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월간문화재

2015.04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5-04-02 조회수 : 9196

기획특집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 -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매우 뜻깊은 해이다. 191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라는 국호가 일제의 강점으로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날이자, 35년의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이후 35년 동안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나라를 되찾았다. 식민지 시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본산이며 산실이었다. 수립 초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였으며 그 바탕이 임시정부청사였다.

3.1운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후 식민지 통치 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고, 한국 사회를 재편하기 위해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 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하였다. 또한 회사령의 실시로 민족 자본의 발전이 가로막혔고,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불법적인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가 인정되었으며 지주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3.1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3.1운동은 종교계와 학생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사진1.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의 부엌, 사진2.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전경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계, 이승훈 등 기독교계, 한용운 등 불교계가 독립선언을 계획하여 독립선언서, 파리강화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독립의견서 등이 작성되었고,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배포되었다. 그 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오후 2시,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3.1운동이 확산되었다. 3.1운동은 비록 일제의 폭력적 진압으로 독립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3.1운동 직후 국내의 한성정부를 비롯하여 국외에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7개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이들 임시정부는 통합을 거쳐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후 1945년 광복이 이루어질때까지 27년간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는 활동하던 지역에 따라 상하이 시기(1919~1932), 이동 시기(1932~1940), 충칭 시기(1940~1945)로 구분한다. 상하이 시기는 임시정부 수립부터 윤봉길 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난 1932년 4월까지이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존립한 27년 중 13년으로 절반이나 되는 기간으로 미성숙하나마 국내외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려는 출발기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약도(출처 :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관리처)열두 차례나 임시정부 청사 옮겨 다녀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지만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이끌어 갈 청사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방해로 한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 상하이 황포구 마당로 306통 4호에 복원된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부터 상하이를 떠나기 전인 1932년까지 사용했던 건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수립된 후 만 13년 동안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청사를 두고 활동하였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장소나 청사의 위치는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지 내에 2층 양옥집을 빌려 태극기를 게양하고 청사로 사용하며 공개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1919년 10월 17일 프랑스 조계 당국으로부터 건물 폐쇄 조치를 당하였다. 첫 임시정부 청사는 쑨원(孫文)의 심복으로 알려진 두웨성(杜月笙)의 주선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22호에서 수립되었지만, 이곳이 청사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도 한 두 곳이 아니었다.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는데, 현재 확인된 횟수만 해도 12차례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는 개인의 집이나 기관의 사무소에 청사를 마련하고 사무를 보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안정적인 청사를 마련한 것은 1926년 7월이었다. 현재 복원된 보경리 4호에 청사를 마련한 것이다. ‘임시정부경제후원회’가 조직되어 이를 후원하였고,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로 부득이 항주로 이전할 때까지 6년 동안 이곳에서 국정을 운영하였다.
1980년대 후반 들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청사 건물을 찾기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 정부는 상하이시와 연대 관계를 맺고 1988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를 찾기 위해 공동조사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상하이시 마당로 306통 4호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사용했던 청사임이 확인되었다. 당시 사용하였던 임시정부 청사는 1925년 건축된 중국 근대식 석고문(石庫門) 양식의 건축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사진1.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 걸린 활동 사진, 사진2.대만민국임시정부 청사 현판



복원된 임시정부 청사, 독립운동 성지로
상하이시 노만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1990년 2월 19일 당시 노만구 문물 보호단위 제174호로 지정하는 한편 ‘숭산로 가도 문물관리소’를 설치하였다. 이후 ‘숭산로 가도 문물관리소’는 한국의 독립기념관, 삼성물산과 협력하여 임시정부 청사 복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약 3여 년의 과정을 거친 후 임시정부 청사는 1993년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던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청사를 관리하던 ‘숭산로 가도 문물관리소’의 명칭도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지관리처’로 변경되었다.
 

사진1.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모형도, 사진2.대힌민국임시정부 청사 김구 선생의 집무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지관리처는 1993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복구공사 완공 기념식을 거행하고 일반에 공개하였다. 그리고 2001년에는 한국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노후된 청사를 전면적으로 정비하고 수리했으며 전시실 공간의 확장과 전시 내용을 보완하여 재개관하였다. 2012년 노만구가 황포구에 통합되면서 현재는 황포구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청사 건물의 1층과 2층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생활하였던 공간이 복원되어 있다. 1층에는 회의실과 주방이 있는데, 회의실은 회의용 탁자와 함께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임시정부 초기 사용했던 태극기가 전시되어 있다. 주방은 당시 사용했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2층에는 김구 선생의 집무실 겸 침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집무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숙소가 복원되어 있다. 3층에는 임시정부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있다. 제1전시실 입구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3.1운동 이후 탄생할 때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의 역사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외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최초로 사용했던 청사
사진과 독립선언서, 국민대회 취지서 및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에는 상하이 시기 임시정부의 활동과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의거, 이동 시기 및 중경에서의 임시정부 활동, 해방 후 환국 과정 등이 소개되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 있는 표지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임시정부가 사용하였던 청사 중 상하이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사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93년 복원 이후 20여 년 동안 300만 명 이상의 한국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오늘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한민족의 맥을 이어준 ‘독립운동 성지’로서 한국 국민들의 마음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으며, 한·중 양국의 우의를 증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글 성주현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연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