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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 겨울호-사랑과전쟁] 혼인-근대 혼례 문화의 변동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2-01-03 조회수 : 2105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2)사진엽서, [(조선풍속)현대상류의 혼례도중], 1920년대 _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사진엽서, [(조선풍속)현대상류의 혼례도중], 1920년대_부산광역시립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3)사진엽서, [혼례광경], 1900-1910년대 _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사진엽서, [혼례광경], 1900-1910년대_부산광역시립박물관



개항기 신분제가 사라지고 종교가 다양화되면서 혼례 문화도 다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천도교 와 기독교 등의 영향으로 혼례식은 조선시대의 재래적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와 더불어 근대시기 서울을 중심으로 오늘날 우리가 고부갈등의 온상이라 부르는 ‘시집살이’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글_ 김연수(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수료)



근대 혼례 문화의 변동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1)사람의 일생 중 혼인식 _ 국립중앙박물관

사람의 일생 중 혼인식_국립중앙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4)結婚(교배례), 『조선풍속화보(1910, 나카무라킨죠)』, 민속원(2008)

結婚(교배례),『조선풍속화보(1910, 나카무라킨죠)』, 민속원(2008)



밤에서 낮으로의 예식 시간 변경 


전통혼례식에서 신랑은 혼례식을 위해 늦은 오후에 길을 떠났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혼례식에서 ‘등롱’과 ‘횃불’은 필수 품목으로 등장한다. 행차는 시배하인이 앞장서고 등롱군(燈籠軍)이 두줄로 뒤를 따르며, 기럭아비가 기러기를 안고 그 뒤에 걸어간다. 신랑은 그 뒤를 백마를 타고 따르는데, 왼쪽에 고삐 잡는 이가 그 앞에 선다. 그 뒤로는 문안비(問安婢)가 장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가고 관대비(冠帶婢)는 관대를 넣은 채죽상(彩竹箱)을 들고 맨 뒤에서 걸어간다. 행렬이 여가에 이르면 신랑이 말에서 내리고 기러기를 올리는 전안례(奠鴈禮)를 시작으로 밤의 혼례식이 시작되었다. 반면, 천도교에서는 “예전에 길흉을 택일하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반드시 어느 일요일로 예식일을 정한다”하여, 신랑의 사주단자를 받아 신부집에서 혼례일을 점치던 재래적 풍습을 비판하고, 반드시 일요일로 잡을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일 오전 10시에 혼례식을 진행한다”고 하여, 오전이라는 넓은 범주의 시간보다 더욱 구체적인 시간을 설정하고 있다. 이는 근대적 시간 개념의 도입과도 관련이 깊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여자집에서 예식장으로의 장소 이동 


조선시대 혼례식의 장소는 여가, 즉 신부의 집이었다. 신랑의 행차가 여가에 당도하면 신랑 입장 을 알리는 전안례(奠鴈禮)를 행한 후, 대청에 마련된 대례상 앞으로 이동하여 신랑 신부가 맞절하는 교배례(交拜禮)와 술잔을 합하여 부부가 하나되는 합근례(合巹禮)를 진행하였다. 이 과정을 통 해 성혼이 인정되었고, 부부가 되었다. 이에 반해, 천도교인의 결혼식에서는 예식장을 제3의 공간인 교회당으로 정하였다. 혼례식 당일이 되면, “혼인하는 두 집안 가족이 당일 오전 10시에 천도교 회당으로 모여 식을 마친다”고 하여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두 집안 가족이 결혼식에 함께 참석한다는 점도 변화하였다. 기존 조선의 혼례식에 있어, 신랑 의 어머니는 신부 집에 동행하지 않았으며, 양가 부모는 모든 혼례 절차에 있어 서로 마주하지 않았 다.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거나 예식 후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서 양가의 어른들을 뵙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신랑 신부의 부모 및 친지들은 서로 상견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도교 혼례에 있 어서는 양가 부모와 집안의 가족들이 오전 10시에 교회당에 모두 모여 의식을 치르고, 혼례식이 진 행되는 동안 함께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이는 오늘날의 결혼식 풍경과도 비슷한데, 혼례식에서 양가 부모가 서로 마주하는 것은 근대적 신식혼례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5)경성백경 - 프랑스 교회당(명동성당)과 YMCA 사진엽서 _ 국립춘천박물관

경성백경-프랑스 교회당(명동성당)과 YMCA 사진엽서 _ 국립춘천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6)『동서예법대요(1933)』 결혼식장도형

『동서예법대요(1933)』 결혼식장도형



사모관대에서 프록코트로의 예복 변화 


위의 전통혼례 그림에서 살필 수 있듯이 조선시대 양반의 혼례복은 일명 ‘사모관대’라 하여 사 모(紗帽)를 쓰고 깃이 둥근 단령(團領)을 입었으며 품계에 맞는 품대(品帶)를 둘렀다. 신부는 붉은색 원삼을 입고 화관(花冠)으로 머리를 장식하였다. 


근대의 기독교식 혼례복의 경우, 신랑은 평상복(通常服) 혹은 프록코트(厚祿高套)에 모자를 쓰고, 신부는 서양부녀자의 예복(西洋婦女 禮服) 또는 평상복에 모자를 쓰고 혹은 모자에 꽃을 꽂기도 하여, 이를 통해 오늘날 신랑 정장 및 신부 웨딩드레스와 같은 혼례 복식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당시 비교인(非敎人)들은 “신랑은 프록코트나 단령을 입고, 신부는 서양부녀자의 예복이나, 혹 은 원삼을 입는다”고 하여, 당시 혼례식 예복의 과도기적 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이로써, 1920년대 중반 신식혼례의 등장과 함께 혼례복에 있어서도 서양복으로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7)사진엽서, [신랑 신부], 1920년대 _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사진엽서, [신랑 신부], 1920년대_부산광역시립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8)사진엽서, [婚禮], 1920년대 _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사진엽서, [婚禮], 1920년대_부산광역시립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9)사진엽서, [귀족의 가입(嫁入)], 1920년대 _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사진엽서, [귀족의 가입(嫁入)], 1920년대_부산광역시립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10)시집가셔잔붓는모양(모사복원품), 기산 김준근, 19세기 말 _ 국립민속박물관

시집가셔잔붓는모양(모사복원품), 기산 김준근, 19세기 말_국립민속박물관



근대 시집살이의 탄생 


조선시대 혼례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는 바로 ‘친영(親迎)’의 정착 여부였다. 친영은 신랑이 친히 신부를 맞으러 간다는 뜻으로 결혼식부터 혼후 거주까지 모두 남가에서 이루어지는 부계중심의 혼인을 상징한다. 조선 전반에 걸쳐 왕실에서는 친영을 사대부가에 정착시키고자 법령을 만들 고 의례서를 편찬하는 등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조선시대 문집, 일기, 고문서 등의 실행 자료에서 친영의 성공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신 조선 재래의 풍속인 ‘우귀(于歸=新行)’의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귀는 친정에서 결혼한 신부가 시댁에 처음 들어가는 절차를 의미하는 것으로, 친영과는 길항관계를 가진다. 그 기간을 검토한 결과 조선 후기까지 짧게는 4개 월에서 길게는 4년까지 혼례 후 신부가 친정에 머물렀음을 확인하였다.


먼저 호남 거족이었던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손자 광선(光先)이 1576년 (선조9) 2월 19일 본집 해남을 떠나 남원 신부댁으로 혼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모습이 담겨 있고, 그 이듬해인 1577년 유희춘이 사망하기 전까지 손주 며느리는 시댁으로 오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이는 당시 신랑이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신부가 1년 넘게 처가살이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경북 사족이었던 김택룡이 저술한 『조성당일기』의 기록에서는 광해군 8년(1616년) 3월 27 일 신시(申時: 오후3시~5시)에 사위가 와서 합근례와 예작(禮酌)을 치르고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 날 처의 부모에게 인사를 올렸으며, 딸의 우귀(于歸)는 그로부터 약 8개월 뒤인 1616년 11월 10일에 진행되었다. 또한 18세기 경상도 선산 출신의 무관이 기록한 『노상추 일기』에서도 아버지와 본인, 그리고 자식 및 조카들 모두가 신부 집에서 결혼했으며, 신부가 적어도 수개월에서 1년 정도는 친정에서 생활을 하다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구조를 가졌다. 


19세기 전라도 구례의 거주했던 유제양(柳濟陽, 1846~1922)의 손자 유행동은 해주 오씨와 1899년 11월 21일에 혼인하는데, 약 1년 2개월이 지난 1901년 1월 11일 신행을 왔다. 이처럼 16세기 이후 작 성된 여러 사대부 문집과 일기에 나타난 실행례를 정리하면 조선 후기에도 친영제가 정착되지 못 한 모습을 보이며, 혼후 거주 양상은 조선 초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2021가을겨울_혼인-3_사진11)신부 행차,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 _ 국립민속박물관

신부 행차,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_국립민속박물관



그렇다면 언제쯤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시집살이의 혼례 전통이 생겨난 것일까? 그 해답은 바로 조선 후기까지 양반가에서도 관례로 남았던 우귀(于歸)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지방에서는 19세기까지도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까지 길었던 우귀의 기간이,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학자 정약용의 문집인 『가례작의(嘉禮酌儀, 1810년경)』의 서문에 “현재 경성(京城)의 귀가(貴家)에서는 하루 사이에 신랑은 전안을 하고, 색시도 시부모를 뵙고 예물을 드려 이를 ‘당일신부’라 하니 이 어찌 친영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19세기 당시 서울의 점잖은 집 에서는 당일에 신부가 시댁에 인사드리는 ‘당일우귀’를 행하고 있음이 포착되었다. 


또 다른 사례로 19세기 후반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인(貢人) 지규식의 『하재일기』에 나타난 우귀기록을 살피면 아들(1894년), 딸(1901년)의 혼사에 각각 6일, 1일 만에 신부의 우귀기록이 확인되었다. 경성에서 간행된 『현토주해 사례편람(1924)』에서도 당시 관행되고 있는 혼례에 있어 ‘3일우귀’, ‘당일우귀’의 형태가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이처럼  19세기에서 20세기 로 넘어오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우귀의 기간이 급격하게 단축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경성의 반가 문화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 대중문화로 흡수되었을 가능성과 개항기 이후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양가를 쉽게 왕래할 수 있게 된 점, 제3의 장소에서 혼례식을 진행함으로써 시부모를 바로 뵙고 인사할 수 있다는 점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하여 발생한 현 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결혼식은 신부 집에서 올리고, 바로 시가로 들어가 다음날 시부모를 뵙는 반친영의 형상과 많이 닮아 있다. 비록 조선 전반에 걸쳐 사림들이 강력하게 주창했던 시가살이의 혼례제도 가 그들의 의도에 맞게 친영 ·반친영의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우귀기간의 축소로 인하여 실 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점차 지방으로도 그 문화 현상이 퍼져나가 20세기 중반 이후로 전국 의 시집살이가 성행하게 되었다. 즉, 시집살이는 조선 시대 이후 생겨난 100여 년밖에 되지 않은 한국의 근대 문화 현상이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일컫는 문화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하였을 것 같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서 온 경우가 상당히 많다. 바로 시집살이가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