 말하며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탕건 제작은 탕건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크고 작은 탕건골에다 대고 매듭으로 엮어 나가는데 탕건을 엮어서 완성될 때까지는 여러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탕건은 세공제작이기 때문에 공구 역시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 규모도 크지 않다. 탕건은 말총으로 만들기 때문에 말총을 다루는 공구가 발전하였는데 탕건의 모양을 이루는 탕건틀과 같은 공구가 대부분이고 그 외에 체떼기, 바늘과 칼 등이 있을 뿐이다.

1_말총가닥 빼서 고르기

1_말총가닥 빼서 고르기

2_맺어가기

2_맺어가기

3_맺어가기

3_맺어가기

4_맺어가기

4_맺어가기

약력

  • 1946년출생
  • 1981년제6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그외 7,8,9,10,11,16회 입선)
  • 1986년국가무형문화재 탕건장 이수자
  • 2008년국가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 2009년부천 세계무형문화엑스포 출품
  • 2009년국가무형문화재 탕건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10년무형문화재전수회관 제주전통학교 강습
  • 글 이치헌 / 한국문화재재단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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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정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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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정자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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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정자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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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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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관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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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건(겹탕건,홑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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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건과 정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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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건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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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중인 김혜정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