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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멀고도 가까운 나라 -통신사행에 참여했던 조선 지식인의 일본인식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06 조회수 : 1097
멀고도 가까운 나라 - 통신사행에 참여했던 조선 지식인의 일본인식
흔히들 일본을 ‘멀고도 가까운 나라’,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간의 지리적인 거리는 가깝지만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의 거리는 멀다는 의미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 왜구의 침탈과 임진왜란에서부터 가깝게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등으로 이 땅의 사람들 눈에 일본은 끊임없이 재부(財富)를 약탈하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던 존재라는 인식이 우리 안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 장순순(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HK연구교수)

더욱이 최근의 한일관계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일본의 무역 보복과 한국의 일본 수출품 불매 운동 등으로 경색되어 두 나라 간에 오랜 역사 동안 지속되어 왔던 선린우호(善鄰友好) 관계가 더욱 무색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미래의 한일관계는 갈등보다는 협력의 길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위적인 과제라 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을까? 그 출발로 해외경험이 매우 드물었던 조선시대에 통신사행에 참여하여 일본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던 조선 지식인들의 일본 인식의 추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통신사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직접 남긴 여행기인 사행록을 중심으로 문화와 문물교류라는 측면에서 다뤄볼 것이다.

600년 만에 다시 시작된 통교(通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8세기 후반 이래 600여 년간에 걸친 일본과의 국교 단절 상태를 청산하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와 통교(通交)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1401년에, 일본은 1403년에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책봉 체제에 함께 편입하였다. 1404년(태종 4년) 3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국서(國書)를 지참한 일본 국왕사를 조선에 파견하고, 조선 조정이 이를 접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정식으로 국교가 체결되었다. 그 후 조일 양국은 서로 사절을 교환하였다. 이때 일본 막부에서 조선에 보낸 사절은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불렀고, 조선에서 일본 막부에 보낸 사절은 ‘통신사’라고 하였다. 통신(通信)이라는 말은 “신의로써 통호(通好)한다”라는 의미로, 통신사란 조선의 최고 통치자인 국왕이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막부 쇼군(幕府將軍)에게 파견한 공식적인 외교사절이며, 막부 쇼군에 대한 경하(慶賀)나 조문, 기타 양국 간에 발생한 현안문제의 해결을 위해 파견되었다. 조선전기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된 사절은 모두 8회였다. 그러나 일본의 교토(京都)까지 간 통신사는 1429년(세종 11년), 1439년(세종 21년), 1443년(세종 25년), 1590년(선조 23년), 1596년(선조 29년) 5회였고, 국서 전달이라는 사명(使命)을 완수한 것은 1429년(세종 11년), 1439년(세종 21년), 1443년(세종 25년), 1590년(선조 23년) 총 4회뿐이었다. 통신사행은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의례상 체계화되었는데, 12회의 사절(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 포함)이 파견되었다. 따라서 통신사의 파견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일본에서는 무로마치시대 초기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쳐 에도시대에 이르는 시기가 이에 해당한다.

조선후기 통신사의 사행로.
조선후기 통신사의 사행로.
조선전기 지식인의 대일 인식, 일본이적관(日本夷狄觀)

조선시대 사람들은 세계관으로 중화주의적 화이관(華夷觀, 중국 외의 나라는 오랑캐로 인식)을 수용하면서 그 속에서 자아 인식으로는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을 확립하였다. 중화주의는 사대 관념과 함께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국제질서로, 송대(宋代)에 이르면 지역·종족적 기준에 ‘예(禮)’라는 유교 문화적 요소가 더해지면서 화이(華夷)의 구분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송대의 화이관은 성리학의 전래와 함께 조선의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에게 수용되면서 조선의 대외 인식에 커다란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은 중화주의적 화이관과 사대조공 체제에서는 ‘이적’으로 분류되지만, 유교 문화면에서는 중국과 대등하거나 버금간다고 자부하면서 스스로 ‘화(華)’를 자처하였다.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중심부로 적극 지향하면서 나아가 동일시한 것이다. 조선은 스스로 ‘소중화’라고 하여 중화인 명나라와 일체화하는 한편 주변 국가인 일본, 여진, 류큐(琉球)를 타자화해 ‘이적’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소중화의식이다. 조선전기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왜구의 소굴’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며, 화이관에 입각하여 일본이적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더해 일본을 ‘소국(小國)’으로 인식하였다. ‘일본 소국관’은 15세기 후반 일본의 ‘오닌(應仁)의 난’ 이후 확산된 이른바 ‘무로마치 막부 약체론’과 함께 일본 측의 제추사(諸酋使)나 위사(僞使)가 표현한 ‘조선 상국관(朝鮮上國觀)’ 또는 ‘조선 대국관(朝鮮大國觀)’에 기인한 바도 있다.

신숙주(申叔舟)는 세조대와 성종대 초기 사대교린 외교의 사무를 총괄한 인물이다. 그는 1443년(세종 25년) 통신사행의 서장관으로 일본 교토(京都)까지 갔으며, 귀국 길에 쓰시마(對馬島)에 들러 쓰시마 도주를 설득하여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는 데 일조하였다. 예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1471년에는 성종의 명에 따라 일본 사행 때의 견문, 오랫동안 예조에서 근무하며 얻은 외교 경험, 성종 초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활발히 추진했던 대일 외교 의례의 개정 등 당시 사정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국지(日本國志)라 할 수 있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하였다. 비록 사행 후 30여 년이 지난 후에 편찬된 것이긴 하나 『해동제국기』에는 신숙주의 일본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신숙주는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화이론적 관점에서 일본을 이적시하였다.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일본을 ‘이적’이라고 표현하였고, 이 책이 ‘이적을 대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저술되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조선에 건너온 일본의 모든 통교자에 대해 ‘내조(來朝)’라고 표현함으로써 화이론적 인식을 명확히 드러냈다. 그러나 『해동제국기』의 기술에서는 일본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일본에 대해 “해동의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나라”라고 하면서 대일 정책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이러한 점은 일본 문화에 대한 그의 인식에서도 잘 나타난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전체적인 일본에 대해서는 이적관을 종종 표출하기도 했지만, 일본의 ‘이국적’ 문화와 풍속에 대해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야만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았다. 가치 판단을 자제하고 가치중립적인 입장에서 소개하여 그 문화의 독자성을 인정한 점은 여타 조선 지식인의 그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다. 예컨대, 일본 풍속 가운데 이를 검게 칠하는 풍습과 매춘 풍습 등에 대해서도 담담 히 소개할 뿐 그것을 이적시하거나 야만시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신숙주의 일본 문화에 대한 인식은 그가 사대교린(事大交隣) 외교의 사무를 총괄한 인물로 대일(對日) 외교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라는 점과 왜구 문제 등이 해결되고 조일관계가 안정기에 들어가면서 조일관계의 성격에 변화가 있었던 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해동제국기』, 신숙주가 1471년(성종 2년) 성종의 명에 따라 저술한 책. 『해동제국기』 속 해동제국총도, 국립중앙도서관.
『해동제국기』, 신숙주가 1471년(성종 2년) 성종의 명에 따라 저술한 책. 『해동제국기』 속 해동제국총도, 국립중앙도서관.
왜란의 상처, 일본이적관의 심화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외교는 단절되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전쟁을 통해 조선은 각 방면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본을 ‘하늘을 함께 하지 못할 원수’,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라고 표현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자섬(自島)의 실리를 앞세운 쓰시마와 양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빠르게 전개되어 1607년(선조 40년)에는 회답 겸 쇄환사의 파견, 1609년(광해군 1년)에는 조선후기 조일 간의 기본약조인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치욕을 당한 조선 지식인들은 통신사의 파견을 강력히 반대했다.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어긋하는 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다. 더욱이 일본으로의 사행은 자칫 ‘원수’인 왜적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로 여겨질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은 막부와 쓰시마 도주의 계속된 강화 요청에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포로 쇄환과 일본의 교화(敎化)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행원들은 왕명을 전달하러 이국(異國)으로 떠난다는 중압감에 국내의 부정적인 대일관이 더해져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사행에 참여한 구성원들은 화이관을 근간으로 하는 소중화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고, 통신사행원들은 이를 잣대로 일본을 바라보았다. 이 시기 통신사의 사행 기록인 남용익(南龍翼)의 『부상록(扶桑錄)』에서 일본은 ‘날뛰고 교활한 오랑캐’, ‘윤리와 강상(綱常)이 없고 예와 이(理)를 모르는’ 존재로, 사행이 참여한 조선인 자신들은 ‘공맹(孔孟)을 공부하여 충신(忠信)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었다. 사행의 근본 목적이 오랑캐 일본을 회유하여 화(華)로 선도하고 천성을 회복하게 만드는 것에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성리학적 화이관에 따라 조선과 일본을 철저히 분리하여 일본인을 ‘편협하고 교활한 짐승의 마음을 가진 민족’으로 묘사하였다. 강홍중(姜弘重)은 오디·올빼미를 먹고 이에 검은 칠(漆齒)과 몸에 문신하는 일본의 풍습을 폄하하고, 일본어를 ‘새가 지껄이는 소리’로 표현하며 일본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반면에 자신과 통신사행원은 유교적 예로써 오랑캐를 교화시킨 장건(張騫)이나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 ‘한(漢)의 사신’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조선의 우월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행단 일행은 오사카를 거쳐 육로를 이용하여 에도로 이동하면서 일본의 경제적 형편과 이국적 풍광을 목격하면서 일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일본의 후지산(富士山)을 보고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고 인정하며 ‘부사산가(富士山歌)’ 등 많은 시를 남겼다. 그럼에도 이러한 요소들이 일본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인식을 희석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일본의 자연 풍광이 아름다울수록 이에 비례하여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화되어 나타났다. “경치의 절승함과 가세의 웅장함은 아마 반드시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인데 애석하게도 오랑캐 땅에 있어서”라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또한 통신사행원들에게 베풀어지는 풍성하고 융숭한 접대, 오사카(大坂)와 교토(京都), 에도(江戶)와 같은 번화한 대도시의 모습과 발전된 문물에 대해서도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사치스럽다고 치부하면서 애써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물산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윤리를 모른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일본 대도시의 번성함을 도덕성의 열등함으로 치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통신사행원의 생각은 조선이 문화적인 면에서는 우월하다는 소중화주의적 관념에 기댄 현실 회피라고 할 수 있다.

신숙주영정 및 감실주독, 평택시.
신숙주영정 및 감실주독, 평택시.
일본 문화의 긍정과 대일 인식의 변화

17세기 말, 청이 남명(南明) 정권을 무너뜨리고 중국 전역을 장악하자 조선에 대한 청의 정치적·군사적 위협은 현격히 감소했다. 조선과 청의 관계는 안정을 되찾았고 문물 교류가 점차 활성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조선과 일본의 관계도 점차 안정되면서 교섭이 활발해졌다. 통신사행원 중에서 일본의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유하고 일본의 발달된 문물제도를 새롭게 인식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더불어 이때는 조선 조정의 통신사 파견이 쇼군의 즉위 축하 사절로 정례화되고 외교적으로 의례화되면서 문화적 기능이 강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통신사행원들은 이전의 관념적 도덕성에 기댄 일본의 폄훼와 달리 시문(詩文)을 바탕으로 한 문화우월주의를 표출하였다. 조일 양국 문인들 상호 간의 문화교류는 통신사행원과 일본 문인의 개인적 교류로 연결되었고, 이는 일본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통신사행원은 일본에 다녀와서 사행 중의 체험과 견문을 적은 일본 사행록(使行錄)을 저술하였다. 현재 40여 종의 사행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기행 문학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사회상과 문화를 조선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가져온 일본의 출판기록물과 견문록(見聞錄)은 당시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일부 실학자들에게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하는 근기 남인계(近畿南人系) 실학파 학자들의 일본에 대한 연구는 조선 지식인들이 대일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719년 통신사행에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던 신유한(申維翰)에게서 이러한 변화는 잘 나타난다. 그는 일본의 기이한 풍광과 번성한 도시를 접하면서 이전의 통신사와 마찬가지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반응을 도덕적 예(禮) 관념과 결부시켜 상대를 폄하하지는 않았으며, “자신의 마음이 고요하니 일본의 풍속이 착하게 느껴진다.”고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본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 연결 짓고 있다. 또한 후지산을 노래한 시(富士山賦)에서는 “조물주는 크게 천하를 만드는 데 어찌 염부(閻浮)만 생각하고 오랑캐라고 괄시하랴? 부산에 해 뜨는 것을 봄이여! 신령스런 구역이 아침 볕에 빛나네.”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칭찬하였다. 이는 오랑캐 땅에 절경이 있음을 한탄하던 전대 통신사행원의 그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일본인들은 특히 『퇴계집(退溪集)』을 존경하고 숭배하여 집집마다 외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전했다. 김성일의 『해사록』,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과 같은 우리나라의 서적까지도 오사카에서 출판되어 판매되는 상황을 언급하며, 일본 내에 유통되는 조선 책이 100종을 헤아리고, 중국 남경에서 수입해 온 책이 1,000종을 헤아리며, 민간에서 고금의 특이한 책과 각종 문집을 간행한 것은 조선의 10배가 넘는다고 하여 일본의 풍부한 서적문화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1763년 조엄은 통신사행 출발에 앞서 사행에 참여하는 구성원을 효유한 글에서 “일본인을 업신여기거나 비웃지 말고 충신(忠信)과 성심으로 대접할 것”이며, “함부로 너라고 부르지 말 것”을 명했다. 나아가 일본어를 ‘새가 지껄이는 소리’로 표현했던 전대 통신사행원들과 달리 외교 실무자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익혀야 한다는 생각도 피력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자세는 일본인을 오랑캐가 아닌 외교의 당당한 주체로 인식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사행록에서는 조선에는 없는 일본의 풍속을 기록하면서 그것을 조선의 윤리적 잣대로 평가하거나 화이(華夷)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모습은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표현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전대에는 검은 칠을 하는 풍속이 성인으로서의 표징이라든가 충치를 예방한다는 건강 상의 의미와 상관없이 폄하의 대상으로만 삼았지만, 1747년(영조 23년) 통신사행의 종사관 조명채(曺命采)는 “칠한 이가 숯 같아서 보기에 매우 해괴하다.”고 하여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일본 문화를 야만으로 인식하거나 화이 구분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 1763년 통신사행의 서기 원중거(元重擧)는 “이를 염색하지 않은 여자는 어린아이와 시집을 가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면 창기가 아니면 과부”라며 이에 검은 칠을 하는 행위가 혼례와 관련된 풍속임을 설명하였다. 이는 조일 양국의 풍속 차이를 인정하고 그 의미를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문화상대주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8세기 중엽에는 일본의 발달한 문물을 당황하거나 경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1747년(영조 23년) 영조는 통신사 파견에 앞서 군관(軍官)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일본의 산천과 도로, 무예(武藝)의 장단점, 인심과 습속을 잘 관찰하고 오도록 명령하고 있다. 1763년 계미 통신사행에서 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조엄은 실제로 일본의 문물을 도입했다. 쓰시마에서 쓰시마 지도와 일본지도를 구입하여 모사(模寫)하게 했으며, 오사카에서는 일본지도의 개정본을 구해 부본을 만들게 했다, 그는 요도우라(淀浦)에 도착해서 성 밖에 설치된 수차(水車)를 보고 군관과 화사(畫師)에게 기록하게 했다. 그리고 사도가와(佐渡川)의 주교(舟橋) 제도를 조선의 서남해 제언(堤堰)에 응용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귀국 길에는 쓰시마에서 고구마를 들여왔으며, 통신사의 선박에서 치목이 잘 부러지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일본 선박의 장점을 반영한 배 모형을 만들어 바다에서 시험해 보게 하는 등 일본의 문물을 조선의 상황과 접목시킬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소중화의식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세계관으로 중화주의적 화이관을 수용하면서 그 속에서 자아 인식으로는 소중화의식을 확립하였다. 이는 조선의 대일 인식에서 커다란 기준으로 작용하여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은 화이관에 입각한 일본이적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국지인 『해동제국기』를 편찬한 신숙주도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일본에 대해 기본적으로 화이론적 관점에서 일본이적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해동제국기』에서는 일본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일본에 대해 ‘해동의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나라’라고 하면서 대일 정책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일본의 문화와 풍속에 대해서도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야만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은 조선 지식인들로 하여금 일본이적관의 심화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이후 전개된 17세기 통신사행원의 일본인식은 일본의 현재 정세를 파악하거나 제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전란으로 무너진 문명국 조선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초첨이 맞추어졌다. 그들은 일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은 채, 일관되게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회피함으로써 현실적인 문제를 관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소중화주의적 대외관을 드러냈다. 18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안정과 함께 도래한 조일간의 안정과 평화적인 교류는 통신사행원들로 하여금 새로운 일본 인식의 확장을 가져왔다. 그들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에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려고 하였으며, 조일 두 나라 간의 이질적인 요소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일본의 문물을 조선의 상황과 접목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모색하고자 하였다. 물론 이들 역시 이전의 통신사와 마찬가지로 예에 입각한, 화이관에 입각한 조선 소중화주의와 전란의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전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화이관의 입장에서 바라보던 대일인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일방적 멸시와 폄하에서 상호 이해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통신사행이 일본 본토를 마지막으로 밟았던 1763년의 일이었고, 이후로는 일본 본토와 직접적인 왕래가 끊어져서 더 이상 인식의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은 조일 양국의 현실인식과 개관적인 상호 이해라는 관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문헌
  • 『海行摠載』, 『和國志』 하우봉, 『朝鮮後期 實學者의 日本觀 硏究』, 일지사, 2002
  • 김문식, 「조선후기 지식인의 자아인식과 타자인식-대청교섭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39, 2001
  • 정은영, 「조선후기 通信使와 朝鮮中華主義 -使行기록에 나타난 對日 認識 전환을 중심으로-」, 『국제어문』 46, 2009
  • 하우봉, 『원중거(元重擧)의 한일관계사 인식 -『화국지(和國志)』를 중심으로-」, 『韓日關係史硏究』 50,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