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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 겨울호-사랑과전쟁] 혼인-혼인 문화의 변화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2-01-03 조회수 : 3882



혼인 문화의 변화


글_ 서정화(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책임연구원)



(2021가을겨울_혼인-1_사진1)신행길, 『단원 풍속도첩』 _ 국립중앙박물관

신행길, 『단원 풍속도첩』_국립중앙박물관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부 집으로 향하는 신랑 행렬을 그리고 있다.



혼인과 혼례 


혼인(婚姻)과 혼례(婚禮), 간혹 그것들을 구분하지 않기도 한다. 자원(字源)적으로 혼인은 ‘해질녘의 잠자리’라는 뜻이지만, 혼례는 유교의 여러 의례 중 혼인 의례를 표현하는 특별명사이다. 혼인은 남녀 간의 언약을 통한 동침이 주가 되는, 신랑·신부 가 완전한 주인공이 되는 통과의례이고, 혼례는 혼인을 포함해 ‘유학 사상을 담은’ 여러 절차가 집합된 의례이다. 그렇다고 혼례 에서 신랑·신부의 상호 애정이 중시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사랑 안에, 가문의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의 묶음으로 얽히는 다층적 관계가 형성되는 구조와, 그 속에서의 혼인 당사자가 맡게 되는 유학적 이상을 실현해 가는 각자의 소명이 뒤따른다. 따라서 혼례는 남녀상열지사의 열매가 아니라 가문이 추구하는 대의적인 일의 새로운 씨앗이 시작됨을 알리는 의식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혼례에서는 부부의 화목과 그 후 손의 번창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는다. 


고대인들에게는 유교의 이 혼례가 여성에게 상당히 젠틀한 의 식이라 생각되었던 듯하다. 특히 묵자(墨子)는 유학을 비판하는 「비유(非儒)」편을 통해, 혼례에서 여성을 상전이나 부모 대하듯이 지나치게 우대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혼례의 실제적인 처음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려 초부터 국가 통치에서 유교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여러 기록 속에서 볼 수 있듯, 이미 그 이전부터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온 듯하다. 

고려 후기에는 주자의 신유학 사상인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관례·혼례·상례·제례[冠婚喪祭]를 시대에 맞게 변모시킨 유교의례인 『주자가례』를 사대부들이 중심이 되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운동이 펼쳐진다. 물론 그전에도 유학의 의례 전문서들이 존재했지만, 의례 주체에 있어서 『주자가례』는 왕이나 귀족이 아닌 사대부가 주축이라는 점이 그 특징이다.



(2021가을겨울_혼인-1_사진2)모당 홍이상공의 일생 중 혼인식, 김홍도_국립중앙박물관

모당 홍이상공의 일생 중 혼인식, 김홍도_국립중앙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1_사진3-1)삼국지_국립중앙도서관2

삼국지_국립중앙도서관 고구려에 존재했던 서류부가혼의 실증적 사료라 할 수 있다.

(2021가을겨울_혼인-1_사진3-2)삼국지_국립중앙도서관1

“혼담이 정해졌으면 신부 측 에서 본채 뒤에 서옥(壻屋)이라는 작은 별채를 짓는다. 신랑이 날 저물어 신부집에 와서 문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무릎 꿇어 절하며 두세 번 딸과 함께 잘 수 있기를 애원하 면, 신부의 부모가 그 청을 들어주어서 작은 별채에서 동침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그때 신 랑은 돈과 폐백을 가지런히 놓아둔다. 자식을 낳아서 장성하게 되면 부인과 본가로 돌아 간다.



고대 국가의 혼속


고구려 초기에는 형이 사망하면 형수와 혼인하는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가 존재했다. 그것은 남자 가문에 권세와 재산이 많은 경우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인데, 여성의 재혼이 어렵지 않던 시대에 형의 사후 그 재산이나 지위가 타 가문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형수와의 혼인을 통해 차단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인 혼속은 단연 서류부가혼(壻 留婦家婚), 또는 그 비슷한 말로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다. 이는 사위가 부인의 가문에서 머물러 지내거나 귀의해 들어가는 결혼 생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장가간다’는 말에서도 남아있다. 고구려에 존재했던 서류부가혼의 실증적 사료로 『삼국지』 「위 지-동이전」의 서옥제 기록을 들 수 있다. “혼담이 정해졌으면 신부측에서 본채 뒤에 서옥(壻屋)이라는 작은 별채를 짓는다. 신랑이 날 저물어 신부 집에 와서 문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무릎 꿇어 절하며 두세 번 딸과 함께 잘 수 있기를 애원하면, 신부의 부모가 그 청을 들어주어서 작은 별채에서 동침할 수 있도록 해 주는데, 그때 신랑은 돈과 폐백을 가지런히 놓아둔다. 자식을 낳아서 장성하게 되면 부인과 본가로 돌아간다.” 이 기록은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 233~297)가 살았던 3세기에 작성된 것이므로 고구려(B.C.1C~668) 역사 약 700년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채록된 것이다. 


한편,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조에는 하백의 딸 유화가 ‘결혼중매인[매, 媒]’ 없이 혼인 과정만 거쳐 주몽을 잉태하게 된 일 때문에 부모로부터 꾸지람을 받은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이는 혼례 절차 중 하나인 ‘중매에 의한 초기 의논 과정’이 표현된 것이다. 그것을 가볍게 무시한 유화의 태도로 보아, 그 당시 유교 의례는 그들 내에서 아직 생소하게 느껴지는 유입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혼인 제도에 관해서는 『수서』「동이전」(636년)의 <백제> 조에 “혼인하여 아내를 취하는 의례가 중화와 비슷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혼인에서 혼례로써 하였다는 말이 된다. 다만 ‘비슷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백제 고유의 혼속이 다소 융합된 형식이었을 듯하다. 


『삼국사기』 진평왕 대(579~632) 기록에서 혼례 절차 중 하나인 ‘청기(請期)’를 논한 사례를 볼 수 있다. 그 개략은 이렇다. ‘설씨 녀(薛氏女)를 사랑하는 가실(嘉實)이라는 젊은이가 그녀의 연로 하신 부친을 위해 수년간의 군역을 대신하기로 했다. 떠나기 전 가실이 바로 초야를 보낼 혼인날을 결정하자는 청기를 하지만 차후로 미루어진다. 설씨녀는 생사를 알 수 없는 6년의 긴 세월 을 기다린 끝에 살아 돌아온 가실과 혼례를 올린다.’ 


열녀 정신을 중시했던 조선 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이야기를 여성의 열부(烈婦: 烈女) 사례로 분류하였지만, 사랑하는 여자와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 자청해서 사지로 떠난 일은, 사실 상 남성의 열부(烈夫: 烈壻) 사례에 더 가깝다. 한편, 『삼국사기』에서 설씨녀를 민가의 여식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왕족에서조차 성씨 개념이 강하지 않았던 그 당시 신라 에 귀족으로서 하사받은 성[사성, 賜姓]이었던 ‘설(薛)’씨는 물론, ‘혼인은 사람의 대륜이다’, ‘길일을 점쳐 혼례를 이룬다’, ‘천하의 좋은 말 한 필을 소유하고 있다’라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나타 나는 모습으로 판단하건대 일반 하층민이라 보기는 어렵다.


7세기 중반에 작성된 이연수(李延壽, ?~?)의 『북사』(659년)「신라 열전」 편에는 신라에서 이행되었다는 ‘혼가례(婚嫁禮)’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말을 풀어 말하면 ‘혼인하여 시집가는 의례’가 되며 혼례와 같은 표현이다. 다만 ‘가(嫁)’ 자를 추가한 것 은, ‘남자의 장가감’이 아닌, 유학적 혼례 제도에 충실한 ‘여자의 시집감’을 강조한 표현이다. 같은 기록 속에 ‘신라의 문자가 중국과 똑같다’, ‘왕과 부모 처자 식의 상사에 상복을 입고 1년 동안 거상한다’와 같은 표현도 함 께 서술되고 있다. 이로 보아 시기적으로는 신라 초기의 문화를 서술한 것이라 볼 수 없고, 신라가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기 시작한 이후의 상류층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상류층이 라고 판단한 이유는, 혼가례와 같은 ‘예(禮)’라는 표현을 썼기 때 문인데, 이 시기의 ‘예’는 중국에서도 일반 서민은 접하지 못하 는, 관료계층 이상에서만 영위하던 귀족적인 문화제도였다. 신라 왕족에서 유독 심하게 나타나는 근친혼을 고려한다면, 신라 역시 서류부가혼이 그 초기부터 보편 혼속 중 하나였을 것이 라 생각된다.



고려 시대 혼인과 혼례 


고려 시대에도 남귀여가혼과 근친혼은 계속 이어졌다. 고려는 11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동성혼과 근친혼을 정책적으로 금지해 왔지만 오랜 기간의 노력에도 위로부터 그것이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다.


고려 시대 사람들의 결혼 후 거주 방식은 『조선왕조실록』 태종 15년(1415) 기록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여성 쪽의 집에 서 손주가 자라는 것까지 보면서 거의 평생을 사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근친혼 습속이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무엇보다 가정 내 여성과 남성의 지위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재산상속이 남녀 균분 방식의 관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와 같은 남귀여가혼이 장인댁의 경제력이 전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재산이 없으면 없는대로 처가에서 사위의 노동력으로 살아가는 솔서혼(率壻婚) 형태도 존재했다. 


한편, 송나라 서긍(徐兢, 1091~1153)은 1123년 사절로 고려에 왔 다가 이 땅에서 견문한 여러 실정을 그림과 설명 글을 섞어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책으로 엮어 내었다. (그림은 망실된 상태) 거기에서 혼인 풍속과 관련하여 다음의 사항을 알려 준다. ‘고관대작과 관료 집안에서는 결혼할 때에 빙문례(聘問禮)와 폐백례 등 혼례 의절들을 개략적으로 쓴다.’, ‘부유한 가정에서는 서너 명의 아내를 들이기도 한다.’, ‘민서(民庶:民은 하층민, 庶는 벼슬 없는 사람)들은 남녀가 혼인함에 술과 쌀만 가지고 통호(通好)한다.’, ‘합치기도 가볍게 하지만 헤어짐도 쉽게 한다.’, ‘결혼 생활에서 조금이라도 서로 맞지 않으면 바로바로 이혼한다.’


이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이혼에 대한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더러는 스스로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한 인간으로서 가장 취약한 주기인 육아 시기가 따라오는 여성 입장에서, 이혼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 재산도 없이 혹여 젊음도 사라진 상태에서 기처(棄妻)를 당해도 사회적으로 구제받을 길이 많지 않았다. 당시 이혼이 자유로웠음은 『고려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반 서민[민, 民] 중에 시어머니에게 정중히 하지 않았다[불근, 不謹]는 이유로 아내를 버려서 이혼한 자가 있었다. 조직적·전국 적으로 전 국민에게 효행 캠페인을 펼쳤던 조정에서는 그의 효행을 칭송하며 본인이 원하는 포상을 내려 주었다. 그렇게 버려진 [기, 棄] 아내의 뒷이야기는 거론이 전혀 없다. 포상 전에, 유학의 삼불거(三不去: 아내를 버릴 수 없는 세 가지 경우)에 위배되지는 않았을지 혹여 어떠한 악용이 있었을지의 여부를 조사했다는 언급도 없다.


이혼의 자유는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이혼에 제약이 있는 것이 인위성이 가해진 것이다. 혼인에서의 강력한 인위성은 혼례이다. 개인과 개인의 애정에 대한 약속에 해당하는 혼인만을 치른 경우와, 가문과 가문의 약속에 해당함은 차치하 고서라도 유학적 부부 철학의 배경하에 맺는 신랑 신부의 약속 이 부가되는 혼례를 치른 경우는, 상호 위상이 같을 수 없다. 이 처럼 혼례를 통해 결혼으로 묶인 결속은 강력한데, 고려 시대에는 그 혼례가 대중적으로 이루어지던 시대가 아니었으며, 당시에도 예는 사대부계층 이상의 특권 계층에서만 볼 수 있는 상류 문화였다. 


『고려사』 「예지(禮志)」에 소략하나마 혼례를 통한 공주의 결혼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유학의 혼례 절차에서 전혀 익숙 하지 않은 장면이 보인다. 바로 신랑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이다. 세대를 넘겨주고 여식을 출가시키는 양가의 정서적 입장 때문에, 원래 정통 혼례 절차에서는 가무 행사가 없다. 그와 같은 신랑의 흥겨운 무도 행사는 우리나라 고유 풍속이 혼례 절차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첨가되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사대부 명문가의 혼례는 그들의 문집 속에 비교적 잘 나타난다.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과 이색(1328~1396)의 『목은시고』에서는 인륜의 가장 근본인 근친의 가족 구성이 새롭게 변하고 만들어지는 인륜적 측면에서 혼례의 중요성을 역설함은 물론이거니와, 열정적이면서도 절제된 유교식의 남녀상열을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려 넣고 있다. 


이 당시는 『주자가례』의 혼례가 일반적으로 시행되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른바 고례[古禮: 선진 ·양한 시대의 예. 예경(禮 經)]에 기반한 형식이 주였다. 혼례에 내함된 사상에서도 교조적인 모습 역시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편, 고려 말이 되면 원나라의 과도한 공녀 요구로 혼인 풍속에 커다란 혼란이 발생한다. 그 요구는 서민은 물론 귀족과 왕족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린 나이에 미리 혼인시키는 조혼(早婚) 풍속이 성행하게 되었고, 다처(多妻) 사례까지도 빈번하게 생겨났다. 이미 결혼한 남자와 중혼(重婚)도 마다할 수 없는 여성의 지위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의 이념에서 남녀 모두 중복된 혼례 관계는 허용되지 않는데, 여기에 배치되는 다처와 중혼은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철저히 배척된다.



조선 시대 혼례의 대중화


조선은 건국 초부터 성리학을 이념으로 내세워 모든 관혼상 제 의례[예,禮]를 주자의 유가 식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매진하였다. 비록 기존 습속의 잔재로 조선 초 세종 때에는 명문가 자손의 사촌 사이에서 근친상간이 발생하는 등 다소의 부침이 있기 는 했으나,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제재 노력으로 동성혼은 물론 근친혼의 터부는 결국 이른 시기부터 우리의 혼인 문화로 정착 하게 된다.


이성(異姓) 간의 근친혼에 대해서는 유학 사상에서 따로 규제하 지는 않지만, 오랜 역사 지속된 남귀여가 혼속으로 인해 외가와의 근친혼 금지는 유학 사상과 별개로 정착시킨, 조선 유학에서의 특수성이다. 이러한 친가·외가를 구분하지 않는 근친혼 금기는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 ‘중화도 따라올 수 없는 우리나라의 미풍’이라고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2021가을겨울_혼인-1_사진4)주자가례 _ 신부(딸)가 아버지께 초례를 받는 장면

주자가례 _ 신부(딸)가 아버지께 초례를 받는 장면 초례는 어른이 가르침의 말씀을 해주면서 술을 따라 주는 의례로 신부는 아버지께 받는 초례에서,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노력하며 시부모의 명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주자가례』 「혼례」편에서 혼례에서의 사상과 철학을 직접적으 로 보여 주는 절차가 있는데, 바로 초례(醮禮)이다. 초례는 어른 이 가르침의 말씀을 해 주면서 술을 따라 주는 의례로, 주고받음 없는 일방의 의례이다.[관례(冠禮) 절차에도 초례가 있음] 혼인 당일 신랑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을 따라 주며 다음의 말씀을 한다. “가서 너의 반려자를 맞이해 와서 내가 해오던 가문의 일[종사, 宗事]을 계승하여라. 공경함으로 격려하여 힘쓰게 하고 솔선수범으로 앞장서라.” 이는 신부 쪽도 마찬가지인데, 신부 역 시 아버지께 받는 초례에서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노력하며 시부모의 명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이를 보면 유학의 혼례가 바로 계승의 철학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계승 방향이 신랑 쪽의 가문으로 고정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모습은, 전쟁을 통해 나라를 창업하고 그 창업 을 돕는 과정에서 명문가가 생겨났던, 그러한 시대와 함께 탄생 하고 성장한 유학의 특성이라면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주자가례』 혼례로 일반화·대중화를 시도하면서 고유한 풍속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초례가 끝나면 곧바로 신랑이 신부를 직접 맞이하러 가서 자기 집으로 정중히 모셔(!)와 혼인 의식으 로 이어가는 친영(親迎) 절차가 이어지는데, 고유의 남귀여가 혼속과 상반되는 친영 의례만큼은 쉽사리 정착되지 못하였다. 



(2021가을겨울_혼인-1_사진5)혼인 60주년 기념 잔치 _ 국립중앙박물관

혼인 60주년 기념 잔치 _ 국립중앙박물관 혼인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 잔치를 보여 주고 있다.



신랑이 신부를 친히 맞이하러 가서는(*혼례의 절차) 처가에서 혼인 의식을 치르고(*풍속) 오랫동안 거주해 살기까지 함은(*풍속),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남성 위주의 종법 이념과 가부장제를 조선 사회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의지에 상당한 걸림돌이었다. 결국, 혼인 당일 신부 집에서 하루만 있다가 다음날 시부모에게 가서 현구고(見舅姑), 예부(醴婦), 향부(饗婦) 등 나머지 절차를 계속 진행하는, ‘절반의 친영[반친영, 半親迎]’이라는 절충적인 모습이 제시되지만, 이 반친영도 빠르게 보편화 되지는 못했다. 혼례에서 친영을 제외한 나머지는 조선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고, 서양식 결혼으로 바뀌기 전까지 유학의 혼례는 우리의 대중적인 혼속으로 정착되었다.



(2021가을겨울_혼인-1_사진6)시집가고, 기산 김준근 _ 국립민속박물관

시집가고, 기산 김준근_국립민속박물관 초례를 마친 신부가 사인교를 타고 시집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2021가을겨울_혼인-1_사진7)장가가고, 기산 김준근 _ 국립민속박물관

장가가고, 기산 김준근_국립민속박물관 신랑이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부 집으로 향하고 있다.



상례·제례와는 다르게 혼례에는 다소의 유연성이 허용되었지만, 여성의 재가만큼은 용인되기 어려웠다. 혼례를 해도 소속 가문 이 변함없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재가할 때마다 가문이 바뀌게 된다. 이것은 배우자가 사망했더라도 여성에게만큼은 혼례 횟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인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요구되던 시대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혼인 문화, 시대 사상의 반영


혼인과 혼례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혼인이 두 남녀에 초점을 둔 것이라면, 혼례는 두 가문의 결합은 물론 유학 사상에 입각한 부부의 철학을 담는다. 고구려 초기에 있었던 형사취수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경한데, 그것은 우리의 혼인 관습에서 배제된 지 상당히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남귀여 가혼은 조선 중기까지도 우리의 혼속으로 강하게 남아 있었다.


백제의 혼인 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는 특히나 부족한데, 혼인하여 아내를 취하는 의례가 중화와 비슷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삼국 중에서 유교 문화 수용이 가장 늦었던 신라는 그 수용 속도는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왕조차도 공식적으로 성씨를 사용 하기 시작한 것이 6세기 중반이었던 신라에서, 7세기 중반에 작 성된 기록에는 유학의 혼가례 표현이 등장하고 상례가 이행되었 음도 나타난다. 


오랜 기간 존속해 왔던 혼속인 동성혼과 근친혼에 대한 금지정 책은 통치에서 유교를 숭상했던 고려왕조가 지속적으로 추진했 던 것이지만,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였다. 고려 시대를 묘사한 기록을 보면 통상적으로 이혼과 재혼에 대 한 사회적인 걸림돌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다수가 누렸던(?) 이 혼의 자유는 사실상 이혼의 금지보다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것 은 그만큼 이혼 조건에 대해 상당히 까다로웠던 유학 사상이 아 직은 보편의 관념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500년 조선왕조가 일어서고부터 성리학적 관혼상제를 담은 『주 자가례』는 점차 국가적 차원으로 권장되어 갔다. 조선 중기 수가 많아진 유학자들이 낙향하여 세상을 몽매(蒙昧)로부터 바로잡 겠다는 유학적 소명의식으로 향촌 교화에 힘씀으로써, 일반 민 중들도 유교 사상이 담긴 유교 의례를 본인들의 삶에 밀착시키 는 움직임을 만들어 갔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결국, 조선 말에 조선은 실제적인 대중의 유교 사회가 되었고 동방예의지국이란 찬사를 부상으로 얻었다. 우리가 옛사람들의 보편적이고 당연한 일상이었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유교 관념에 입각한 중매혼, 재가의 터부, 선조를 계승하는 효(孝)의 대상을 시댁에 두는 것 등 등은 바로 그때 풍속으로 굳은 것이다. 


인륜지대사에 있어서, 배우자와 그 부모의 면면까지 신중하게 살피고자 하는 중매혼, 혼례가 자신의 가도(家道)를 굳건히 세우는 출발점이라는 관점, 효심으로 부모의 훌륭함을 닮고[초, 肖] 계승하고자 하는 정신, 이것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의미 있는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