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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 겨울호-사랑과전쟁] 혼인-조선시대 혼례 풍속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2-01-03 조회수 : 3941



(2021가을겨울_혼인-2_사진1)『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하)』 영조 행차 모습 _ 국립중앙박물관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하)』 영조 행차 모습_국립중앙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2_사진2)『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하)』 정순왕후 행차 모습 _ 국립중앙박물관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하)』 정순왕후 행차 모습_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혼례 풍속



결혼은 혼자만의 의지와 실천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호응하면서 완성된다.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서 합일의 목적을 이룬다. 


글_ 이욱(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문화연구실 연구원)



주자가례에 따른 혼인절차 


우리의 전통 혼례는 이러한 과정을 『주자가례』에 따라 의혼 (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 부현구고(婦見舅姑), 묘현(廟見), 서현부지부모(壻見婦之父母) 등으로 나누어 수행하 였다. 이 절차는 세 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혼례를 준비하는 단계로 의혼, 납채, 납폐의 절차가 있다. 이는 탐색과 약정(約定)의 과정이다. 혼인을 의논하여 결정 하면[의혼, 議婚] 신랑 집에서 먼저 혼인의 의사를 신부 집에 공 식적으로 알린다. 이를 받아들여 허락하는 것이 납채이다. 서로 간에 혼인의 의사가 확인되면 다시 신랑 집에서 혼약의 증거로 예물을 신부 집에 보내는데 이를 납폐라 하였다. 고대 혼례에서 는 현훈속백(玄 .束帛)과 여피(儷皮)로써 혼례의 예물로 삼았다. 현(玄)은 흑색, 훈(纁)은 옅은 홍색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청색 과 홍색의 비단을 사용하였다. ‘여피’란 사슴 가죽을 가리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고 예물로써 혼례를 약속하면 두 번째 단 계로 혼인식을 거행하는데 이를 친영이라 하였다. 이 단계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친밀과 결합을 강조한다. 친영은 전안례(奠鴈禮)와 동뢰연(同牢宴)으로 구분된다. 전안례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예물로 기러기를 바치고 신부를 맞이하여 집으로 데려오는 의식이다. 기러기로 혼인을 청하는 것은, 음양에 따라 왕래하는 기러기 성질을 본받아 신랑과 신부가 음양에 역행하지 않고 순조롭게 살아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암컷이 수컷을 따르는 성질이나 두 번 짝을 취하지 않는 성질 때문에 기러기를 혼인 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반면 주자(朱子)는 이를 사(士)의 신분 이지만 혼례 때에 잠시 대부의 폐백을 사용한 ‘섭성(攝盛)’의 예 로 설명하였다. 섭성은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의장을 취하여 꾸 미는 것이다. 이러한 섭성은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만들기 때문에 제지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혼례에서는 허용되어 자기의 신분보다 높은 의복이나 수레, 그리고 폐백을 사용하였다. 대부의 폐백에 사용되던 기러기가 혼례의 상징으로 되는데에는 이러한 섭성의 결과인 것이다. 



(2021가을겨울_혼인-2_사진3)젼얀하는모양(모사복원품), 기산 김준근 _ 국립민속박물관

젼얀하는모양(모사복원품), 기산 김준근 _ 국립민속박물관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여 집에 오면 동뢰연을 베푼다. 동뢰연은 ‘제사의 희생을 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다. 고대의 혼례는 희생을 준비하여 제례를 지내고 그 희생을 신랑과 신부가 같이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나됨을 보여 주었다. 조선시대 혼례에서 이러한 동뢰의 모습을 찾기란 어려우며 대신 서로 절하고 합근의 잔으로써 부부가 되었음을 나타내었다. 합근은 표 주박의 속을 파내고 이를 반으로 잘라 만든 잔이다. 한 표주박 에서 나온 두 개의 잔을 통해서 신랑과 신부가 같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희생과 표주박 술잔을 통하여 상호 친밀성을 높였다. 


위와 같이 전안례는 신부 집에서 거행하고 동뢰연은 신랑 집에서 거행하는 것이 친영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신부를 직접 맞이 하여 신랑 집에서 혼례식을 올리는 이동의 절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가살이의 오랜 전통 때문에 이 친영은 우리 사회에 온 전히 수용되지 못하였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전안례를 행하고 그곳에서 동뢰연을 거행하였다. 다만 시대가 내려갈수록 혼례를 치른 후 신랑 집으로 돌아오는 기간이 점차 짧아졌다. 이렇게 동뢰연까지 신부 집에서 거행하고 신랑 집으로 가는 것을 반 친영(半親迎)이라 하였다. 


친영을 통해서 결국 신랑 집으로 가는 유교 혼례는 여성의 입장 에서 보면 시댁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혼례의 마지막 단계는 이 입문 의식으로 마무리가 된다. 입문의 성격은 신부가 시부모를 알현하는 ‘부현구고’의 의식에서 잘 나타난다. 이는 신부가 시 부모님께 폐백을 올리는 의식이다. 시아버지께 대추와 밤을 올 리고, 시어머니께 단수(腶脩)를 넣은 폐백상자를 올린다. 단수 란 생강이나 계피 등을 섞어 맛을 낸 말린 육고기이다. 동뢰연보다 더 길고 복잡한 시부모에 대한 인사로 하루가 지나가면 신부는 시댁 식구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시댁 식구는 아 니다. 사당에 알현(謁見)하는 의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당에 계신 조상을 알현하는 의식은 혼례식 이후 곧바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3개월이나 기다렸다가 거행하였다. 이로써 신부는 시댁 의 식구가 되었다.



(2021가을겨울_혼인-2_사진4)영조계비 정순왕후 왕비 책봉시 옥책문 _ 국립고궁박물관

영조계비 정순왕후 왕비 책봉시 옥책문_국립고궁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2_사진5)영조계비 정순왕후 왕비책봉 금보 _국립고궁박물관

영조계비 정순왕후 왕비책봉 금보_국립고궁박물관



왕실의 혼례 절차 


왕실 혼례의 전반적인 흐름은 『주자가례』의 혼례 순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왕, 왕세자, 왕자, 공주 등의 지위와 성별 의 차이 때문에 변용이 나타난다. 왕실 혼례는 그 상대에 따라 호칭이 달랐다. 왕실 혼례의 중심이 되는 국왕과 왕세자의 혼례 를 각각 ‘비를 맞이하는 의식[납비의, 納妃儀]’, ‘빈을 맞이하는 의식[납빈의, 納嬪儀]’이라 부른다. 여기서 왕비 또는 왕세자빈으로 책봉하는 의식, 곧 책례가 중요한 절차로 주어진다. 납비의(納 妃儀)의 전체 절차는 “납채,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妃), 명사봉영(命使奉迎), 동뢰”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여기서 납징 은 납폐와 동일한 의식이다. 고기는 혼례의 날짜를 신부집에 알려 허락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혼례의 통상적인 예식 후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冊妃]을 거행하였다. 그러므로 왕비의 혼례식은 부부의 관계 외 민간인에서 왕비나 왕세자빈으로의 지위 상승을 동반한 것이었다.


책례 때 주요 상징물은 교명문(敎命文), 책문(冊文), 보인(寶印), 명복(命服) 등이다. 사신이 이 네 가지를 모두 함에 넣어 가마에 싣고 왕비가(王妃家)에 도착하면 왕비가 명복을 입고 나와서 교 명(敎命), 책(冊), 보인(寶印)을 순서대로 받았다. 교명은 일반적 으로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세손을 책봉할 때 내리는 훈유문서 (訓踰文書)인데 다섯 가지 색깔의 실로 짠 비단에 황금축을 둔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왕비를 책봉할 때에는 교명과 함께 옥책(玉冊)과 보인(寶印)을, 왕세자와 왕세자빈을 책봉 할 때에는 죽책(竹冊)과 옥인(玉印)을 함께 내렸다. 명복은 벼슬 아치들의 정복(正服)으로 여기서는 왕비가 갖추는 의복(衣服)을 가리킨다.



(2021가을겨울_혼인-2_사진6)동뢰연도, 『헌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 _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동뢰연도, 『헌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 _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2021가을겨울_혼인-2_사진7)근배(巹杯), 『헌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 _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근배(巹杯), 『헌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 _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이렇게 왕비로 책봉을 받은 왕후를 궁궐로 들이는 의식이 ‘명사봉영’이다. 이는 임금의 명을 받은 사신이 신부 집에 가서 왕비를 모셔 오는 것이다. 민간 혼례에서 살펴본 친영에 해당한다. 다만 존귀한 국왕이 사대부의 집에 나아가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명분 때문에 사신을 보내어 전안례를 행하고 왕비를 모셔 왔다. 그러나 친영이 예법에 맞는 것이라는 의식이 확산되자 왕이 왕비 의 집까지는 아니더라도 궁궐 밖 가관(假館)이나 별궁(別宮)까지 왕이 나아가 왕비를 맞이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반면, 왕세자 이하의 혼례에서는 일찍부터 친영이 정착되었다. 특히 처가살이 의 전통에 의해 민간에서 친영의 시행이 매우 늦었던 것에 비하 면 왕세자 친영은 일찍부터 시행되어 유교 혼례의 모범이 되었다. 왕실의 혼례를 자세히 기록한 『가례도감의궤』에 실려 있는 「반차도(班次圖)」는 친영을 통해 궁궐로 들어오는 행차를 묘사한 것이다. 영조 대 이전에는 이 행렬에서 왕이나 왕세자의 모습은 제외하고 왕비 또는 왕세자빈의 가마와 의장을 묘사하였는데 『(영조 ·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부터 국왕의 행차도 반영되어 나 타나 친영의 모습이 더욱 두드려졌다. 이렇게 궁궐에 들어온 왕 과 왕비는 “二姓之合百祿之源”(두 성씨의 결합이 백 가지 근원 이 된다)이라 쓴 교배석(交拜席)에서 동서로 마주보고 동뢰연을 거행하였다.


왕실 혼례에서 민간의 예식을 따르기 어려웠던 또 하나는 의식 으로 ‘묘현례’가 있다. 묘현례는 신부가 시댁의 사당에 나아가 조 상에게 인사하는 의식이므로 왕, 왕세자, 왕자의 혼례에서 묘현 례의 장소는 종묘가 되었다. 이는 국가의 최고 사당인 종묘에 나 아가는 것이므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1696년(숙종 22)에 왕세자의 혼례 때 당시 왕비였던 인현왕후와 세자빈이 종묘에 나아가 묘현례를 처음으로 거행함으로써 전례를 마련하 였다.



왕자와 왕녀, 후궁의 혼례 



왕자와 왕녀의 혼례를 살펴보면 고례가 아닌 『주문공가례』 의 절차를 따르고 있다. 납채, 납폐, 친영, 교배례, 부현고구(婦見 舅姑), 묘현(廟見), 서현부지부모(壻見婦之父母)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왕자와 왕녀의 특수성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왕자 의 특수성은 신부인 부인(夫人)이 왕자의 사당을 알현하는 의식 이 생략된다. 왕자의 사당이란 종묘(宗廟)이므로 성립되기 어려 운 상황이었다. 조선후기 왕세자빈의 경우 혼례 후 종묘에 나아 가 선왕에게 예를 행하는 것이 정식화되었지만 왕자에게는 허용 되지 않았다. 


왕녀의 혼례를 ‘하가의(下嫁儀)’로 표현한 것 역시 흥미로운 일이 다. 이는 혼례가 왕가에서 사대부가로 하향하는 과정임을 나타 낸다. 결국 조선 시대의 책례나 하가의는 왕실의 혼례가 다른 국 가의 왕실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왕과 사대부가라는 불평등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혼례이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왕자나 왕녀가 장성하여 궁궐을 나가 살림을 마련하는 것을 출합(出閤)이라 부르는데 왕녀의 혼례는 출합이면서 하가 인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에는 후궁의 혼례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후 궁의 혼례가 왕후의 것과 동일할 수 없었다. 후궁의 경우 친영 대 신에 홀로 궐에 와서 국왕을 조현(朝見)하고, 동뢰연도 동서로 마 주보는 것이 아니라 남향한 국왕을 알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 다. 이는 일부일처의 형식을 중시하여 정식 부부만이 온전한 혼 례의 형식을 향유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