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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 겨울호-사랑과전쟁] 혼인-칠거지악 삼불거, 조선의 이혼실태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2-01-07 조회수 : 3520



칠거지악 삼불거, 조선의 이혼실태



1970년대 이후 이혼의 증가는 전세계적인 추세이지만, 한국은 더욱 가파르게 이혼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도 과거와 달리 부부 간의 애정이 식을 경우 사랑 없는 결혼생활에 더욱 회의를 가지고 결혼생활을 지속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아무튼 지금이야 부부 간에 마음이 안맞으면 이혼하면 그뿐이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은 그러한 경우 어떠한 방식으로 처리했을까? 그 시대에도 과연 지금과 같은 이혼제도가 있었는지 한번 거슬러 올라가보자.


글_ 정성희(실학박물관장)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가능했을까?


『예기(禮記)』에 “혼례란 두 성(姓)의 좋은 점을 합쳐 위로는 선조 제사를 받들고 아래로는 후손을 잇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 듯이 조선시대 혼인이란 집안과 집안이 결합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양반가의 경우 혼인 관계를 파탄시킬 때는 개인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부부가 헤어지는 일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어서 한번 결혼하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백년해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특히 여자들은 어릴적부터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돼라’는 부덕교육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에 이혼 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조선에서 이혼을 억제한 배경은 치국(治國)의 근간이 되는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유교에서 남녀 간의 결합을 모든 인간 관계의 뿌리로 여겨 국가의 토대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가정을 보호한 것이다. 또한 부계를 강조한 조선 시대는 혈통에 대한 명확한 계보를 파악하기 위해 중혼(重婚)을 금지하고 일부일처를 옹호했다.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이혼을 억제한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존재했다. 이전 시대와 달리 양반 여성의 재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이 남발될 경우 여성의 처지가 열악해지는 상황을 우려하기도 했다. 양반 여성이 개가의 자유가 없듯이 양반 남성도 함부로 이혼할 수 없는 제약을 같이 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개인의 의사가 무시된 결혼만큼이나 이혼 또한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했고, 이혼에 대한 합법적인 법률조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금과 다를 뿐이다. 지금은 이혼이라는 용어로 통일되게 사용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이이(離異)·출처(出妻)·휴기(休棄)·종부가매(從夫嫁賣) 등 이혼의 방식에 따라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이가 개인의 의지와 무 관하게 국가적 차원에서 강제성을 띤 이혼의 형태라면, 출처나 휴기는 칠거 등의 이유로 남편이 아내를 버린 경우를 말한다. 


조선 시대 이혼이라는 말을 ‘처를 내쫓는다’라는 의미의 출처라고 표현하거나 버린다는 의미의 휴기라고 표현한 것은 남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여자를 내쫓는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 준다. 여성은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이혼은 남편만이 요구할 수 있는 남성만의 특권이었던 셈이다. 남자가 이혼당할 수 있는 경우는 부인을 팔았을 때, 그리고 장인·장모를 구타하거나, 장모와 간통했을 경우 등에만 한정되어 부인한테 쫓겨나는 남편은 거의 없었다. 


그 외 이혼은 아니지만, 소박이라 하여 집안에서 별거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소박에는 남편이 아내를 내쫓는 외소박과 반대로 부인이 남편을 내쫓는 내소박이 있는데,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에는 주로 남편에 의해 부인이 소박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박은 행실이 나빠서 남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 부인이 추녀일 경우가 많다.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한 풍습이 빚어낸 불행인데, 이럴 경우 남편은 부인을 소박놓고 애 첩에 빠져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소박은 생이별이나 사별과 다름이 없어 소박맞은 아내들은 평생 뒷방차지 신세가 되어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늙어 가야 했다. 간혹 소박당한 여자들 중에는 소박이 부부 간의 궁합에 원진살이 낀 탓이라 생각하여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다니며 살풀이를 하는 등 갖은 치성을 다하여 소박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ELIZABETH KEITH THE PRINTED WORKS 1917-1938    Pacific Asia Museunm    (2021가을겨울_파탄-3_사진1)엘리자베스 키스 판화 전시 포스터 _ 국립민속박물관

엘리자베스 키스 판화 전시 포스터 _ 국립민속박물관 혼례복을 입고 족두리를 쓴 신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칠거지악과 삼불거 


부인에게 내쫓길 이유가 별로 없었던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 들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일곱 가지 죄목에 해당할 경우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칠거지악에 해당 하는 여자란, 


시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여자

아들을 못 낳은 여자

음란하고 투기하는 여자

나쁜 질병이 있는 여자

말이 많은 여자

도벽이 있는 여자


를 말한다. 아들을 못 낳고 투기하며 말이 많은 여자는 내쫓겠다는 칠거의 논리는 조선시대 여성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칠거지악 규정은 말하자면 이혼을 위한 구실이었다. 얼마든지 부인이 마음에 안 들면 칠거지악으로 트집을 잡아 내쫓을 수 있었다. 반면 부인에게는 남편을 내쫓을 자유와 권리는 없었다. 칠거지악에 대한 규정이 너무도 가혹하다 보니 한말 고종 때에는 자식이 없다든가 말썽이 많다고 해서 기처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하여 오거(五去)를 이혼 기준으로 삼았고, 자녀가 있는 사람은 여하간 이혼을 못한다 하여 삼불거를 사불거로 하기도 했으나 원칙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칠거지악이야말로 악법 중의 악법이었지만, 이 악법에도 구제망은 있었다. 칠거의 사유로 남편은 아내를 소박할 수는 있었지만, 이혼이라는 것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남녀 쌍 방의 애정이 아닌 가문과 가문간의 결혼은 더욱 이혼이 어려웠다. 더욱이 다음과 같은 ‘삼불거(三不去)’에 해당하는 여자라면 비록 칠거에 드는 여자라 해도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유교 윤리의 정서였다.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

부모의 3년상을 같이 치른 아내는 버릴 수 없다.

늙고 의탁할 데 없는 여자는 버릴 수 없다.


부부 간의 애정보다도 도의를 중시한 삼불거는 『대명률』에 명시되 어 있을 정도로 철저히 이행되었다. 칠거지악은 사실 우리나라의 이혼 풍속이 아닌 중국의 풍속이었다. 때문에 무조건 이를 기준 으로 아내를 버리는 것이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면도 있었다. 따 라서 칠거지악 못지않게 삼불거도 중요시하여 절충하고자 했다. 


이혼이 쉽지 않은 것은 또한 국가의 입장이 보수적이었기 때문 이기도 했다. 양반들의 이혼을 금기시하여 아예 국법에 이혼 조문이라는 것이 없었고, 따라서 간통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국가의 입장이었다. 특히 양반들은 아내와 이혼하려면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아 내야 했기 때문에 이혼이라는 것이 쉽지 않았다. 칠거지악의 사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혼의 증가를 염려하여 되도록이면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반면 서민들은 자율적인 합의 이혼이 가능했다. 


이혼을 가능한 한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태종 때 장진이라는 사람은 부인 김씨가 악질에 걸렸다고 하여 다른 여자에게 새장가를 들었다가 처벌받았다. 세종은 아들도 못 낳는다며 처를 내쫓은 대신 이맹균을 파직시켜 귀양 보내기도 했다. 더구나 태종 때 김봉종은 5촌 시숙과 간통한 부인을 내쫓았는데 도리어 장 80대를 맞았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여성의 정절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간통은 당연히 이혼감이었다. 게다가 남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부인이 칠거의 죄를 저질렀다고 따지고 들면 왕의 허락이라는 것은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이혼이 왕의 허락을 통해 가능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일반적으로는 한 집에 살면서 서로 보지 않는 별거가 많았다. 이혼으로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보다는 애정 없는 부부 생활을 하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의절이혼과 역가이혼 


조선 시대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강제이혼이라는 것이 있었다. 의절이혼과 역가이혼이라고 불리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타율적인 강제이혼이 그것이다. 의절이혼란 의절의 사유가 발생했을 때 행해지는 강제이혼이다.


역가이혼은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역모와 관련되었을 때에 하는 강제 이혼을 말한다. 강제적이었던 만큼 하기도 쉬웠던 이혼이었다. 의절이혼의 사유는 남편이 부인의 조부모·부모 등을 구타 및 살 해하는 경우, 그리고 장모와 간통했을 경우다. 이런 경우 부인은 남편과 의절이혼을 할 수 있었다. 반면, 부인은 남편의 조부모·부모를 살해 및 구타하는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욕설하는 경우에도 이혼을 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친족 누구와도 간통 하면 이혼이었다. 또한 부인이 남편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경우도 물론 모두 의절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었다. 


의절이혼이라는 강제이혼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훨씬 불평 등한 법적용을 받았다. 특히 남편과 달리 처가 간음을 했을 경우는 범간율에 의해서 벌을 받는 동시에 의절이혼의 사유가 되어 무조건 이혼이었다. 그러나 간통죄보다도 더 무거운 처벌을 받은 것은 남편의 조부모나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을 했을 경우였다. 이는 정절보다 며느리의 도리가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의절이혼 가운데에서 가장 남녀차별이 심한 것이 부부 간의 구타였다. 말하자면 남편은 아내를 때려도 되지만, 아내가 남편을 때리면 이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남편의 폭력으로 인한 법적 이혼은 성립하지 않았던 반면, 아내가 남편을 구타하면 장 1백 대 를 맞고, 남편이 이혼하겠다고 하면 이혼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숙종 때 유정기란 사람이 부인에게 맞았다고 하여 이혼 을 청구한 일이 있었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유정기의 부인인 태영이라는 여자는 “남편을 때리는 기가 센 여자”였다고 한다. 이 사례로만 보면 아내들이 남편에게 억압당하며 산 것만은 아닌 듯싶지만, 사실상 반대로 부인을 죽을 지경으로 때렸다고 해 서 이혼당한 남편은 없었다. 


이러한 불평등한 이혼 조건 속에서 여자 쪽에서만 할 수 있는 의절이혼이 있었다. 바로 남편이 아내를 꾀어 다른 사람과 간통시 키는 경우다. 이런 일은 양반과 천민 사이에 있었는데, 상전의 압력을 못 이긴 종이 자기 아내에게 상전의 말을 듣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이럴 경우 부인은 남편에게 의절을 요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얼마나 의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엄연히 국가 법상 이혼의 사유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의절이혼은 인간으로서는 저지르면 안되는 치졸한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양반가에 서는 별로 없었지만 천민들 사이엔 자주 있었다. 


한편 처의 집안이 반역죄를 범했을 때, 남편이 자기와 자기 집안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처와 이혼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을 역가이혼이라 하며, 이 이혼은 매우 쉽게 이루어졌다. 반역죄는 친가·처가·외가 등 구족이 멸문당하는 화를 입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비롯하여 반역죄로 파직당하 거나 죽음을 당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는데, 그런 집안의 딸은 이 혼을 당해서 친정으로 되돌아오는 수가 많았다. 비록 아내를 사랑할지라도 기처(이혼)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입고 죄를 받았기 때문에 남편 입장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흐른 뒤 누명이 벗겨질 것을 기약하지만, 대개는 그대로 헤어지고 마는 슬픔을 겪는다. 선조 때 상신 김응남과 홍가신은 이호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는데, 이호가 정여립의 역모에 연좌되자 이혼을 청구했고, 환서 권 반의 손자 권제는 원종경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괄의 반란 사건으로 원종경이 처형당하자 부인과 이혼하여 충신으로 칭찬 받았다고 하니, 인지상정보다 소중한 것이 명분이었던 세상이었 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가이혼에는 왕도 예외가 아니어서 중종의 비 단경왕후가 친정아버지 신수근의 실각으로 말미암아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왕과 강제로 이혼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폐위로 남편인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 자리에 올랐으나, 아버지의 연좌로 인해 일주일 만에 폐비가 되었다.



할급휴서와 사정파의


양반들이 이혼하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서민들까지 왕의 허락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서민들은 양반과 같은 정치적인 연좌도 없었고 재혼도 비교적 어렵지 않았으므로 순전히 부부 간의 합의에 따른 파경이 많았다. 


양반 부녀자들은 재혼이 힘들고, 더구나 결혼은 가문 간의 약속이기 때문에 애정에 문제가 있어도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했지만, 서민층 부녀자들은 이 같은 제약이 덜했으므로 상대적으로 이혼율이 높았다. 유교적 교화로 재혼을 기피하는 현상이 서민층 부녀자들에게까지 보급되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설혹 이혼녀 가 되었다 하더라도 ‘보쌈’과 같은 탈출방법이 있었고, 양반 부녀자들에 비해 제약도 없었으므로 재혼이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서민층에서도 이혼 사유는 대개 칠거지악이었는데, 절차상 ‘사정파의(事情罷議)’라는 부부 간의 합의이혼을 거쳐 헤어졌다. 이때 남편이 부인에게 이혼 증서로서 ‘할급휴서(割給休書)’라는 것을 주기도 했는데, 말하자면 재혼허가증이었다.


‘사정파의’는 이혼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였을 때,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혼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얘기하고 서로 승낙하는 합의 이혼을 말한다. 파의란 우리말에 “일이 글러서 마지막”을 의미한다. ‘사정파의’는 표면적으로는 합의 이혼을 뜻했다고는 하지만, ‘사정파의’를 종용해오는 남편의 요구를 거절하면 자동적으로 버림을 받았다. 결과적으로는 남자들이 일방적으로 처를 버리는 기처행위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할급휴서’는 이혼할 때 받는 깃저고리 조각이다. 이 조각을 ‘휴서 또는 수세’라고 하며, ‘할급휴서’를 속칭 “수세 준다”고도 한다. 수세란 고어로 ’이혼 증서‘란 뜻이다. 대개는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데, 서로가 헤어지기는 싫으나 남의 이목이 무서워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딱한 형편일 경우에 여자의 장래를 위해 주는 경우가 많다.


이 휴서는 탈출구가 없는 소박맞은 여자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숨 쉴 구멍이었다. 이 물증을 가진 여인들은 개가가 묵인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휴서를 주지 않으려는 남편과 받으려는 부인 사이에 실랑이가 종종 벌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히 휴서를 받은 소박녀들은 이 세모꼴의 옷섶을 들고 성황당 이른 새벽에 자신을 책임질 운명의 남자를 만나기 위해 서성거렸다. 남녀가 이혼할 때 주는 이혼 증서는 중국에서는 ‘이연장(離緣狀)’이라 하여 성문화되었으나, 우리나라는 단지 이러한 물증만이 있었다.



이혼당한 세종의 며느리들


빈번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조선시대에 이혼은 왕을 비롯 하여 일반 서민까지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었다. 게다가 남편이 가만 있다고 하더라도 부모 입장에서 며느리를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 역대 왕들 중 며느리를 두 번이나 쫓아낸 왕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누구보다도 많은 업적을 남긴 왕으로 유명한 세종대왕이다. 그러나 그는 명성과 걸맞지 않게 개인적으로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간의 불화, 그리고 많은 아들을 두었지만 수양대군의 찬탈과 함께 죽임을 당해야 했고, 며느리 복도 없는 편이었다. 문종이 세자시절일 때 이미 두 명의 부인과 이혼을 했기 때문이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아주 어려서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일찍 혼인했다. 그러나 학문을 좋아하고 정사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서인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생과부 신세를 한탄하다 폐위당한 부인이 둘이나 되었다. 문종이 세자시절, 그의 첫째부인은 김씨였는데, 문종이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자 압승(壓勝)이라는 술법을 사용하다 들켜 폐위되고 말았다. 압승은 소위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이라고하는데,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발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자신이 사랑을 받게 되고, 상대방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씨는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하다가 발각되었다.


세종은 뒤이어 봉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했는데, 그때 세자의 나이 14세였다. 그런데 세자와 봉씨는 금실이 좋지 못했다. 후사가 없어 걱정을 한 세종이 마침내 3명의 후궁을 더 맞이했다. 후궁에 대한 질투와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봉씨는 마침내 궁궐의 여종 소쌍을 사랑하게 되었다. 마침내 궁궐은 세자빈과 소쌍이 같이 동침한다는 소문으로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세종은 이미 세자빈을 한 번 내쫓은지라 웬만하면 봉씨를 눈감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소쌍을 신문한 결과 세자빈과 같이 옷을 벗고 남녀의 성행위를 그대로 따라한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세종은 눈물을 머금고 봉씨마저 폐출하고 말았다.


그런데 궁녀 간의 동성애 행위는 조선 초기에 꽤 많이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세종은 봉씨 사건이 있기 전에 궁녀들의 동성애가 만연한 사실을 알고 발각시에는 장 60대 이상의 벌을 내리도록 했다. 하지만, 이 벌칙을 내리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애로 쫓겨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세종은 봉씨의 동성애 사실은 숨기고, 성질이 질투하며 아들이 없고, 또 노래를 부른 네댓 가지 죄목으로 내쫓았다.



‘환향녀’에 대한 이혼 청구소송 


정조 없이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는 여자를 속칭 ‘화냥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화냥년이란 말은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 이후 실절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 즉 ‘환향녀(還鄕女)’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조선시대 환향녀들은 정조를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이혼 청구를 받은 여성들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자를 붙잡기만 하면 남이 옆에 있는 것도 아랑곳없이 욕을 보이고, 집단 강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전국의 남편들은 정절을 잃고 돌아온 부인들에 대해 불쌍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이혼하고 새장가를 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왕의 이혼 허락이 있어야 했다.


마침내 전국의 실절녀 남편들이 모여서 선조에게 무더기로 이혼 청구를 올렸다. 그런데 선조는 “이혼을 요청한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실절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허락할 수 없다”며 묵살해 버렸다. 선조의 이 같은 방침으로 실절한 부녀자들은 간신히 이혼을 면했으나 남편들은 모두 첩을 얻어 부인을 멀리했다. 이와 같은 일은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에도 마찬가지였다. 병자호란 때는 피해가 더욱 심했는데, 주로 북쪽 지방에 사는 여인들이 많이 끌려갔다. 특히 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미인이 많아 벼슬아치, 양반의 처 할 것이 없이 무차별로 끌려갔다. 포로로 끌려간 여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청이 요구하는 몸값을 치르고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대부 집안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수백, 수천 냥을 요구하여 제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절식하여 생명을 끊거나, 지불할 능력이 없어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돈을 지불하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의 처지도 돌아오지 못한 여자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이때 돌아온 여성은 실절하고도 고향에 돌아왔다 하여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리면서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병자호란 후에 돌아온 부녀자들의 남편들도 이혼을 요구했는데, 선조와 마찬가지로 인조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첩을 얻도록 절충안을 제시하자 양반 남편들 모두 첩을 얻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이혼 청구를 요구하여 허락받은 경우도 있었다. 영의정 장유의 며느리가 강화도에서 청군에게 붙잡혔다가 속환되어 왔지만, 실절했다 하여 시부모로부터 이혼 청구를 당했다. 이 이혼 청구는 처음엔 인조의 허락을 받지 못했는데, 장유가 죽은 후 그의 아내 김씨가 ‘환향녀’라는 이유로는 며느리를 내쫓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시부모에게 불손하다는 칠거의 이유를 덧붙여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다. 이것이 선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강조된 끝에 이루어진 이혼이었지만, 한편으로 시부모에게 불손한 며느리는 이혼당할 수 있다는 사례가 될 수 있는 판결 이었다. 이 사건이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으나, 이미 결정된 판결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