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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옛사람들의 눈에 비친 세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06 조회수 : 697
옛사람들의 눈에 비친 세계
글 오상학(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동양의 세계관을 담은 『천지도』

근대 이전의 전통시대에서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주변 세계는 크게 천상(天上) 인 하늘과 천하(天下)인 땅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이 두 영역이 별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했다. 서양에서는 천상의 세계가 지상의 세계와 분리된 신이 주재하는 영역이지만, 동양에서는 지상의 질서가 천상에 투영되기도 하고 천상의 변화가 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러한 천지 상관적 사고로 인해 하늘을 그린 천문도에 지상의 공간 질서가 표현되기도 하고 땅을 그린 지도에 천상의 별자리가 그려지기도 했던 것이다.

『천지도(天地圖)』는 동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에 따라 하늘은 둥글고 땅은 사각형으로 그렸는데, 둥근 원 둘레에 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28수(宿)를 그려 천지의 상관적 관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사각형 내부에는 중국과 주변 나라를 그려 넣었고 그 외곽에는 목성의 운행 주기에 따라 구분한 12차(次)의 이름이 방위 표시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사각형 바깥에 그려진 별자리에는 할당된 지상의 영역이 있는데 별자리의 변화를 관찰하여 해당 지역의 변화를 예측하는 점성술에 이용되기도 했다.

『천지도』(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천지도』(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 지도』

『천지도』와 같이 하늘과 땅을 같이 그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세계지도는 방형(方形)의 형태로 천하를 표현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긴 이름의 지도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창한 직후인 1395년 『천상열차분야지도(天上列次分野之圖)』라는 천문도를 국가사업으로 제작하도록 했다. 이것의 후속 사업으로 1402년(태종 2년)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지도와 일본 사신을 통해 입수한 일본지도, 그리고 조선의 지도를 합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였다.

지도에는 중앙에 중국이 포진하고 있고 동쪽으로 조선, 남쪽 바다에는 일본이 위치해 있으며 서쪽에는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유럽 대륙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세계지도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려진 모습이 객관적 실재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가 제작된 1402년을 전후한 시기는 유럽에서는 스페인, 포르투갈에 의한 대항해시대가 막을 열기 직전이었으며, 지도학사적으로는 고대의 탁월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가 재생되기 이전이었다. 이 시기 서양의 세계지도는 종교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는 중세 유럽의 세계지도(Mappa Mundi)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다소 왜곡된 형상을 띠고는 있으나 당시의 세계지도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뛰어난 지도로 평가받는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을 온전하게 그린 최초의 지도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유럽 대륙은 어떻게 해서 그려질 수 있었을까? 당시 조선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까? 실제로 조선이 아프리카나 유럽 지역에 갔던 경험이 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대외교류가 활발했던 고려시대의 세계지도를 기초로 제작된 것은 아닐까? 이러한 것들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서양에 소개되면서 지도사가들이 가장 먼저 제기했던 의문들이다. 지도 하단에 수록된 권근의 지문에서 알 수 있듯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두 장의 지도 즉,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기초로 하고, 최신의 조선지도와 일본지도를 결합, 편집하여 만든 세계지도이다. 『성교광피도』는 중국 이외의 지역이 자세히 그려진 지도이고, 『혼일강리도』는 중국 역대 왕조의 강역과 도읍이 상세히 수록된 지도이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그려진 유럽, 아프리카 부분은 『성교광피도』의 것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는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중국 원나라 때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지도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족이 세운 원제국은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확보하여 유럽까지 진출하였는데 이로 인해 동서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는 넓은 사라센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고 성지 순례와 교역 등의 필요에서 지리학과 지도학이 발달하였다. 지도학은 로마시대의 선진적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학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칼리프의 후원에 의해 그의 저서들이 번역되었다. 알 이드리시(Al-Idrisi)와 같은 학자는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을 기초로 원형의 세계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선진적인 이슬람 지도학은 동서문화 교류에 의해 중국 사회로 전파되었고, 중국에서 다시 이택민과 같은 학자에 의해 중국식 지도로 편집, 제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수록된 유럽과 아프리카의 모습은 중국을 거쳐 들여온 이슬람 지도학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원형은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지리 지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지도의 아프리카 부분에 그려진 나일강의 모습과 지명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에서도 볼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고 있는 세계관은 서로 다르다. 이슬람 지도학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지도학을 계승한 것으로 땅은 둥글다는 지구설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천원지방의 천지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일부의 이슬람 지도에서 보이는 경위선의 흔적은 전혀 볼 수 없다. 지도의 형태도 원형이 아닌 사각형의 형태로 그려져 있다. 아울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표현하고 있는 세계는 여전히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입각하고 있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고 조선은 중국 문화를 계승한 소중화(小中華)로 표상된다. 다만 16세기 이후 나타나는 경직된 대외 인식과 달리 중화적 세계관에 기초하면서도 개방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고, 그것이 지도에서도 반영되어 문화적으로 다른 세계까지 자세히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원본 1402년, 일본 류코쿠대본 모사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원본 1402년, 일본 류코쿠대본 모사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 15세기 사본.(출처 : Gallerix online museum)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 15세기 사본.(출처 : Gallerix online museum)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1154년), 영국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도서관.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1154년), 영국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도서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제작된 『천하고금대총편람도』

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열린 세계를 지향하려 했던 조선사회는 16세기 이후 주자성리학이 사회의 운영원리로서 정착되면서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처럼 다양한 국가들과의 교류는 점차 약화되고 중국, 일본 등의 동아시아 일대로 좁혀지게 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세계지도는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지도들이 많다. 조선 초기 세계지도에 그려졌던 아프리카, 유럽은 관심의 영역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김수홍(金壽弘)의 『천하고금대총편람도(天下古今大摠便覽圖)』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세계지도로서 전통적인 화이론(華夷論)적 관점에서 중국을 크게 과장해서 그리고 주변의 나라들은 국명만 표기하는 정도에 그쳤다. 중국 각 지역의 역대 왕조와 역사적 사실을 상세하게 기재하였는데, 역사 부도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지도에서도 천지의 상관적 사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데 중국 각 지역에 주요 별자리인 28수를 배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주자성리학이 정착됨에 따라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문화적 중화관인 화이관이 지배하게 된 데에서 기인한다. 중화(中華)인 중국과 소중화(小中華)인 조선 이외에 다른 나라는 오랑캐인 이(夷)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세계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곳은 중국과 조선 정도이며 그 주변의 나머지 지역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는 바로 이러한 세계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유교적 기준에 입각하여 의미 있는 지역을 선택적으로 그려냈던 대표적인 보기이다. 사상적으로 주자성리학의 안정적인 지배가 계속되던 조선사회는 17세기를 거치면서부터 중국 북경에 갔던 사신들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주로 북경에 거주하던 서양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양의 천문, 지리, 역법 등의 서학서와 마테오 리치(利瑪竇)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페르비스트(南懷仁)의 『곤여전도(坤輿全圖)』와 같은 한역세계지도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서구식 세계지도는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까지 성리학적 화이론에 매몰되어 있던 지식인들에게 오대주로 구성된 세계지도는 자신의 세계관과는 합치될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둥근 지구를 전제로 경위선이 그려진 지도는 천원지방의 세계관에 매몰되어 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선뜻 수용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김석문, 홍대용, 최한기 등 일부의 실학자들은 지구설을 바탕으로 서구식 세계지도를 이해하기도 했다. 특히 최한기와 같은 이는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라는 서구식 세계지도를 직접 제작하여 보급하기도 했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김수홍, 1666년), 서울역사박물관.
『천하고금대총편람도』(김수홍, 1666년), 서울역사박물관.
실학자들이 제작한 서구식 세계지도 『지구전후도』

『지구전후도』는 중국 장정부(莊廷尃)의 『지구도』를 목판으로 중간한 동서 양반 구도이다. 「지구후도(地球後圖)」의 좌측 하단에 간기(刊記)와 제작자가 표시되어 있는데, 1834년 최한기가 지도를 편집하고 김정호가 판각했다. 이 지도는 양반구도로 되어 있는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와 다소의 차이가 있는데, 주변으로 가면서 경선 간격이 넓어지는 『곤여전도』와 다르게 등 간격의 경선으로 그려져 있다. 현재의 반구도에서는 볼 수 없는 24절기가 표시되어 있고, 적도와 황도, 남북회귀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특히 오세아니아 대륙이 남극대륙과 분리되어 있어서 이 지역이 탐험된 이후의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오세아니아 대륙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의 탐험 결과로, 『지구전후도』에서도 오세아니아 대륙이 비교적 원형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 인식과 관련하여 『지구전후도』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 영향력이다. 휴대와 열람에 편리한 소규모 첩의 형식으로 목판 인쇄됨으로써 이전 시기 큰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민간의 지식인들에게 더 많이 유포 될 수 있었다. 국가기관이 아닌 민간에서 제작, 보급함으로써 지도의 대중화를 제고하는 데 일조했는데, 이러한 점은 현존하는 세계지도 가운데 『지구전후도』가 차지하는 수량적 비중을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지구전후도』(최한기, 183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지구전후도』(최한기, 183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전통적 세계관으로 해석한 세계지도 『천하도』

반면에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서구식 세계지도를 해석하려 하였다. 당시까지 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세계는 중국과 그 주변 지역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신대륙, 오세아니아 등은 그들의 전통적 세계관에서는 포섭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 지역은 가볼 수도 없고 실체의 확인도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였다. 이러한 미지의 세계를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이해하려 하였는데, 중국 고대의 신화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괴상하고 황당한 나라들로 이들 지역을 대치시켰다. 『산해경』에 나오는, 눈이 하나 달린 사람들이 사는 일목국(一目國), 몸뚱이가 셋인 사람들이 사는 삼신국(三身國) 등과 같은 기괴한 나라들로 그들 나름의 세계지도를 다시 그린 것이 원형의 『천하도』라 할 수 있다.

『천하도』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모습으로 되어 있고 중심에서부터 내대륙, 내해, 외대륙, 외해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내대륙에는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시 실제로 존재하고 있던 나라들이다. 중앙에는 천지의 중심인 곤륜산이 자리 잡고 있다. 내해와 외대륙에는 『산해경』에 나오는 가상의 나라들이 표기되어 있다. 가장 외곽에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곳에 각각 부상(扶桑)과 반격송(盤格松)이 그려져 있고, 내해의 일본국 밑에는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 등의 삼신산이 그려져 도교적인 성격도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실재와 미지의 세계가 섞여 있는 『천하도』는 17세기 이후 조선의 지식인층에 광범하게 유포되었고 현재에도 필사본, 목판본을 통틀어 십여 종 이상이 남아 있어서 단일 세계지도로는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서구식 세계지도가 일찍부터 조선사회로 유입되어 일부 실학자층을 중심으로 유포되기도 했으나 그 양은 적은 편이었다. 오히려 서구식 세계지도의 역할을 원형의 『천하도』가 대신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밀려오는 19세기 후반에도 원형의 『천하도』는 여전히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세계의 모습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천하도』(18세기), 영남대학교 박물관.
『천하도』(18세기), 영남대학교 박물관.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옛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에 비친 세계를 지도라는 시각 이미지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이는 광활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아울러 자신들이 전혀 접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Terra Incognita)를 지도에 그려 넣으며 새로운 여행을 꿈꾸기도 했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