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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미지의 땅에서 보여준 열정의 순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13 조회수 : 758
미지의 땅에서 보여준 열정의 순례
지금부터 1300년쯤 되는 먼 옛날에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멀리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방을 두루 여행하고 여행기를 남긴 이가 있다. 신라의 혜초(慧超)이다. 혜초는 단신으로 머나먼 이국땅을 이곳저곳 돌아보고, 그사이 보고 듣고 경험한 온갖 풍정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책 이름은 오천축 곧 인도에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이다. 그때는 인도가 워낙 큰 나라인데다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어서 오천축 또는 오인도라고 불렀다.
글·사진 정병삼(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명예교수)
『왕오천축국전』 순례 경로.
『왕오천축국전』 순례 경로.
사막에서 세상으로 나온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은 뜻하지 않게 세상에 나왔다. 사막의 도시 돈황은 중국 문물과 서양 문물이 만나는 비단길의 길목이었다. 이곳에 천년에 걸쳐 조성된 불상과 불화의 보고 막고굴이 있다. 그중 한 작은 동굴에서 1900년에 엄청난 양의 전적과 서화가 발굴되었다. 프랑스 탐험대가 파리로 실어 간 문서 중에 한 두루마리가 있었다. 앞뒤가 떨어져 나가서 무슨 책인지 이름도 모르는 것을 천재적인 탐험가 펠리오(Pelliot)가 『왕오천축국전』임을 알아냈다. 이 책은 227줄에 6천자쯤 되는 여행기를 붓으로 쓴 세로 28.5cm 길이 358.6cm 정도의 종이책이다. 혜초는 700년경에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승이다. 젊은 시절에 인도에 구법여행을 다녀온 후 밀교의 고승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며 780년경까지 살았다. 혜초는 대략 720년 무렵부터 728년까지 지금의 인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걸어서 여행했다. 지금과 달리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던 이곳은 당시 기준으로는 모두 36개 지역에 이른다. 이 중에 26개 지역은 직접 순례했고, 10개 지역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다. 인도가 10(3)지역, 파키스탄이 4지역, 아프가니스탄이 5지역이다. 아랍 등이 2(1)지역,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가 1(5)지역, 그리고 중국 4(1)지역이어서, 모두 26(10)지역이 된다. 넓게 보면 아프간 북쪽에서 중국 서부 지역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일대가 절반인 18개 지역이다. 이점이 『왕오천축국전』의 큰 특색으로 다른 순례기에 비해 단연 중앙아시아에 대한 비중이 크다.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전반의 인도기행 기록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그런데 670년에 당과 티베트 사이에 전개된 서부 지역의 쟁탈전으로부터 751년에 벌어진 당과 아라비아의 탈라스 전투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는 당과 티베트, 돌궐과 아라비아 등이 각축하던 격변의 현장이었다. 때마침 혜초는 이 지역을 순례하고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아랍은 704년에 호라산 총독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혜초의 기록은 중앙아시아에 진출했던 아랍의 상황을 처음으로 기록한 것으로 크게 평가받기도 한다.

『왕오천축국전』, 국립중앙박물관.
『왕오천축국전』, 국립중앙박물관.
불교 성지에서 얻은 감동과 보람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서 순례 지역의 방향과 걸어서 며칠 걸리는지 거리를 기록했다. 이런 기록으로 추정해 본 구법 행로는 이렇다. 혜초는 720년경에 당나라 서울 장안을 떠나 동남쪽 해안의 광주로 가서 배를 타고 인도로 향했다. 당시 인도로 가는 구법승들은 험난한 사막을 지나야 하는 육로보다 해로를 선호하였다. 다른 구법승들이 그랬듯이, 아마 계절풍을 고려하여 겨울에 출항하여 한 달 만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며 더운 기후에 적응하고 산스크리트어도 익혔다. 당시 인도네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산스크리트어를 쓰는 인도 문화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 그러고는 해안을 따라 말레이반도를 지나 인도 동쪽 콜카타 근처에 있는 탐룩(탐라립티)에 상륙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인도 순례에 들어간 것이다. 혜초는 먼저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기 위해 갠지스강 근처를 찾았다. 앞부분이 떨어져 나간 『왕오천축국전』은 바이샬리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이어 석가모니가 돌아간 곳인 쿠시나가라를 순례하고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한 바라나시에 갔다. 이 갠지스강 일대의 불교 유적지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혜초는 석가모니가 불교를 처음 열었던 성지에서 때로는 그때의 벅찬 느낌에 감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위대한 불교 기념물에서 성지순례의 성취감을 가슴에 가득 안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은 왕오천축국전의 기록에서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인도의 불교 유적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4대 성지를 꼽는다.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인 룸비니, 고행하다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얼마 후 같이 수행했던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사르나트, 석가모니가 열반했던 쿠시나가라가 그것이다. 인도 순례자들은 누구나 이 성지를 찾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혜초도 마찬가지였다. 4대 성지에 더하여, 번영국이자 불교 중심지였던 슈라바스티와 마가다국의 라자가하, 신통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카시아,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평화롭게 살던 바이샬리를 합쳐 8대 성지라고 한다. 혜초는 이들을 모두 순례했고, 이렇게 8대 성지를 꼽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미지의 땅을 향한 끝없는 발자국

이렇게 불교의 핵심 성지를 찾은 다음 서쪽으로 향한 혜초의 발길은 두 달 만에 중인도에 닿았고, 여기서 석 달이 걸려 남쪽으로 석굴이 많이 있던 남인도를 찾았다. 남인도에서 다시 두 달 만에 북서쪽으로 인더스강 유역의 서인도에 이르렀다. 서인도에서 세 달이 걸려 북인도 잘란다라에 이르렀다. 인도가 워낙 큰 나라였기 때문에 완전히 도보로 다녔던 혜초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 두세 달씩 걸렸다. 이곳에서 가기 어려운 오지의 소식을 들었다. 혜초는 직접 가지 않은 곳도 많은 얘기가 있는 곳은 전해 들은 소식을 기록해 두었다. 다시 서쪽으로 한 달을 가서 파키스탄 땅의 시알코트(탁샤르)에 들어섰다. 또 서쪽으로 한 달을 가니 펀치(신드 구자라트)였다. 여기서 북쪽으로 15일을 가서 카슈미르 중심지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티베트와 라다크 등 흥미로운 오지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카슈미르에서 서북쪽으로 7일을 가니 장수지역으로 이름난 길기트였다. 길을 돌아 나와 카슈미르에서 큰 산을 넘어 한 달 만에 불교미술이 크게 발달했던 간다라에 이르렀다. 지금의 페샤와르이다. 간다라는 일찍부터 불교가 처음 일어난 곳을 제치고 불교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대탑과 대사원이 곳곳에 들어서서 아름다운 불상과 어우러져 자태를 뽐내면서 불교미술을 꽃피우고 있었고 그만큼 불교도 성행하던 지역이었다. 간다라 일대에는 불교 유적지가 몰려 있었다. 북쪽으로 3일을 가면 지금의 스와트인 우디아나였고, 거기서 동북으로 15일을 가면 지금의 치트랄인 쿠위였다. 다시 간다라로 돌아와 서쪽으로 7일을 가서 아프가니스탄 땅인 람파카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8일을 가면 지금의 카불인 계빈국이다. 다시 서쪽으로 7일을 가면 지금의 가즈니인 자불리스탄에 이르고, 계속 북쪽으로 7일을 가면 바미얀에 이른다. 이곳에는 5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두 불상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얼마 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던 그 현장이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20일을 가서 지금의 발흐인 박트리아(토하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한 달을 가서 이란의 니샤푸르에 도착했다. 이곳은 페르시아 영역이었다. 혜초는 이때 보고 들은 아라비아 문물을 기록했다. 니샤푸르에서 북쪽으로 10일을 가면 아라비아에 이르는 곳이어서, 혜초는 이곳에서 서방 비잔틴제국에 대해 전해 듣고, 또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지역에 있던 사마르칸드 등 소그드 여섯 나라와 투르크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실크로드 등 문물이 유통되는 통로가 여러 갈래로 운영되던 곳이었다. 토하라로 돌아와 그곳에서 동쪽으로 7일을 가서 와한에 이르렀다. 이곳은 파키스탄 북부의 긴 회랑지대로 역시 지금도 중요한 교역로로 사용되는 곳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15일을 가서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슈쿠르간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지금의 중국 땅이 된다.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 사이로 난 서역북도를 따라 카슈가르와 쿠차를 지났다. 각각 한 달씩 걸리는 먼 길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 도시들이다. 혜초는 쿠차에서 타클라마칸 사막 건너편에 있는 교역과 불교의 도시 호탄에 대해 전해 들었다. 혜초는 다시 쿠차에서 동쪽으로 가서 카라샤르에 이르렀는데, 원래 여정은 장안이 최종 목적지였지만, 『왕오천축국전』은 현재 여기까지만 남아 있다. 아마 혜초의 여정은 고창을 지나 서역과 당나라의 문화가 만나 천불동의 화려한 예술을 꽃피운 돈황을 거쳐, 728년경에 장안에 도착함으로써 긴 여정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중국 서안 교외 선유사에 있는 혜초스님 기념비. 간다라 다르마라지카                 대탑.
중국 서안 교외 선유사에 있는 혜초스님 기념비. 간다라 다르마라지카 대탑.
간다라 페샤와르박물관 불상. 파키스탄-중국 국경 근처 파미르.
간다라 페샤와르박물관 불상. 파키스탄-중국 국경 근처 파미르.
현장의 생생한 맛을 살린 감성적인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자신이 여행한 지방을 보고 느낀 점이나 전해 들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래서 각 지역의 불교계 현황과 지역 간의 거리를 비롯한 지리 환경, 그리고 풍습과 산물이나 언어 또는 정치 상황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일일이 방향과 걷는 기간으로 다음 목적지를 표시하여, 지금도 이를 곰곰 생각하면 그 위치와 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그곳의 상황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 그 공간에 대한 느낌도 머릿속에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중인도에 대한 기록을 보자.

길에는 도적이 많은데 물건을 빼앗고 곧 놓아주며 해치거나 죽이지 않는다. 만약 물건을 아끼다가는 다치는 수도 있다. 토지가 매우 따뜻하여 온갖 풀이 항상 푸르고 서리나 눈은 없다. 먹는 것으로는 쌀과 떡과 보릿가루와 버터와 우유 등이 있고, 간장은 없으며 소금을 쓴다. 흙으로 만든 냄비에 밥을 지어 먹고 쇠솥은 없다. 백성들은 가난한 사람이 많고 부자가 적다. 왕이나 관리나 부자는 털옷 한 벌을 입고 가난한 사람들은 옷 하나만 입는다.

어떤가. 1천 년도 훨씬 넘는 옛날 기록이지만, 마치 얼마 전에 다녀온 것처럼 그 정경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가. 혜초는 이런 종합적인 풍정과 함께 한편으로는 순례자의 감회를 풍부한 시정으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모두 5편의 시를 남겼는데, 이는 다른 여행기에는 없는 『왕오천축국전』만의 특징이다. 혜초는 주관적 편견을 제거하고 여행지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산문 부분에 우선 중점을 두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순례 중 부딪히는 온갖 난관을 헤치고 순례의 서원을 완성하려는 생생한 감정을 진솔하게 시에 담아 구도자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산문에서 그리고자 했던 대상 지역의 객관적인 기술과 시에서 표현한 사실적 체험의 정서적 표현이 대조적인 구조를 이루면서, 『왕오천축국전』은 전편에 걸쳐 견실한 짜임새를 갖춘 보기 드문 순례기가 되었다. 혜초는 바닷길로 인도에 가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 육로로 당나라에 돌아왔다. 7세기에 삼장법사 현장은 육로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와 방대한 대당서역기를 남겼다. 이 육로의 험난한 여정은 손오공이 활약하는 서유기로 각색되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모습을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우리나라 구법승 중에서 인도에 구법여행을 갔던 이들은 모두 15인이 알려졌다. 그런데 그중에 여행지 인도에서 혹은 왕래하던 여행길에서 생을 마감한 이가 10명이나 된다. 중국까지 돌아온 이는 3명,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는 불과 2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목숨을 내건 험난한 여정을 완수해냈던 현장감을 따뜻한 마음에 담아, 다양한 풍정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것이 『왕오천축국전』이다. 아직 우리가 이름만 들어봤지 그 내용은 잘 모르는, 굳은 다짐과 정보와 뜨거운 열정이 문장과 시에 남아 짙은 향기를 전하고 있는 보기 드문 여행기이다. 저 먼 옛날에 세계를 향해 몸과 마음을 활짝 열고 넓은 세상을 향해 발길을 내딛었던 뜨거운 용기가 그대로 전해오는, 그래서 세계에 자랑스러운 우리의 훌륭한 문화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