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월간문화재

[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북경에서 만난 또 다른 세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06 조회수 : 490
북경에서 만난 또 다른 세계
중국과 이웃한 한국과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점이 적지 않지만, 전통 시대에 양국 간에 공식적인 교류는 없었다. 두 나라 사이에 비공식적인 접촉이 있었다면,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에 표류한 베트남 사람들이 한반도에 이르든가 한반도의 표류민들이 베트남에 온 정도였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베트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시점은 9세기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이후에 직접적인 만남은 북경에서도 이루어진다.
글 윤대영(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신라 시대 기록에 등장한 ‘안남’

신라 시대의 최치원(崔致遠)은 『계원필경(桂苑筆耕)』에서 한나라 무제가 기원 전 111년에 남 비엣(Nam Viêt, 南越)을 점령한 후에 설치한 ‘교지(交趾)’의 사방 경계와 당대(唐代)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의 변천 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현재 베트남 북부의 역사, 지리, 문화 등을 개략적으로 소개했다. 이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한반도의 고조선에 해당하던 남 비엣의 역사와 풍물, 후한 시기 마원(馬援)의 베트남 원정과 쯩(Trưng, 徵) 자매의 저항 운동, 당나라의 ‘안남(安南)’ 지배 양상, 명나라의 베트남 정벌 등과 같은 사실들이 점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는 양국의 사신들이 중국의 북경(즉, 연경[燕京])에 갔다가 서로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서 더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조선왕조실록』, 사행 기록, 개인 문집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500년의 정조사(正朝使) 김영정(金永貞)과 부사(副使) 안처량(安處良)은 “안남국(安南國) 사신 세 사람과 함께 전각의 위[殿上]에 반열(班列)하는” 공식적인 의례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후 조선에서 파견된 사신들 중에는 베트남의 사정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다. 1528년부터 조선의 사신들은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을 의식해서인지는 몰라도 1527년에 선양(禪讓)의 형식을 빌려 제위에 오른 막 당 중(Mạc Đăng Dung, 莫登庸)의 레 (Lê) 왕조(黎朝) ‘찬탈’ 과정과 중국 측의 태도를 비교적 자세하게 조정에 알렸다. 또한 17세기 초에 세 차례에 걸쳐 사행을 다녀온 후에 신분 제도와 적서 차별에 항의했던 허균(許筠)은 명의 빈공과(賓貢科, 외국인이 응시하던 과거)에 급제해 관리로 활동하던 ‘안남’ 사람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1785년의 사은정사(謝恩正使) 박명원(朴明源)과 부사(副使) 윤승렬(尹承烈)은 ‘안남’의 특산품 육계(肉桂)와 곽향(藿香)에 대한 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조선과 베트남의 사신들이 만난 중국의 북경과 1687년에 제주도민이 표류한 지점으로 추정되는 베트남의 꾸 라오 짬 섬.
조선과 베트남의 사신들이 만난 중국의 북경과 1687년에 제주도민이 표류한 지점으로 추정되는 베트남의 꾸 라오 짬 섬.
1687년에 제주도민이 표류한 지점으로 추정되는 베트남의 꾸 라오 짬 섬(호이 안에서 24km 떨어져 있다).
1687년에 제주도민이 표류한 지점으로 추정되는 베트남의 꾸 라오 짬 섬(호이 안에서 24km 떨어져 있다).
양국 사행단의 시문 교류

아울러 조선 사신들은 베트남 사신들이 지은 시문(詩文)에도 관심을 가졌다. 중국 통주(通州)의 역루(驛樓)에 걸려 있던 어떤 베트남 사신의 시 세 편은 조선의 사신들을 통해서도 유입된 것 같은데,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김정국(金正國)과 장유(張維)는 자신들의 문집에서 이 시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1578년에 하지사(賀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이정형(李廷馨)도 베트남 사신 응우옌 짱(Nguyễn Trang, 阮莊) 등이 북경에 사신으로 왔다가 옥하관(玉河館)의 문에 남긴 시 한 편을 자신의 문집에 수록해 놓았다. 적극적인 양국 사행단의 교류는 직접 시문을 주고받는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1458년의 사은사(謝恩使) 서거정(徐居正)과 르엉 혹(Lươg Hộc, 梁鵠), 15세기 후반의 수행원 조신(曺伸)과 레 티 끄(Lê Thì Cử 黎時擧), 1481년의 천추사(千秋使) 홍귀달(洪貴達)과 응우옌 반 쩟(Nguyễn Văn Chất) 및 응우옌 비(Nguyễn Vĩ, 阮偉), 1488년의 서장관 황필(黃㻶)과 익명의 베트남 사신, 1496년의 정조사(正朝使) 신종호(申從濩)와 부 따(Vũ Tá, 武佐), 1518년의 사은부사 (謝恩副使) 김안국(金安國)과 익명의 베트남 사신, 1519년의 사은사 김세필(金世弼)과 익명의 베트남 사신, 1598년의 진위사(陳慰使) 이수광(李睟光)과 풍 칵 코안(Phùng Khắc Khoan, 馮克寬), 1691년의 진주사(陳奏使) 민암(閔黯)과 익명의 베트남 사신 등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이수광과 풍 칵 코안의 만남은 양국 사신 교류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수도에서 궁전들이 불타게 되자, 이수광은 북경에 파견되었다. 그때 베트남 레 왕조의 사신 풍 칵 코안을 만나 숙소 옥화관에서 50일 동안 함께 머물며 필담을 통해 알게 된 ‘안남’의 풍속과 제도 등을 『지봉집(芝峯集)』에 상세히 소개했다.

사행 기록에 나타난 교류의 흔적

아울러 각종 사행 기록에서도 조선 사행단의 베트남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1766년에 북경을 방문한 군관(軍官) 홍대용(洪大容)은 “안남이 6년에 두 번 조공을 바친다”고 소개했고, 1777년의 부사 이압(李押)은 베트남의 조공 횟수 이외에도 문화와 풍물을 알렸다. 마찬가지로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을 수행했던 박지원(朴趾源)도 1780년의 여행을 통해 학문 풍토뿐만 아니라, 중국 승려 석대산(釋大汕)의 여행기 『해외기사(海外記事)』(1699)에 근거하여 지리적 환경과 특산물 등을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팔순을 기념하는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기 위해, 1790년에 진하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참가했던 서호수(徐浩修)의 『연행기(燕行紀)』가 특히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의 기록이 이수광의 『지봉집』이나 『지봉유설(芝峰類說)』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관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 특유의 고증적 태도, 서양 학문에 대한 관심, 청의 정치·문화에 대한 정보, 주변 국가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베트남으로까지 확대되어 예리한 관찰이나 문답 형식 혹은 분석을 통해 당대(當代) ‘안남’의 분위기를 ‘거침없이’ 해부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서호수는 1790년 7월 16일 열하(熱河)에 도착한 직후부터 약 열흘 동안 베트남 사신들과 공식 행사에 함께 참여하면서 교류할 수 있었다. 이미 사행을 떠나기 전부터 떠이 썬(Tây Sơn) 왕조(西山朝, 1778~1802)가 1789년에 레 왕조를 ‘찬탈’한 사건을 알고 있던 서호수는 이 조정의 사신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상대편의 치부를 하나씩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구차한 만주식의 갓과 의복” 차림 때문에 떳떳할 수 없었던 베트남의 부사 판 후이 익(Phan Huy Ích)은 자신의 칠언율시에서 “의관은 오랜 세월 동안 같은 모양이고, 기이한 인연으로 아침마다 손바닥에 글씨를 쓰며 이야기를 나누네”라며 서호수의 이해를 구하고자 했지만, 조선 부사의 반응은 냉담했을 뿐이었다. 서호수의 『연행기』에 나타난 베트남 관련 기사들은 이후 조선 사행단의 베트남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떠이 썬 세력으로 대표되던 지극히 부정적인 이미지의 ‘안남’은 적어도 19세기 초까지 지속되었으며, 떠이 썬 왕조를 붕괴시킨 응우옌(Nguyễn) 왕조(阮朝)가 성립한 다음 해인 1803년 말에 이르러서야 보다 객관화된 베트남이 재등장할 수 있었다.

1803년 8월 27일에 사행을 떠났다가 12월 28일에 돌아온 사은사의 서장관 홍석주(洪奭周)는 떠이 썬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응우옌 푹 아인(Nguyễn Phúc Ánh, 阮福映)이 청조로부터 ‘안남왕’에 봉해지고 국호가 ‘월남(越南)’으로 정해졌음을 조정에 알렸다. 당시 정사였던 이만수(李晩秀)도 중국 측의 관보 『저보(邸報)』를 통해 알게 된 베트남의 최근 정세를 『관월남기(觀越南紀)』에서 홍석주와 마찬가지로 전하고 있다. 아울러 1803년 12월 4일 동지사 (冬至使) 일행의 서장관 서장보(徐長輔)의 수행원 이해응(李海應)도 자신의 사행 경험을 정리한 『계산기정(薊山紀程)』에서 산문과 시를 적절히 배합해 응우 옌 푹 아인의 ‘월남’ 건국을 기록하고 있고, ‘월남국’ 등장의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인접해 있던 태국과 캄보디아의 역사도 간략하게 부언하고 있다. 그리고 1828년 10월에 동지사 홍기섭(洪起燮)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4월에 돌아온 박사호(朴思浩)는 그동안의 경험과 견문을 기록한 『심전고(心田稿)』에서 18세기 말 응우옌 반 후에(Nguyễn Văn Huệ)의 떠이 썬 정권 등장 배경과 19세기 초반 ‘월남국’의 성립 과정을 약술했고, 베트남의 공작과 전투용 코끼리 이외에도 태국의 특산품이나 캄보디아의 풍물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1832년 12월 동지사의 서장관 김경선(金景善)은 다음 해 2월 12일 유구국(琉球國) 사신이 호송해 온 제주도 출신의 표류자 26명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표류자들을 불러 조사한 사건 경위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원래 33명의 제주도 사람들이 1831년 12월 26일 저녁에 배를 타고 장사하러 육지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7명은 행방불명되고 나머지 26명만이 1832년 1월 9일 유구국의 이강도(伊江島)에 표류했다. 이들은 결국 26일에 수도로 호송된 후 유구국의 조공 사행단을 따라 북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유구국에서 생활하던 표류인들은 베트남과 관련된 소식을 듣기도 했는데, “바로 지난해 5월에 지나가던 안남의 배가 근처에 와서 정박하고는 왕성에 들어가 보기를 청했더니, 유구국 사람들이 대단히 두려워해 군사를 내어 지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한 “안남의 배”는 응우옌 왕조의 제2대 민 망(Minh Mạg) 황제가 정기적으로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파견하던 ‘관선(官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845년에 서장관 이유원(李裕元)은 베트남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현지 화폐, 과거 양국 사신들의 화답시, 베트남의 관대(冠帶)와 반청(反淸) 감정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총괄적인 평가에서, “아, 한번 중화의 문물이 오랑캐의 풍속으로 바뀌어 버린 뒤로는 변발(辮髮)과 홍모(紅帽)가 중국 땅에 두루 가득해 한관(漢官)의 점잖은 위의(威儀)는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는데, 이제 안남 사람들을 보니 그 의관과 문물이 오히려 명나라의 옛 제도를 전하고 있구나”라고 결론을 내렸다. 베트남 사신들을 통해 받은 이런 인상 때문에 이유원은 당대(唐代) 이후 전개된 딘씨(丁氏), 레씨(黎氏), 리씨(李氏), 쩐씨(陳氏)로 이어지는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더 나아가서 태국,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필리핀 등지 사람들의 풍물에 대해서도 소개하게 되었다.

『지봉유설』-권2 외국부의 안남 부분, 국립중앙도서관.
『지봉유설』-권2 외국부의 안남 부분, 국립중앙도서관.
다른 나라에 대한 이해와 경험의 활용

이처럼, 북경으로 파견된 조선의 사신들은 공식적인 의전이나 비공식적인 만남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베트남의 경우는 조중 관계를 조정할 때, 중요한 선례였다. 그리고 ‘안남’의 특산품은 경제적인 면에서 중요했으며, 시문을 주고받던 문학 교류는 서로를 이해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국의 선례를 따라 ‘안남’이라고 부르며 베트남을 정치적으로 폄하하기도 했던 조선의 사신들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안남’을 ‘월남’으로 재인식하면서 이 나라를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하기 위해 베트남 주변의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 필리핀 등의 역사, 특산품, 풍물 등으로 관심을 확대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