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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 겨울호-사랑과전쟁] 연정-조선 시대 보이는 성, 숨겨진 성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2-01-03 조회수 : 5088



조선 시대 보이는 성, 숨겨진 성



성리학을 중심 사상으로 유교문화를 꽃피운 조선은 정말 금욕(禁慾)을 절대선으로 믿고 실천했으며, 성적 (性的)으로 매우 억압된 사회였을까? 이 글에서는 일기 속에 나오는 성적 체험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 성의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글_ 박동욱(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교수)



성, 인간의 본성 


성(性)이란 매우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다. 성 문제에 있어 서 은폐나 왜곡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킨제이 보고 서가 나오면서 인간의 성생활은 비로소 공론화되었다. 킨제이 보고서의 원제는 <여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in the Human Female>으로, 인간의 성(性)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연구서이다. 연구 결과는 많은 논란을 가져왔고, 이로부터 인간 본성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장제스 전 대만 총통이 57년 동안 써 온 일기가 처음으 로 공개됐다. 장제스는 자신의 최대 약점이 호색이라고 고백했 고, 젊은 시절 일기에도 “오늘 저녁에는 밖에 나가 꽃을 따자.”는 말이 수시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대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 다. 남명 조식(曺植) 선생은 “여색에 있어서는 패한 장수이니 묻 지 말라.”며 이 문제가 자신 있게 큰소리칠 만큼 쉬운 일이 아님 을 언급한 바 있다. 또 퇴계(退溪) 선생을 주인공으로 한 성소화 (性笑話) 또한 많이 남아 있으니, 진위 여부를 떠나 그만큼 지식 인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대들 한 몸 되는 한바탕 놀이에서 暮雨朝雲劇..칠 분쯤의 능력도 감당키 어려우리. 七分本事勢難當한창 때 돌아보면 속에서 천불나니, .思盛壯心頭火그대 나이 40년 전에는 15살이었네. 四十年前十五郞_김려( 金.),「김요장이 첩을 얻어서 시를 써서 놀리고 조롱하다[ 金僚長卜姓 詩以戱嘲 ]」


친구인 김기서(金箕書, 1766〜1822)가 55살에 첩을 들일 때 써준 시로 모두 9수이다. 성적인 능력이 감퇴되는 초로의 나이에 첩 을 얻게 되었으니 감당이나 할 수 있겠느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성애(性愛)를 표출한 시로는 노긍(盧兢)의 「자야곡(子夜曲)」, 이안중(李安中)의 「월절변곡 십이수(月節變曲 十二首)」, 강박(姜樸) 등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한시(漢 詩)에서 이런 내용의 시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집은 말 그대로 저자 본인에 의해 한 번, 문집을 간행할 때 그 와 관련된 관계자들에 의해 또 한 번 선별이 되는 까닭에 고인에 게 누가 될 기록은 빠지기 마련이다. 반면 일기는 아주 개인적인 기록으로 날것 그대로를 담고 있어 내밀한 성 체험에 대한 기록 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일기도 자기 검열이 없을 수 없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번히 등장하는 성경험에 대한 기록은 그것이 별반 흠이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고 있다. 조선은 정말 금욕(禁慾)을 절대선으로 믿고 실천했으며, 성적(性 的)으로 매우 억압된 사회였을까? 이 글에서는 일기 속에 나오는 성적 체험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 성의식에 대해 살펴보고자한다.



(2021가을겨울_연정-3_사진1)봄날이여 영원하라, 신윤복 _ 국립중앙박물관

봄날이여 영원하라, 신윤복_국립중앙박물관


성욕, 자유와 억압 사이 


유교의 경전에서 여색(女色)에 관한 글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에는 “음식에 대한 식욕, 남녀 사이의 성욕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있는 곳이다[飮食男女, 人之大慾存焉]”라고 하여, 결국 인간이란 식욕(食慾)과 성욕(性慾)으로 대표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여타의 종교와 차별되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인간이 실천하기 어려운 계율이나 계명을 내세워 그것을 실천하도록 노력하게 만들고, 실천할 수 없더라도 죄의식 등으로 이러한 욕구를 억압하게 만든다.  

『논어 (論語)』,「계씨 (季氏)」에 “군자에게는 세 가지 삼가는 것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아서 삼가는 것이 여색에 있다. [孔子曰 : 君子有三戒 . 少之時 , 血氣未定 , 戒之在色.]” 라고 했다. 젊었을 때는 혈기가 왕성하여 지나치게 호색(好色) 하기 십상이니 조심하라는 말이다. 또, 『논어 (論語)』, 「자한(子罕)」에 “덕을 좋아함을 여색을 좋아함같이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 라고 했고, 『논어(論語)』, 「술이 (述而)」에 “다른 사람의 현명함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 한다[賢賢易色]” 라고 했다. 성욕은 인간의 어떤 욕망보다 강렬한 쾌락을 담고 있기에 특별히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지, 도덕적으로 금기시해야 할 행위라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통상 종교나 도덕에서 한결같이 성적 쾌락을 부정적으로 몰고 가며, 억압할 문제로 보는 것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가 된다. 사대부에게 유교 경전은 종교적 경전에 버금갈 만한 무게를 지녀서 행동의 준칙으로 삼았다. 유교 경전에서는 성욕을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하며 조심해야 할 문제로는 인식하였지만, 그렇다고 금욕이나 절제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성 문제만큼은 경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무릇 간범(姦犯)에 관한 형벌(刑罰)은 마땅히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집행해야 하는 것이나 사형수(死刑囚)가 임신(妊娠)하였으면 출산(出産)을 기다려서 행형(行刑)한다. ○ 사족인( 士族人)이 시마(緦麻) 이상의 친척 이나 시마(緦麻) 이상 친척의 처(妻)를 간음(姦淫)한 경 우에는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교수(絞首)하며 대공 (大功) 이상 친척의 양첩(良妾)을 간음한 경우에도 교수 (絞首)한다. ○ 사족(士族)인 부녀 (婦女)가 음욕(淫慾) 을 자행(恣行)하여 풍속(風俗)과 교화(敎化)를 더럽히 고 어지럽게 한 경우에는 간부(姦夫)와 함께 교수(絞首)한다. 그것이 궁박(窮迫)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 어 도로( 道路)에 떠돌아다니면서 거지(丐乞)가 되어 남 에게 몸을 의탁한 경우에는 상천(常賤)과 다를 바가 없 으므로 사족(士族)으로 논할 수가 없으니 간부(姦夫)와 함께 추문( 推問)하지 아니한다. ○ 사족(士族)의 처(妻) 와 그 딸을 강간(强姦)하는 경우에는 강간(强姦)의 기 수(旣遂)와 미수( 未遂)를 막론하고 주범(主犯)과 종범 (從犯) 모두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참수( 斬首)한다. 사족(士族)의 첩(妾)과 그 딸을 강간(强姦)한 경우에도 같은 형률( 刑律)이다. 1) 


그 다음으로 법률적 문제를 들 수 있다. 『속대전(續大典)』, 간범 (姦犯) 조항에 상세히 나온다. 간범(姦犯)은 취첩(娶妾) 또는 취첩 (娶妾) 이외 남녀(男女)의 성관계(性關係)를 말하는데 지금의 간통(姦通)과 강간사범(强姦事犯)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가까운 친인척 간에 간통을 하거나 사족(士族, 향촌사회에서 농 민을 지배하던 계층)의 여자를 강간하는 경우에는 혹형(酷刑)을 받게 된다. 처벌 수위가 높지만 처벌되기도 쉽지 않았다. 아주 극 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성 문제가 공론화되거나 처벌받지 않는다 는 말이다. 반면, 여자의 경우 남편을 제외한 혼외정사에 대해 아주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남성의 성에 대해 관대한 풍조는 상대적으로 여성의 성을 억압하면서 사회적인 안정성을 구현하려 했다. 조선시대에 성행한 열녀 담론이야말로 여성에 대한 정신적 할례였다. 이처럼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경전이나 법률에서 성에 대한 제재를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이 사회적 제재 로부터 자유롭고, 한 개인의 도덕성으로만 환원될 때에 성의 방 종은 이미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단죄되지 않은 성1 . 현지처 문제


유배객들은 유배지에 거의 예외 없이 현지처가 있었다. 김춘택과 석례, 박영효와 과수원댁, 김윤식과 의주녀, 김정희와 예안 이씨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학규는 유배지에서 첫째 부인을 잃고 김해의 하층 여자인 진주 강씨를 얻어 5년을 함께 살다가, 딸을 낳은 지 9일 만에 세상을 뜨자, 「윤이 엄마 제문(哭允母文)」 을 쓰기도 했다. 김려는 1797년 11월 부령에 유배를 왔다가 부령관아의 관비인 연희와 불같은 사랑을 하다가 3년 뒤 1801년 4월 진해로 이배(移配)를 당해 생이별을 하게 된다. 그는 그녀에 대 한 그리움을 담아 「사유악부(思 .樂府)」를 지었다. 


그녀들은 각종 허드렛일과 잠자리까지 도맡아 아내와 다름없었 지만 해배(解配)되었을 때 여자나 자신의 소생을 다시 원래의 거주지로 데려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아예 데려갈 시도조차 하지 않고 버려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미암일기(眉巖日記)』의 저자인 유희춘은 함경도 유배 시절에 구질덕(仇叱德)이라는 노비를 첩으로 들여 네 딸을 낳았다.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노비가 된 네 딸을 양인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다가 마침내 뜻을 이루었던 이야기가 미담처럼 전해 온다. 이와는 반대로 비극적으로 끝난 경우도 있다. 다산은 1801년에 유배 가서 1812년을 전후하여 홍임의 어미와 살림을 차린다. 1818년 해배(解配)되어 서울에 돌아올 때 홍임이 모녀도 데려왔지만, 다산의 본처가 그녀들을 달갑지 않게 여기자 다시 다산 초당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다산은 홍임 모 녀를 위해 「남당사(南塘詞)」 16수를 썼다. 


조선 시대 최장기 유배객이었던 조정철(趙貞喆)은 제주도에서 무려 27년을 적거(謫居)하였으며, 총 29년 동안 유배지를 떠돌았 다. 읍비(邑婢)의 신분이었던 홍윤애는 1779년 겨울부터 조정철의 적소를 드나들다 1781년 딸을 낳았다. 제주 목사는 홍윤애에게 모진 고문을 하여 조정철의 죄를 무고(誣告)하게 만들려 했지만, 그녀가 끝내 자백을 거부하자 곤장 70대를 때려 죽였다. 홍윤애는 고통 속에 죽어 가면서도 조정철을 지켜 냈고, 조정철은 유배 29년 만에 해배(解配)되었다. 그 후 4년이 지난 어느 날 제주목사가 되어 제주로 돌아와 홍윤애의 빗돌을 세워 주고, 자신 과 홍윤애 사이에서 태어난 31살 먹은 딸을 만난다. 늦게 만난 딸과의 재회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고, 구전으로 약간의 이 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2) 이렇게 의리를 지킨 경우도 있었지만 일 반적인 경우라고 볼 수는 없다.



단죄되지 않은 성 2. 첩의 문제


조선 시대 남성들이 첩을 들인 이유는 제각각이다. 양반 남 성들이 후사를 잇기 위해서, 집을 떠나 외지에서 장기 체류할 때 시중을 받기 위해서, 부인이 죽은 뒤 더 이상 후사를 둘 필요는 없고 오로지 시중 받을 목적으로, 여자를 만나던 중 생긴 자식 을 거두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로 혹은 부인의 권유로 첩을 들이 는 경우 등으로 요약된다. 3) 


오봉은 첩을 얻으려 했으나 항상 아내를 두려워하여 감 히 실행하지 못했다. 어느 날 몰래 양가( 良家)의 딸을 첩으로 얻으려 했더니 그 집에서 폐백을 지나치게 요구 했다. 그는 마련할 길이 없자 다만 한 장의 장지( 長紙) 에 “홍문박사 이호민( 弘文博士李好閔)”이라고 자기의 관직을 적어 함에 넣어 보냈다. 그 집에서 함을 열어 보 고 아주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 은 모두 우스워 포복절도하였다. 4) 


후사(後嗣)를 위해 불가피하게 첩을 두는 경우가 아니라, 호색 (好色)의 방편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축첩(蓄妾)은 “진사(進士) 만 해도 첩을 둔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엄 처시하(嚴妻侍下)에 있던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이 아내 몰 래 첩을 얻으려는 정황이 희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첩을 두는 것 이 아내의 무조건적인 협조나 승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신 천 강씨의 편지를 보면 이러한 상황을 알 수 있다. 김훈·신천 강 씨 부부 사이에 사달이 난 것은 김훈이 선현역 찰방이 되면서부 터다. 김훈이 첩을 얻겠다고 밝히자 아내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위에게도 말하지 마라. 너희만 보아라. 이렇게 앓다가 너무 힘들면 내 손으로 죽고자 한다. 암말 않고 소주를 독하게 해서 먹고 죽을까 생각도 한다.”  


혹 또 첩을 얻을 때 나이나 얼굴은 따질 것 없이 착실하 여 믿을 만한 사람을 얻는다면, 비록 나이가 아주 어리 지는 않더라도 혹은 20〜30세가 넘은 여자라도 무방하 니 첩(妾)도 할 겸 여종도 할 겸 먹고 입는 일에 이바지 시킬 따름이네. 한편 한양의 여염집 아낙 중에 가난한 자가 바느질과 음식 솜씨가 깔끔할 수 있다면, 비단 가 장에게만 음식을 댈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재물을 만 들 수도 있네. 노모( 老母)를 의지하다가 혼인이 늦어진 사람이 있다면 더욱 좋겠네. 눈앞의 하책( 下策)으로는 오로지 어린 여자아이를 구할 필요도 없다네. 하물며 내 나이가 지금 41세니, 늙다리 여자를 취해 생명을 해 치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5) 


황윤석(黃胤錫)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 나오는 이야기다. 상 처(喪妻)한 이후에 정식으로 혼인하기가 여의치 않은 경우에 들 이는 여자도 첩(妾)이라 했다.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식 모(食母) 역할이나 잠자리 상대를 원할 뿐이었다. 약간의 자조도 섞여 있기는 하지만 결국 눈높이를 낮춰 상대를 구할 요량을 한다. 이현환(李玄煥, 1713~1772)의 「애첩설(愛妾說)」에도 예순 살 에 가까워서 중매쟁이의 말과는 딴판인 박색(薄色)의 여자를 첩 으로 얻게 되자 모모(食母)와 무염(無鹽)과 같은 천하의 추녀보 다는 낫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정을 붙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나온다. 


첩을 얻는 것은 기본적인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었다. 우선 딸을 줄 집에 10〜20냥을 주어야 하고, 혹 귀첩(貴妾) 을 들이려면 30여 냥과 보내야 할 의복을 대략 준비해야만 했다. 또 첩과 동거할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40냥 정도의 집값이 필요하고, 덧붙여 1년에 쌀 10여 섬도 갖추어야 살림이 꾸려진다. 6) 유득공(柳得共)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초정소실혼서(楚 亭小室婚書)’에는 소실을 얻는 정황이 상세히 나온다. 1792년 박 제가의 부인 덕수 이씨(德壽李氏)가 세상을 떠난다. 그녀와의 사 이에는 아들과 딸 각각 셋을 두었다. 상처한 후 안의현에 박지원 을 찾아가자 박제가에게 13살 먹은 기생을 천침(薦枕)하게 하고, 첩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7) 그 후 서울에 사는 장씨(張氏)를 첩으로 얻게 된다. 


첩을 얻는 경우의 수는 매우 복잡하다. 상처했지만 재취를 들이 지 않고 첩을 두거나, 아내가 살아 있지만 첩을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외직에 나가거나 유배에 처했을 경우 상황에 따라 불가 피하게 첩을 두기도 했다.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다시 돌 려보냈다. 철저히 필요에 따라 취했다가 용도 폐기한 것이다. 첩 의 신분에 따라 기녀, 천민, 양민, 서녀까지 실로 다양하다. 첩은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없이 노동과 정욕만을 채우기 위한 존재 로, 실질적으로 아내의 역할을 하면서도 아내로 대접받지는 못 했다. 첩은 남성은 물론이거니와 여성에게도 타자였다. 지금의 세컨드라는 말이 갖는 불온한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단죄되지 않은 성 3. 관기의 문제 


식사를 한 뒤에 강가에 나아가서 국령(國令,李紀淵)이 곧 떠나려는 것을 보았는데 피리와 북, 돛폭과 돛대 등 위엄 있는 모습이 매우 성대하였다. 국령은 유람선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고, 방기(房妓)인 경란(鏡鸞)이 옆에서 섭섭해 하여 이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국령이 손을 내저으며 들어가라고 했지만 경란은 말하지도 일어나지 도 못하고 다만 눈물을 비 오듯 흘릴 따름이었다. 배가 오래도록 출발할 수가 없었고, 국령 역시 정을 끊고 뿌 리쳐서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이에 명령을 내려 (기생을) 함께 싣고 배를 출발시켰으니 한바탕 웃음거리가 될 만 하였다. 8) 


박래겸(朴來謙, 1780~1842)의 『서수일기(西繡日記)』 중 한 대목 이다. 『서수일기』는 1822년 3월 16일부터 동년 7월 28일까지 장 장 126일 동안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활약했던 일을 담고 있다. 위의 글은 이기연(李紀淵, 1783〜?)이 기생과 헤어지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서로 정이 들어 끝내 헤어지지 못하고 기생을 배에 태우고 함께 떠나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럽다. 『서수일기』에는 조선 3대 명기(名妓)였던 부용(芙蓉), 즉 김운초 (金雲楚, 1800?〜1857?)를 만난 일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녀와의 만남이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몇 차례에 걸쳐 언급하고 있 다. 그 외에도 기생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자신 또한 기생과 두 차 례 동침한 일을 기록하기도 했다. 『북막일기』에는 옥(玉)이란 이 름의 기녀와 헤어짐을 안타까워하거나 9), 당숙과 옛날 연분이 있 던 회령(會寧)의 퇴기인 해옥(海玉)과 만나는 사연이 등장한다. 10) 조선 시대에는 관기와의 로맨스가 없었던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이이(李珥)와 유지(柳枝), 유희경(劉希慶)과 이매창(李梅窓), 최경 창(崔慶昌)과 홍랑(洪娘), 김이양(金履陽)과 김부용(金芙蓉), 이황 과 두향(杜香) 등의 이야기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기생은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사랑을 해야 만 했다. 그들에겐 늘 사랑하면서도 늘 버림받아야 하는 유기(有 期)의 사랑만이 허락되었다. 또, 선택하는 것이 아닌 선택되어지 는 수동의 삶만이 강요된 셈이다. 외직(外職)에 나갔던 관리에게 는 담당 방기(房妓)가 있었다. 그녀들과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수년 동안 인연을 맺으니 남녀 간에 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관 기는 이동의 자유가 없었지만 여러 가지 편법으로 관기를 유출하 여 솔축(率蓄, 예전에 여자 종을 첩으로 맞아 동거하던 일)을 하 였고, 관에서는 집요하게 쇄환(刷還)을 요구했다. 직접 데려가지 못하는 경우 후임 지방관에게 자신을 담당했던 관기의 구휼을 부탁하는 일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기생과의 관계는 관리의 임기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종료된다. 자신의 원래 생활공간으로 기생을 데려가는 것은 여러모로 무 리수가 따랐다. 둘 사이에 아이가 있을 경우 아이만 거두는 일은 간혹 있었지만, 아이까지 모른 척하는 일도 빈번했다.11) 


또 30리를 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향청(鄕廳) 곡산지점(谷山支店)에 숙사를 정하였다. 주수 최홍덕(崔弘悳)이 보러 나오고, 곡산 원 서만순(徐萬淳)이 정사(正使) 가 여기 오는 것을 영접하기 위하여 나왔으며, 본부(本府) 사인(士人) 임계영(林啓榮)과 사문(斯文) 신영태(愼永泰)가 보러 왔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방기(房妓)가 있다. 양서(兩西) 기생들이, 북경(北京)가는 사람에게 천침(薦枕)하는 것을 별부(別付)라 칭하는데, 미친 듯이 분주하여, 심지어 하룻밤 동안에 3, 4군데를 편력(遍歷) 하는 자까지 있다고 한다.12) 


박래겸은 암행어사로 공무를 집행하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기생과 동침을 했다. 연행사(燕行使)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생들이 연경(燕京)에 가는 사신 행렬과 동침하는 것을 별부(別付)라고 했는데, 기생들은 하룻밤에 3~4명의 상대를 감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연행 기간 동안 오래도록 금욕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그것을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상사와 같은 고급 관료도 예외는 아니어서 “상사에게는 고을마다 방기(房 妓)가 있었는데 만부에서는 유이(有二)였고 선천에는 태진(太眞)이라 하였다.”13)라는 기록이 있다.


“젓대소리 늦바람으로 들을 수 없고, 백구만 물결 좇아 날아든다. 一笛晩風聽不得, 白鷗飛下浪花前”


지방에 파견된 관리와 관기(官妓)와의 인연은 『노상추일기(盧尙 樞日記)』에 상세히 나온다. 마흔두살에 열여섯 살 갑산부 기생 석벽(惜璧)을 맞아 솔축(率蓄)할 계획을 세우고 무진 공을 들여서 결국 그녀를 얻었다. 첩으로 들인 지 1년 반 만에 딸아이를 낳고, 그 이듬해 훈련주부(訓鍊主簿)로 자리를 옮겨 한양으로 돌 아오게 되었다. 석벽과는 어떻게 헤어졌는지, 또 딸아이를 데려 왔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된 내용이 없고, 그 후 여섯 살 된 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마흔세살에는 스물넷의 유애(裕 愛)라는 시기(侍妓)를 만나 일주일 넘게 밤마다 시중을 받았고, 마흔여덟살에는 구성부(龜城府) 소속 옥매(玉梅)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까지 있었던 처지였지만 두 사람의관계는 1년 이상 유 지되었다. 14)



관대함의 반작용


현재에도 성 문제, 성희롱, 성추행, 성도덕 등 성(性)과 관련 된 무수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되고 있다. 노소와 지위를 막 론하고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의 몸은 성욕 (性慾)에 나약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만 한다. 성 문제는 욕구 자체가 죄악이 아니라 욕구의 발현이 문제인 셈이다. 현대에는 자신의 배우자를 제외한 대상과의 성 행위는 도덕적이거나 법률적으로 모두 단죄된다. 조선 시대는 일 부일처제가 아닌 일부다처제였다. 적어도 성에 관한 일이 법률적 으로는 문제될 일이 없었다는 말이다. 


서얼, 열녀, 축첩, 처첩 간의 갈등까지 많은 문제들이 성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인 성 그 자체에 대해서 당시 에 주목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남성의 성욕에 대한 관대함은 상 대적으로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틀어진다. 여성을 무 성(無性)의 존재로 만들어 놓았으며, 열녀(烈女)의 삶을 강제했 다. 엄격한 부도(婦道)를 강조하며 가부장제를 공고히 했고, 현모 양처(賢母良妻)라는 이름으로 자발적인 사회적 활동을 봉쇄하 고 가족 내에 얽매어 두었다. 자신의 성욕으로 파생한 결과물인 자식마저도 서얼이란 이름의 딱지를 붙여서 사회 주류로 편입되 는 것을 막아, 자신들만의 견고한 성을 구축해 놓았다. 


이러한 데에는 구조적인 문제도 한몫을 했다. 장기적이고 연례 적인 외직(外職)과 유배로 인해 실제 부부가 동거한 기간이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성에 대해 상호 대등한 책임과 의무를 갖지 않 고서 여성 일반의 인내만을 강요한 것은 틀림없다. 계색(戒色)과 관련된 글이 적지 않으나 수신(修身), 위생과 건강에 국한될 뿐 이었지, 사회 일반과 관련된 논의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성 문제는 지금껏 우리가 믿고 싶고 보고 싶은 조선이 아니라, 조 선의 민낯을 여실하게 보여 준다. 낯설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 이다. 남성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 를 일으켰는지 주목해야 한다.




각주 

1) 《續》 凡姦犯律應不待時者, 懷孕則待産行刑

○ 士族姦.麻以上親及.麻以上親妻者, 不待時絞, 姦大功以上親良妾者絞. 

○士族婦女, 恣行淫慾,瀆亂風敎者,.姦夫絞其窮不自存,流離道路, .乞托身者,與常賤無異, 不可以士族論.姦夫勿推.

○ 士族妻女劫奪者, 勿論姦未成, 首·從皆不待時斬 士族妾女劫奪者, 同律. 

2) 조목사는 곽지(郭支) 마을에 농토(農土)를 4차에 걸쳐 총 7,000평(1차 2,500평, 2차 1,600평, 3차 1,700평, 4차 1,200평)을 사 주어 딸네 박씨 가문(朴氏家門)의 생계(生 計)를 어렵지 않게 했다. 조원환(1994), 882면 참조. 

3) 김경미(2012), 『家와 여성』, 여이연. 93면 참조. 

4)『삼명시화』 

: 蓋李欲卜妾而常畏內不敢動. 一日潛卜于良家, 其家苛索綵幣, 李無路備之, 只以一片長紙, 書其銜曰: “弘文博士李好閔”, 納諸函中而送之. 其家開見大懊. 聞者絶倒. 

5) 1769년 8월 23일: 或又卜姓, 不論年姿, 但得着實可信者, 雖非最少, 或逾二三十者亦不 妨, 兼妾兼婢, .供衣食之役而已. 且京中閭閻婦女之貧者, 苟於針線飮食, 能精能潔, 則不獨可以供.家長, 亦可因此生財. 如有依倚老母, 晩乃成婚者尤妙. 至於目前下計, 則不必專求童女,.我年今四十一, 豈若取其老成者, 不至傷生之爲愈乎.

6) 황윤석이 첩을 들이는 이야기는 다음의 논문에 상세히 나와 있다. 유영옥(2008), 「鄕 儒 黃胤錫의 泮村 寄食과 卜妾」, 『동양한문학연구』 제27집, 동양한문학회. 70면 참조. 

7)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가 된다. 안대회, 「楚亭 朴齊家의 인간면 모와 일상 : 小室을 맞는 詩文을 중심으로」, 『한국한문학연구』 제36집, 한국한문학회, 2005.

8)初九日, 食後出江頭, 見國令方發行, .鼓帆巾+嗇, 威儀甚盛, 國令端坐畵舫上, 而房妓鏡鸞者, 在傍戀戀不能別. 國令揮之使入, 而鸞猶不言不起, 但涕淚如雨而已. 船久不得發, 國令亦不能斷情揮去. 乃令同載發船, 可發一笑也.

9) 박래겸, 『북막일기』 3월 6일. 初六日, 風止. 早發, 玉妓昨冬, 來留於行營, 有若相依者, 然 今當.別, 涕泣不忍辭. 余亦爲之.涕.

10) 박래겸, 『북막일기』 10월 5일. 會寧退妓海玉, 出來相見, 卽兵使從叔, 所眄者也, 率置 京第, 下世後, 還歸. 聞余之來, 中路來迎, 涕泣話古, 不覺愴憐也. 是日, 行六十里.

11) 박래겸의 『심사일기(瀋 .日記)』 7월 26일 기록에도 이러한 경우가 나온다. (……) 은 산(殷山)의 천한 소생(所生)이 이미 5살이 되었다. 여기에 와서야 처음으로 만나보았 으니, 도리어 불쌍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돌아갈 때 데려가기로 약조하고 그 어 미가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 (殷山賤産已五歲矣. 到此始相見. 還不勝可憐之心 也. 約以歸時率去, 還送其母處.)

12) 김경선(金景善), 『연원직지』, 1832년 10월 23일. 

13) 최덕중, 『연행록』, 1713년 3월 18일. 

14) 노상추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서가 도움이 된다. 문숙자,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 너머북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