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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각자장 김각한
발행일 : 2023-02-15 조회수 : 3021
각자장 김각한

1957. 10. 23 ~ | 보유자 인정: 2013년 3월 12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각자장 김각한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Master Artisan of Decorative Knot craft skill Holder

너를 새긴다 너의 이름을 새긴다

푸르디푸른 칼끝 한자 한자 넋을 달쿼 넋에 새긴다

이슬에 새긴다 별에 새긴다 햇빛 달빛 흘러가는 강물에 새긴다 (중략)

- 박두진 시인의 '육비명' 중 일부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장인, 각자장

각자장(刻字匠)은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기능을 가진 장인을 일컫는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류는 삶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여 흔적의 수단으로써 그리고 새기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사유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종이 사용이 일반화되기 이전 모필로 쓰는 행위보다 선행되었던 것이 ‘문자의 새김’이라는 행위였다. 중국 은나라의 갑골문, 주나라의 각종 금문과 석각 등 그리고 우리나라의 각종 비석 등에 새겨진 석각류를 비롯하여 거울에 새긴 문자, 도기에 새기거나 찍은 문자, 옥기에 새긴 것, 벽돌과 기와에 새긴 문자 등 그 종류 또한 무수히 많다. 앞선 문자의 새김 행위가 인쇄를 위한 행위는 아니었으나 이러한 흐름 뒤에 등장한 목판에 글씨를 새기는 행위는 인쇄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행위였다. 다만, 각자는 인쇄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크게 두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인쇄를 목적으로 글자 좌우를 바꾸어 새기는 반서각(反書刻)과 공공건물이나 사찰, 재실에 거는 현판용으로 글자를 목판에 그대로 붙여 새기는 정서각(正書刻)으로 나뉜다. 이 중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인쇄용 판본이 해인사에 비장(祕藏)된 팔만대장경판이다. 고려시대는 신라시대의 목판인쇄술을 계승하여 사찰을 중심으로 경전이나 고승의 시, 문집 및 저술의 간행이 성행하면서 목판인쇄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목판 인쇄술이 그대로 전래되어 판각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작품이미지


목판은 활자본과는 달리 한번 힘들게 새겨 놓으면 간행량에 제한을 받지 않고 무한정 찍어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목판을 보관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조선조 말기까지 매우 성행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내려오면서 각자의 새김은 초기에 비해 그 정교함이 매우 떨어졌고 금속활자의 발달과 서양인쇄술의 도입으로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까지 잔존되어 오다가 6·25전쟁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1960년대 후반 서각예술이라는 장르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러한 서각은 공공건물이나 사찰의 현판 또는 주련, 유명한 서예가의 글씨를 받아 새긴 판각서(版刻書)들로 인출을 위한 목판의 반서각자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는 1996년 각자장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초대 보유자로 오옥진 선생을 인정하였다. 오옥진 선생은 2014년 타계하였고 김각한 선생이 각자장 보유자로 인정되어 활발한 전승활동을 펼치고 있다.

나무에 혼을 새기는 각자장 김각한 보유자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김각한 선생은 1957년 경상북도 금릉군 감천면 양천동(1995년 김천시로 통합)에서 부친 김문진 선생과 모친 이원준 여사 사이에 5남 1녀 중 5째로 태어났다. 농사를 짓는 집이었고 그리 형편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계를 꾸려 나가기도 힘들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공부도 곧잘 하고 반장도 하고 그랬는데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중학교 진학을 못했죠. 애들 자전거 타고 교복 입고 학교 가는 게 그렇게 부러웠었죠.” 


마을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을 무렵, 양천초등학교(현재 폐교됨)를 졸업하고 가정형편 상 중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김천시내의 목공소를 드나들며 소목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 집하고 김천하고는 4km 정도 되는데 1시간 정도 걸어서 다녔죠. 한 2년 정도 그렇게 하다가 내가 도망 나갔죠.” 


매일같이 김천 시내에 있는 목공소를 드나들며 소목 일을 배우다 집에서 나오기를 작정하고 부산에서 자취하며 시계방에서 일을 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 달가량 친구의 자취방에서 신세를 지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게 참 한 번 손댄 게 그게... 다시 다른 일 잡기가 어렵잖아요. 소목 일 하면서 집 짓는데도 따라다니고. 그때 신일건구사라고 건축도 하고 가구도 하고. 거기가 사람이 좀 많았어요.” 


일을 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낮에는 일을 하며 독학으로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군에 입대를 했다. 1981년도 2월 군 제대를 하고 사고를 당해 한동안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탑골공원 인근에 위치한 목공예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 한 번 손댄다는 게, 참 그게 직업이 되잖아요. 목공예 학원에 가서 목조각을 했었어요. 한 2년 가까이 정도 했었죠. 그러다가 이제 오옥진 선생님 전시를 보고... 수선전도 이런 거 목판으로 해 놓은 거를 보니까 기가 막히잖아요.” 


*1983년 3월 3일부터 9일까지 동덕미술관에서 개최된 철재 오옥진 선생의 개인전시를 보게 된 것이 인생의 갈림길이 되었다. 당시 전시회에서 오옥진 선생의 수선전도 작품에 마음을 빼앗겼다. 무작정 다음날 지인 2명(이대규·이재복)과 함께 당시 오옥진 선생이 작업하던 인사동 작업실로 찾아갔다. 

김각한 선생은 1984년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故 오옥진 선생의 약력에 표기된 개인전 기록과 신문기사들을 참고하여 연도를 대조한 결과 1983년 동덕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로 추정된다. 


“그때 인사동 수도약국 맞은편 2층에 오옥진 선생님 작업실이 있었어요. 찾아가니까 선생님 키가 크시잖아요. 단발머리, 장발이지 그러니까. 그때 처음 뵈었죠. 선생님이 처음에는 뜸을 많이 들였죠. 이거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고 어렵다고. 할 수 있다고, 해보겠다고 하니까 그럼 다음 날부터 나와 보라고.” 


바로 목공예 일도 다 정리하고 그때부터 줄곧 지금까지 각자 일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냥 뭐 글씨 새기고 이런 게 무지 재미있더라고요. 생각해보면 그게 각이 뭔지도 모른 체 어려서부터 해왔던 거랑 다르지 않더라고요. 어려서 목공예일을 배우면서도 나무 같은 거 켜고 나면은 짜투리에 창칼 같은 걸 만들어 가지고 새기고 했거든요. 두드려가면서 글씨를 새겼었죠. 누구한테 듣고 보고 그런 건 없었는데 내가 그 방법을 하고 있었던 거죠.” 


오옥진 선생의 공방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철재각연전(철재는 오옥진 선생의 호)이 1985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렸다. 철재 오옥진 선생의 지도를 받은 유문형, 오윤영(오옥진 선생의 아들), 이태식, 박원희, 이대규, 김각한, 이기현, 이재복, 구회관, 김성밀(스님), 박윤정, 유은상, 이혜현(스님) 등 제자들이 현판, 주련목판문 등을 출품했다. 


“입문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전시를 한다고 그러니까 얼마나 대단해. 그것도 한 4개월 정도 남겨놓고. 이문동 한국외국어대학교 후문 쪽에다가 쪼그마나한 내 작업실 한 개 얻어놨었어요. 그때는 하여튼 재미있게 했어. 전시 끝나고 나니까 몸무게가 한 5kg정도 빠졌더라고요. 처음에는 뭐 이걸 내가 직업을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도 없이 그냥 좋으니까 계속 했었고.” 


전시가 막상 끝나고 나니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그전까지는 서예교본인 법첩을 목판에 붙여 새기곤 했는데 공방에 자주 들르던 서예가 박충식 선생으로부터 초서를 잘못 새겼다는 지적을 받았다. 1986년 6월 경 박충식 선생의 방배동 서실 인근인 내방역 반포세무소 건너편으로 공방을 옮겼다. 서예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오전엔 서예를 공부하고 오후엔 공방에서 작업을 했다. 글씨만 알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의미를 알고 싶어졌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92년도에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다. 


“나이 많아서 공부하면 공부가 되게 재미있죠. 필요에 의해서 하면 참 재미있어요. 한 6년 다녔습니다. 4년 만에 졸업 못하고.” 


1988년, 어머니 나이대의 어르신이 공방에 자주 놀러왔었는데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조카를 소개받고 그해 12월 소개받은 지 4개월 만에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없는 형편에 결혼을 하려니 돈이 궁했다. 아는 스님에게 돈을 빌려 그 돈으로 월세방을 구하고 최소의 비용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혼자 있을 때는 그나마 유지가 되었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살림을 꾸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후 김포에 있는 어느 어른이 본인 문중 재실의 열녀비 등을 가져다가 작품을 의뢰했다. 새겨주고 설치도 해주고 해서 7백만 원을 받았다. 그렇다고 계속 작업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형편이 좋아지진 않았다. 이렇게 해서는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노트를 갖다 놓고 순서대로 나열을 해봤다. 1번 각자, 2번 운전, 3번 실내 인테리어.... 11번까지. 아무래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는 원래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사 지국에서 신문과 함께 끼워 넣는 전단지도 의뢰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전단지를 노란 봉투에 넣어 집집마다 직접 돌리기도 했다. 큰 소득은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부처님이 도왔다. 김천 동향인 조계종의 어느 스님 덕에 사찰의 현판 등을 수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어져 지금까지 부처님 덕분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오옥진 선생의 지도하에 독립기념관 현판 제작, 숭례문 복원 등에 참여했다. 지난 2018년엔 한글날을 기념해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책판복각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기도 했다. 또한 6·25전쟁 당시 화재로 유실된 훈민정음 목각판을 3년의 작업 끝에 복원하기도 했다. 작품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국내에서 처음 만들어져 화제가 됐었던 중곡동 기원정사 후불각자다. 또한 독일 베를린 포츠담 광장의 ‘통일정’과 동계 올림픽 종각의 현판,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직지’ 목판본도 복원했다. 


“내가 보유자가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을 안 했거든요. 자제분이 있었잖아요. 알죠?” 


스승인 오옥진 선생 문하에 아들인 오윤영 선생도 함께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오윤영 선생은 40대 초반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이른 생을 마감했다. 김각한 선생은 7년간의 이수자 생활 뒤에 다른 제자들과 경쟁을 거쳐 2005년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전수교육조교(현재 전승교육사로 명칭변경)로 인정받았다. 스승인 오옥진 선생과는 목판 재료인 나무 선정 등 간혹 의견 충돌이 있기도 했다. 오옥진 선생은 은행나무를 주로 고집했지만 김각한 선생은 산벗나무를 제일로 친다. 


“팔만대장경판의 나무 수종을 분석해 놓은 거 보니까 산벗나무가 70%이상이에요.” 


나무와 생활을 많이 하다 보니 나무를 고를 때 냄새도 맡고 심지어 맛도 보기도 한다. 


“오래된 나무도 그렇고 새로 된 나무도 그렇고 이게 나무마다 향이 다 다르고 맛이 다 다르잖아요. 어떤 맛이 좋은 거냐면 당연히 향긋한 게 좋은 거죠.”

작업모습

작업모습

2004년부터는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각자반의 지도를 맡고 있다. 김각한 선생에게 각자를 배운 수강생들은 매해 십여명씩 배출되어 현재 19기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들은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각자반에서 기초반, 연구반, 전문반의 3년 과정을 거쳐 배출되고 있으며 수강 이후에도 전수동문전을 매년 열어 그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교육과정을 마치면 별도의 작업장이 필요하기에 각 동문별로 모아 별도의 작업실을 마련해 작품 활동들을 이어오고 있다. 스승인 오옥진 선생이 창립한 철재각연회의 이름을 최근 한국전통각자보존회로 바꾸었다. 보다 전통각자를 직접적으로 알리기 위한 의도였다. 전수동문전에서 경험을 쌓은 이들이 한국전통각자보존회로 넘어오는 체계가 생겼다.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교육자료가 필요하기에 2007년 전통각자 교재를 만들기도 했다. 그간의 기량과 전승활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너무 작업에만 몰두하다 보니 허리에 문제가 생겨 척추협착증으로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다. 한 번 아파보니 무엇보다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단전호흡을 통해 그나마 건강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문화재청과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노후된 방배동 공방을 현대식으로 새롭게 단장해 편해진 것도 있지만 왠지 옛날 게 더 정감 있고 좋았던 것도 같다고 생각을 한다. 2021년 제 70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22년 12월에 서울시청역 내 4번출구 방향 통로 벽면에 설치된 서울특별시 명예의 전당(서울의 얼굴) 헌액 대상자로 선정됐다. 여전히 작품 활동과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지만, 좋은 작품을 좀 더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후진양성을 위해 교재도 새롭게 다시 만들고 싶은 욕심이다. 제자들도 나이들이 너무 많다보니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좀 더 전통각자에 흥미를 갖고 빠져들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며 살고 있다.

제작과정 및 제작도구 사진

각자는 구상하고, 나무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후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대패질을 하여 판재를 준비한다. 그런 다음 판재에 붙이는 배자를 하고 각자(새김질)를 한 뒤 마지막으로 채색하는 과정을 밟는다. 목판 새김질 순서는 최소 5~6년 동안 건조된 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판하본을 붙인 뒤 기름칠을 하고 새기면서 홈을 파 마구리(손잡이)를 끼우고 시험 인출을 하기 위해 먹칠을 하고 1~2회 교정한 다음 최종 인출을 한다. 각자법은 크게 반서각과 정서각으로 구분되는데, 반서각은 인쇄가 목적인 목판본과 판화나 전각처럼 원본을 반대로 뒤집어 새기는 반면, 정서각은 고궁의 현판과 같이 글씨를 정자로 새긴다. 거친 목판 위에 글씨를 세밀하게 새기고 다듬기 위한 도구도 망치, 칼, 끌 등 30여 가지에 이른다.

새기기 작업1

새기기

새기기 작업2

새기기

인출작업

인출

제작도구1

제작도구

제작도구2

제작도구

작품사진

진심

진심

온고지신

온고지신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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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시_ 강벽조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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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명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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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象村) 신흠(조선중기 문신)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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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원통보전 현판 (화재 후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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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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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의 한경명(漢鏡銘)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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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심체요절 복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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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언해본 복각

훈민정음 언해본 복각

훈민정음 언해본 복각

훈민정음 언해본 복각

약력

  • 1957년 출생
  • 1983년 철재 오옥진 선생 각자 사사
  • 1986년 죽사 박충식 선생 서예 사사
  • 1989년 한국미술종합대전 서각부분 대상
  • 2002년 개인전 (갤러리 월인천강)
  • 2004년~현재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각자반 지도
  • 2005년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전승교육사 인정
  • 2006년~2010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출강
  • 2006년 「전통각자」 (예문당) 집필
  • 2007년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교재10 「전통각자」집필
  • 2012년 개인전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전통공예관)
  • 2012년~2014년 대전대학교 서예 한문학과 출강
  •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보유자 인정
  • 2013년~현재 국가무형문화재보유자 작품전 출품
  • 2016년 (사)철재전통각자보존회 이사장 취임
  • 2021년 (사)한국전통각자보존회 이사장(보존회 명칭 변경)
  • 2021년 제70회 서울시문화상 수상
  • 현재 (사)한국전통각자보존회 회장, (사)국가무형문화재기능협회 부이사장
  • 글 이치헌 (한국문화재재단 한국무형문화재진흥센터센터장 /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저자)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