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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봄, 여름호-전설의고향] 우리의 문화유산 속 굿과 귀신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7-14 조회수 : 1112
우리의 문화유산 속 굿과 귀신
오래전부터 굿과 귀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옛 우리말에 귀신을 굿것으로, 귀신을 섬기는 일을 굿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굿과 귀신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마을굿과 무속굿, 나라굿 등 다양한 굿판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지금부터 살펴본다.
글 나경수(전남대학교 명예교수)
귀신과 굿것

귀신에 대한 논의는 중국의 노장(老莊)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내로라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귀신설, 귀신론을 펼친 바 있다. 방외인 김시습은 독특한 생애사 만큼이나 그의 사상 또한 자유분방하고, 그래서 독특하다. 그의 소설 『금오신화』는 귀신담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다음은 「남염부주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박생이 물었다.

“귀신이란 무엇입니까?” 염왕이 대답했다. “귀신의 귀는 가장 신령스러운 음기를 말하고, 신은 가장 신령스러운 양기를 말한다.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만든다. 그래서 살아 있으면 사람이다, 사물이다 말하고, 죽고 나면 귀신이라 한다. 이치로 따지면 두 가지가 다르지 않다.”

짧은 글귀지만 새길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람만 아니라 사물도 포함된다. 둘째는 생과 사를 이원적으로 나누고 있다. 셋째는 이치로는 둘이 같다는 것이다. 첫째는 귀신의 전제조건으로 생사의 변곡을 겪을 생물이라는 범주를 설정한 것이겠고, 둘째는 이승과 저승이라는 생사관의 확장으로 이어지고, 셋째에 와서는 귀신 역시 인간과 동일하게 성정(性情)을 가지는 존재로 귀결시키고 있다.

혼백을 음기의 혼(魂)과 양기의 백(魄)으로 나누듯, 귀신 역시 각각 음양(陰陽)의 기운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분절 욕구가 강한 지식인들의 형이상학적 담론과는 달리 인고의 삶을 영위했던 일반 사람들 입장에서는 귀신을 길흉화복(吉凶禍福)의 근원으로 보면서 제액초복(除厄招福)과 벽사진경(闢邪進慶)의 방식으로 귀신과의 거리를 늘 산정해왔다. 우리말 고어로 귀신을 굿것(또는 귓것)이라 하고, 그를 섬기는 일을 굿이라 했다. 굿이 구경 또는 구경거리로 파생적 의미를 가지는 것도 경건한 고등종교의 그것과는 달리 자연종교의 의례는 소위 난장(orgia)의 판이 벌어지는 까닭이다.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귀신과 그 신앙적 측면을 더듬어 본다.

마을굿에서의 귀신

진도지역에서는 독특한 ‘도깨비굿’이 전승되고 있었다. 요즘 코로나19 정국처럼 전염병이 돌 때면 마을 부녀자들만 참여하여 마을 밖으로 역귀(疫鬼)를 내쫓는 굿판을 벌였다. 월경의 혈흔이 낭자한 속곳을 장대 높이 매달고 앞장서면 각종 소음을 내는 물건을 요란하게 두드린다. 온 동네 골목골목을 누비다 마지막으로는 마을 밖 일정한 곳에 이르러 속곳장대를 멀리 내던진 뒤 일순 모든 사람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을 향해 줄달음친다. 속곳장대를 마지막 내던지는 것을 ‘굿낸다’라고 말한다. 같은 지역인 소포마을의 걸군농악, 덕병마을의 거릿제가 끝나고 나면 동구 밖에 피운 짚불 위를 모든 참여자가 뛰어넘어 마을로 내달린다. 모두 굿내기의 일환이고 귀신을 마을 밖으로 방축한다는 의미다. 마을굿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으로서 진도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명의가 분명한 말로 전하는 것은 진도 사례가 유일하다.

일반적 제례가 청신(請神), 오신(娛神), 송신(送神)의 3단 구성을 필수로 하는 바 이 역시 귀신을 저승의 공간에서 맞아들였다가 즐겁게 위무한 뒤 다시 저승으로 보내주는 의례 문법에 따른다. 다만 사람과 귀신의 성정을 동궤로 보았던 김시습의 관념처럼 사람도 선인, 악인이 있는 것처럼, 귀신 역시 다르지 않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가치론적 판단이 작동하게 되면 선신에게는 복을 빌지만, 악신은 방축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공부하기 싫으면 선생님께 “무서운 이야기 해주세요.” 하고 조르던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때 선생님이 해주시던 무서운 이야기의 대부분은 귀신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세계관, 인생관, 생사관 등 온갖 관념의 교육적 기능을 해왔던 시대로 굳이 소급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귀신이라 하면 ‘함께 하면 해를 입는 악령’을 떠올리게 된다. 요즘 여고괴담에 나오는 귀신도 그렇고, 서양의 동화에 나오는 마귀나 사탄과 다르지 않다. 한국의 귀신을 학술적으로 최초 정리했던 무라야마 지준은 그의 저서 『조선의 귀신』에서 귀신을 물리치는 양귀법(攘鬼法)으로 방기퇴귀(防鬼退鬼), 구타법(毆打法), 경압법(驚壓法), 화기법(火氣法), 자상법(刺傷法), 봉박법(封縛法), 공물법(供物法), 공순법(恭順法), 부적법(符籍法), 차력볍(借力法), 약물법(藥物法), 고묘법(顧墓法), 오감법(五感法), 접촉차단법(接觸遮斷法), 음양법(陰陽法), 기타방법 등 16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감금법도 있는데 예의 진도지역에서 여제(厲祭)가 민간에 넘어오면서 음력 정월 보름에 여제당에 귀신을 몰아 가둔 뒤에 농사가 마무리되는 10월이 되면 얻어먹고 다니라고 풀어주는 매우 인도주의적인 방식도 있었다. 마을 앞에 세우는 입석, 장승, 솟대 등도 모두 그렇지만, 무덤 앞의 석물이며, 궁궐 앞에 해치나 사찰에 동서남북 방위신인 사천왕상 역시 형상적인 양귀법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연말에 궁중에서 행하던 나례도 정초에 마을에서 행하던 마당밟이(매구, 지신밟기, 걸립, 걸궁)도 모두 우리말로 ‘굿 내기’의 일종이다.

서산 차리 안택굿에서 하계의 잡귀잡신을 위한 상, 국립민속박물관.
진도 덕병마을에서 거릿제를 모신 후 짚불을 뛰어넘는 굿내기(2019. 2. 18) ⓒ 나경수.
무속굿에서의 귀신

‘처용가’와 ‘처용설화’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문학 유산이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무속의 시원(始原)을 살피는 유용한 자료로 보는 것이 통례화되어 있다. 처용가는 세 종류로 전하는데 향가, 고려가요, 그리고 악장가요이다. 현재 처용무는 유네스코의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그 성가(聲價)가 높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시용향악보』에 다른 무가들과 함께 실린 악장가요로서 “잡처용”이라는 작품이며, 장문의 고려가요 ‘처용가’ 역시 무속신화, 특히 문신 기원 신화로서의 직능적 기원담에 들어있는 삽입가요라는 점이 분명하다. 일부에서는 처용설화를 외설적 이야기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오해요, 원전에 대한 난독의 결과일 뿐이다. 처용의 처를 범한 것은 원문에도 나오듯 역신(疫神), 즉 병에 걸리게 하는 귀신이지 이것이 간통사건보고서는 결코 아니다. 우리말에 병에 걸린 것을 ‘병이 들다(入)’라고 하는 말로 그 표현이 관용되는 까닭을 되짚어 보면 금방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마치 요즈음 바이러스나 인플루엔자 같은 병원균이 몸에 들어와 병에 걸린다고 알고 있듯이, 예전에는 병을 일으키는 귀신이 몸에 들어와서 ‘병이 든 것’, 즉 ‘역귀가 몸에 든 것’으로 믿었던 데서 기인한다. 무속에서 병자를 앞에 두고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로 후려치거나 칼이나 불로 위협하면서 “잡귀야 썩 물러가라!”는 주언을 되풀이하는 것도 모두 처용의 처를 범했던 역귀를 물리치는 것과 통하는 주술적 요법에 해당한다.

특히 무속굿에서 가장 빈도가 높은 굿은 액막이굿과 천도굿이라 하겠다. 액막이굿은 주로 정초에 하는 일종의 제액초복을 위한 굿으로서 초복보다는 제액에 가중치를 두기 때문에 액막이굿이라는 명칭이 통용된다. 제물을 가능하면 걸게 장만하고 잡귀잡신을 잘 대접하여 연간 우환을 막자는 뜻에서 아주 흔했던 굿이다. 천도굿은 이승의 존재를 저승으로 보내는 무속의례적 성격의 의식이다. 지역에 따라서 씻김굿, 오구굿, 다리굿, 망묵이굿, 시왕맞이굿 등 명칭은 다양하지만, 원리는 하나다. 저승으로 천도하지 못한 귀신은 이승을 맴돌면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다. 더구나 그것이 가족의 혼령이라면 해악에 대한 공포는 배가된다. 특히 무속에서는 제 명에 살다 가지 못한 모든 귀신을 잡귀잡신으로 간주한다. 죽음 자체가 극단적인 절연의 슬픔을 짜내는 원인이지만, 흘리는 눈물의 양만큼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의 애정의 끈도 비례한다. 따라서 가족이 죽었을 때 천도굿은 살아있는 가족의 당연한 의무요, 도리였던 것이다. 특히 죽은 가족이 자연사가 아닐 경우, 그래서 천도를 못 하고 구천을 맴돌 경우, 해악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살아있는 가족들이다. 프로이트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산 사람은 망자에 대해 적대감을 느낀다고 했다. 적대감이 아니라 조상숭배와 같은 미덕으로 비록 포장을 할지라도 두려움은 여전하다. 특히 사고사로 죽거나 더더욱 미혼으로 죽은 가족은 한과 원을 풀어달라는 신호를 다른 방법이 아닌 각종 흉사로 전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처녀귀신과 총각귀신을 가장 무서워했으며, 흉한 일 당하지 않으려고 매장법도 달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속인이 집전하는 영혼결혼식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또한 지역별로 명칭은 다르지만, 천도굿이 흔했던 까닭도 저승으로 편입되지 못한 귀신이 끼칠 수 있는, 또는 끼치고 있는 흉한 일을 막고 보자는 것으로서 그 발상이 진지했다.

전국 어디든 공통적인 무속의례의 한 거리는 반드시 무연고의 귀신을 초대하여 배불리 먹인 다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당부에는 길흉화복에서 유리한 입장을 고수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투사되어 있다. 객귀, 잡귀, 거릿신 등의 용어도 있지만, 손님이라는 말로 유화적 제스처를 보이는 예도 있다. 이러한 무속적 귀령관에서 나온 것 중 하나가 바로 문외밥이다. 제사나 명절에 반드시 각 가정에서는 대문 밖에 짚을 깔고 그 위에 각종 음식을 놓아둔다. 구천을 맴돌며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굶주린 무사귀신(無祀鬼神)을 홀대하는 것은 액과 화를 부르는 손짓이나 매일반이다.

무속현장(순천 삼설양굿)에서는 무속인이 잡귀잡신을 가장하여 마당극적 장면을 연출한다. (2007. 10. 20) ⓒ 나경수.
나라굿에서의 귀신

우리나라 나라굿의 가장 원형은 고대 국중대회(國中大會)일 것이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그리고 마한의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의 제천의례 등이 그것이다. 두 가지가 공통된다. 귀신을 위한 행사라는 것과 남녀가 무리지어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것이다. 귀신을 즐겁게 하는 일은 한편 사람도 즐거워야 한다. 오신행사(娛神行事)가 곧 오인행사(娛人行事)와 상통하는 구조다.

고대 국중대회의 유습(遺習)이 삼국시대에 와서 변형된 예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연등회(燃燈會)며, 다른 하나는 팔관회(八關會)이다. 연등회는 도교유래설이 정설로서 태을신(太乙神)을 모시던 중국의 전통적인 의식을 받아들인 것이지만, 팔관회는 우리 고유의 국중대회였다. 연등회와 팔관회의 국중대회적 성격이란 『고려사』에 자세히 기사되어 있듯 왕이 직접 집전한다는 점에서 뚜렷하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33년(572년) 기사에 “겨울 10월 20일에 전사한 사졸들을 위하여 외사(外寺)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개최하여 7일 만에 마쳤다.” 요즈음 현충일과 같이 국가기념식의 시원적 행사로서 전몰장병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개설한 것이었다. 중국에서 양나라 무제(武帝, 재위 502~549)가 502년에 처음으로 제정한 수륙재(水陸齋)와 동기가 같은 셈이다.

고려조에 와서도 팔관회는 계속되었지만, 소위 국행수륙재로 대체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수륙재란 중국에서 기원한 것을 고려 광종 21년(970년) 갈양사(葛陽寺)에서 처음 시행하여 조선조 초까지도 사설수륙재는 물론이며, 국행수륙재도 빈번했다. 소위 삼재팔란(三災八亂)에 시달리다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위 무하는 불교류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초 연등회는 물론 팔관회를 혁파 하자는 논의와 상소가 계속되면서 특히 나라굿으로서의 위령제는 국행수륙재를 그만둔 대신 중국 칠사(七祀) 중 하나인 여제를 태종 원년에 받아들인다. 도성은 물론이요, 전국 주, 부, 군, 현의 소재지에는 소위 1묘 3단(一廟三壇), 즉 공자묘,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을 설치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여제단이었던 것이다. 여제(厲祭)란 여귀(厲鬼)를 모시는 것으로서 『춘추좌전』에서 정자산은 “귀신이 돌아갈 곳이 있으면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면서 특히 갈 곳 없는 귀신은 사람에게 빙의하여 해코지를 한다 하였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부터 국가 제사로 모시던 것을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조에 와서 전국 단위로 시행하게 되었다.

『국조오례의』에 보면 여귀를 전장에서 죽은(在戰陣而死國 재전진이사국), 말에서 떨어져 죽은(遭闘敺而亾軀 조투구이망구), 수재, 화재, 도적에게 죽은(以水火盜賊 이수화도적), 굶주림과 병에 걸려 죽은(罹飢寒疾疫 이기한질역), 담장이 무너져 깔려 죽은(為墻屋之頽壓 위장옥지퇴압), 해충이나 짐승에게 물려 죽은(遇䖝獸之螫噬 우충수지석서), 형벌과 무고로 죽은(陥刑辟而非罪 함형피이비죄), 재물 때문에 죽은(因財物而逼死 인재물이핍사), 처첩으로 인해 죽은(因妻妾而隕命 인처첩이운명), 목매달아 죽은(危急自縊 위급자액), 자손 없이 죽은(没而無後 몰이무후), 아이 낳다 죽은(産難而死 산난이사), 벼락 맞고 죽은(震死 진사),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은(墜死 추사) 등 14종의 횡사를 예거하고 있다. 성황단에는 이들 여귀의 위패를 봉안해두었다가 발고 후 여제를 모시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귀위패 일습이 전남의 한 도서지역에 전하고 있다(관리가 허술하여 주소를 밝히지 않는다). 거기에는 모두 15종의 위패가 있는데, 14종은 『국조오례의』와 일치 또는 대동소이하지만, 섬지방이라서 물고기에게 먹혀 죽은 귀신(漁饒而死神 어요이사신)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다. 우리나라 귀신의 종합적 조감패라 하겠다.

전남의 한 마을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조의 여귀 위패(2015. 2. 10) ⓒ 나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