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월간문화재

[2022 봄, 여름호-전설의고향] 신성도 마성도 먹성에 깃든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7-14 조회수 : 1458
신성도 마성도 먹성에 깃든다
TV 프로그램 <전설의 고향>을 대표하는 에피소드라면 <덕대골>이 단연 첫손에 꼽힐 것이다. 다리가 잘린 처참한 모습의 귀신이 외다리로 뛰며 “내 다리 내놔”를 외치던 장면이 강렬하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덕대골> 귀신은 고통을 느끼는 몸으로 존재한다. 마치 사람같다. 그래서 무섭다. 사람 같은 귀신은 <쥐 둔갑 설화>에도 등장한다. 손톱을 먹고 변신한 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닮아서 더 무섭다. 사람 같은 귀신이 등장하는 이들 설화를 통해 변신과 먹성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본다.
글 이은우(성신여자대학교 교양학부 강사)
동자삼 설화

<전설의 고향>은 1977년부터 12년간 방영된 장수 프로그램이다. 1989년 프로그램이 폐지된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여름밤의 더위를 물리는 납량특집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른바 전설의 레전드 편으로 손꼽히는 에피소드를 떠올리자면 처참한 모습을 한 시신이 외다리로 껑충껑충 뛰며 “내 다리 내놔”라고 외치는 장면으로 유명한 <덕대골>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 방송한 에피소드 <동자삼>을 1996년 리메이크한 것으로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채록되어 전하는 <시체로 변신한 동자삼(童子蔘)>이라는 설화가 출처이다. 내용은 이렇다. 남편이 위중한 병에 걸렸지만 백약이 무효하던 중, 지나가던 시주승에게 덕대골에 초분한 무덤에 가서 시신의 다리 한쪽을 잘라 삶아 먹으면 낫는다는 비법을 듣는다. 게다가 마침 새로 들어온 시신이 있으니 오늘 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단다. 그날은 마침 천둥과 번개가 치며 비가 쏟아져 달빛 한 점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었다.

아내는 너무도 무서웠지만 남편을 살리려는 일념 하나로 덕대골을 향한다. 아직 부패하지 않은 시신을 더듬더듬 찾아 그 다리를 잘라서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다리를 잃은 시신이 “내 다리 다오”라고 외치며 외다리로 껑충껑충 뛰어 아내를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돌아온 아내는 가마솥에 시체의 다리를 고아 남편에게 먹였다. 다음날 아침 남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가마솥에는 먹다 남은 동자삼이 있었다고 한다. 왜 하필 다리를 잘랐을까? 덕대는 본래 아이가 죽었을 때 그 시체를 가마니에 싸서 나무 위에 선반(덕)을 매어 올려두는 것으로 장례를 대신하던 풍습을 일컫는 말이다. 아이가 아니더라도 무연고자나 전염병에 걸린 시신처럼 제대로 된 장사를 치를 수 없는 경우에는 덕대로 무덤을 대신했다. 덕대골은 그런 덕대가 여럿 있는 곳일 테니 무섭기로 치면 공동묘지보다도 몇 배는 더 무서운 공간이다. 덕대는 다른 말로 ‘덕다리’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일종의 동음이의 현상이 이루어져 하필 다리가 잘린 시신이 출몰하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터이다. 동음이의의 기대는 건강을 회복하고 쾌유하는 것을 병석에서 ‘일어나다’라고 하는 말처럼 병을 훌훌 털고 ‘다리’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한 숟갈쯤 들어갔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동자삼 설화>는 여럿인데, 대개 병든 부모(혹은 남편)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사람을 먹으면 낫는다는 비법을 듣고 기꺼이 자식을 죽여 약으로 삼으려 한다. 그 효성에 감복한 하늘이 아이를 대신하여 동자삼을 내렸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동자삼은 병든 가족을 살리기 위해 참척(慘慽)의 희생을 자처하는 이의 착한 마음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인 셈이다. 그러나 이 감동적인 결말의 이면은 덕대골의 무덤만큼이나 어둡고 축축한데, 바로 이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행위를 가리키는 말인 카니발리즘은 대기근이나 조난과 같은 재앙 속에서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선택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주술적인 목적으로 행해진다.

주술과 먹성

주술은 원시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영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그의 저서 『황금 가지』에서 주술은 사물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통할 수 있다는 공감의 법칙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마치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달이 지구의 바닷물을 끌어당겨 밀물과 썰물을 만들어 내듯이 말이다.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현실의 세계에서도 일어난다고 여기는 이러한 믿음에서 두 가지의 주술이 만들어진다. 유감주술(類感呪術)과 감염주술(感染呪術)이 그것이다.

유감주술은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는다’라 하여 결과는 원인과 닮았다는 믿음이다. 사극에서 후궁이 중전을 해치기 위해 중전의 화상을 구해놓고 활을 쏘는 것이 바로 유감주술이다. 인삼의 약효가 탁월한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유감주술의 성취를 바라는 그림자도 은밀하게 깔려 있다.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축소한 것처럼 생겨 그 이름도 ‘인삼(人蔘)’으로 지은 이것을 먹는 행위는 일종의 유사 식인 행위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심청전』에서 뱃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심청의 목숨을 바치듯이, <동자삼 설화>에는 생명을 제물로 바쳐 다른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고대 인신공희(人身供犧)의 주술이 일어난다. 그 주술이 아비나 남편을 살리고자 자청한 것이라 하여 효행이나 절행이라는 중세 유교의 윤리가 반영된 것도 같다. 동자삼이라는 명칭에는 주인공의 소중한 어린 자식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아울러 아이가 갖는 왕성하고 활기찬 생명력을 대표하기도 한다. <덕대골>, <시체로 변신한 동자삼>이 기억에 남는 가장 큰 이유는 외다리로 겅중겅중 뛰어오며 “내 다리 다오”라고 고통스럽게 호소하는 시신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섭고도 생생한 공감각적 이미지인가. <시체로 변신한 동자삼>은 살인과 식인이라는 영약(靈藥)의 잔인한 정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감염주술은 ‘한 번 접촉했던 것은 나중에 떨어지더라도 계속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뱃속 아기의 몸을 이루고 있던 태반과 탯줄을 태어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태항아리[태옹(胎甕)]에 모셔 소중히 보관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비록 소임을 다하여 떨어진 신체의 일부이지만 이것을 획득하면 원래의 주인의 몸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감염주술을 실행하기 위해 사용되는 대표적인 수단은 바로 손톱과 머리카락이다. 파푸아뉴기니에 있는 뉴브리튼 섬의 원주민들은 매일같이 바닥을 쓸며 집안 청소를 깨끗이 했는데, 그 이유가 청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내 손발톱이나 머리카락을 주워다가 주술의 도구로 사용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였을 정도이다. 감염주술은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해리포터』에도 통용되는 마법이다.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게 해주는 ‘폴리 주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발과 같은 변신할 사람의 신체의 일부를 넣어야 한다는 설정이 그러하다.

백자 태항아리,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쥐 둔갑 설화

‘밤에 손톱 깎지 마라’는 우리나라의 옛말 역시 여기에서 유래한다. 어두운 데서 손톱을 깎다가는 자칫 다치거나 곪을 수 있어 위험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 여겼던 유교적 가르침도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쥐 때문이다. 어둡다고 깎은 손톱을 함부로 버렸다가 쥐가 물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 일어난다. 쥐가 만드는 폴리 주스의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고전소설 『옹고집전』으로 도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쥐 둔갑 설화>라 하여 우리나라 전 지역에 다수 전해진다.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날 나와 똑같은 사람이 나타나 나를 행세하기 시작한다. 얼굴 생김새며 하다못해 몸에 난 점의 위치도 똑같고, 행동거지며 버릇까지도 어찌나 똑같은지 부모도 자식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한다. 심지어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아내마저도 진짜를 알아보지 못하고 가짜에게 속아 ‘나’를 내쫓는다. 사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 아니던가. 게다가 나랑 똑같은 사람이 나타나 내 집, 내 가족을 차지하고 있다니, 무섭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한참을 떠돌며 고생하다 만난 조력자는 고양이 한 마리를 구해서 가보라는 비법을 알려준다. 배운 대로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다시 귀가하자 놀랍게도 가짜 ‘나’가 깜짝 놀라 정신없이 도망가려다 정체가 밝혀진다. 그것의 정체는 쥐였다. 쥐가 함부로 버린 ‘나’의 손톱을 주워 먹고 변신하여 내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랬던 쥐가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고양이를 만난 나머지 깜짝 놀라 자신의 정체가 그만 탄로 나고야 만 것이다. 설화에 따라 때로는 손발톱이 아니더라도, 진짜 ‘나’가 집을 떠난 사이 내 몫의 밥을 먹었던 쥐가 변신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술을 써서 둔갑한 것이 아니라도, 때때로 쥐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모 이야기를 떠올리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많은 계모 이야기에서 악독한 계모는 전처의 착한 딸을 눈엣가시로 여겨 모함한다. 딸이 부정한 행실을 저지른다는 누명을 씌우는데 이때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바로 쥐이다. 부엌에 드나들던 쥐를 잡아 꼬리를 자르고 껍질을 벗겨 딸이 자는 이부자리 속에 미리 넣어두고는 그 끔찍하고도 불길한 핏덩이가 바로 부정한 임신과 낙태의 증거라며 몰아세운다. 몇몇 조작이 있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쥐의 형태는 가족들의 눈에는 영락없는 태아, 즉 사람으로 보인다. <쥐 둔갑 설화>에서만큼 온전한 변신은 아니지만 이러한 경우도 유사 변신으로는 인정해 줄 만하다.

이렇듯 쥐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재주를 갖고 있다. 이는 아무 동물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특별한 능력이다. 우리 설화 속에서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 중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동물은 결코 많지 않다. 얼추 꼽아도 호랑이, 곰, 뱀(용), 여우, 멧돼지 등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이 지닌 능력이 만만치 않다. 산신(山神)으로 여겨지는 호랑이, 각각 고조선과 후백제의 건국신화 주인공의 부모인 웅녀(곰)와 야래자(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은 원광법사 수행을 도운 여우신 등. 이들은 문명보다 야생이 우월했던 아득한 원시 사회에서부터 숭배의 대상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거듭되면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천 년이나 살았던 뱀과 여우는 이제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은 토템으로 숭앙 받던 그들에게 남겨진 신성의 흔적이다.

신성도 마성도 먹성에 깃든다
손진태가 지은 『조선신가유편(朝鮮神歌遺篇)』에 수록된 「창세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시대 십이지신도>,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고작 쥐가 사람으로 변신을 한다니 의아한 일이다. 그러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쥐에게도 신성은 존재한다. 쥐는 십이지신(十二支神)의 하나로 모셔지는데 소뿔에 올라타 있다가 결승 직전 뛰어내려 일등을 차지했다는 설화에서처럼 영리한 면모를 갖고 있다. 쥐의 신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창세신화라고 불리는 「창세가」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창세가」는 함경남도에서 활동하던 무녀 김쌍돌이가 1920년대에 구연한 것으로 이를 채록한 민속학자 손진태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신화는 조금이나마 조선적인 색채를 가진 유일한 창조설화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태초에 미륵이 탄생하여 한데 붙어있던 하늘과 땅을 분리하고 해와 달을 조정한 뒤 이윽고 물과 불을 마련하려 그 근원을 찾는다.

아무도 모르던 물과 불의 행방을 알려 준 것이 바로 쥐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쥐는 쌀뒤주를 차지한다. 생쌀을 먹던 미륵은 쥐 덕분에 물과 불의 근원을 찾아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사람은 생기기도 전의 일이다. 쥐는 사람보다도 먼저 신에게 쌀을 허락받은 영물인 셈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쥐를 가리키는 한자 ‘鼠(서)’를 써서 풍농을 기원하는 부적으로 삼기도 했다는데, 쥐가 다산의 상징인 것도 이유가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이러한 관념과 맥이 같다. 오늘날 쌀뒤주라 하면 잘 도정된 쌀을 보관하는 용도의 가구나 물건을 떠올리지만 과거에는 수확한 쌀을 볏대째로 쌓아 보관하는 일종의 곳간과 같은 기능을 하던 나락뒤주가 있었다. 이 나락뒤주에 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짚이나 나무 대신 함석판을 대기도 하고, 바닥에는 철사로 그물을 엮어 설치하였다. 쌀을 둘러싼 인간과 쥐의 싸움이 제법 치열했던 셈이다. 인간이 쥐에게 풍농을 기원하던 시대는 저문 지 오래다. 쥐는 소중한 음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퇴치해야 하는 존재이며, 꽤 오래전부터는 음식과 상관없이 국가적으로 나서서 무조건 박멸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1985년에 촬영된 김제 장화리의 나락뒤주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온양민속박물관에 소장된 나락뒤주의 모습, 온양민속박물관.
쥐잡기 포스터. 1960년대부터 시작된 쥐잡기 운동은 1970년대에는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확대되었다.
쥐를 가리키는 한자인 ‘서(鼠)’를 써서 풍농을 기원하던 부적, 국립민속박물관.

그림에 등장하는 쥐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찾았는가? 네 작품에 등장하는 쥐는 하나같이 먹고 있다. 그것이 수박이든 당근이든 순무든, 쥐는 항상 무엇인가를 앞발로 움켜쥐고 먹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설치류인 쥐의 앞니는 평생 자라나기 때문에 딱딱한 것을 수시로 갉아야만 적정한 크기를 유지할 수 있다. 딱딱한 손발톱을 갉아먹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쥐가 무엇인가를 붙잡고 끊임없이 갉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먹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쥐의 변신도 그러한데 쥐는 먹어야 변신한다. 손발톱과 머리카락은 몸의 일부이며 나아가 그 몸의 주인인 사람을 환유하는 비유와 주술이다. 마찬가지로 쌀은 음식과 식성의 환유이다. 쥐는 사람을 먹고, 사람과 같은 밥을 먹어서 사람으로 변신한다. 마늘과 쑥을 먹은 곰이 사람으로 변신했듯 말이다. 목숨을 살리자고 시체를 잡아먹던 사람은 귀신을 만난다. 그러나 가족을 살리고자 하는 애틋한 사랑이 인정되어 시체는 영약으로 바뀐다. 밥알을 먹인 쥐는 죽은 아기로 변신하여 소중한 가족을 내쫓았다. 몸(손발톱)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던 사람은 그것을 먹고 변신한 쥐를 만나 쫓겨나는,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일을 겪는다. 허깨비를 만든 마성도 기적을 만든 신성도 먹성에 깃든다.

신사임당, <초충도>, 국립중앙박물관.
최북, <서설홍청>, 간송미술문화재단.
정선, <서과투서>, 간송미술문화재단.
심사정, <서설홍청>, 간송미술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