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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봄, 여름호-전설의고향] 21세기 아시아 귀신의 진화 생태학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2-07-14 조회수 : 1089
21세기 아시아 귀신의 진화 생태학
21세기 아시아 귀신이 달라졌다. 이제 귀신은 더 이상 하얀 소복을 입고 인간 앞에 나타나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고 애걸하지 않는다. 그 대신 생사의 경계에서 인간과 직접 공조·협력하여 스스로 해방할 기회를 갖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21세기 포스트휴먼에 관한 성찰이 제기되는 현시점에서 귀신은 인간보다 인간성을 지니며 21세기 사회 정의를 묻는 성찰의 매개로서 존재한다.
글 최기숙(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교수)
생사 경계의 계류자들, 자기 책임성을 지키는 귀신

디지털 플랫폼과 가상현실을 매개로 한 메타버스가 일상에 자리 잡기 시작한 21세기에도 여전히 귀신 이야기가 창작되고 향유된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물질성, 신체성, 영토성을 뛰어넘어 전 지구적 연결성을 선도하는 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생사의 경계를 넘을 수 있다는 고전적 상상력이 부활하고 있다. 디지털미디어의 시대에 귀신 이야기는 멸종하지 않고 오히려 활발히 진화하며 현대의 각종 문제와 연결돼 사회적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추세다. 생사의 경계를 뛰어넘는 귀신은 등장 자체부터 충격적이다. 죽은 존재가 현실로 귀환했을뿐더러 외형적 동일성을 유지한 채, 부식된 형태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귀신은 기억한다. 산 사람이 잊고 덮고 가려둔 것조차 빠짐없이 기억하기에, 타인의 억울함을 담보로 귀신 만들기에 가담한 이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약자를 사지로 몰아 귀신이 되게 한 대가로 출세도 하고 부귀영화도 누릴 줄 알았는데, 은폐한 죄를 고발하러 나타난 귀신에게 단죄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귀신은 은폐된 사실, 조작된 정보,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귀환했다. 귀신을 본 사람이 깜짝 놀라 기절하는 것은 생사를 뛰어넘을 정도의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귀신의 기에 눌렸기 때문이다(머리를 산발하고 피 흘리는 귀신의 무서운 형상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죄의 막강한 힘, 상흔의 참혹함, 어둠 속의 발광체가 되어 자기 존재를 드러낸 귀신의 의지에 놀란 것이다. 완전범죄라고 자만했던 것이 발각되었을 때의 낭패감과 유사하다).

생사를 뛰어넘는 에너지 장력은 실제로는 측정 불가다(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기에 측정 불가이고, 상상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현실화했기에 측정 불가다). 상상적인 귀신 이야기가 21세기 여전히 만들어지는 것은 사느라 바빠서 살펴보지 못한 삶의 현장 어딘가에 억울하게 삶을 빼앗기고 생기를 박탈당한 누군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산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고, 이에 잘 대처해야만 비로소 인간다운 세상이 된다는 공감대가 우리 사회의 윤리적 감수성을 지배하고 있다. 세상이 당신을 버릴지라도 스스로는 결코 자신을 버려서도 방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귀신의 핵심적 메시지다. 귀신은 억울함을 신원하고 생애를 주체적으로 정리할 때까지, 생사의 임계지에 계류된다. 그 사이에 삶의 현장에서 자기 의지를 실현시킬 협력자를 반드시 찾아낸다. 21세기 귀신은 인간과 공조 협력해서 억울함을 신원하는 형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데 일조한다. 귀신과 악수하는 협력자들은 부패한 현실을 정의적으로 복원시키는 실행자다. 이것이 아시아 귀신의 전통적 힘이자, 21세기에 강화된 면모다.

영화 <싱글라이더> 속 한 장면(출처 : 네이버 영화).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한 장면(출처 : tvN).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포스터(출처 : tvN).
귀신은 주체적 단수로서, 집단의 생태계를 유지한다

전통적으로 한국 귀신은 단수로 등장한다. 엄밀히 말해 귀신은 단독자다. 무리를 지어 규모의 힘에 의존하지도 않고, 조직화해서 권력을 부리지도 않는다. 귀신은 단독으로 출현한 주체적 단수다. 그러나 한 인간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에는 생애사에 걸친 복합적 사연이 얽혀있다. 귀신의 몸이 사회적, 법적, 정치적으로 얽힌 복합적 의미체로 해석되는 이유다. 아시아 귀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만들어지는 이유는 전통적 귀신의 생태를 이어받아 ‘인간다움’의 요건을 사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잘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며 생명(삶)과 생기(능력과 자원)를 빼앗았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21세기 귀신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희생되어 잊히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자기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줌으로써 억울하게 희생된 자신을 구제한다.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나 목격자를 깜짝 놀라게 하고 기절시키거나 죽게 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죄지은 자가 지레 놀라 자기 처벌로 사망했을 뿐, 세상의 모순과 부정부패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원혼지』는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자의 귀신이 나타나기만 해도 사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귀신을 보고 죽은 자들은 적어도 자기 죄를 알았기에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이른바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있었다. 21세기에는 자기 죄책감이 없는 사이코패스(개인과 조직 모두를 포함)가 등장해 범죄와 악행에 대한 면죄부까지 탐하는 추세다(사이코패스는 정신적으로 병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죄를 범했으니 정상참작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사회적 동정을 구하거나, 조직은 합리적 시스템으로 운영되니 ‘인간적인’ 감정이 배제되는 게 당연하다며 면죄부를 주는 발상). 그러나 이를 좌시할 수 없다는 상상력이 디지털미디어의 귀신 이야기를 통해 생성되고 있다.

한국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는 천 년 전에 죽어 귀신이 된 장만월이 등장한다. 장만월의 한은 살아서 자기 구제를 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장만월은 호텔 델루나를 경영하면서 비슷한 처지의 존재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게 기회를 준다. 직접 돕기도 하지만, 귀신 스스로 하도록 상상적 시공간을 제공한다. 장만월의 곁에는 마고신도 있고 저승사자도 있다. 생사의 경계에 머물면서 갓 귀신이 된 이들을 돕는 호텔리어도 있고, 어쩌다 이곳에 들어와 온갖 귀신들과 인연을 맺으며 사는 사람도 있다. 21세기 귀신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조 협력체로 활동한다. 이른바 팀플레이로 집단지성을 운영한다. 이들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기 능력을 키우고, 사회 정의를 수호한다. 디지털 성범죄를 단죄하는 스토리, 악플러가 징계 받자 도리어 앙심을 품고 자살해 다시 악업을 쌓는 이야기는 21세기의 신종 범죄를 귀신과 접속해 사회에 경고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에, 자살한다고 해서 삶에 대한 자기 책임성을 회피할 수 없다는 성찰적 인식에 시청자가 공감했다.

김나임 작가의 웹툰 <바리공주>에도 무녀 바리가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하는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바리는 죽은 자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어린 무녀에서 대무당으로 성장해간다. 바리는 귀신의 문제를 혼자 해결하지 않고 무장승, 구미호, 도깨비 등과 공조 협력한다. 이들이 접속하는 귀신은 신분, 성별, 세대, 빈부, 지역, 정체(인간, 동물)별로 다양하다. 이런 설정은 귀신 문제란 인간 문제이며 사회문제라는 생각을 강화한다. 신분, 젠더, 연령 등 불균형한 사회 제도나 인식, 문화 때문에 귀신이 되었기에, 현재는 사라진 사건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현대인들에게 역사를 성찰하는 기회를 주고, 지금의 현실이 미래에 역사화되면 어떤 사안이 모순으로 부각될지 생각하게 한다. 21세기 귀신 서사는 변화하는 현실을 수용하면서 진화하는 한편, 역사를 사유해서 미래를 재구성하는 성찰의 동력이 된다.

귀신들, 주체적으로 해방의 길을 찾다

21세기 아시아 귀신의 특징 중 하나는 생사의 경계 지역에 일정 기간 머물면서 스스로 해방할 기회를 갖는다는 점이다. 사람은 임종 직전에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다는 속설이 있다. 이는 예로부터 전해진 경험적 진술이기도 하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의 임상 체험이기도 하다. 단지 이런 발상이 상상력과 사고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한다. 죽기 전에 전 생애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어떤 일과 장면, 상황과 감각을 기억하게 될까? 21세기 귀신 서사는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림보와 같은 생사의 임계지를 설정한다. 또한 살면서 정말 중요한 가치, 경험, 사람, 반드시 해야 할 일들, 기억하고 싶은 장면 등을 찾을 때까지 죽을 수 없다고 설정했다. 사람으로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으니 죽기 전에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일찍 알아차리면 ‘남들처럼’ 사느라 허덕이지도 않고, 소중한 인생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생사의 임계지에 계류된 귀신 이야기에 담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저승에 가져갈 단 하나의 장면을 찾아야만 죽을 수 있다는 상상력으로 림보의 세계를 만들었다. 죽어서 단 하나의 경험만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인물의 탐색을 통해 관객 스스로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작중 인물이 찾은 장면은 성공, 출세, 부귀영화, 섹스, 가족 만들기, 야망 등이 아니다. 이런 선택을 감독의 개인 취향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실제로 감독이 영화를 위해 사전 취재로 600여 명의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이른바 소소한 행복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대단한 성취로 보일지라도 실제로 행복감을 느끼려면 인간이 인지할 수 있게 해석되어야 한다. 예컨대 로또에 맞는 것 자체가 행복이 아니라,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또는 내가 로또에 당첨될 정도로 운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의 감각, 이제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부푼 마음이 행복이다. 성공 그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성공에 이르기까지 고난을 극복하고 꿈을 이룬 스스로에 대한 격려와 만족감, 성공한 나를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존경받는 느낌이 행복이다. 결혼을 통한 가족 만들기 자체가 행복이 아니라 안전하고 다정한 관계, 영원한 사랑에 대한 기대, 진심을 터놓을 수 있는 친밀한 소통이 행복이다.

호즈미 작가의 만화 <우세모노 여관>이 보이는 상상력도 유사하다. 죽은 자들은 우세모노 여관에 일정 기간 머물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소중한 무언가를 찾아야만 제대로 죽을 수 있다. 가치를 망각하거나 놓친 삶은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는 발상이다. 영화 <싱글라이더>의 주인공은 ‘잘나가는 삶’을 추구하다 좌절해 자살했다. 그가 귀신이 되어 찾은 행복은 가족과 함께 가지 못했던 해변가를 걸어보는 것이었다. ‘그냥 하면 되지’ 생각하지만 먹고살기 바빠서, 또는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현실에 움츠리고 행복 ‘따위’는 구겨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취직하면, 승진하면, 부자 되면, 성공하면) 하려고 했지만, 나중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 게 얼마나 허망하고 어리석은지를 귀신이 되어서야 깨닫는다면 내 삶은 그저 남 보기 좋게 쇼윈도에 내어준 마네킹처럼 생명력을 잃고 만다. 내 삶인데 정작 내가 없는 것이다. 임계지에 계류된 귀신담은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생애 가치, 소중한 일상, 위해 주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21세기 귀신은 삶에 쫓기느라 돌보지 못한 자기만의 삶, 생애 가치를 다시 찾고 돌볼 수 있게 기회를 주는 영혼의 메신저가 되었다.

웹툰 <바리공주>의 무장승과 무녀 바리.(출처 : 카카오웹툰).
영화 <원더풀 라이프>에서 한 망자가 림보에 머물면서.(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싱글라이더>의 주인공.(출처 : 네이버 영화).
귀신, 21세기의 포스트휴먼(Posthuman)

인간은 기억하는 동시에 망각하는 존재이기에, 자신에게 유리한 일들로 기억을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역사를 기록할 권한을 장악해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었던 것과 유사하게,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렇게 한다. 잘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기고, 부족하고 연약한 것은 망각의 장으로 도태시킨다. 이른바 우생학적 권력 장치를 정당화할 때, 현실은 권력과 성공 자본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망각의 자리는 제거된다. 인간의 두뇌 용량은 한정적이어서 무언가를 기억하려면 반드시 망각이 수반된다. 망각 자체가 제거되면 더 이상의 ‘자연스러운’ 기억 생성도 사라진다. 기억과 망각은 공의존 관계다.

귀신 이야기는 이런 면을 인간의 취약성으로 접근한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윤리적으로 불완전하고 신체적으로 허약하기에, 부족한 부분을 강화시켜 미완의 생을 연장시키려 한다. 장기나 신체의 일부를 이식해서 약한 부분을 강화시키고, 수명 연장을 통해 필멸성에 저항하는 것이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의 경향이다. 방향성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다. 강화된 존재로 영생을 누리는 것이 목적이며, 목적을 위한 수단의 개발을 정당화한다. 결국 인간의 불완전성은 불안정성으로 이어진다. 삶은 비틀거리고 인생이 주저앉는다. 영생을 누리면 행복할까? 건강하게 영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모두가 완전한 삶이란 과연 가능한가?

성찰과 사색이 없는 일방적인 기술개발은 인간을 또 다른 위기로 내몬다. 포스트휴먼을 사유할 때, 아시아 귀신의 생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귀신의 억울함에 사회가 공감하지 않으면, 귀신의 귀환 목적은 절대 실현될 수 없다. 귀신이 제기하는 정의적 감수성이 공감을 얻을 때에 비로소 귀신은 사회적 성찰의 대상으로 사유되기 시작한다. 도덕적으로 공감받지 못한 악귀는 퇴치의 대상이 될 뿐, 절대로 신원 대상이 될 수 없다. 귀신 문제를 인간 문제로 사유해 더 나은 삶의 지향점을 찾았던 것처럼, 영생불멸을 꿈꾸며 생로병사라는 ‘자연’에 저항하는 21세기의 포스트휴먼은 공감적 미래 설계를 위해 성찰적 공론장을 마련해야 한다. 번영과 영생의 욕망을 성찰하고 주체적 의지를 가졌던 귀신에 대한 상상력을 참조해야 하는 이유다. 귀신은 인간 이후의 존재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되어서 다시 현실을 돌아본다는 것이 귀신을 둘러싼 상상력의 핵심이다. 21세기 귀신 서사는 죽어서 돌아보지 말고 살아서 때때로 돌아보고 삶을 수정해야,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암시를 준다.

귀신은 죽음 이후의 존재, 즉 포스트휴먼이라는 아시아적 개념의 전신에 해당한다. 서구의 포스트휴먼 상상은 인간의 욕망과 접속해 죽지 않는 삶으로서의 영생, 인간이 일방적으로 낭비한(또는 소비해 버린) 지구를 버리고 우주를 자본화하는 상상력을 강화한다(글로벌 자산가는 이미 우주에 투자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깃발을 꽂아 식민화했던 항해 시대의 제스처가 우주에서 재현되는 것은 시간문제일까). 이와 달리 아시아의 포스트휴먼인 귀신은 언제나 현실을 성찰하게 하고 인간의 의지와 접속시킨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은 정의적 세상을 꿈꾸며 귀환했기에, 귀신의 움직임은 곧 윤리적 세상을 희망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귀신은 약자의 상징이기에 성별, 신분, 나이, 지역, 자본의 사각지대에 빛을 비추는 사회적 발신체의 역할을 했다. 아시아 귀신은 단지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기술을 성취하는 소유 지향적 미래가 아니라, 어떻게 (오래) 살고, 누구와 함께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성찰적 미래를 끌어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