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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 옹주의 삶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02-02 조회수 : 4555
공주의 삶 - 글:한희숙(숙명여자대학교 교수)
 
 
500년 동안 조선 왕실에는 67명의 옹주가 살았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딸까지 포함하면 73명이 되고,

여기에 일찍 죽은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실제 옹주 수는 더 늘어난다.

궁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혼례 후 양반가의 아내와 며느리로 살아간 옹주들은 많은 권세를

누리는 한편 정쟁에 휘말려 불운한 삶을 살기도 했다.
 



공주의 삶


왕의 서녀이자 후궁의 딸, 옹주

옹주는 공주와 마찬가지로 국왕의 딸이다. 다만 어머니가 왕비가 아닌 후궁이다.  <경국대전>에는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라 하고, 측실이 낳은 딸을 옹주라 하여 구별하였지만, 공주와 함께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의 최상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공주와 마찬가지로 궁중에서 자란 뒤 양반가로 시집을 가기 때문에 외명부에 속했다. 옹주라는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왕의 후궁을 칭하기도 했다. 공양왕 때는 중국의 옛 제도를 참작해 왕의 딸을 궁주라 하고, 왕자의 정실부인, 왕의 동성자매·질녀, 종친들의 정실부인, 왕녀까지도 옹주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대군의 부인, 왕의 후궁, 왕의 서녀, 개국공신의 어머니와 처, 왕세자빈의 어머니, 종친의 딸 등을 옹주라 칭하였으나, 세종대 이후 왕의 서녀만 옹주라 칭했다.




공주의 삶

옹주의 혼례와 상례

옹주는 공주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부마와 동갑이거나 한두 살 차이가 났다. 부마를 맞이하는 의식도 공주의 혼인 의식과 비슷하였다. 한 예로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 부마 간택 과정을 보면 1732년(영조 8년) 8월 초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각 지방으로부터 부마 간택단자를 받도록 했다. 8월 28일 초간택 때 총 84명이 참가했는데 이를 9월 4일 재간택에서 11명으로, 9월 11일 삼간택에서 최종 3명으로 추렸다. 삼간택을 마친 당일 영조는 화순옹주 부마를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으로 정했다는 비망기를 내렸다. 이어 본격적으로 가례 준비가 시작되었다. 가례청을 설치하고 가례일인 친영은 가장 길한 11월 29일로 정하고, 나머지 납채-납폐-명복내출 등은 친영일 전에 길일을 택해 정하도록 했다. 가례청 배설 이후 가례를 마치기까지 두 달 반 정도 걸렸다.

한편 옹주가 죽으면 국가에서는 왕녀의 상례 장례제도에 의거해 공주보다 하등의 예로 장례를 지냈다. 또한 2~3일간 조회를 중단하고 왕 이하 고기반찬을 피하고 애도를 표하였다




옹주의 생활

옹주는 공주보다 한 등급 낮은 대우를 받았는데, 후궁인 어머니의 신분이 왕비와 차이가 나다 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이 있었다. 어머니 신분이 양반 출신인지 천인 출신 궁녀였는지에 따라서도 대우가 달랐다. 그러나 왕의 딸로서 존귀한 지위를 가지고 사회적·경제적으로 많은 혜택과 특권을 누렸으며, 공주와 마찬가지로 내명부·외명부 등과 함께 여러 궁중 행사에 참석하는 등 왕실 가족으로서의 권리를 가졌다.

옹주 역시 결혼을 하면 양반가의 며느리, 처가 되어 사가에서 생활하였다.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고, 아들을 과거에 급제시켜 가문의 영광을 높여야 했으며, 첩 때문에 마음고생도 했다. 남편이 일찍 죽어 젊은 나이에 자식도 없이 평생 수절하기도 했다. 또한 왕실의 정치적 사건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남편 집안의 정치적 입지가 그들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기도 했다.




어머니 죄에 연좌된 불행한 옹주들

옹주도 친정의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종의 딸 공신옹주는 귀인 엄씨의 소생으로, 14세에 한명회의 손자인 한경침과 혼인하였으나 18세에 과부가 되어 슬하에 자식 없이 수절하였다. 이복오빠인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 사사의 배후로 귀인 엄씨를 지목하여 죽일 때 이에 연좌돼 폐서인이 되어 아산으로 귀양 갔다. 옹주는 남편의 신위를 유배지에 가져가서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고 무엇이든 신위에 먼저 올린 뒤에 먹었다. 중종반정 이후 사면되었는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중종은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곡식을 내려주고, 옹주의 절행을  <삼강행실속록>에 싣도록 하였다.

정혜옹주는 어머니 귀인 정씨가 폐비 윤씨 사사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여 연산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오빠 안양군이 제천에, 봉안군이 이천으로 유배 갈 때 폐서인되어 배천으로 유배를 갔다. 이후 중종이 즉위하면서 작위가 회복되었으나, 이듬해 어린 나이로 죽었다.

중종의 딸인 혜순옹주는 1527년(중종 22년)에 어머니 경빈 박씨가 김안로와 그 아들 김희 등이 조작한 ‘작서灼鼠의 변’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오빠 복성군과 함께 죽임을 당하자 서인으로 폐출되어 경상도 상주로 유배되고, 남편인 김인겸도 같은 사건에 연좌되어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신원되어 1541년(중종 36년) 남편과 함께 직첩을 돌려받았다. 동생 혜정옹주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남편 홍여는 동궁을 모함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추국 중에 매를 맞아 죽었다. 혜정옹주는 작호를 박탈당하고 폐서인이 되었다가 이후 김안로가 축출되면서 억울함이 밝혀져 도성 안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인조의 딸 효명옹주는 1651년(효종 2년)에 시아버지 김자점이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처형되고 일가가 적몰되자, 어머니 귀인 조씨의 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악독한 일을 저지른 것이 탄로 나서 폐서인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 후에 효종의 특명으로 풀려났으나 복호되지는 못하였다.



 
경순옹주 묘지편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왕실 유일의 열녀, 영조의 딸 화순옹주

화순옹주는 영조가 딸 7명 중 특히 예뻐했다 한다. 1732년(영조 8년) 12세에 김흥경의 아들이자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혼인해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했다. 하지만 둘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1758년(영조 34년)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죽음을 애도하며 곡기를 끊었다. 영조가 화순옹주의 집에 찾아와 미음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듣지 않고 14일 만에 38세의 나이로 죽었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자신의 뜻을 저버렸다 하여 정려를 내리지 않았지만, 조카인 정조가 1783년(정조 7년)에 그녀를 열녀로 봉하고, 부부의 무덤이 있는 충남 예산에 열녀문(화순옹주 홍문)을 세웠다. 수많은 조선의 왕녀들 중 유일하게 열녀로 지정된 사례이다.




마지막 황녀,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

소설과 연극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덕혜옹주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덕수궁에서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복녕당 양씨는 덕수궁의 소주방 나인이었는데 서른이 넘은 나이에 옹주를 낳았다. 고종은 총 9남 4녀를 두었지만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순종 이척, 의친왕 이강, 영친왕 이은, 덕혜옹주까지 3남 1녀뿐이었다. 덕혜옹주는 사실상 유일한 딸로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컸다.

덕혜옹주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깊은 슬픔에 빠졌고, 일제에 의해 1925년 정월에 일본 유학이 결정되어 여자학습원에 입학하는 등 어린 나이에 타국에서 외로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29년 모친 귀인 양씨가 사망한 이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심한 불면증을 겪다가 결국 정신장애인 진단을 받게 되었다.


 
낙선재 내부 사진: 서헌강

 

덕혜옹주는 1930년에 옛 대마도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양자인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였다. 옹주는 결혼 초부터 거의 완전한 실어증 증상을 보였다. 1932년에 딸 소 마사에를 낳았으나 출산 이후 병이 악화되어 1946년부터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1947년 신적강하 즉 '왕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평민이 된다는 결정’에 따라 연금을 비롯한 각종 특권을 박탈당해 생계가 어려워졌고, 입원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1955년에 이혼당하였다.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같은 해 2월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다. 1967년 5월 병세가 안정되어 퇴원 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기거하다 1989년에 사망하였다. 조선왕조의 몰락과 아픔, 불행한 가족사를 온몸으로 겪었던 슬픈 왕녀였다.


공주의 삶




옹주의 남편, 부마들

공주든 옹주든 왕녀에게 장가든 왕의 사위는 모두 부마, 또는 위라고 칭했다. 공주에게 장가든 자는 첫 벼슬로 종 1품을, 옹주와 결혼한 부마에게는 첫 벼슬로 종 2품을 내려주었다. 부마가 죽을 경우 옹주는 그대로 남편의 품계에 따른 대우를 받았다.

옹주의 남편도 공주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왕실의 부침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신옹주의 남편 한경침은 장모인 귀인 엄씨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사건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할 때 작위와 재산을 모두 뺏기고 유배지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이외에도 왕실의 권력 구도에 따라 죽거나 유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마는 외교 사신 임무를 수행하며 문물을 들여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국왕의 혼례를 비롯해 왕실의 크고 작은 행사를 주관하고 이에 참여했다. 부마 중에는 특히 시와 글씨, 그림 등에 능한 인물이 많았다. 또한 부마를 배출한 가문은 왕실의 측근으로 많은 권세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