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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 조선시대의 무예 조선의 무예훈련 - 진법(陣法)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09-01 조회수 : 5763
조선시대의 무예 조선의 무예훈련 - 진법(陣法

 
현대의 조선시대 무예 관련 의례재현 행사는 다양한 무예와 무기 그리고 무예훈련 방법인 진법(陣法)이 우리나라 무형의 전통
문화유산 콘텐츠로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다. 사라져 가는 조선시대의 무예를 복원하고 재현하는 일은 전통문화의 이해와 확산이라는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조선시대의 무예는 조선 후기 정조 대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의 무예이다. 그런데 이 무예들이 어떤 훈련대형을 갖추고 시행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무예를 심도 있게 다루고자 조선시대의 무예훈련이자 군사훈련인 진법(陣法)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하였다. ‘첩종 의식’재현행사에서
시연된 오위진법(五衛陣法)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 등장한 원앙진(鴛鴦陣)은 조선시대의 창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조선시대의 진법(陣法)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장기와 바둑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장기는 초(楚)의 항우(項羽)와 한(漢)의 유방(劉邦)의 전쟁을 모방해 만들어졌다. 이 놀이는 양쪽이 동일하게 병력을 구성하고 전술의 움직임을 통해 공격
과 방어를 주고받으며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다. 바둑도 흑돌과 백돌이 영토 확장을 위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공격과 방어를 하며 승패를 결정짓는다. 이외에 스포츠인 축구경기를 통해서도 다양한 전술 포메이션(formation)이 구사되는 것을 통해 진법이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진법(陣法)은 군사들이 시행한 전술, 무기, 기법 등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진법은 문종 대의 오위진법(五衛陣法)이다. 오위진법은 『이위공문대』 중권에 나오는 오행진법이 기초가 되었다. 이 책에서는 오행(목·화·토·금·수)과 오방(동·남·중·서·북), 오색(청·적·황·백·흑), 오계절(춘·하·유월·추·동)을 이용해 가장 기본적인 진의 모습인 구부러진형의 곡진(曲陣), 뾰족한 형의 예진(銳陣), 직선형의 직진(直陣),사각형의 방진(方陣), 원형의 원진(圓陣)의 형태와 특징을 설명하였다.

 
곡진,애진,직진,방진,원진 등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군사문헌 집1-兵將說·陣法』, 1983, 204쪽.

 
오위진법은 다섯 개의 전·후·좌·우·중위(前·後·左·右·中衛)로 편성된 군사들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북방의 야인이 주된 적이었기에 기병을 중심으로 효과적인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방식으로 부대가 구성되었다. 각각의 병종에 따라 살펴보면 일위(一衛)는 크게 기병과 보병으로 구분된다. 말을 타는 기병은 원거리에서 활을 쏘는 기사(騎射) 인원이 60%, 창을 쓰면서 돌격하는 기창(騎槍)이 약 40%로 구성되어 전장의 상황에 따라 포위섬멸이나 충격 돌파 등의 전술을 구사했다.

보병은 진의 방어력을 높이는 방패수(防牌手) 또는 팽배수(彭排手)가 가장 앞에 서서 철벽의 장벽을 만들었다. 그 뒤로는 초기 화약무기를 사용하는 총통수(銃筒手), 긴 창으로 적의 접근을 방어하는 장창수(長槍手), 자루가 긴 청룡언월도와 비슷한 무기인 장검수(長劍手)의 순으로 배치되었다. 이런 배치는 뒷사람이 앞사람을 보호하는 방식이다. 맨 마지막 줄에는 조선의 장기인 궁수(弓手)들이 열을 맞춰 배치되어 돌격해오는 적의 선봉에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또한, 전력 병력 중 10분의 3을 보조 병력인 유군(遊軍)으로 편성하여 유군장(遊軍將)이 전투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군사들을 배치하였다. 안정적인 진형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각 병종들은 나아가서 싸우는 전통(戰統)과 머물러 대기하는 주통(駐統)으로 갈라져 적의 진형을 살피며 진형을 변형시켰다.

진법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바로 신호체계의 숙달이다. 군기종류는 장수를 상징하는 표기(標旗)와 휘하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는 영하기(令下旗), 휘하 장수들을 소집할 때 사용하는 초요기(招搖旗), 매복병에게 기밀하게 내리는 대사기(大蛇旗), 척후병들이 사용하는 후기기(候騎旗) 등이 있다. 군기 신호는 응(應), 점(點), 지(指), 휘(揮), 보(報) 등이 있다. 신호체계의 기본은 대장이 휘를 왼쪽으로 점하면 직진을 이루고, 오른쪽으로 점하면 방진으로, 앞으로 점하면, 예진,뒤로 점하면 곡진, 사방으로 향해서 점하면 원진,두 휘를 합쳐서 점하면 2위(衛)가 함께 모여 1진(陣)을 이루었다.

군사 신호용 악기로는 나발(角), 북(鼓), 징(金), 방울(鐸), 비(鼙), 도(鼗) 등이 있다. 북은 이동을 뜻했다. 북을 빠르게 치면 빨리, 느리게 치면 천천히 이동하라는 신호였다. 반대로 징은 후퇴를 명령할 때 사용했다. 휘가 지시하는 방향에 따라 징을 빠르게 치면 후퇴하고 징소리가 멈추면 다시 공격 대형을 갖춰 싸웠다. 방울은 주로 진중을 조용히 시킬 때 사용했는데, 쇠방울 소리가 날 때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적의 야간습격에 대비하거나 다음 명령을 받을 때까지 침착하게 대기시켰다. 반대로 도를 치면 일제히 함성을 질러 아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전투에 나가기 위해 군사들은 이처럼 다양한 신호체계를 익혀야만 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진법은 원앙진(鴛鴦陣)이다. 대장 1명에 등패수(藤牌手), 낭선수(狼筅手), 당파수(鐺鈀手) 각 2명, 장창
수(長槍手) 4명, 화병(火兵, 보조병) 1명으로 총 12명이 한 부대로 움직이며 각개 전투를 치렀다. 이 대형을 기본으로 몇 개의 원앙대가 함께 모여 큰 규모의 방진(사각진)을 이루는 등 다양한 단병전술을 구사하였다. 종대형의 단독 원앙진은 전투 상황에 따라 두 날개를 펼치듯 움직이는 양의진(兩儀陣), 대장의 엄호 상태를 높이는 삼재진(三才陣)으로의 진법 변형이 가능했다.

원앙진과 그 변형 진법은 전장에서 소수의 인원으로도 전투를 펼칠 수 있어 일본군의 날카로운 창검수들을 제압했다. 원앙진의 기본적인 움직임은 선두의 등패수를 따라 앞뒤에서 서로 보호하고 방어하며 전진하는 것이다. 교전 시에는 낭선은 등패를 구원하고, 장창으로 낭선을 구원하며, 단병으로 장창을 구하는 방식이었다. 원앙진은 원앙처럼 사이좋게 서로를 보호하라는 의미가 담긴 진법이었다.

진법을 비롯한 군사훈련 체계는 정조 대에 이르러 비로소 체계화되었다. 정조는 먼저 군사들이 대규모로 움직이는 진법을 정리해 1785년(정조 9)에 『병학통(兵學通)』을 간행하였다. 또 자신이 직접 이름을 붙여 1790년(정조 14)에 『무예도보통지(武藝
圖譜通志)』를 편찬해 군사들에게 보급하고, 개개인이 단병무예를 익히도록 했다. 이 책들은 조선후기 새로 만들어진 오군영의 체제에서 각 군영간의 훈련체계와 개인무예 자세의 통일이라는 면에서 큰 뜻을 담고 있다. 또한, 두 책은 모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맞닥뜨리게 된 북방과 남방의 적 모두에 대해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할 수 있는 기법을 담고 있어서 조선 병학서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경복궁 흥례문에서 재현되는 ‘첩종’의식은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과 조선 후기의 원앙진 등이 『무예도보통지』의 무예와 함
께 어우러져 무예훈련으로서 재현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무형의 문화유산 콘텐츠들이 국내외에 인정을 받고 더욱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무예에 대한 체계적 교육을 통한 전문가 교육양성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무형 문
화유산콘텐츠가 풍부해질 수 있다. 더불어 무예에 대한 의례 재현을 위해서는 학제간 교류를 통한 다양한 전공의 전문가들에
의한 철저한 학술적 고증이 필요하다. 이로써 사실에 근접한 재현을 하고, 일반인들에게도 올바른 역사 인식과 이해를 제공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성능행도』의 서장대야조도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동래부순절도 – 육군박물관 소장


 
원앙진기본대형 – 박금수, 『조선의 武와 전쟁』 , 지식채 널, 2011, 71쪽/『기효신서』의 원앙진, 양의진, 삼재진, 국방부군사편찬연구 소, 『군사문헌집 23 – 紀效新書(上)』, 2011, 371-372쪽.
 
- 글˚곽낙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정보화실 전임연구원 / 한국무예사 전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