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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 겨울호-사랑과전쟁] 연정-<만복사저포기>에 그려진 여귀( 女鬼)의 사랑과 소망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2-01-03 조회수 : 1569



<만복사저포기>는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금오신화』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는 전쟁 상황에서 성폭력을 피하여 정절을 지키려고 죽음을 택한 여인들이 느꼈음 직한 억울함과 죽어서 귀신이 된 뒤 가졌음 직한 사랑에 대한 소망을 상상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글_ 박일용(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만복사저포기>에 그려진 여귀( 女鬼)의 사랑과 소망



전쟁 그리고 정절 이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여성에게 성적 순결이 요구되었지만,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택한 조선 사회에서 는 그 정도가 특별히 심했다. 가부장제적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 하기 위해 여성에게 정절(貞節) 이념이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그 래서 이 시기에는 여성이 성적 순결을 잃는 경우 살아있으면서도 귀신(鬼神)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여성에게 강요된 이러 한 정절 이념의 억압성은 평상시에도 문제적이었지만 전쟁 시기 에는 그것이 비인간적인 폭력 형태로 나타났다. 


14세기 중반 이후 원과 명의 교체 그리고 고려가 원나라 지배에 서 벗어나 군사력을 정비하기 어려운 틈을 타서 왜구들이 중국 의 해안과 고려에 대한 약탈을 일삼았다. 일본의 남북조 시기 중 앙 권력인 막부의 지배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큐슈 이끼섬 대마 도 등을 근거지로 한 남조의 지방 세력은 해적이 되어 동아시아 를 상시적 전쟁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고려의 우왕(禑王) 재위 14년 동안 왜구가 378회나 침략했다는 사실을 보면 그 빈 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 열전의 열녀 조에는 이 시기 왜구들로부터 정절 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인들의 행적이 여럿 소개된다. 강 화부에 살던 서리의 세 딸, 진주에 살던 정만(鄭滿)의 처 최씨. 광주에 살던 강호문(康好文)의 처 문씨와 역시 광주에 살던 김언 경(金彦卿)의 처 김씨, 정읍에 살던 경덕의(景德宜)의 처 안씨와 역시 정읍에 살던 이득인(李得仁)의 처 김씨, 이숭인의 <배열부전> 의 주인공인 경산에 살던 이동교(李東郊)의 처 배씨 등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는 <만복사저포기>의 배경 인 남원에서 왜구에게서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양중 수(梁仲粹)의 처 이씨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시기는 신유학이 도입되어 유교 이념이 정착되면서 여성의 정 절과 남성의 충절이 국가를 지탱하는 두 축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그런데 왜구의 침략이 일상화되어 여성들에게 정절과 목숨 사이의 선택이 강요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숨을 버리고 정절을 선택한 여인들의 행위를 유교적 시각에서 예찬한 것이 이숭인의 <배열부전 > 같은 열녀전이다 . 그리고 앞에 소개한 고려사나 동국여지승람 속 열녀들의 기사 역시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의 위정자들이 편찬한 것들이다. 


이들에서는 열녀들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렇지만 , 왜구들에게 정절을 잃었을 경우 사회가 그 여인들을 어떻게 대했을지를 상상해 보면 그들의 태도를 달리 이해할 수도 있다 . 비슷한 예로 해방된 지 반세기 가까이 세월이 흐르기까지 자신들이 일본군에게 당한 비인간적 폭력을 공개하지 못했던 위안부 여성들의 처지를 들 수 있다. 위안부 여성들이 자신들이 당한 폭력을 공개하지 못했던 이유 역시 그 시기까지도 온존했던 성적 순결 이념 때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녀전과 달리 <만복사저포기>는 억울한 여성의 사랑에 대한 소망을 담았다.



(2021가을겨울_연정-2_사진2-1)황산대첩비지 _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황산대첩비지 _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황산대첩비지 바로 옆에 동편제 판소리의 비조(鼻祖)인 가왕 송흥록, 그리고 후에 박초월 명창이 살았던 집터가 있다. 지금은 송흥록의 집 모습이 복원되었다.

(2021가을겨울_연정-2_사진2-2)황산대첩비지 _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성적 순결과 여귀 (女鬼) 혹은 여성의 한 


<만복사저포기> 는 고려 말 조선 초 왜구의 침략을 집중적으로 받은 남원을 배경으로 한다 . 남원은 지리산에서 공급되는 풍부한 농업용수를 이용하여 풍요로움을 누리면서도 , 경상도 함양에서 팔양치를 넘어 인월 운봉을 지나는 육로와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구례를 지나는 수로가 만나는 곳으로 , 왜구의 침탈을 가장 심하게 받았던 고장이다 . 이성계의 황산대첩이 남원으로 이어지는 인월 운봉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사정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2021가을겨울_연정-2_사진1)만복사저포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_ 국립중앙도서관

만복사저포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국립중앙도서관


< 만복사저포기 > 의 여주인공 여귀 (女鬼 ) 하씨 (何氏 ) 는 만복사 부처 앞에서 “지난번 국경의 방비가 무너져 왜구가 침략하여 눈앞에 창과 방패가 번득이고 여러 해 봉화가 이어졌습니다. 집을 분탕질하고 백성을 노략하니 사람들은 동서로 달아나 숨고 친척과 하인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는 부들풀과 버들처럼 연약하여 멀리 갈 수 없어서 규방에 숨어 끝내 정절을 지켜 부정한 행실을 하지 않고 횡역 (橫逆 ) 의 화를 면했습니다.” 라고 자신의 처지를 고백한다 . 자신의 예를 들어 왜구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백성들의 위급한 상황, 그 가운데서도 연약한 여성들의 처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하씨는 “하지만 가을 달 봄꽃을 상심하여 헛되이 보내고 들판의 구름 흐르는 물에 매일을 무료히 보냅니다 . 빈 골짜기에서 지내면서 평생의 박명을 한탄하고 홀로 밤을 지내면서 채란(彩鸞)이 혼자 춤추는 걸 슬퍼합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혼 백이 스러지고 여름 저녁 겨울밤에는 간장이 찢어집니다.”라고 자신의 외로움을 고백한다. 그리고 부처님께 “타고난 인연이 있 다면(賦命有緣) 빨리 만나 즐거움을 누리게(早得歡娛) 해 주십 시오.”라고 소원을 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하씨의 기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당대의 눈으로 보면 괴이쩍기 짝이 없었을 것 이다. 당대의 가부장제적 통념으로 보면 여성이 외로움을 고백 하면서 짝을 맞고 싶다고 비는 것은 자신이 여귀(女鬼)라는 사 실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짝을 맞고 싶은 여성의 소망은 반사회적 인 더러운 성적 욕망으로 간주되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표출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가부장의 혈통을 잇는 수단으로 여겨져 성적 주체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씨가 자신이 왜구로부터 정절을 지켰다고 고백하면서도 외로움을 고백하면서 짝을 찾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정절 이념으로 보면 이러한 하씨의 고백은 모순적이다. 정절은 부모가 맺어 준 가부장에 대한 성적 순결을 뜻 하는 것으로서, 짝을 찾고 싶은 여성 자신의 외로움 또는 욕망은 배제된다. 역설적 내용의 기도문를 통해 하씨는 자신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귀(女鬼)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하씨같은 귀신(鬼神)은 현실 세계에 실재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귀신을 실재하는 것처럼 인식한다. 그 이유는 무얼까. 죽음으로 인해 억압된 죽은 자의 소망을 사람들이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무의식에 기억된 죽은 자의 억압된 욕망은 환상 형태로 돌아온다. 공동체의 무의식 속에 저장된 하 씨의 처지, 정절을 위해 목숨을 버렸지만 정절을 바칠 대상을 찾 을 수 없게 된 하씨의 비극적 처지에 대한 무의식적 기억이 여귀(女鬼) 하씨의 형상을 소환한 것이다. 


그런데, 정절이 강요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합법적 결혼 형식 이외의 어떤 형태의 남녀 관계도 용납되지 않는다. 정절을 바칠 대상을 찾고 싶은 여귀(女鬼)의 억압된 욕망 역시 용납될 수 없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귀(女鬼) 형식을 빌어 소환된 여성들의 억압된 소망이 더러운 반사회적 욕망으로 인식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21가을겨울_연정-2_사진3)만복사지 석조좌대 _ 한국관광공사 소장, 한국문화정보원 공공누리 제공

만복사지 석조좌대 _ 한국관광공사 소장, 한국문화정보원 공공누리 제공 신증동국여지승람 , 용성지 등에는 만복사의 서쪽 전각에 35 척 높이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위한(趙緯韓)의 최척전(崔陟傳)에는 장육존불(丈六尊佛)로 나온다.



여귀 (女鬼)의 사랑 또는 여귀 (女鬼)에 대한 애도 


<만복사저포기>에서 귀녀 하씨는 부처에게 올리는 발원문 형식을 빌려 자신의 처지와 소망을 간절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양생은 하씨의 발원을 괴이쩍게 여긴다. 하씨의 발원 내용을 가부장제 사회의 통념으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만복사저포기>는 양생이 하씨와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통념을 깨나가는 과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양생의 심리적 변화는 이어지는 두 차례의 만남과 이별 과정에 대응된다. 


첫 번째는 하씨가 여귀라는 사실만을 알면서 만났다가 헤어지는 단계로 여기서는 여귀들이 오히려 살아있는 여성들보다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둘째는 하씨의 부모 그리고 재회한 하씨로부터 하씨가 현실적으로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확인하는 단계로 여기서 비로소 하씨의 처지를 하씨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하씨와 양생의 만남은 만복사 부처 뒤에 숨어서 양생이 하씨의 기도문을 읽은 직후에 이루어진다. 이 첫 만남에서 양생은 “그대 는 어떤 사람이기에 홀로 여기에 왔느냐” 묻고, 하씨는 “저도 역시 사람입니다. 무엇을 의아해하십니까. 아리따운 배필만 얻으면 되었지 어찌 성명을 물어 본말을 전도시킨단 말입니까”라고 답 한다. 양생이 하씨를 여귀(女鬼)로 보고 가부장제 사회의 통념에 따라 의아해하자, 하씨는 양생의 이러한 본말전도적 편견을 힐난 한 것이다. 양생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장가도 들지 못해서 만복사의 동쪽 에서 홀로 지내는 노총각이다. 달밤에 방 밖에 핀 배꽃 아래를 바장이면서 외로움을 호소하다가 부처에게 짝을 점지해 달라면 서 저포놀이를 하여 이긴 뒤, 부처 뒤에 숨어서 간절하게 짝을 바라던 존재이다. 이렇게 사회의 끝까지 밀려난 존재이면서도 하 씨의 소망을 가부장제적 통념으로 재단한 것이다. 


그러던 그가 만복사 판방으로 이동하여 하씨와 정을 나눈 뒤 그녀가 사람과 다르지 않음을 의아해한다. 또 시녀가 가져온 음식 을 먹고 대화를 나눈 뒤 하씨가 사람이 아니라고 짐작하면서도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아해한다. 이러한 의아 해함은 하씨와의 만남으로 인해 여귀에 대한 통념이 깨어지면서 나타나는 심리적 변화를 뜻한다. 하씨와의 동거 이후에는 의아 해함이 사라지는데, 이는 여귀에 대한 통념적 편견을 온전히 버 렸다는 걸 뜻한다. 그리고, 동거를 끝내면서 하씨가 자신이 귀신 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녀가 이러한 양생의 변화를 확신했다는 뜻이다. 


이어서 정씨 오씨 김씨 유씨 등 하씨의 이웃 처녀들과 나눈 시연 은 양생이 변화된 자신의 인식을 일반화하는 과정이다. 주고 받 은 시를 읽고 양생은 짝을 만나 정절을 지키고 싶은 하씨의 소망 이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다. 또 그들의 고결한 품 성과 뛰어난 재색을 확인하면서, 그녀들을 선녀처럼 바라본다. 이별을 앞두고 세세생생(世世生生)하여 하씨를 짝으로 맞고 싶 다고 노래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씨와 이별을 한 뒤 양생은 그녀의 부모를 만나 하씨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후 개녕동에 1) 임시로 매장된(殯) 여인 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대상을 앞두고 보련사에서 지 낸 천도재에서 하씨를 재회하여, 그녀로부터 자신이 어려서부 터 경전을 읽고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여성의 법도를 알았기 때 문에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스스로 양생과의 만남을 주선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역설적 처지 등에 대해 듣는다. 목 숨을 버려 순결을 지켰지만 그렇게 지켜낸 순결의 의미를 현실 세계에서 실현할 수 없는 여귀(女鬼) 하씨의 처지를 온전히 이해 한 후 하씨와 영별을 한 것이다. 


이렇게 <만복사저포기>의 구성을 여귀 하씨가 자신의 비극적 처지를 양생에게 이해시켜 나가는 과정, 그리고 세상의 통념을 깨고 양생이 여귀 하씨의 처지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으로 읽는 경우 작품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읽어 낼 수 있다. <만복사저포기> 의 결말 구조를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혼령이여, 태어날 때부터 따뜻하고 아리따웠으며, 자라서는 청 순했고, 용모는 서시(西施)보다 아름답고 시부(詩賦)는 숙진(淑 眞)보다 뛰어났어라. 규문을 벗어나지 않고 가정의 가르침을 따 랐기에 난리에 순결(璧)을 지켜 도적에게 목숨을 잃었도다. 쑥덤불에 홀로 지내면서 꽃과 달에 상심하고 봄바람에 애가 끊어지며 피토하는 두견이 울음에 슬퍼하고 가을 서리에 담장이 찢어지는 건 비단 부채의 인연이 없음을 탄식해서라.” 


하씨와 이별을 한 뒤 양생은 위와 같이 하씨의 순결을 예찬하면 서 그녀의 비극적 처지를 애통해한다. 


“땅은 어두워서 돌아갈 수 없고 하늘은 막막해서 바라볼 수가 없네. 들어와서는 황홀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나가서는 창망 하여 아무데도 갈 수 없네. 신령을 가린 휘장에 눈물을 삼키고 잔을 올리며 슬픔이 더하노라.” 


이별을 한스러워하면서 하씨의 영혼을 위로한다. 

결말 부분에 제시된 양생의 제문은 서두 부분에 설정된 하씨의 발원문에 상응하는 것이다. 제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괴이쩍게 바라보았던 하씨의 발원을 하씨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양생의 심리적 여행은 일단 끝난다. 정절을 지키 려고 죽은 딸을 바로 묻지 못하고 “편안함을 여는 마을”이라는 뜻의 개녕동(開寧洞)에 임시로 장사지냈던(殯) 하씨의 부모가 보 련사(寶蓮寺)에서 천도재를 지내고 대상을 치루어 장례 의식을 마치었듯이, 여귀(女鬼)로 보았던 하씨를 선녀(仙女)처럼 인식하 면서 그녀의 처지를 그녀보다 더 슬퍼하는 제문을 지어 위로함 으로써 양생의 애도 여행은 끝난 것이다.



(2021가을겨울_연정-2_사진4-1)개령암지 마애불 _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
(2021가을겨울_연정-2_사진4-2)개령암지 마애불 _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개령암지 마애불_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련사(寶蓮寺)가 어디에 위치한 절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신증동국여승람에는 북쪽 40리에 만행산(萬行山) 속칭 보현산(寶賢山)에 보현사(寶賢寺)가 있었다고 하고, 서쪽 40리에 보련산(寶蓮山)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곳을 지칭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만복사 와의 거리로 본다면 서쪽에 있는 보련산(寶蓮山)에 있었던 절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랑과 애도 너머의 문제 


그러나, 하씨가 겪은 비극은 이렇게 애도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대의 천발(薦拔)에 힘입어 저는 다른 나라에 남자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유명을 달리하고 있지만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대도 다시 깨끗한 업을 닦아서 함께 윤회의 업을 벗어 나시길 빕니다.”라고 한 하씨의 말은 이를 뜻한다. 하씨는 똑같은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될 남성으로 다른 나라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머지 여성들은 어찌할 것인가. 왜구의 침략은 조선 초기까지 끊이지 않았으며, 임진 정유재란에는 전 국토가 더욱 참혹하게 유린을 당했으며, 병자호란에서는 아예 국왕이 항복까 지 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일본 제국에게 나라를 빼앗겨 수많은 여인들이 성노예로 전락하는 참상을 겪기까지 했다. 


보호받지 못한 성적 순결은 강요될 수 없다. 성적 순결이 무엇이라고, 가부장제적 혈통의 순수성이 무엇이라고 그것을 위해 사람의 목숨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택한 조선 사회는 정절 이념과 충절 이념을 국가 통치의 두 축으로 설 정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의 통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정절이나 충절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비극적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양생에게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라고 한 하씨의 말은 이를 뜻한다. 앞에 소개한 고려사의 열녀 기사는 강화부에 살던 서리의 세 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편이 있는 여인에 관한 것이다. 강화 처녀 들의 경우는 세 자매가 함께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기록된 것 으로 추정된다.


이를 보면 성적 순결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을지라도 처녀의 경우에는 대부분 여느 ‘손각시’처럼 인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각시’는 결혼을 하지 못하고 죽은 것을 한스러이 여겨 이승을 떠돌면서 해를 가하는 처녀귀신을 뜻한다. ‘손각시’ 형상은 죽음 으로 인해 억압된 여성의 사랑에 대한 욕망이 공동체의 무의식 속으로 귀환하면서 가부장제적 이념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식민지 시대 『조선의 귀신』이라는 보고서를 낸 일본인 무라야마지 쥰(村山智順)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각시’를 가장 무서워한다고 소개한 바 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피 흘리는 처녀 귀신의 모습을 가장 무서워한다. 억압된 욕망은 그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강할수록 강렬한 형상으로 귀환한다. ‘손각시’의 무서운 모습은 여성의 사랑에 대한 욕망이 가부장제 이념에 의 해 얼마나 강하게 억압되었으며 얼마나 심하게 왜곡되었는지를 뜻하는 것이다. 


여느 ‘손각시’의 경우가 이럴진대, 성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죽음 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처녀들의 경우 그들이 느낀 억압의 강도 는 얼마나 컸을까. 또 그들이 실재했다면 자신들의 모습이 더러운 욕망을 지닌 여귀의 형상으로 왜곡되는 걸 보고 얼마나 억울했을 까. <만복사저포기>는 왜구의 폭력 앞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기 위 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처녀의 사랑에 대한 순결 한 욕망을 상상으로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들에게 가해진 정절 이념의 비인간적 폭력성을 드러낸 것이다.




각주 

1) 개녕동(開寧洞)이 실제 지명인지 허구적 지명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남원 디지털 문화 대전에는 구례 천은사에 소장하고 있는 호좌남원부지리산감로사사적(湖佐南原府智 異山甘露寺事蹟)이라는 글을 근거로 정령치 부근 마애불상군이 있는 곳을 개령암(開 嶺庵) 터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개령암은 개녕동과 한자가 다르다. 설혹 한자가 다르지만 같은 곳을 뜻하는 지명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개령암(開嶺庵) 터인지는 근거 가 분명하지 않다. 한편 용성지에는 견수산(犬首山)에 개량사(開良寺)라는 절이 있었다 고 한다. 이곳을 지칭하는 지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 지명이 아니라 이들 지명을 염두에 두면서 하씨의 비극적 처지를 위로하는 뜻에서 개녕동(開寧洞)이라는 지명을 만들어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