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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 겨울호-사랑과전쟁] 혼인-조선의 팜 파탈, 유감동과 어우동의 진실게임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2-01-07 조회수 : 1407


조선의 팜 파탈, 유감동과 어우동의 진실게임



윤리와 도덕.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와 규범인 이 명제가 어쩌면 여성들에게는 좀 더 엄격한 잣대를 요구했을지도 모르겠는 생각이 드는 건 두 여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음녀(淫女)와 간부(奸婦)로, 현대사회에선 자유부인과 팜 파탈로 소비되는 두 여인, 세종 대 40명이 넘는 남자들과 스캔들을 일으킨 유감동(兪甘同)과 성종 대 정치인들과의 성 추문에 휩싸인 어우동(於宇同)1)이다. 그녀들은 각각 사 대부가의 마나님과 왕실 종친의 배우자로서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와 도덕의 가치관에 도전장을 던진다. 그리고 그 이유로 숱한 세월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 시절엔 구설과 비난으로, 지금은 오락과 흥미의 소재로서 말이다. 시대를 초월해 자극적인 루머와 말초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온 유감동과 어우동. 그녀들의 화려한 타이틀 속에 숨겨진 진짜 내막과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글_ 이영숙(사랑에 밑줄친 한국사 저자)



자유부인 유감동의 이유 있는 항변


세종 9년(1427) 사헌부로부터 희한한 추국 주청이 올라온다. 검한성(檢漢城) 유귀수(兪龜壽)의 여식이자 평강현감 최중기(崔仲基)의 아내인 유감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평강현감 최중기의 아내 유감동이 남편을 배반하고 스스로 창기(倡妓)라 일컫고 서울과 외방에서 멋대로 행동하며 간부(奸夫) 김여달(金如達)·이승(李升)·황치신(黃致身)·전수생(田穗生)·이돈(李敦)과 여러 달 간통했으니…감동과 함께 모두 형문에 처하여 추국하기를 청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18일 


현감의 아내가 숱한 외간남자와 놀아났으니 국문으로 엄히 다스리자는 주청이었다. 거론된 상대만도 자그마치 40여 명, 그 중에는 내로라하는 양반집 인사에 개국공신의 자제 및 고위대 관도 수두룩했다. 죄명은 남편 배신죄, 창기 빙자죄 그리고 음란죄. 여기에 돈과 곡식이 오간 뇌물수수 및 매음의 정황까지 더해 지니, 풍기문란을 넘어 정치적 숙청과 반목으로 번지는 사태가 예견되었다. 


조정 관료들은 앞 다퉈 ‘감동의 음행’에 방점을 두며 중벌을 강력히 주장했다. 일벌백계로 윤리기강을 다잡는 계기로 삼자는 취지였다. 이에 세종은 감동을 변방의 관비로 보내고, 상대한 남성들은 곤장이나 파직, 보석 등의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린다. ‘음탕한 여인’의 중죄로 결론지었으니, 이만하면 관료들 체면은 지켜주었거니 싶었다. 그럼에도 유감동의 교수형을 주장하는 항의는 빗발쳤다. 연이은 상소와 「세종실록」에 21차례나 실린 공방 들은 이 사안에 대한 조정 안팎의 심각한 관심과 과도한 반응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대로 유감동은 진정 남자들을 유혹해 타락시키고 사회를 문란하게 한 요망한 여인일까? 사료의 다음 구절은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김여달은 길에서 병을 요양하러 가는 유감동을 만나자 순찰한다고 속이고 위협하여 강간하고, 드디어 음탕한 욕심을 내어 중기의 집에까지 왕래하면서 거리낌 없이 간통하다가 마침내 거느리고 도망하기까지 했으니 완악함이 비할 데가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9월 16일 


유감동의 실절(失節) 경위가 담긴 구절이다. 기록은 그녀를 요부라기보다 강간 사건의 피해자라 전한다. 국가의 관리가 공권력을 이용해 선량한 부녀자를 농락한 성범죄에 해당되는 사안인 것 이다. 사건 이후 가해자가 집으로 찾아와 협박하며 간통을 요구 했으니, 공갈협박죄까지 추가될 수 있다. 정조를 잃고 상대에게 협박까지 받는 사대부가 여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을 터. 치욕을 숨기며 시달리며 살든지 자결하든지. 이 시점에서 감동은 의외 의 행보를 보인다. 


유감동이 중기와 같이 살 때에 김여달과 간통했는데, 후에 남편과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하여 돌아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9월 16일 


자신을 겁간한 남자와 정분이 나기는 힘든 법이다. 그럼에도 감동은 제 발로 가해자를 찾아간다. 아마도 위협에 몰리다 못해 내린 벼랑 끝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집을 나와 김여달과 동거 하던 그녀는 차츰 나름의 생존루트를 모색한다. 스스로 창기임을 빙자해 수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판관, 행수, 부사, 별시위부터 개국공신의 자제들, 조카와 남편 중기의 매부까지... 어쩌면 감동은 이미 실추된 이미지와 명성에 지지 않을 자신만의 삶을 구축하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욕구와 본능을 덮은 허례(虛禮)의 너울을 벗어던지며, 또 자신에게 죄를 전가한 세상과 사족(士族)의 가면을 벗길 작정으로 말이다. 


일이 발각되자 불안해진 관료들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성폭 행사건의 피해자를 풍기문란의 가해자로 몰아가는 마녀사냥에 동참한 것이다. ‘모든 잘못은 유혹한 감동에게 있다’ ‘우리는 그저 멋 모르고 당한 피해자일 뿐이다’ ‘그러니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이렇게 모든 여론이 감동을 향해 비방의 날을 세울 때였다. 한 관료가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지사간원사 김학지(金學知)였다. 


유감동의 추악함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는데, 김여 달에게 강포한 짓을 당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여달이 어두운 밤을 타서 무뢰배와 결당하여 거리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이 관리의 아내인 줄 알면서도 순찰을 핑계로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밤새 희롱했습니다. 유감동이 순종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포학한 짓을 행한 것이 명백하니, 어찌 미천한 무리의 간통처럼 가볍게 논죄하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9월 29일 


그는 김여달의 만행으로 비자발적인 음행의 길에 들어선 감동의 처지를 진언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김여달의 극형과 유감동의 정상참작을 주청하였다. 상소를 귀담아 들었던지 세종은 유감동에게 교수형 대신 노비형을 내리고, 이듬해인 세종 10년(1428) 윤달 4월 1일에는 천역을 면제해 준다. 그러나 천역이 면제된들 추문과 국문 과정에서 감동은 이미 천형을 수천 번 이상 받은 셈이었다. 더구나 김여달은 극형은커녕 오히려 곤장 100에서 80 대로 줄여졌으니, 이래저래 패륜의 주범이란 배역은 여전히 감동의 몫이었다.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극형 상소와 희대의 망부(亡 婦)라는 손가락질, 그것은 사회가 그녀를 통해 조선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순결’에 초점을 맞춘 윤리 제국의 도약을 알리는 신호탄으로서 말이다.  


유감동은 시와 글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나 ‘음부(淫婦)’라는 이유로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재능’과 ‘도덕’이 분리되지 못한 채 여자라는 단일한 이름으로만 평가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사안이었을까?



(2021가을겨울_파탄-2_사진1)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18일 계유 3번째 기사 _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18일 계유 3번째 기사 _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팜 파탈 어우동의 자유와 퇴폐 사이


유감동 사건 발생 53년째인 성종 11년(1480), 당시 장안의 화제는 단연 어우동이었다. 지승문원사 박윤창(朴允昌)의 여식이자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손자인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의 아내 어우동과 사내들의 염문이 술자리와 저잣거리 뒷담화의 최대 이슈였다. 거기에는 왕실 종친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과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를 비롯해 전의감(典醫監)과 내금위 (內禁衛) 등도 다수 얽혀 있었다. 고위관료와 왕실종친까지 연루 된 대대적인 성 스캔들에 조정에서는 서둘러 조사에 착수한다. 


사달은 어우동이 은장이와 수작을 벌였다며 이동이 그녀를 내쫓으면서 비롯되었다. 친정에 머물던 어우동이 계집종의 중개로 남자들과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헌부의 오종년(吳從年)을 필두로 그녀와 잠자리를 했다는 사내들이 속속 나타났다. 단옷날 그네를 뛰다가도, 정원의 꽃을 감상하다가도, 거리를 걷다가도, 어우동과 눈길만 닿으면 바로 동침하더라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했다.  


이근지(李謹之)는 어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단 소문에 찾아와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거짓 고하고 간통했다. 내금위 구전(具詮)은 어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어우동이 정원에 있을 때 담을 넘어 내실로 가서 간통을 하였다.… 밀성군(密城君)의 종 지거비(知巨非)는 어느 날 새벽 어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부인께선 어찌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크게 떠들어서 이웃이 모두 알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오.”라 위협하니, 어우동이 두려워서 마침내 안으로 불러들여 간통을 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122권 성종 11년 10월 18일 


얼핏 어우동의 사음(邪淫)만을 고발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상은 어우동의 음행이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위협과 협박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추문을 꼬투리 잡은 사내들이 너도나도 집적대며 간통을 요구했고, 그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 판국. 더구나 이런 지경에 이르기까지 어우동에게는 억울한 사정도 있었다. 


태강수 이동이 기녀 연경비(燕輕飛)를 매우 사랑하여 그 아내 박씨(어우동)를 버렸습니다.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여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려서 이별하니, 폐단의 근원을 막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박씨와 다시 결합하게 하고, 이동의 죄는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71권 성종 7년 9월 5일 


4년 전 실록은 어우동의 추문이 모함이라 전한다. 기녀 연경비 에게 빠진 남편 이동이 어우동을 내쫓기 위해 고의적으로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당시 자초지종을 들은 성종이 이동을 나무라며 어우동과 재결합할 것을 명했으나, 이동은 끝내 어명을 따르지 않았다. 작첩을 위한 남편의 의도적인 흠집 내기와 친정의 불신, 부풀려진 구설들은 어우동이 사통(私通)하게 된 계기와 그 과정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사연들은 오로지 그녀의 음행에만 초점을 맞춘 심문과정에서 묻혀버리게 된 것이다. 「성종 실록」에 26차례나 언급되며 상간남과 정황을 밝혀내는 과정, 그 것은 한 여인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고역이었을 터다. 성적 호기심과 야릇한 구설의 주인공으로 관심과 눈총을 한 몸에 받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남자들에게 성종은 가벼운 처벌 혹은 석방으로 처결한다. 


그런 그녀에게도 애틋한 상대는 있었다. 남편 이동의 친척이자 왕실 종친인 방산수 이난은 자기 집에서 함께 거하며 부부처럼 지낼 정도로 어우동을 사랑했다. 호탕하며 시를 좋아했던 이난은 어우동의 재주를 알아본 인물이기도 하다. 둘은 몸에 서로의 이름을 새기고 연서를 주고받으며 시상(詩想)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이난은 어우동과의 추문으로 옥에 갇혔을 때도 지극한 애정을 보인다. 그는 ‘예전에 유감동도 너와 같은 처지였으나 석방되었 으니, 너도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어우동을 위로한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어우동은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 


귀양으로 처결하자는 중론을 물리치고 성종이 끝내 사형을 선고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간통이 아닌 강상(綱常)을 무너뜨린 죄라는 이유였다. 여기에는 어우동이 왕실 종친의 안사람이기에 가중 처벌된 부분도 있었지 싶다. 결국 어우동은 종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그렇게 세간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기게 된 어우동, 그녀가 남긴 시구가 가슴을 울린다. 


백마대 텅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白馬臺空經幾歲.

낙화암은 선 채로 많은 세월 지났구나. 落花巖立過多時.

청산이 혹여 입 다물지 않았다면 靑山若不曾緘,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으련만. 千古興亡問可知. 


「부여회고 扶餘懷古」


백제의 백마대와 낙화암을 찾았을 때의 감회를 읊은 시다. 고도古都의 쓰라린 흔적과 망국의 한을 묵묵히 견뎌낸 유구한 청산. 그 모습에서 온갖 구설과 날선 힐난을 의연하게 버텨내는 자신을 떠올렸을까? 망국의 정한과 어우동의 애수가 묘하게 교차된다.



음녀에서 팜 파탈이 된 여인들 


그 시대 유감동과 어우동의 ‘음녀’ 타이틀은 남자들의 성적로망과 남성 중심의 편견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대가 원하는 고분고분한 여인이 아니었기에 짊어진 숙명 같은 것이었다. 실절 후 보인 신체와 욕망에 대한 자유롭고 주체 적인 행보, 운명을 개척하려는 몸부림 또한 흥미와 호기심을 넘어 괘씸죄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삐딱한 시선이 음녀 라는 비아냥으로 돌아온 것이다.

 

두 여인은 이제 현대사회의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섹시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다. 마음껏 본능을 발산하고 거리낌 없이 사랑 하는 자유부인과 팜 파탈로 말이다. 정조의 프리즘을 걷고 음녀의 타이틀을 벗었으니, 그녀들의 어두운 과거는 이제 완전히 보상받은 걸까?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이 시 점에서 그녀들을 바라보는 에로틱한 시선과 섹시 아이콘·팜 파탈이라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다시금 되새겨 보라 한다. 지금 인권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과연 어떤 시각으로 그녀들을 바라봐 야 할지를.


각주 

1) 『용재총화( .齋叢話)』에는 어우동(於于同),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 하였으 며 『송계만록(松溪漫錄)』과 『대동시선(大東詩選)』,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등에는 어우동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대중적 용례에 따라 어우동으로 표기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