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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악기장 이정기
발행일 : 2022-09-19 조회수 : 3604
악기장 이정기

1957. 10. 17 ~ | 보유자 인정: 2012년 11월 20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악기장 이정기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
Master Artisan of Decorative Knot craft skill Holder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이다.

법고는 침묵 중이지만 둥둥둥 하고 마음 심 心자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 『절은 절하는 곳이다』 (정찬주 지음, 이랑, 2011) 중

북의 연원과 상징

북은 물체를 두드려 소리내는 타악기의 총칭으로 나무 북, 대나무 북, 토고(土鼓), 도고(陶鼓), 쇠북(金鼓·銅鼓) 등과 같이 물체를 직접 두드려 소리 울림을 얻는 체명악기(體鳴樂器, Idiophones)와 통의 마구리(물건의 양쪽 끝머리의 면)에 동물피막(皮膜)을 팽팽하게 씌워 울려서 소리를 얻는 막명악기(膜鳴樂器, membranophones)로 구분되는데 이를 통틀어 북이라고 한다.

북은 세계 모든 지역에서 아주 오랜 역사를 통해 전승되어 왔다. 고대 이집트나 앗시리아의 조각에도 다양한 북 종류들이 표현되어 있으며, 중국문화권에서는 상대(商代)의 갑골문자에 이미 ‘鼓’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북은 고대로부터 적을 무찌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도구로 인식하기도 했고 종교적인 상징과 기능을 하기도 했다. 북방 샤머니즘 전통에서는 북이 사람과 신을 이어준다고 믿었다. 각종 의례에서 신과 인간의 매개자는 북을 울리며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전하고, 신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한다는 것이었다. 삼한시대 부여의 ‘영고(迎鼓)’가 대표적이다. 관련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이자 진도북춤으로 유명한 故 박병천 보유자(1933~2007)는 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북의 소리를 이해를 할 줄 알고 북을 알아야 되아. 수천년 되고 오래된 고찰일수록 북 없는 집이 어데가 있어.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반드시 북이라는 것이 있어. 그라고 북이라는 소리는 인간과 신의 중간 역할을 해줘. 안 그래? 고찰 같은 데 가봐. 반드시 북 있잖아.”- 故 박병천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중)

승무북

승무북

승무북

승무북

노고

노고

대고

대고

사찰 사물 중 하나인 법고

각각의 사찰 사물 중 범종은 땅속과 특히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제도(濟度)하고 법고는 가축과 짐승을, 목어는 수중생물을, 운판은 날아다니는 짐승을 제도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불교의례에서 북은 법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 소리가 장중하고 무거워 부처님의 소리를 상징한다. 범종, 운판, 목어와 함께 사찰 사물(四物)의 하나로, 법고는 주지가 대중에게 설법하는 상당(上堂)과 보설(普說) 등의 법요식 때 쓰는 큰 북을 말하며, 북소리를 통하여 속세의 모든 축생(畜生)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법을 전하는 북으로, 특히 축생들을 제도한다. 보통 종각에 걸어두고 예불을 알릴 때 친다. 범종은 본래 대중을 모으고 때를 알리기 위하여 쳤으나 점차 조석예불이나 의식을 치를 때 치게 되었다. 범종을 치는 본뜻은 지옥의 중생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도록 하는 동시에, 불법의 장엄한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데 있었다. 목어는 목어고(木魚鼓), 어고(魚鼓), 어판(魚板)이라고도 하며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이 비게 파내어 불사에 쓰는 기구이다. 처음에는 완전한 물고기 형상을 취하였으나 차츰 용의 머리에, 물고기 몸을 취한 용두어신의 형태로 변하였다. 물고기가 언제나 눈을 뜨고 깨어 있으므로 잠들지 않는 수행을 상징하기도 한다.
운판은 구름 모양의 얇은 청동판으로 원래 끼니때를 알리는 용도로 썼다고 하나, 요즘은 조석 예불 때 치는 의식용구로 사용된다. 운판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 떠도는 영혼을 천도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능에 따른 북의 분류

북은 기능에 따라 종교의례용 북과 연주용 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종교의례용 북은 앞서 언급한 법고와 같은 불교의례, 무속의례, 유교의례 등에서 사용된다. 무속의례에서 북은 기본 악기다. 북방계 샤머니즘에서 북이 사람과 신을 연결해주는 매개 도구로 중시되었던 예처럼 무속의례에서 북은 곧 의례를 상징하기도 했다. 유교의례에서는 종묘제례 및 문묘제례에서 편성되는 북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외 연주용 북은 궁중음악과 춤에 사용되는 북(건고 建鼓, 무고 舞鼓, 좌고 座鼓, 교방고 敎坊鼓 등), 군례와 행차에 사용되는 북(용고 龍鼓), 농악에 편성되는 ‘풍물 북’, 판소리의 장단을 치는 ‘소리 북’과 이외 손잡이가 달린 작은 북인 ‘소고(小鼓)’와 전문예인들이 승무를 추면서 치는 북인 ‘승무북’ 등이 있다.

법고

법고

기능에 따른 북 이미지

악기장과 북메우기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 종목 지정당시에서에서 북메우기가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악기장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현악기 제작을 의미했다. 현악기제작과 별도로 북 제작이 북메우기라는 이름으로 종목이 지정된 것은 1980년 9월 1일이었다. 이후 1995년에 악기장으로 통합된다.

반백년 쉼 없이 북을 만들어온 악기장 이정기 보유자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 이정기 선생은 1957년 10월 17일, 충남 공주 우성면 대성리에서 부친 이석규 선생과 모친 박덕분 여사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 일하시기도 했고 동네 이장직도 맡아 하셨던 기억이 있으나 이정기 선생이 초등학교 2학년일 무렵 생계를 위해 상경하여 사업을 하였고 이어 어머니도 이정기 선생이 초등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상경하여 아버지를 도와 생계를 이어간 관계로 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다닐 시절엔 선생님의 추천으로 학교 대표로 웅변대회에 나갈 정도로 발표력이 좋아 졸업식 때면 송사와 답사를 하는 대표학생은 이정기 선생이 전담을 할 정도였다. 우성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상경하여 상계동에 있는 중학교에 1년 정도 다녔는데 아버지 사업이 잘 되지 않아 형편이 어려워졌고 학교도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출판사. 그런데 그게 제가 서울 올라오고 나서는 안 된 거 같아요. 덕분에 시골에 할아버지가 어렵게 정말 마련하신 논답을... 그걸 팔아가지고 뭐 어떻게 하신 것 같은데...”

야학에도 잠시 다녀보긴 했지만 결국 중학교 졸업장은 받지 못했다. 친구들은 한창 학교에 다니며 추억을 쌓을 시기에 본인은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야 했다.

“동네 시계방 그런 데도 한 일 년 있었고, 구두 만드는 데도 한 일 년 있었고. 동네 타이루 붙이는 기술자 따라서 또 한 일 년. 그런데 그거는 힘들어서 제가 못하겠더라고요. 또 그게 겨울에는 일이 없으니까.”

동네에서 장신구(액세서리) 만드는 곳에 들어와 서너 달쯤 일을 하고 있을 때 이정기 선생 또래의 김해영이라는 친구가 직원으로 들어왔다. 반년 가량 함께 일을 하던 1974년 5월 어느 날 친구가 다른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18살 때. 라일락이 아주 기가 막혔죠. 지금은 4월이면 라일락이 피는데 그때는 5월 달로 기억합니다. 이 친구가 이숙, 이숙 하는데, 사촌이모부더라고요. 그냥 친구 따라 가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일 시작했죠.”

친구를 따라 간 곳은 친구의 사촌이모부이자 훗날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북메우기) 보유자로 인정받은 박균석 선생(1919~1989)의 공방이었다.

“근데 소리 나는 게 좋더라고요. 그때는 장구통으로 미루나무를 많이 깎았어요. 지금은 소나무로도 깎고, 오동나무는 아주 고급. 그런데 이렇게 사포질 곱게 해서 칠해서 놓으면 이제 선생님이 장구 메고 덩더쿵 덩더쿵 하는 소리도 좋게 들리더라고요.”

처음 공방에 입문하였을 당시에는 목공작업과 가죽 메우고 단청하는 일 등이 분업화 되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일할 사람이 없어지자 점차 분업화하여 하던 공정이 한 사람이 전체 공정을 맡아서 하는 일로 바뀌었다.

“그때 당시는 요. 농악북 같은 거를 주로 했죠. 지금은 쐐기북 이런 줄로 막 엮잖아요. 그때는 그런 걸로 안하고 가죽을 오리면 이런 자투리가 조금씩 나와요. 그거를 줄을 오린 거예요. 줄북이라고 하죠. 가죽 그걸로 땡겼어요. 또 동동구루무 장수.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막 치고 하는 그런 북. 그리고 오고무, 삼고무도 하고.”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공방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일하며 월급은 따로 받진 않았다.

“그때는 월급은 없었고 용돈. 한 1년 지나니까 한 달에 5만원씩 주고. 6만원씩 주고. 그러다가 5년 지나니까 10만원 주고 그랬었어요. 왜냐면 숙식을 거기서 했으니까.”

1980년 9월 1일 국가무형문화재 북메우기 종목이 지정되고 이와 함께 스승인 박균석 선생이 북메우기 보유자로 인정받게 됐다. 박균석 선생은 1919년 전남 담양군 수복면 두정리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광주에 사는 당숙 박귀옥 선생으로부터 3년간 북 제작 기술을 배우다 16세때 서울로 상경하여 현저동에서 독자적 북 제작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때에 고향으로 내려가 3년간 농업에 종사하다가 다시 상경하여 북 제작을 재개했다. 1958년부터는 국립국악원에서 악기를 제작하던 강상기 선생으로부터 악기 및 가자(架子, 악기를 매달아 놓는 틀) 제작에 관한 일을 2년간 배운 후 국악원 등에 진열용의 각종 북을 납품했다.

숙식을 하며 일을 했던 공방이 연립주택이 들어서면서 헐리게 됐다. 후암동에 임시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연립주택이 들어서고 그 건물 지하로 다시 들어갔다. 천장이 낮아서 큰 북을 만들 때는 어려움이 많았다.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도 10년간 혼자 남은 사모님(스승의 부인)을 모시고 그 자리를 지켰다.

이정기 선생은 스승이 국가무형문화재 북메우기 기능보유자가 됨에 따라 스승의 첫 전수장학생으로 등록됐다. 그 사이 여러 명이 함께 배우며 일을 하다 그만뒀다. 이정기 선생은 동사무소에서 짧은 기간 군복무를 하던 때를 제외하곤 북 제작 일을 쉬어 본 적이 없다. 1983년 봄, 강남구 삼성동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 한상수 선생(1935~2016)으로부터 자수를 배우던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83년 겨울에 만났나? 27살 때. 그때 그 건물이 그렇게 훌륭한 건물이 아니었고 가건물로 있을 때. 거기 심부름 왔다 갔다 하다가... 한상수 선생님 공방에서 수를 놨었어요.”

그 이듬해인 1984년 국가무형문화재 북메우기 이수자가 됐다. 스승인 박균석 선생은 그렇게 말씀이 많은 분은 아니었다.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해라 이런 지적은 안 하신 것 같아요. 그냥 하는 대로 주는 거예요. 니 손에 익어야 한다. 조금 잘못되는 경우는 지적을 해주시고 그 외에는 소위 말하는 잔소리, 터치 이런 건 안하시고.”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일이 많다 보니 잠깐 한눈을 팔게 되면 크게 다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아들이 2살 때쯤으로 기억한다.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던 11월 중순, 조심성이 없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잠깐의 실수로 오른손 검지가 잘려나갔다.

세월이 흐를수록 제자들이 하나둘 떠나자 일손이 부족해졌다. 박균석 선생은 오래 전 함께 일을 했던 처조카를 제주도에서 불러 올렸다. 스승인 박균석 선생이 타계하기 일 년 전쯤 제자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한 일 년 전에 그러시더라고. 이제 우리 동업하자고. 조카랑 저랑 셋이. 선생님은 재료 사오고 바깥일 봐주시고, 우리 둘은 일하고 그랬는데 일 년 있다 돌아가셔 가지고 한 10년 사모님 모시다가 나왔죠.”

박균석악기연구원을 나와 1998년 함께 일하던 스승의 조카와 함께 진정악기연구원을 설립했다.

“같이 일하던 그분 이름이 김진철 이었어요. 저는 이정기. 이름의 가운데 자를 한 글자씩 딴 거죠. 그런데 그 이름이 괜찮았어요.”

그 동안 삼광사, 직지사, 불국사, 송광사의 법고 등을 제작했다. 고양시 지축동에 새롭게 공방을 열고 4년간 있다가 진관내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3년 7월 17일, 평소 같으면 공휴일에도 일을 하였으나, 유난히 더운 날씨여서 하루 쉬기로 한 날이었다.

“그날 불이 난 거예요. 옆에서 불이 나서 이게 쳐들어온 거야. 한 네 시쯤 전화가 왔더라고요. 아무래도 그쪽이 이상하대. 검은 연기도 나고. 갔더니 재만 남아있어. 재만. 뭐 대패가 하나 있어, 톱이 하나 있어? 그런 거야 돈 주고 좀 구할 수는 있겠지만 연장이라는 게 내 손에 맞아야 해. 길들여야 한다고.”

나무, 가죽, 연장 등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일을 접으려고 했다. 주위에서 지인들이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다시 북 제작 일을 하지 못했을 거였다.

진정악기연구원은 2007년, 지금의 공방이 위치한 고양시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 공방을 옮기고 두 달 뒤쯤, 함께 동업을 하던 김진철 선생이 위암판정을 받았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3년 뒤 타계했다. 지금은 악기장 이수자인 아들 이선용 씨(1984년생)가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

“한 7시면 나와요. 여기 나와서 차 한 잔 마시고 일 시작하고. 한 4시 반쯤 끝나고. 오래 붙들고 있는다고 일이 되는 거 아니고. 이제 바쁠 때는 좀 늦게까지 하고. 아들이랑 일하는 게 좋긴 하지만 대우를 충분하게 해줄 형편이 아니라서 그게 좀 마음 아프고 그렇지.”

컴퓨터 게임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던 아들을 불러 함께 일을 한 지도 8년이 넘었다. 충분한 수입을 마련해 주지 못해 한편으론 그냥 회사에 다니게 놔뒀더라면 지금보다 형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 때가 있다. 스승에게 배운 대로 이정기 선생 역시 아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지는 않는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거의 안하고 그냥 하는 대로. 이건 이런 식으로 해야 겠다. 딱 한마디만 하면 알아서 하게끔. 잔소리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어려운 환경을 이겨 내며 반백년 동안 북 제작을 이어온 아버지와 함께 북 제작 일을 하고 있는 이선용 씨는 주저함 없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제 롤 모델이십니다.”

제작과정

하단 내용 참조

북 제작은 일반적으로 북통의 재료인 (1) 나무 고르기와 건조과정을 거쳐 (2) 북통을 제작한다. 나무는 주로 소나무를 쓴다. 잘 건조된 나무를 골라 제작하려는 북 크기에 맞게 본을 대고 ‘쪽’을 낸다. 이때 나무쪽은 결대로 잘라야 강하고 소리가 좋은 북이 된다. 북쪽이 준비되면 멥쌀풀을 사용하여 만든 접착제를 이용해 붙인다. 북쪽이 잘 마르면 테를 빼기 전에 가죽이 닿을 북 가장자리를 대표로 곱게 다듬고 북면은 여러 각도의 통 깎기 칼을 이용해 둥글게 다듬고 사포질을 하여 마무리한다. 북통 다듬기를 마치고 나면 북통 안쪽에 한지를 바른다. 한지는 통의 습기를 제거하고 나무 사이에 있을 틈을 밀봉하는 역할을 한다. 북 안쪽에는 테를 만들어 넣는다. 안테는 통이 줄어들거나 틀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북을 쳤을 때 소리의 반사효과를 내는데 도움을 준다. 완성된 북 통에는 고리를 단다. 북 테를 벗겨낸 뒤 겉면에 광목을 바르면 북통이 완성된다. 겉면에 바르는 광목은 북 안쪽에 바르는 한지와 같은 기능을 할뿐더러 마무리 과정에서 북통에 단청을 입힐 때도 도움을 준다. 북통이 완성되면 (3) 가죽 고르기와 다루기 단계로 들어간다. 북을 만들 때는 주로 소가죽을 쓴다. 가죽을 고른 후 무두질을 하고 가죽을 늘이는 쟁치기 과정을 거쳐 소리를 잡는 가장 중요한 공정인 (4) 북 메우기를 한다. 가죽을 통에 붙인 다음 단계적으로 좋은 소리가 날 때까지 늘이고 조이는 과정이다. 이후 북 메우기가 완성되면 (5) 단청을 하는 북의 장식과정으로 진행된다. 과거에는 가죽 다루는 일과 단청하는 일이 분리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경제적 이유로 북 메우기 장인이 모두 맡아한다고 한다. 승무북의 경우는 마지막에 (6) 북틀을 만들어야 하는데 북틀은 기둥과 받침대 양쪽의 용두로 구성된다. 단청을 마친 북 가장자리에 광못을 일정하게 박아 장식하고 북틀 고리에 북을 걸면 승무북이 완성된다.

작품

좌고

좌고

좌고 부분

좌고 부분

승무북

승무북

법고

법고

대승무북

대승무북

노고

노고

교방고

교방고

약력

  • 1957년 충남 공주 출생
  • 1974년 북메우기 입문 (박균석 악기장 보유자 사사)
  • 1980년 북메우기 전수장학생
  • 1982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 1983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특별상
  • 1984년 국가무형문화재 북메우기 이수자
  •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북메우기 전승교육사
  •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 1998년 진정악기연구원 설립
  • 2010년 이정기국악기연구원으로 명칭 변경
  • 2012년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북 제작) 기능보유자 인정
  • 2013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심사위원
  •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 연합공개(악기장 전시, 시연) 행사
  • 2014년 조달청 문화상품 선정 심사위원
  • 2015년 (사)국가무형문화재기능협회 이사
  • 2016년 국제형사재판소(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대한민국 정부기증 신문고 제작
  • 글 이치헌 (한국문화재재단 한국무형문화재진흥센터센터장 /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저자)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