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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 겨울호-사랑과전쟁] 혼인-목공예품에 담긴 사랑, 전통 혼례가구와 안방가구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2-01-07 조회수 : 1599



목공예품에 담긴 사랑, 전통 혼례가구와 안방가구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1)혼수함, 가로 66cm×세로 37cm×높이 28cm _ 국립민속박물관

혼수함, 가로 66cm×세로 37cm×높이 28cm _ 국립민속박물관



혼례는 일생의 큰 경사이고, 한 사람의 인생 변곡점을 알리는 중요한 행사이다. 전통 생활 속에서, 혼례를 치르면서 사용되었던 가구들과 여성이 준비했던 혼수용 가구 품목들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전통가구를 탐방하는 즐거운 기회가 될 것이다. 더불어 오늘날 전통가구와 관련한 무형문화재 분야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글_ 김미라(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일생에 가장 큰 의례의 하나 혼례 


우리 옛 전통 생활에서,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일생을 살아가 면서 맞이하는 가장 큰 4단계의 의례였다. 이는 인간이 생(生)과 사(死)를 겪으면서 큰 변화의 순간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그 중에 서도 혼례는 오늘날까지 그 전통의 내용이 많이 남아 있는 의식 의 하나로,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전통 혼례의 과정은 육례(六禮)로 전해지고 있는데, 『주자가례』 와 『사례편람』을 통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혼례의 첫 시작은 가 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 되었지만 이러한 혼례의식이 유교적 인 가례로서 정착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고려 말 『주자가례』로 유교적 혼례절차가 전해지지만, 널리 민간에까지 일 률적인 의식절차로 정착된 것은 아니며, 유교를 정치적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 들어서 후기까지도 각 지방마다 각각의 특색을 가 지고 발달하였다. 아래의 서술은 조선 후기 이후 전통 혼례의식으 로 전하는 예를 가지고, 지방특색을 구별하지 않고 통례적인 절차 를 바탕으로 하였다. 6례는 납채(納采)·문명(問名), 납길(納吉), 납 징(納徵)·청기(請期)·친영(親迎)을 말하는데, 혼례식이 치러지는 것은 친영에 해당한다. 친영의 전 단계의 절차들은 혼사를 확인하 고 길일을 정하는 절차에 해당한다. 납징은 혼사가 완전히 정해지 는 단계로 이때 신랑 쪽에서 납폐라 하여 폐백을 보내는데, 이때 혼서지와 함께 옷감과 폐물이 담겨 신부 쪽에 전해진다. 『삼국유 사』, 권 제1기 이 태종춘추공에 ‘춘추공이 문희와 혼례를 올렸다’ 는 기록이 전하고,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혼례의식을 치렀던 여러 기록이 전한다. 당시 자세한 행사 절차에 대한 기록 은 알려져 있지않으나, 고려사 85권, 志 39권 충렬왕 4년(1278년) 에, ‘홍대촉(紅大燭: 붉은색 큰 초)’을 금지하는 기사 내용에서는 사치스런 의식이 행해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전통 친영 의 예식으로 전하는 조선의 초례상 차림에도 역시 초가 켜졌다. 


초례청은 신부집의 대청이나 마당에 마련된다. 동서 방향으로 자리를 깔고 병풍을 친 다음 초례상을 한가운데에 남북 방향 으로 놓고, 상 위에는 촛불 한 쌍과 송죽(松竹) 화병 두 개, 백 미(白米) 두 그릇과 닭 한 쌍을 남북으로 갈라놓는다. 한쪽에 는 물을 담은 세숫대야 두 개와 수건, 그리고 술상을 마련해서 합근례(合巹禮)를 하기 위해 둔다.

(한국일생의례 자료집, 국립민속박물관, 2011, p69)


신부가 신랑 집에 혼수로 장만해 가는 물목에는 가구류와 의복, 옷감류가 주를 이루며, 문방구나 장신구 등이 포함되기도 하였 다. 혼수품에 들어가는 가구로는 농과 상자나 함이 기본이 되며, 형편에 따라 장이나 반닫이가 들어가고 나전함이나 화초장과 같 은 고급품은 일반인들의 혼수품 장만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혼례의식에 쓰이는 목공예품


혼례를 치르면서 사용되는 특색 있는 가구 종류에는 봉치함, 목기러기, 초례상, 합환주상이 대표적이다. 혼례에는 평민들도 신 랑은 사모관대를 쓰고, 신부는 원삼과 활옷을 입는 호사를 누렸는데, 이러한 특별한 의상이나 가마와 목기러기와 같은 물품은 상을 치를 때 사용하는 상여의 경우처럼 마을에서 공동으로 소 유하고 필요할 때 빌려 사용하기도 하였다. 



봉치함은 혼서지와 폐물 등을 담아 친영을 하기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가는 함이다. 신부가 신랑 집에 오면서 이 봉치함을 챙겨 와서 평생 간직하였으며, 혼서지는 죽어서 관에 함께 묻기도 할 만큼 소중하게 여겼다. 봉치함을 신랑 집으로 보낼 때 찹쌀로 빚은 떡을 넣어 보냈다고 하며, 그 떡을 봉치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랑 집에서 봉치함이 올 때, 안에는 사주단자와 혼 서지, 예물과 부정을 없애는 숯과 고추, 목화 등을 함께 넣어 보 냈다고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봉치함의 형태는 혼수함의 한 전형으로서, 붉은 칠을 하고 모서리 처리를 현대어 로 ‘몰딩’ 처리했으며(외사모 혹은 쌍사모 장식), 흑칠로 둘러 장식하고 앞면에는 수복을 새겨 특별한 용도의 함임을 강조하였다. 뚜껑에 달린 손잡이 역할의 금속장식(길채) 역시 꽃문양으로 장식하여 의례용구로서의 장식적인 면모를 보인다. 봉치함은 다른 이름으로 예장함과 혼수함 등으로도 불린다.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2)목안, 길이 34cm×너비 10.2cm×높이 18.3cm _ 국립민속박물관

목안, 길이 34cm×너비 10.2cm×높이 18.3cm _ 국립민속박물관 기러기 보, 36cm×36cm _ 국립민속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3)기러기 보, 36cm×36cm _ 국립민속박물관

기러기 보, 36cm×36cm _ 국립민속박물관



목기러기(목안:木雁)는 전안례(奠鴈禮)에 사용되며, 신랑이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부 집에 가는 행렬 맨 앞에 기럭아범이 들고 가게 된다. 신랑이 신부 집에 당도하여 초례를 치르기 전에, 이 목기러기를 보자기에서 풀어 상에 두고 전안례를 치르게 된다. 이때 기러기를 싼 보자기는 사각형에 한쪽 끈만 길게 부착되 는데, 오색실과 술로 장식하며 작은 크기에 화려한 색감이 특징이다. 전안례는 지방마다 그 세부 절차에는 차이가 있으나, 목안 의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고 신랑이 재배를 하고 나서 신부 측에서 목안을 받아들이는 의식을 말한다. 신랑이 절을 할 때, 상대는 절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러기는 질서를 지키고 한 배우자 만을 고집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 나무로 만든 목안으로 이러 한 풍습을 행해온 것이라 전해진다. 오늘날 전해 오고 있는 조선 시대 목안들은 머리와 몸통을 따로 만들어 결합과 분리가 가능하며, 몸통의 바닥 면은 움푹하게 파낸 경우가 많다. 몸통에는 깃털을 조각하거나 그렸는데,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있지 않아 다양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민속유물로 오늘날에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초례상은 사각형의 상판 아래 높은 다리가 달렸는데, 제사상과 매우 흡사하나 붉은 색을 칠해서 흑칠의 제사상과는 구분된다. 초례상 아래에는 교배례 이후 행하게 되는 합근례에 사용하는 합환주상을 두었다. 합근례는 신랑과 신부가 대개 3번의 술을 마시는 의례로서 백년해로 할 것을 맹세하는 의식이다. 합환주상(合歡酒床)의 예는 전하는 예가 많지 않은데, 작은 크기의 소 반으로 상판 위에 2개의 구멍을 뚫어 잔을 놓는 자리를 마련해두기도 하였다. 합근례에는 표주박을 반으로 갈라 사용하여, 단 한 명의 배우자와 함께하겠다는 의미를 다지는 의식이다. 국립 민속박물관 소장의 합환주상은 해주반 형태의 소반으로 판으로 된 양쪽 다리에 투각(뚫음 장식)으로 무늬를 조각하고, 상판에 2개의 원형 잔을 둘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4)합환주상, 가로 27.7cm×세로 20cm×높이 18.3cm _ 국립민속박물관

합환주상, 가로 27.7cm×세로 20cm×높이 18.3cm _ 국립민속박물관



결혼생활을 함께 시작하는 가구


혼수품에 들어가는 가구류는 농과 함이나 상자가 기본이 되었는데, 형편이 되는 경우에는 장과 반닫이, 혹은 자개나 화각, 수놓은 가구들도 들여 여성의 공간인 안방에서 사용하도록 하 였다. 현대에서는 ‘장롱’이라고 하나, 조선에서는 장(欌)과 농(籠)으로 구분하여 명칭하였다. 장은 기둥을 세우고, 층마다 문을 달아 이층 혹은 삼층으로 구성하며, 앞면을 동자주(세로로 된 짧은 기둥)와 쇠목(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로 길게 연결하는 나무)으로 면 분할한 형태로 짠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농은 본래고리(버들고리)로 만든 상자를 상하로 포개어 쓰면서, 여닫는 문을 상자의 앞에 만들게 되면서 완성된 형태로, 쇠목이나 동자주의 면 분할을 하지 않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조선 말기에 오면 이 층농에도 쇠목과 동자주를 만들어 장의 형태와 흡사해지는 변화를 보이게도 되지만, 전통 장과 농의 확연한 구별 점은, 층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농’이고 층이 분리가 되지 않는 것은 ‘장’으로 구분된다.


안방에 두는 수장용 가구로, 옛말로 ‘궤(櫃)’라고 통칭되는 가구가 있다. 궤는 육면체의 상자형 수장용 가구를 말하는데, 그중에서 수직으로 높은 궤를 분류하여 ‘장’이라고 한다면, 옆으로 긴 장방형의 궤는 앞닫이와 윗닫이로 나뉘고, 그중 앞닫이를 흔히 ‘반닫이’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반닫이는 전하는 수량도 많고, 지 방색도 뚜렷하여, 다른 전통가구들에 비해 우리에게 보다 친근 하다. 또 반닫이는 밥상이었던 소반과 함께 가장 최근에까지 전통의 모습을 유지하며 실내가구로 자리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익숙한 가구일 수 있다. 그 특징은 앞면의 금속장식으로 확인이 된다. 전라도와 제주도, 경상도 등 남부 지방에서 제작된 반닫이는 쇠장식이 두껍고 튼실하며 화려한데, 결이 뚜렷한 느티나무나 소나무 등으로 제작된 몸체와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보 여 준다. 예를 들어, 밀양반닫이, 양산반닫이, 진주 반닫이는 쇠 장식이 화려하고 튼실한 반닫이로 유명하다. 그에 반해 전라도 반닫이 중 나주반닫이와 익산 반닫이와 같이 내륙 쪽 반닫이의 경우, 큼직한 쇠 장식을 반닫이 앞면에 단순하게 장식하는 특징 을 가지고 있어, 현대적인 면모를 자랑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강 화반닫이, 남한산성반닫이와 같은 경기도 반닫이나 개구멍반닫 이, 박천 반닫이 등 북쪽의 반닫이들은 모두 이름난 전통 반닫이로 유명하다.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5)삼층장, 가로 104.5cm×세로 53.5cm×높이 147cm _ 국립민속박물관

삼층장, 가로 104.5cm×세로 53.5cm×높이 147cm _ 국립민속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6)반닫이(밀양반닫이), 가로 94.5cm×세로 42.7cm×높이 73cm _ 국립민속박물관

반닫이(밀양반닫이), 가로 94.5cm×세로 42.7cm×높이 73cm _ 국립민속박물관



전통가구 중, 주로 안방가구에서 볼 수 있는 나전기법과 화각기법은, 특별하게 화려한 우리의 전통 장식기법이다. 전통가구의 대부분이 나무결을 그대로 살린 장식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 2가지 기법은 더욱 주목되는 기법이 된다. 곱게 자수를 놓거나 비단 혹은 종이로 발라 장식한 가구들도 있지만, 그 제작의 공력과 고급스러움은 역시 나전칠기와 화각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이 거처했던 사랑방 가구의 경우 옻칠을 하거나 오동나무를 지져 문양을 새기는 낙동법으로 장식하는 것을 추구하여, 두드 러진 문양 새김은 하지 않아, 여성의 안방가구와는 다른 분위기의 실내장식을 하였다. 한 예로 매일 마주하며 사용하였을 ‘경대’의 경우 남성의 것은 작은 규모에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졌지만, 여성의 경대는 새김질을 하거나 나전칠기로 화훼영모를 그려 넣어 차이를 보이다. 베갯모에 나전 장식을 붙이거나, 옛 책상 용도인 서안에도 화려한 나전을 넣어 장식하기도 하였다. 화각 역시 베갯모로 장식하기도 하고, 빗이나 반짇고리 장식으로 눈에 띈다. 검은 칠 혹은 붉은 칠의 바탕에 영롱하게 박아 넣은 전복 껍질로, 오색 찬란한 아름다움을 자랑한 나전칠기는 당시 보석 못지 않은 화려함을 뽐내었을 것이다. 화각은 쇠뿔에다 당채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표면에 쇠뿔의 결이 잔잔하게 드러나는 판 아래로 붉은색과 녹색, 황색의 화려한 당채색이 겹쳐서, 은은하면 서도 색색이 비추는 장식이 아름답다. 쇠뿔은 한정된 크기만 제 작이 가능하여, 넓은 면을 한꺼번에 붙일 수가 없다. 때문에 우 골(牛骨)로 구획선을 넣어 면을 채우는데, 장식 과정이 까다롭고 당시에도 매우 고급스러운 장식기법이었으며 습도나 온도에 민감한 탓에 전래량이 많지 않다. 작은 소품이나 함 종류가 전하고 있고, 규모가 큰 화각장은 매우 드물게 전하고 있다.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7)나전칠국화모란넝쿨무늬 상자, 높이 9.8cm×너비 31.3cm×길이 31.3cm _ 국립중앙박물관

나전칠국화모란넝쿨무늬 상자, 높이 9.8cm×너비 31.3cm×길이 31.3cm _ 국립중앙박물관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8)화각함, 높이 17.7cm×너비 28.3cm×옆너비 20cm _ 국립중앙박물관

화각함, 높이 17.7cm×너비 28.3cm×옆너비 20cm _ 국립중앙박물관



무형문화재로 내려오는 기술


오늘날에도 전통가구를 만들었던 소목장과 나전장, 화각장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기술을 보전 계승하고 있다. 소목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박명배·엄태조·소병진, 나전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0호 이형만, 화각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09호 이재만이 보유자로서 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다. 그 외 시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곳곳에서 우리 전통기술을 보호하고, 전승 교육을 해 오고 있다. 각 보유자들은 좋은 재료를 선별하고, 전통 도구를 다루며 숙련된 기술로 각 분야의 공예품들을 제작해 낸다. 무형문화재 소목장은 주로 전통가구를 제작하는 장인인데, 창호(窓戶) 제작이나 백골(白骨) 제작의 분야도 세부 종목으로 나 뉘어 지정되어 있다. 백골이라는 것은 칠이 되기 전의 나무 골재를 말하는 것이다. 백골장은 나전칠기나 화각을 만들기 위해, 장식 이전에 뼈대를 제작하는 일을 하거나, 느티나무 등 나무 결이 강한 나무의 결을 살려 그대로 완성품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한다. 백골장은 칠 작업 후 뼈대가 휘거나 어그러지지 않도록 나무를 건조하고 결구를 하는데 있어서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며, 완성 이전 단계의 백골을 제작하므로 완성되었을 때의 치수와 칠 작업을 고려해 칠 작업자와의 명확한 협업이 요구되는 작업을 하게 된다.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9-1)소목장 박명배

소목장 박명배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10-1)나전장 이형만

나전장 이형만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11-1)화각장 이재만

화각장 이재만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9-2)박명배_반닫이

소목장 박명배_반닫이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10-2)이형만_나전경대

나전장 이형만_나전경대

(2021가을겨울_혼인-5_사진11-2)이재만_화각사주함

화각장 _화각사주함



우리 삶 속에서 가구가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항상 가까이에 있고, 다양한 용도의 가구들이 주위에 있다. 최근에 와서, 수백 년 동안 우리 전통 생활에서 가장 편리한 가구로 인정받았던 당시의 우리 전통가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는 동안 우리 전통가구의 자취는 빠르게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를 다시 돌이켜 우리 현대 생활에 맞는 새로운 가구들의 탄생 이 기대되고 있다.


화각장은 화각을 다루는 장인을 말한다. 화각에 대한 역사적 기 록은 19세기의 기록만이 단편적으로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역사적 기록을 찾기 힘들며, 화각 재료의 한계로 온 도와 습도에 취약하여, 전하는 유물의 수량도 매우 적은 편이다. 1970년대까지도 전통 화각 작업을 했던 유일한 인물인 故음일천 에게 기술 전수를 받은 이재만이 현재 보유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태이다. 화각은 우리 전통가구에 화려한 색채를 불어넣 었던 독특한 우리 전통 기법으로, 앞으로 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분야이기도 하다.  


나전장은 故송주안 선생을 이어 故송방웅 선생이 끊음질 기법 을 이어왔었고, 나전장 이형만 선생이 故김봉룡의 주름질을 이 어 작업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도 나전칠기는 다른 공 예에 비해 주목되는 산업으로 육성되었고, 때문에 당시의 기술 과 사회상이 반영되어 근대 공예의 변화양상을 뚜렷이 드러내 는 전개양상을 보였다. 옻칠은 방염과 방습의 훌륭한 도료로 꼽힌다. 그리고 우리 나전칠기는 고려시대에 꽃을 피워 조선 시대, 근현대를 지나 지금에 이르는 긴 역사를 지니며 발전해 왔다. 이 에 현대 공예 재료의 변용과 시도로 오늘날의 생활에서도 광범 위하게 활용될 수 있는 길이 모색되고 있어, 주목받고 있는 우리 공예이다.




참고문헌 

• 김정녀, 혼례물목류(婚禮物目類) 고문헌 자료를 활용한 민간 전통혼례 문화 연구, 한민 족문화  연구 38, 2011 

• 박혜인, 혼례 '奠雁禮(전안례)'考,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 제6, 2005 

• 정연학, 일생의례와 물질문화 -출생의례와 혼례를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37, 2011  

• 한국일생의례 자료집, 국립민속박물관,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