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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 시민 품으로 돌아온 경교장과 딜쿠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2-02 조회수 : 1889
하단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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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의 임시정부 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을 보기 위해서는 중국 상하이나 충칭으로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서울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과 서대문역 사이의 언덕 위에 있던 한양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 그 돈의문 터 바로 옆에 강북삼성병원이 있는데, 그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1949년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총에 맞아 서거한 현장이 남아 있다. 오랜 기간 강북삼성병원의 현관과 로비 구실을 해 온 지상 2층 지하 1층의 석조건물 ‘경교장(京橋莊)’이다.
애초 임오군란 이후 일본공사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성을 따 ‘죽첨장(竹添莊)’이라 불리던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금광 개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일군 사업가이자 조선인인 최창학의 소유였다. 그런데 당시 금광업을 위해 일제에 전투기를 헌납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부역 행위를 서슴지 않던 최창학에게 ‘갑작스러운 광복’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나 보다. 그가 광복과 동시에 이 건물을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도록 내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백범에 의해 경교장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이 건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인 동시에 그의 사저이자 암살 현장을 넘어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가 알려지자 임시정부 각료들과 각 정당 및 단체 대표들이 모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펴기로 결정한 반탁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나아가 남북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자 “통일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에 통일을 위해서는 그것이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이라고 해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며 북행을 결의하는 등 남북통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백범과 함께 잊힌 경교장
 
그러나 백범 서거 이후 모든 것이 뒤바뀌고 만다. 이 집은 다시 최창학에게 되돌아갔고, 이후 자유중국 대사관과 미군특수부대 주둔지 그리고 베트남 대사관저 등으로 이용되는 등 경교장의 운명은 파란을 겪는다.
이윽고 1968년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인 고려병원에 인수되고부터는 건물 내부가 완전히 변형되고 말았다. 응급실과 약국, 의사휴게실 등으로 개조된 탓에 외벽만 그대로일 뿐 내부는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백범은 이승만을 비롯한 당시 주류세력에게는 정치적 경쟁자였고, 미 군정청에게는 한반도 통치에 눈엣가시와 같은 민족주의자였기에 아무도 경교장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남북통일운동의 산실로서 기념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던 최창학 소유의 집이었기에 사라지지 않고 남겨질 수 있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경교장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외양만 유지한 채 내부는 바뀌어 갔고, 존재 자체도 서서히 잊혀 가는 듯했다.


또 하나의 잊힌 존재 딜쿠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 여겨지던 건물은 경교장만이 아니다. 한양도성과 나란히 놓인 송월1길을 따라 인왕산 방면으로 700m 남짓 올라가면 이내 생경한 느낌의 붉은 벽돌 집에 닿는다. 태평양전쟁 이래 방치되다시피 하다 최근에 와서야 그 역사가 드러난 ‘딜쿠샤(Dilkusha)’다. 건물의 내력이 알려지게 된 과정이 흥미롭다.지난 2006년 1월 31일 백발의 노부부와 젊은 여인이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문을 빠져나왔다. 미국인인 브루스 테일러와 그의 부인 조이스, 딸 제니퍼였다. 66년 만의 귀국…. 1940년 21세의 나이로 일제강점하의 조선을 떠났던 브루스가 87세가 돼서야 마침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찾은 것이다.
지난 1982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은퇴한 브루스에게 있어 서울은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1940년 대학 진학을 위해 미국으로 갈 때까지 젊은 시절을 모두 보낸 곳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는 태어나자마자 격동의 한국사 한복판에 있었다.


3·1독립만세운동을 세계에 알린 미국인
 
브루스의 할아버지인 조지 테일러와 아버지인 앨버트 테일러 그리고 작은아버지 윌리엄 테일러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지난 1896년이었다. 평북 운산금광에 기술자로 파견돼 온 것이다. 아버지 앨버트는 한 미국계 통신사의 통신원 역할도 겸하고 있었는데,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뒤에도 귀국선을 타지 않았다.
앨버트 테일러가 영국 연극배우 메리 린리와 결혼해 서울역 앞 연세빌딩 자리에 있던 옛 세브란스병원에서 첫아들 브루스를 낳은 것은 결혼 이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19년 2월 28일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기 정확히 하루 전이었다.
 

“… 나는 일어서서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카키색 군복을 입은 일본 군인들이 남대문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또 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흰옷의 한국인들이 있는 것도 알았다. … 그날 우리의 아들이 태어났다. 절반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나는 병원에 큰 움직임이 있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나는 사람들이 내 방을 슬며시 들락날락하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떠 보니 간호사가 아기 대신 서류뭉치를 안고 있었다. 간호사는 그 서류를 내 침대보 속에 감췄다. 바깥 거리에서는 모든 게 난리였다. 간혹 들리는 비명, 총소리 그리고 찬송가를 낮게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끝없이 반복되는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만세! 만세! 그 소리는 맹수의 포효처럼 들렸다. 만세!
… (중략) …
내가 앨버트 때문에 다시 깨어났을 때 방은 거의 어두웠다. 그는 허리를 구부려 내게 키스를 했고, 익숙지 않은 솜씨로 아기를 안아 올렸다. 그 바람에 감춰져 있던 종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앨버트는 당장 아기를 내려놓고 불빛이 있는 창가로 그 종이들을 가져갔다. ‘독립선언서’잖아! 그는 놀라서 소리쳤다. 장담컨대 그는 신문사의 새 통신원으로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한 것이 자신의 상속자이자 친아들을 만난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날 밤 동생 빌[윌리엄]이 신발 뒤축에 독립선언서를 넣어 도쿄로 떠났다.”
Mary Linley Taylor, Chain of Amber, The Book Guild Ltd., 1992, England

 
마침 그날 그 시각 그곳에서 브루스가 태어남으로써 독립선언서, 나아가 3·1독립만세운동은 해외에 알려질 수 있었다. 평소 조선인 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던 앨버트 테일러의 용기에 의해서….


추방 이후 잊힌 딜쿠샤
 
사실 조선인의 인권을 위한 투쟁을 넘어 전 세계 모든 피압박 약소민족의 권리를 주장하며 세계민중투쟁사에 한 획을 그은 3·1독립만세운동이 어떻게 해외에 알려지게 됐는지 오랜 기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누가 그러한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지난 2006년 브루스 테일러 일행이 방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붉은 벽돌 건물의 정체 역시 오리무중이었다. 테일러 가족은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미국으로 추방된 이후 돌아올 수 없었고, 조선총독부 재산을 거쳐 광복 뒤 한국 정부의 소유가 된 이 집은 6·25전쟁을 겪으며 집 없는 서민들이 격벽을 치고 나눠 살아가는 곳으로 바뀐 이래 변변한 내력 조사도 한 번 없이 수십 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그나마 세간에 <대한매일신보>의 옛 사옥이라는 말이 돌면서 1995년께 문화재 지정 직전까지 가는 일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내 진위 논란에 휩싸였다. 건물 벽면에 새겨져 있는 ‘DILKUSHA 1923’이라는 글씨가 궁금증을 증폭시킨 탓이다. ‘딜쿠샤’는 테일러 부부가 인도를 여행하던 중 방문한 아름다운 고성의 이름으로, 언젠가 자신들의 집을 갖게 되면 꼭 그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다는 것은, 브루스 테일러의 방한이 아니었으면 영영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그의 방한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딜쿠샤 자체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거주자들은 건물이 자기 소유가 아닌 탓에 오랜 기간 적절한 보수를 하지 않았고, 안전진단 결과 D등급이 나오는 등 붕괴 위험에 내몰려 있었다


시민에게 돌아올 딜쿠샤와 이미 돌아온 경교장
 
테일러 일행의 방한으로 우연히 딜쿠샤의 내력이 알려지면서 이 집을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투쟁의 순간에는 말 그대로 조선인만이 아니라 얼굴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들도 함께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의미를 돌아보고 그 역사를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었다. 2017년 등록문화재 지정에 이어 2020년 여름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원형 복원공사의 결과가 더욱 궁금한 까닭이다.
최근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경교장도 시대 변화를 새삼 느끼게 해 준다. 백범 서거 이래 수십 년간 희망이 보이지 않던, 행여 기억 속에서 지워질 뻔한 경교장도 지난 2005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2013년에는 전시관으로 재탄생했다. 특히 김구를 비롯한 각료들이 국무회의를 열던 1층 귀빈 응접실을 비롯해 김구의 집무실과 그를 찾아온 손님들이 잠시 대기하던 선룸(Sun Room), 만찬을 열던 식당 등의 모습이 백범의 수행비서이던 선우진의 증언을 토대로 원형에 가깝게 제 모습을 되찾았다.
복원공사를 맡은 삼부토건 관계자는 “병원 시설로 쓰이면서 내부가 많이 바뀌었지만 1938년 발간된 <조선과 건축>이란 책자에서 경교장의 평면도를 찾아내 원래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라며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자료와 사진들을 토대로 바닥의 작은 타일 하나까지 원래의 모습대로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그 위상에 견주어 보면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만감이 교차하기에 충분하다. 경교장을 소유한 기업의 양보와 관계당국의 지속적인 설득, 관심 있는 시민들의 참여 속에서 일구어낸 성과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역사여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