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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봄, 여름호-전설의고향] 가면극 속의 괴물, 영노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7-14 조회수 : 1747
가면극 속의 괴물, 영노
가면극은 근대이행기 우리 사회의 인물상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위선적이고 무능한 양반, 억압에 저항하는 하인, 이기적인 가장, 첩 때문에 내쳐지는 본부인, 타락한 승려들, 천형이라 불리는 문둥이 등. 이러한 현실적 인물들 속에 유일한 상상의 동물 ‘영노’가 있다. 영노의 정체는 뭘까. 그리고 왜 가면극 속에 등장하는 것일까.
글 김국희(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강사)
밤마리대광대패에서 야류와 오광대로
수영야류 양반과장에서 양반과 말뚝이가 대립하는 장면, 국립무형유산원.
영노가 등장하여 청흑백적 신장을 차례로 잡아먹는다. 가산오광대 영노과장, 국립무형유산원.

가면극은 탈을 쓴 배우가 연행하는, 놀이와 춤과 극의 종합적인 예술이다. 가면극 중에서도 경상남도 낙동강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의 해안에 분포한 가면극을 야류(野遊)와 오광대(五廣大)라고 부른다. 야류는 부산의 수영과 동래, 오광대는 통영, 고성, 가산 등지에서 전승되고 있다. 야류와 오광대를 황해도의 탈춤이나 경기도의 산대놀이와 비교하면 양반과장의 내용이 많고, 영노·문둥이·오방신장이 등장하는 특징이 있다. 야류와 오광대만 놓고 보면 양반·영노·할미과장이 공통으로 들어 있다. 양반과장에서는 양반과 하인 말뚝이가 대립하는데, 말뚝이가 양반을 희롱하거나 양반의 부인과 통정했다며 망신을 준다. 영노과장에서는 비비 소리를 내는 영노가 등장하여 양반을 위협해서 쫓아내거나 잡아먹는다. 할미과장에서는 헤어졌던 할미와 영감이 해후하지만, 영감이 데려온 첩 때문에 갈등하다 할미가 죽음을 당한다.

그 밖에 수영과 통영의 사자과장과 포수놀이는 사자가 담보를 잡아먹는 춤이, 동래·통영·고성의 문둥이과장은 문둥이의 삶의 애환이 담긴 춤이 연행된다. 가산의 문둥이들은 춤과 함께 노름판을 벌여 순사에게 잡혀가기도 한다. 통영의 중과장에서는 중이 소무(小巫)를 희롱하는 춤을 추고, 가산에서는 중이 양반의 첩인 서울애기와 도망쳤다가 잡혀 와 양반에게 혼이 나는 극을 벌인다. 가산에만 전하는 오방신장무에서는 동서남북과 중앙을 가리키는 신장들이 등장하여 벽사의식의 춤을 추는데, 영노가 등장하여 네 방위신을 잡아먹고 황제장군과 대결하는 영노과장이 이어진다. 구전에 따르면 야류와 오광대는 19세기 후반 전문 유랑광대 집단인 합천의 ‘밤마리대광대’와 의령의 ‘신반리대광대’의 영향으로 수영과 진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창설되었다고 한다. 이들 가면극이 황해도의 탈춤이나 경기도의 산대놀이와 유사한 이유를 두 유랑광대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야류와 오광대의 전승 지역인 경남 해안지역은 임진왜란 이후 대일(對日) 방어의 요충지로 수군과 육군의 진영이 있던 곳이다. 이들 아문에 소속된 향리들은 연말 나례(儺禮)에서 놀이를 주관했는데, 그것을 가면극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일례로 오횡묵이 기록한 『함안총쇄록』과 『고성총쇄록』의 연말 관아 나례에서 양반과 중, 할미가 등장하는 가면놀이를 발견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야류와 오광대는 지방의 나례 등의 제의에서 행해진 놀이를 기반으로, 중앙의 산대놀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양반 아흔아홉 잡아먹으면 득천한다
수영야류 영노과장,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영노가 양반을 잡아먹으려 하는 장면, 동래야류 영노과장, 국립무형유산원.

수영야류 양반과장에서 양반과 말뚝이의 대결이 양반의 패가망신으로 끝나면, 제 양반은 물러가고 수양반만 쓸쓸하게 남는다. 이때 검은 보자기를 쓴 영노가 나타나 비비 소리를 내면서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양반을 위협한다. 영노와 양반은 당기고 뿌리치는 싸움을 반복하는데, 영노가 검은 보자기를 벗고 무서운 가면을 드러내면 양반은 경악한다.

양반
니가 무엇꼬!
영노
내가 영노다.
양반
니가 어데서 왔노.
영노
내가 천상에 득죄하여 잠시 인간(세상)에 내려왔다.
양반
니가 무엇을 하는 물건고.
영노
날물에 날 잡아먹고 들물에 들 잡아먹고 양반 아흔아홉 잡아먹고 하나 만 더 잡아먹으면 득천을 한다.
양반
(놀라 떨며) 내가 양반 아니다.
영노
양반 아니라도 잡아 먹는다. 양반 내가 쇠뭉치다.
영노
쇠뭉치는 쫀득쫀득 더 잘 먹는다.
양반
내가 그림자다.
영노
그림자는 그(거)침없이 훌훌 잘 넘어간다.
양반
(진퇴유곡의 양반은 한참 생각다가) 니가 제일 무엇을 무서워 하노?
영노
참양반이라면 호령을 하면 물러가겠다.
양반
옳지 우리 고조 할아부지는 영의정이고 우리 징조 할아부지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우리 조부님은 병조판서를 지냈고 우리 아부지는 부마도위요, 나는 한림학사를 지냈으니 나야말로 참양반이로다. 이놈 영노야 썩 물러가라.
영노
옳지! 그런 양반을 잡아먹어야 득천을 한다. (양반을 잡아끌고 잡아먹는 형용을 하며 퇴장하고, 악사는 급한 템포로 풍물을 울린다.)

- <수영야류> 영노과장

수영야류의 영노는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형체의 괴물로 양반 아흔아홉을 잡아먹고 하나만 더 잡아먹으면 하늘로 오르는 존재이다. 못 먹는 것이 없어 사람은 물론 쇠뭉치나 그림자까지 먹는다고 위협한다. 양반은 참 양반을 무서워한다는 영노의 꾀에 속아 스스로 문벌 있는 양반임을 내세우다 결국 영노에게 잡아먹힌다. 이와 같은 영노의 하강과 승천, 양반 백 명 잡아먹기는 모든 영노과장의 공통된 내용이다.

영노가 먹을 줄 아는 것은 다양하다. 동래야류에서는 똥, 돼지, 소, 풀쐐기, 구렁이 등 잡다한 것을, 통영오광대에서는 뱀, 개구리, 올챙이를, 고성오광대에서는 멸치, 꽁치, 털치나 여치, 송아지 등 바다와 뭍 생물을 가리지 않고 먹는다. 가산오광대의 영노는 모기와 깔따구 같은 작은 벌레까지 잡아먹는다.

영노의 형상 또한 지역마다 다르다. 1960년대 수영의 영노 가면을 살펴보면1 붉은 얼굴에 작은 혹이 산재해 있고, 뚫린 눈과 입의 테두리에는 은지를 붙였다. 귀는 팔자형으로 노끈으로 잡아매었다. 복색은 검은 상의에 붉은 바지를 입고 검은 보자기를 들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귀신 형상에 가깝다. 통영오광대의 영노는 새처럼 긴 입 끝에 두 눈이 있고 눈 위로 귀와 두 뿔이 있다. 탈은 푸른색 바탕에 홍색, 백색, 청색의 무늬가 섞여 있고, 비늘무늬가 있는 긴 보자기로 몸을 감싼다. 고성의 비비는 붉은 얼굴에 흰 점을 찍었고 두 뿔이 달려 있어 도깨비를 연상시킨다. 가산오광대의 영노는 봉산탈춤이나 수영야류의 사자와 모습이 유사하다. 얼굴에는 동그란 눈에 뾰족한 이빨이 나 있고, 둘레에는 갈기 같은 털이 몸까지 덮여 있다.

1964년 수영야류의 영노탈, 국립무형유산원.
현재 수영야류 영노탈, 국립무형유산원.
동래야류 영노탈, 국립무형유산원.
통영오광대 영노탈, 국립무형유산원.
고성오광대의 비비, 국립무형유산원.
영노, 이무기인가 새인가

수영과 동래에서 영노는 ‘날물에 날 잡아 먹고 들물에 들 잡아 먹는 존재’로 하늘로 오르고 싶어 한다. 날물과 들물은 썰물과 밀물을 의미하므로 영노는 바다에 사는 존재가 된다. 바다에서 하늘로 오를 수 있는 존재는 상상의 동물, 용이다. 그런데 영노는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했으므로 용이 되지 못하고 물에 사는 구렁이 즉 ‘이무기’를 가리킨다. 이무기의 다른 이름은 ‘용강철이’ 또는 ‘이심이’이다. 설화에서 이무기는 눈과 귀가 있고 몸은 크기가 산만하며, 손발이 없는 ‘뱀 같은 기둥 통’으로 묘사된다. 얼굴은 맞댈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데, 소나 사람을 한입에 널름 잡아먹을 정도로 입이 크다고 한다. 수영·동래·고성의 영노가 입이 크고 보자기나 통옷으로 손발의 구분을 가리는 것은 이무기의 형상과 유사하다.

한편 영노를 새로 보기도 한다. 야류·오광대의 시원인 밤마리대광대패의 영노과장에는 비비새가 등장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고성 오광대 영노의 이름은 비비이다. 비비를 비롯한 영노는 ‘비비’ 소리를 내며 등장한다. 통영 오광대 영노의 긴 주둥이는 새 부리 모양인데, 영노는 자신을 영노사 즉 영노새라고 말하며, 양반 백 명을 먹으면 용으로 변해 올라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노는 용이 되지 못한 새를 가리키는 말인, ‘강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새가 하늘을 날면 폭우와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일어난다고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속언에는 강철이가 나타나면 근처 몇 리의 풀, 나무, 곡식이 모두 타 죽는다는 전설이 실려 있다. 한편 구비설화에는 이무기가 삼천 년을 살면 기미새가 되고, 이 새가 날아가면 그림자만 비춰도 사람이 죽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간의 연구에서는 영노의 정체를 새나 이무기 중 하나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설화와 문헌을 참고해보면, 영노는 용이 되지 못한 존재로 물에 있으면 이무기이고, 하늘을 날면 강철이 또는 기미새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과학적으로 따지면 자연재해인 폭풍, 해일, 가뭄, 홍수, 강의 범람에 대한 상상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즉 인간은 삶을 위협하는 자연재해에서 우주적 괴물인 영노를 상상해 낸 것이다.

우주적 괴물이 양반 괴물을 징치하다
통영오광대 영노과장,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가산오광대 영노과장,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벌레부터 바다와 뭍의 생물까지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이무기, 지나가기만 해도 모든 땅에 한발(旱魃)이 드는 강철이. 이처럼 영노는 모든 것을 소진하고 태워버리는 우주적 괴물이다. 그런데 파괴는 새로운 창조와 연결된다. 밤마리대광대패가 기반을 두었던 합천군 율지리에 전승되는 가면극 관련 설화에는 영노의 창조적인 면이 드러나 있다.

옛날 어느 해 대홍수 때의 일. 큰 나무 궤짝 하나가 초계 밤마을(지금의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에 떠내려 왔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건져 열고 보니, 그 속에는 가면이 그득하게 들어 있고, 그것과 같이 『영노전 초권(初卷)』이라고 하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그 당시 마을에는 여러 가지 전염병과 기타 재앙이 그치지 않으므로, 좋다는 방법은 다 하여 보아도 별무신통(別無神通)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럴 때 마침 어떤 사람의 말대로 탈(가면)을 쓰고 그 속에 있는 그대로 놀음(演戱)를 하여 보았더니 이상하게도 재앙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뒤로 이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탈을 쓰고 연희하여 왔다고 한다.

율지리 사람들은 홍수 뒤에 오는 전염병과 같은 재앙을 탈놀음으로 극복했다. 탈놀음의 내용이 적힌 책 이름이 ‘영노전’인 이유는 영노가 홍수나 전염병과 같은 재앙을 불러오는 괴물이면서 동시에 재앙을 없애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율지리는 홍수로 낙동강이 범람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민간에서 힘을 모아 ‘활인대’를 축조했다고 한다. 현전하는 활인대불망비는 1757년에 축조하고 1859년에 개축했으며, 개축 당시에 걸립(乞粒)을 다녀 비용을 마련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걸립 때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가면극이 연행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낙동강에 홍수가 난 후 『영노전 초권』에 적힌 대로 탈놀음을 했다는 이야기는 활인대를 축조하기 위한 가면극에서 영노과장을 연행한 것과 연결된다. 홍수의 원인인 영노를 달래어 앞으로 닥칠 재앙을 막으려는 것이다.

야류·오광대의 영노가 자연재해를 상징하는 우주적 괴물이라면, 피지배층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양반은 사회적 괴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노가 양반을 잡아먹는 행위는 우주적 괴물인 영노를 달래기 위해 인간 사회의 폐악인 양반을 제물로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서민을 괴롭히는 양반이라는 사회적 괴물을 없애기 위해 더 무서운 우주적 괴물에 의탁했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