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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폭풍을 만나 떠난 여행, 표해록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06 조회수 : 501
폭풍을 만나 떠난 여행, 『표해록』
『표해록』은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표류한 여정을 기록한 기행록으로 예기치 못한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과 낯선 풍경이 생생하게 담겨있어 매력적이다. 우리나라에도 김대황의 베트남에 대한 『표해일록』(1687년), 장한철의 유구열도 등지에 관한 『표해록』(1771년), 문순득의 필리핀 등지에 관한 『표류기』(1816년), 최두찬의 중국 강남에 대한 『승사록』(1818) 등이 있으며 각 표해록은 그 시대와 여정에 따라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중 1488년 편찬된 최부의 『표해록』은 15세기 명나라의 모습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어 중국에 대한 세계 3대 기행문 중 하나로 꼽힐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글·사진 최철호(『표해록』 공역, 표해록기념사업회장)
최부의 『표해록(漂海錄)』

조선 성종 때 문관이었던 최부는 1487년 임금의 부름을 받아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 도망간 노비 혹은 병역 기피자를 색출하여 돌려보내는 일을 맡은 벼슬)으로 제주에 파견되어 공무를 수행하던 중, 1488년 음력 1월 30일 고향인 나주로부터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같은 해 윤달 1월 3일 초상을 치르러 수행원 42명과 함께 나주에 배를 타고 급히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표류하기 시작했다. 14일간 거센 풍랑으로 난파된 선박 안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중국 절강성 해안에 도착했다. 상륙하자마자 최부 일행은 해안을 침범한 왜구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은 후 마침내는 왜구의 혐의를 벗어 149일 만인 같은 해 음력 6월 4일에 43명이 세계 표류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모두 낙오자 없이 생환했다. 귀국 후 당시 임금인 성종의 명에 의하여 일기를 작성하여 올렸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표해록』이다. 『표해록』의 가치에 대해서 문학가 이병주 선생은 “표해록은 최부의 정밀한 관찰력과 문재(文才, 문학의 재능)를 보여주는 일품(逸品,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영국의 소설 『로빈손 크루소의 표류기』는 우리의 독자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있다. 그런데 문학적인 질에 있어서, 곁들여 역사적인 기록성에 있어서 최부의 『표해록』은 이에 우월했으면 했지 결단코 손색이 없다. 그런데도 일반 독자에게 알려져 있지 못하다는 것은 유감스럽기 한량이 없다.” 또한 중국의 북경대학 거쩐자(葛振家) 교수는 “표해록의 광범위한 문학적 함축성, 각 분야를 망라한 풍부한 내용, 사료적 가치, 중국에 대한 인식도는 엔닌(圓仁, 일본의 승려)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불법을 구하러 당나라를 여행하며 기록한 책. 신라의 장보고의 활약상을 기록)』,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능가한다.”라고 찬사를 마지않았다.

최부 『표해록』 1896년 목활자본, 국립제주박물관.(출처 : e뮤지엄)
최부 『표해록』 1896년 목활자본, 국립제주박물관.(출처 : e뮤지엄)
최부(崔溥)는 누구인가?

최부는 호가 금남(錦南)으로 1454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출생했으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조선 전기 집권했던 수구 정치세력이 이에 맞섰던 신진 정치 세력을 숙청한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그는 과거에 두 번이나 1등으로 합격한 청렴하고 강직한 문관으로 주로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司憲府), 왕실 내의 서적과 문서의 관리, 왕의 자문을 하던 홍문관(弘文館) 등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했다. 그는 『동국통감(東國通鑑, 고대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여 1485년에 편찬한 역사책)』의 편찬에도 참여했는데, 그의 해박한 『동국통감』 논설문은 여론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최부의 해박한 지식은 중국의 관원들을 놀라게 했다. 최부는 그를 심문하던 중국의 고위 관원에게 메모 하나도 없이 오직 기억에만 의존하여 중국의 문학, 역사, 고사(故事), 명승고적(名勝古跡), 중국 및 동남아의 지리, 역사 등을 필담(筆談, 글로 쓴 문답)으로 막힘없이 진술하여, 최부가 중국인 지식인보다 더 박식하다며 그 관원들은 놀란 나머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혀를 내둘렀다.

최부 『표해록』 여정 경로.
최부 『표해록』 여정 경로.
최부의 뛰어난 리더십

표류 당시 35세 나이의 최부는 주로 뱃사공, 군인들로 구성된 억세고 우락부락한 수행원들이 난파선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자 내뿜었던 본능적인 행태에도 솔선수범(率先垂範, 앞장서서 모범을 보임)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그들을 설득하고 달래며 숱한 고비를 넘겼다. 식수가 바닥나 기갈(飢渴, 굶주림과 목마름)이 극도에 이르러 처절한 참상이 일어나자, 최부는 선실 내의 짐꾸러미를 조사하여 감귤 50여 개와 술 두 동이를 찾아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하였으며, 이도 떨어지자 마른 쌀을 씹기도 하고 오줌을 받아 마시도록 했다. 오줌도 잦아 버리자 옷을 거두어 빗물에 적신 다음 그 물을 짜서 저장한 두서너 병을 숟가락으로 마시도록 하였다(윤달 1월 10일 자). 배가 오랜 풍파에 시달린 나머지 만신창이가 된 배의 틈새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틈새를 막고 물 푸는 작업에 일부 선원들은 오불관언(吾不關焉, 나는 그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하며, 거의 자포자기 심정에 빠졌다. 최부는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물이 이 지경으로 새고 있고, 선원들 또한 이와 같이 무너지고 있는데, 내가 잘났다고 함부로 뽐내면서, 어찌 앉아서 물에 빠져 죽기를 보겠는가?” 이내 일부 종자(從者, 남에게 종속되어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달라붙고 최부도 몸소 물을 바가지로 퍼내니 물은 거의 바닥이 났다. 선원들도 좀 기운을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윤달 정월 15일 자).

최부 일행은 바다에 표류 중 지니고 있었던 의복, 양식 등은 해적에 겁탈당하고, 배는 난파되어 침몰할 시간이 다가오자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제주 출신의 군인 일부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최부가 신사(神祠, 신령을 모신 집)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출발한 탓이라고 심하게 투덜거리자 최부가 이들을 꾸짖었다. “천지는 사심이 없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악한 사람에 재앙을 주는 데는 공평할 따름이라네. 악한 자가 귀신에게 비위를 맞춰가며 복을 바란다고 해서 그에게 복을 내리겠는가? 착한 사람이 이단적인 주장에 현혹되지 않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 벌을 내리겠는가? 천지와 귀신에게 아첨을 하고, 음식을 드린다고 해서 사람에게 벌과 복이 내린다는 말이 일찍이 있었던가? 절대로 이러한 이치는 없다. 제주 사람들은 귀신을 몹시도 좋아하여 산이나 습지, 하천과 늪에 모두 신사를 세워 아침저녁으로 정중하게 산사에 제사를 지내며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있네. 그렇다면 자네들이 바다를 건널 때 표류나 침몰하는 재앙은 없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나?”(윤달 정월 14일 자) 또한 최부가 제녕(濟寧)을 출발하여 분수용왕(分水龍王)의 사당에 이르렀다. 호송하는 중국 관원들이 사당에 제사를 지내야 풍파가 심한 강을 쉽게 건널 수 있다며 최부도 사당에 절을 해야 한다고 강권하자, 최부는 “바다를 본 사람이라면 강물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법이오(觀於海者難爲水관어해자난위수, 맹자의 어록). 나는 수 만리 바다와 거친 파도를 헤쳐온 사람이오. 이곳 중원에 있는 강물쯤이야 두려울 것이 못되오”(3월 10일 자)라며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또한 해적을 만나 작두로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도 조선 관리의 위엄을 보이며 의연하게 해적들을 호통치던 일(윤달 1월 12일 자), 그리고 상륙하자마자 왜구로 몰려 총칼로 무장한 중국 군인들의 위협적인 행동, 일행의 초라한 몰골을 보고 조롱하는 수많은 관중들에 에워싸인 채 끌려가면서도 우리나라가 동방의 예의지국임을 잃지 말고 행동하라는 최부의 명령대로 수행원들이 시종 예의 바르게 처신했던 일 등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최부의 처신과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최부 일행이 표류 끝에 상륙했던 절강성 임해현 우두외양의 금목사(金木沙) 해안.
최부 일행이 표류 끝에 상륙했던 절강성 임해현 우두외양의 금목사(金木沙) 해안.
중국(당시 명나라)의 문물을 배우고 활용한 실용주의자

경과했던 강남(江南, 양자강 이남)과 강북(江北, 양자강 이북) 지역의 문물을 자세히 견문(見聞, 보고 들음)하며 강남 지역, 특히 소주, 항주 등 도시의 인구, 기반 시설, 경제의 번성과 주위 환경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강남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하였는데, 그 중에서 소주와 항주가 제일이었고, 소주가 으뜸이었다.”(2월 17일 자)고 몹시 놀라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시는 절강성 해안에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여 명나라 정부는 해금해방(海禁海防, 해상 교통이나 무역 및 인적 교류를 제한) 정책을 강력히 실시해서 강남 지역에 외국인의 출입을 막던 시기였다. 그러나 최부는 뜻하지 않은 표류 때문에 웅장하고 화려한 강남 지역을 두루 살펴보는 귀중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부는 남북을 관통하면서 매섭고 정밀한 관찰안(觀察眼, 사물을 살펴보는 눈)으로 강남과 강북의 옷차림, 인심과 풍속, 발음의 차이, 무기, 생업(生業) 등을 살폈다. 예컨대 “부녀자들의 옷은 대개 좌임(左衽, 오른쪽 섶을 왼쪽 섶 위로 여미는 복장 방식)이었으나, 통주 이후는 거의 우임(右衽)이었다”, “강남 사람들은 육로로 다닐 때는 가마를 이용했지만 강북은 말이나 노새를 탔다”, “강남의 인심과 풍속은 온화하고 유순(柔順, 성질이 부드럽고 온순)하였으나, 강북은 사나웠다”, “일부 지방에서는 부녀자들이 화장을 하고 몸을 팔아 생활한 경우도 있었고”, “화가 나면 입을 찡그리고 침을 뱉고, 같은 그릇과 탁자를 사용했으며, 젓가락도 돌려쓰고 있었다”, “이(蝨, 이과의 곤충, 머릿니 등)는 입에 넣어 씹었다”, “강남의 시장에서는 통화로 금이나, 은을 사용하였지만, 강북은 동전을 쓰고 있었다”(이상 최부의 요약) 등을 열거하였다. 또한 천진(天津)을 지나면서 윤아만(尹兒灣), 포구아(蒲溝兒)의 “兒” 즉 “얼화음(혀를 감아 올려내는 발음)”을 중국 북쪽 현지인의 발음을 그대로 기록했다(3월 24일 자). 절강성 소흥(紹興)의 한 호숫가에서 수차를 돌려 논에 물을 대는 농부를 목격한 바 있는 최부는 정해(靜海)를 지나면서 호송하는 관원에게 수차의 제작과 운용 방법을 집요하게 캐물었다(3월 23일 자). 당시 조선에는 주로 발로 밟아 돌리는 수차, 즉 도차(蹈車)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최부가 중국에서 배워 온 수전수차(手轉水車, 손으로 돌려 논에 물을 대는 장비)는 당시에는 신식 장비였다고 한다. 1496년 5월 호서(湖西, 충북 제천의 의림지와 금강 상류의 서쪽)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로 가뭄을 극복했다고 전해진다.

최부가 윤달 정월 19일부터 당월 22일까지 심문을 받던 임해의 도저소 [현재 중국 국가문화재인 도저고성(桃渚古城)] 내의 최부 일행이 밟았던 거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최부가 윤달 정월 19일부터 당월 22일까지 심문을 받던 임해의 도저소 [현재 중국 국가문화재인 도저고성(桃渚古城)] 내의 최부 일행이 밟았던 거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006년 2월 15일 전남 나주시의 재정지원과 최부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최부가 심문을 받았던 중국 국가문화재인 도저고성의 고즈넉한 장소에 최부 표해록 사적비(중·한민간우호비)를 건립했다.
2006년 2월 15일 전남 나주시의 재정지원과 최부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최부가 심문을 받았던 중국 국가문화재인 도저고성의 고즈넉한 장소에 최부 표해록 사적비(중·한민간우호비)를 건립했다.
한편의 대하드라마 『표해록(漂海錄)』

연인원 7,100여 명이 등장되었고, 현장에 등장되지는 않았지만 거론된 인원만 해도 중국의 제왕을 비롯하여 중국의 고전 및 고사 속의 인물이 근 100여 명, 조선과 고려의 역대 인물 수도 90여 명이 등장된 한 편의 웅장한 드라마요, 장엄한 서사시인 『표해록』 내용 중 극히 일부만 소개해서 아쉬움이 크지만 지면의 제약으로 당대의 문장가였던 이병주 선생의 탄식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민족의 역사를 수놓은 빛나는 별 가운데 한결 영롱하고 애절한 이름이 있으니, 금남 최부 선생이 바로 그다. 그 영롱함은 탁월한 재질과 염결(廉潔, 청렴하고 결백함)한 성품과 성충(誠忠)으로 나라에 봉사하고 열성으로써 후학을 훈도한 공적으로서 빛나는 것이요, 그 애절함은 천부의 능력, 만장(萬丈, 한없이 높음)의 기염(氣焰, 불꽃같은 기세)을 펴지 못하고 50년의 짧은 생애를 형사(刑死)로 매듭지어졌다는 사실을 말함이다. 민족의 한은 역사의 도처에 깔려 있는 것이지만, 최부의 생애와 행적을 살피게 되면 특히 그 한이 애처롭다. 어찌하여 이러한 대재(大才)를 민족의 거목으로 가꾸지 못했던가. 어찌하여 나라를 위한 성충(誠忠)이 나라 전체에 널리 퍼지도록 받들지 못했던가. 그러나 표해록 한 권을 남긴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매우 다행이다. 수백 수천의 기행기 가운데서 표해록은 단연 빛난다.”

1 최기홍이 완역한 국역본(1979). 2 최기홍·최철호의 최근 개정본(2016). 3 미국의 존 메스킬(John Meskill)의 영역본(1965). 4 일본 기요타 기미카네의 일어 번역서(1769). 5 중국의 거쩐자(葛振家)의 점주본(1992).
1 최기홍이 완역한 국역본(1979). 2 최기홍·최철호의 최근 개정본(2016). 3 미국의 존 메스킬(John Meskill)의 영역본(1965). 4 일본 기요타 기미카네의 일어 번역서(1769). 5 중국의 거쩐자(葛振家)의 점주본(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