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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열하(熱河)로 직행한 서호수(徐浩修)의 길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06 조회수 : 682
열하(熱河)1로 직행한 서호수(徐浩修)의 길
한반도로 영토가 확정된 이래로 한국은 주로 중국 대륙을 통해 다른 문화와 교류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원(元)나라가 대도(大都), 즉 지금의 북경(北京)을 수도로 삼고 명청(明淸)이 이를 계승하여 조선으로서는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왕래하는 육로가 중국과 교섭하는 주요 통로였다. 고려와 조선의 숱한 외교 사절이 이 길을 왕복하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문물을 접하였다. 압록강 밖의 대륙은 선진 문화의 근원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한반도에 대해서는 가장 큰 위협의 소재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압록강을 건넌 외교사절은 그 위협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도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다.
글 이창숙(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규장각한국학연구원장)

1790년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간 성절진하사은사(聖節進賀謝恩使)는 열하(熱河)의 피서산장(避暑山莊)3으로 직행한 유일한 사절단이다. 이 생일에는 조선을 비롯한 몽고, 회부(回部, 위구르족), 안남(安南, 베트남), 면전(緬甸, 미얀마), 남장(南掌, 라오스), 금천 (金川, 티벳족), 대만(臺灣) 등 청조 내외의 각국 각족 사절이 모두 열하에 모였다. 이때 서호수(徐浩修)는 부사(副使)로서 외교 임무를 수행하였고, 돌아와 일기체로 정리한 기록이 『열하기유(熱河紀遊)』 일명 『연행기(燕行紀)』이다. 10년 전인 1780년 박명원(朴明源) 사절단을 수행한 박지원(朴趾源)이 열하를 다녀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었지만 이때는 북경에서 열하를 왕래하였다. 서호수는 부사로서 공식 사절이니, 자제군관들의 연행록과는 달리 『열하기유』는 공적인 외교 기록이자 사적인 기행문의 성격을 겸한다. 그의 눈길은 시종 청나라의 현실을 관찰하였고, 돌아와 정리하여 유용한 정보로 가공하였다. 사이사이 개인의 감회가 깃들어 있다. 특히 『열하기유』는 압록강을 건너 열하로 직행한 유일한 연행의 기록이고, 따라서 어느 연행록에서도 볼 수 없는 심양(瀋陽)과 열하 사이의 노정, 그 지역에 대한 견문과 저자의 소감이 들어 있다.

1 [편집자주] 중국 하북(河北) 승덕시의 북부에 위치한 행궁과 그 일대

2 [편집자주] 조선후기의 문신, 실학자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조부는 호조판서 서종옥, 부친은 정조 즉위에 공로를 세운 판중추부사 서명응이다. 북학파 학자로 두 차례의 연행을 통해 청문화의 도입이라는 정조의 내밀한 임무를 수행했다.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3 [편집자주] 건륭제의 여름 행궁[현지명 : 중국 허베이성 청더(承德, 승덕)]

18세기 초기의 피서산장 전경[냉매(冷枚) 작] 「피서산장도(避暑山莊圖)」, 북경고궁박물관.
18세기 초기의 피서산장 전경[냉매(冷枚) 작]
처음 가는 고난의 열하길

서호수는 6월 28일 성경(盛京) 즉 심양(瀋陽)에서 묵었고, 다음날 해 질 녁에 심양을 출발하였다. 통상적인 연행(燕行)은 심양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가지만 1790년의 이 사행은 당시 건륭이 열하에 가 있었으므로 심양에서 정서(正西) 방향으로 의주(義州) 조양(朝陽)을 거쳐 열하로 갔다. 6월 24일에 이미 사절단을 둘로 나누어 삼사(三使)와 역관, 수행원 등 40명 가량은 열하로 직행하고, 나머지 인원과 공물은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가도록 결정한 터였다. 서호수 일행은 7월 4일 심양 서쪽 교외 신점(新店)을 지나 열하로 직행하는 길을 잡았다. 신점에서 정서 쪽 소흑산(小黑山)으로 가면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가는 길이고 서북쪽 백대자(白臺子)로 가면 구관대(九關臺)를 거쳐 열하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부터는 요동 벌이 끝나고 구릉과 산악이 일어난다. 더구나 이때는 여름 장마철이라 곳곳이 물에 잠기고 길이 끊겨 고난의 연속이었다. 밤낮을 달려 겨우 15일에 열하에 도착하였다. 7월 15일 자에 이 여정을 기록하였다. “심양 신점에서부터 구관대를 거쳐 열하에 이르는 길은 조선사람들이 모르는 바라 후대의 참고에 대비해 붙여 써 둔다. …… 무릇 970리이다(自瀋陽新店, 由九關臺, 至熱河道里, 東人之所不知. 故付錄于左, 以備後考. …… 凡九百七十里.)” 이 무렵 홍수가 나서 인가와 전답이 다 쓸려가고 길도 곳곳이 끊겼다. 물이 말의 배까지 차오르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 현지에서 고용한 중국인 마부와 수레꾼은 또 삯을 더 받고자 어깃장을 부리기 일쑤였다. 이런 길 근 1,000리를 달리면서 무너진 산길을 메우고 끊어진 길은 돌아서, 고개 넘고 물 건너며 11일 동안 어떤 날은 밤낮 140리를 달린 끝에 처음 열하에 도착하였다. 원래 연행은 악전 고투의 길이었지만 특히 서호수의 열하 길은 그 고난의 극치였다. 그런 고난 속에서도 서호수는 청나라의 실정을 차분하고 예리하게 직시하였다.

중국연행노정도 *[지도와 기록사진으로 보는 明·淸 교체기 해로사행의 육로노정 1] 해로사행 육로노정의 시작과 끝, 등주登州, 신춘호(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오늘의 가사문학』 2018년 봄호 제16호(2018.03) 182-206
중국연행노정도 *[지도와 기록사진으로 보는 明·淸 교체기 해로사행의 육로노정 1] 해로사행 육로노정의 시작과 끝, 등주登州, 신춘호(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오늘의 가사문학』 2018년 봄호 제16호(2018.03) 182-206
연로 각 지역에 대한 정보 수집

서호수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도 부사로 연행하였지만 그때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열하기유』는 서호수의 2회 연행의 종합적 기록이면서도 성경[盛京, 심양(瀋陽)의 옛 명칭]에서 열하까지의 노정은 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 가는 길이자 그 기록이다. 그래서 열하 직행길에 접어든 7월 6일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신라 고려 이래로 우리나라의 사신이 여기를 지나간 일이 없다(自羅麗以來, 我使未嘗過此.)”라고 적었다. 전인미답의 길을 갔으니 그 견문과 소감이 또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열하기유』에는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연도의 각 지역에 대한 정보가 자세하다. 연행 연도의 지역 정보는 연행록의 공통 주제이기도 하지만 특히 서호수는 귀국한 이후 자신의 견문에 『명일통지(明一統志)』, 『청일통지(淸一統志)』 등 중국의 각종 문헌 및 이전의 연행록, 그리고 수행원 유득공의 기록까지 참고하여 지역 정보를 세밀하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귀국 후 2년 반이 걸려 1793년 늦봄에 『열하기유』를 완성하였다. 서호수의 첫째 관심사는 연행 연로의 지역에 관한 정보였다. 압록강을 건너 봉황성(鳳凰城) 책문(柵門)을 들어간 6월 23일에 ‘성경변장(盛京邊墻)’의 대략을 기술하였다. 책문은 성경변장의 출입문 중 하나였다. 성경변장은 ‘유조변(柳條邊)’이라고도 부르는 담장으로서 흙으로 폭과 높이 1m가량의 둑을 쌓고 그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버드나무 말뚝을 박아 안팎을 가르는 경계였다.

남쪽은 봉황성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개원에 이르고, 꺾어서 서쪽으로 산해관에 이르러 둘레가 1,950여 리이다. 또 개원 위원보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영길주를 지나 북쪽 지역은 법특합에 이르니 길이는 690여 리이다. 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만들어 “버들 꺾어 울타리 밭에 울타리 세웠다”는 지경이니 중국과 외국의 경계를 보존할 뿐이다. …… 문마다 장경(章京)과 필첩식(筆帖式) 각 1인, 관병 20인이 있다.

유조변은 청나라 초기에 만주족의 발상지를 보호하고, 북으로는 몽고, 동으로는 조선 사람들의 무단 출입을 막기 위해 건설하여 총 길이가 1,000km에 달하였다. 담 앞에 깊이 2m 남짓의 도랑도 팠으나 장성(長城)과는 달리 방어적 기능은 미약하였다. 이 담장의 곳곳에 문, 즉 변문(邊門)을 내고 인원을 두어 출입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 가운데 봉황성에 낸 변문이 바로 책문이다. 조선 사절은 늘 이 책문을 출입하였으나 그 전체 변장에 관심을 가진 이는 서호수가 처음이다. 그는 중국 측 문헌을 참고하여 변장의 규모와 각 변문의 위치를 기록하고, 자신의 견문에 바탕해 소감을 붙였다. 밭에 둘러친 울타리처럼 겨우 안과 밖을 구분하는 기능만 있다고 관찰하였다. 이후 김경선(金景善)이 『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 「책문기(柵門記)」를 남겼다. 열하 직행로를 잡은 이튿날인 7월 5일에 위가령(魏家嶺)을 넘었고, 그 지리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위가령 이동은 광녕(廣寧) 지역, 이서는 의주(義州) 지역, 남쪽은 중국 지역, 북쪽은 몽고 지역이다. 남북의 경계에 유조성(柳條城)을 설치하여 구관대(九關臺) 등 여러 변문(邊門)에 연결된다. 광녕의 마시하(馬市河)는 이 고개에서 발원한다.

위가령을 경계로 남북으로 중국과 몽고가 나뉘고, 그 경계를 따라 버드나무 성 즉 변장을 설치하였으며, 변장에는 여러 변문을 냈다. 성경변장의 변문 이름과 위치를 모두 기록해 놓았다. 7월 6일에는 의주(義州)에서 묵으며 의주성의 규모와 연혁을 살피고, 수비 병력을 기록하였다.

성안에 주둔하는 방수위(防守尉) 1인, 좌령(佐領) 19인, 효기교(驍騎校) 19인, 필첩식(筆帖式) 1인이다. 인솔하는 병력은 만주, 한군, 몽고병 1,491명이다.

청나라 때 각 지역의 수비 병력과 품계는 『청통전(淸通典)』과 『팔기통지(八旗通志』 등에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현전하는 각종 자료의 수치와 위 서호수가 조사한 수치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호수가 입수한 자료는 당시의 최신 정보로 보인다.

열하경추봉. Ⓒ이창숙
열하경추봉. Ⓒ이창숙
처음 가는 길, 처음 보는 현실

중국과 몽고의 경계를 목도한 서호수는 현지인에게서 들은 변문 밖 몽고 사람들의 현실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토민(土民)에게서 들으니, 몽고(蒙古) 사람들이 근래에 변장 밖에 와서 거주하는 사람이 많아, 가옥을 갖고 농경과 목축을 일삼아 모두가 땅에 정착하여 쉬 옮겨 다니지 않아 옛 습속이 싹 바뀌었다고 한다. 옛날에 금(金)나라 사람들이 중원을 차지하여 문서, 의절(儀節), 복식, 기용(器用)에서 점차 중화(中華)의 제도를 배워서는 쇠미해져 기세를 떨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몽고 사람들이 토지에 정착하여 쉬 옮겨다니지 않게 한 것은 실로 청나라의 큰 이익이다.

몽고 사람들은 변장 밖에 정착하여 농경에도 종사하면서 이전처럼 유목에만 종사하지 않는다. 다음날 7일 자에 중국 측 문헌을 인용하여 소개한 ‘몽고토풍(蒙古土風)’에 이와 관련한 항목이 있다.

황전(荒田): 농작은 몽고의 본업이 아니다. 지금 태평한 날이 오래 되어 가는 곳마다 산기슭에 밭을 만들고 씨를 뿌린 다음 사방으로 유목과 사냥을 나갔다가 가을걷이 때에 돌아온다. 김매고 가꾸는 방법은 강구하지 않는다.

몽고 사람들이 변장 바깥에서 반농반목(半農半牧)에 종사하면서 정착하는 실상을 목도하고, 청조의 대몽고 정책의 실질을 간파하였다. 옛날 여진족이 중원을 차지하여 살면서 본래의 유목과 수렵 습속을 버리고 중국화하여 결국은 동화 흡수되어버렸듯이 지금의 몽고도 장차 청나라에 흡수되어버릴 운명임을 직감하였던 것이다. 7월 8일에는 한족과 몽고족이 평화롭게 동거하는 현실을 목도하였다. 의주(義州)에서 망우영(蟒牛營)까지 100여 리에 높은 산이 없이 구릉이 뻗어 있고, 그 사이에 몽고족과 한족이 수백 호 또는 수십 호씩 섞여 사는 마을이 즐비하다. 7월 11일에는 야불수(夜不收)에서 묵으면서 그곳에서 만주족, 몽고족, 한족이 어울려 사는 평화로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조양에서 여기(야불수)까지 산세가 자못 험하고 구릉이 구불구불 수려하며, 곳곳이 활짝 트여 민가는 더 조밀하고 농경에 더욱 힘을 쏟아 땅은 개간되지 않은 데가 몇 평도 없고, 마을은 연기가 끊긴 데가 몇 리도 없으니 아마도 열하에 점점 가까워져서 그런 듯하였다. 제왕이 사는 곳에는 조화가 따르니 누가 구외(口外)의 황무지라고 하겠는가. 육대(六臺) 이후로 읍치(邑治)와 도회(都會)에는 행상이 모여들고 시전이 즐비하며, 물과 풀이 풍부한 곳에는 말, 소, 양 낙타가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서 한인 만주인 몽고인 세 나라 사람들이 100여 년을 모여 살면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농사와 상업과 목축에 거두지 못한 이익이 없으니 어찌 부유하지 않겠는가. 몽고인이 가장 많고, 만주인이 그 다음이며, 한인이 또 그 다음이다.

야불수는 지금은 ‘엽백수(葉柏壽)’라고 표기한다. 몽고어로 큰집이라는 뜻이며, 이 지역에 몽고 사람들이 집을 지어 살면서 정착하였기 때문에 큰집이라고 한 것이다. 조양에서 야불수까지 동서 200리를 포함한 열하 연도의 지역은 17세기 중반까지는 한족, 몽고족, 여진족이 각축하던 전장이었다. 결국 여진족이 대륙을 장악하였고, 이곳도 각 민족이 동거하며 평화와 번영을 누린다. 더구나 인구가 가장 많은 몽고 사람들은 천성이 순박함을 목도하고, 원(元)나라 때 허형(許衡, 1209-1281)이 몽고 자제를 교육하여 인재로 쓸 수 있음을 인정한 일을 거론하며 “옛날로 지금을 보니 하늘이 인재를 냄에 진실로 화(華)와 이(夷)를 구분하지 않음이라”라고 하여 화이관(華夷觀)에 대한 부정을 내비쳤다. 이는 결국 이적(夷狄) 만주족 청나라의 성공에 대한 인정이며, 현실에 바탕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인식이다.

『의주북경사행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의주북경사행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앞날에 대한 혜안

악전고투 끝에 7월 15일 열하에 도착하였다. 열하는 당시로서는 신도시였다. 몽고가 강희제(康熙帝)에게 바친 1만 평방 km에 달하는 사냥터 남쪽에 1703년부터 행궁의 하나로 건설하기 시작하여 1792년에 완공하였다. 서호수는 열하의 연혁과 규모를 정리하고, 그 전략적 지정학적 가치를 파악하였다.

열하는 지세가 험준하여 여러 산이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이룬다. 경추(磬棰), 미륵(彌勒) 등의 여러 봉우리가 읍하듯이 싸안고, 그 가운데에 평평한 골짜기가 수십 리 열렸으며, 난수(灤水)와 열하가 좌우를 두른다. 북으로 몽고를 제압하고 남으로 선부(宣府)와 대동(大同)을 굽어보며, 서로는 회부(回部)와 연결되고 동으로 요양 심양과 통하니 실로 변방 밖의 깊숙한 땅이요, 천하의 상류(上流)이다.

서호수는 강희제가 열하에 피서산장을 건설한 원래의 목적을 잘 파악하였다. 그러나 그가 열하 현지에서 목격한 건륭의 피서산장 생활은 할아버지(강희제)와는 사뭇 달랐다. 서호수는 열하에 도착한 다음 날인 16일부터 19일까지 하루 평균 8시간씩 황제를 따라 연극을 관람하였다. 생일잔치의 중심 항목이 연극 관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조는 여기에 머무를 때 기무(幾務)가 많았으며, 한가한 날에는 유신 위 정진(魏廷珍), 왕난생(王蘭生) 등을 불러 율력(律曆)을 강구하였고, 또 손수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편집하면서 역마를 보내 어려운 것을 웅사리(熊賜履)와 이광지(李光地)에게 물었다. 무력을 느슨히 하지 않았고 또한 문교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내가 열하에 여러 날 머물면서 단지 우령(優伶)과 각저(角觝)를 일대사(一大事)로 삼는 것만 보았지, 유신(儒臣)을 만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무슨 까닭일까?

건륭은 여름과 가을을 피서산장에서 보낸 적이 많다. 어떤 해는 생일과 추석도 이곳에서 보내며 연극을 관람하였다. 건륭은 연극을 내치와 외치에 잘 활용하기도 하였지만 할아버지만큼 학문과 정무에 열을 쏟지는 않았다. 정확히 반세기 후인 1840년 청나라의 앞날을 서호수는 이미 보았는지도 모른다. 이후 열하와 북경에서 만난 청조 대신과 외국 사절들의 행태에 대한 관찰에서 이 혜안은 더욱 빛난다. 서호수 사절단은 유일하게 열하로 직행하였다. 원래 험난한 연행로였지만 당시 홍수로 요동 벌이 물에 잠기고 열하로 가는 산길은 곳곳이 끊겼다. 매일 밤낮을 100리 넘게 달리는 여정에서 서호수는 청나라의 현실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하였다. 서호수의 열하행은 처음 가는 길이자 처음 보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시선으로 통찰하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