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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빙사, ‘문명’을 향한 오랜 동경의 시작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13 조회수 : 3159
보빙사, ‘문명’을 향한 오랜 동경의 시작
신미양요로 강화도가 유린되기 직전이었던 1871년 4월, 『중용(中庸)』 강독을 끝낸 고종은 신하들과 함께 국정현안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이 자리에서 영의정을 역임한 원로대신 김병학은 ‘미리견’ 선박의 출몰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미리견(彌利堅)’은 ‘아메리카’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서 지금의 미국을 가리킨다. 바로 그 ‘미리견’ 선박이 교역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종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이들은 해적(海浪賊)과 다름없다. … 만약 한 번이라도 교역하게 된다면 사학(邪學)이 불길처럼 일어나 공자의 도가 폐지될 것이다.” 교역을 거부한 조선은 곧이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고 오랑캐와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했다.
글 서명일(고려대학교박물관 학예사)
‘은자(隱者)’와 ‘서양 오랑캐’의 만남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883년, 조선은 오랑캐로 여겼던 ‘미리견’에 국서(國書)를 전달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 국서에 적힌 상대국의 이름은 ‘미리견’이 아닌 ‘대아미리가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으로 격상되었고 국서의 수신자 역시 ‘프레지던트’를 뜻하는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으로 정확히 표기되었다. 마침내 ‘대아미리가합중국’의 ‘백리새천덕’을 접견하게 되자, 조선에서 온 사절단은 체스터 아더(Chester A. Arthur) 미국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소중화’를 자부해 온 조선이 교역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오랑캐의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그들의 대통령에게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 경의를 표한 셈이다. 미국의 한 주간지에 소개된 이날의 모습은 서로를 ‘서양 오랑캐(洋夷)’와 ‘은자(隱者)의 나라’로 여겨왔던 조선과 미국, 두 나라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미국에 파견된 최초의 사절단

1883년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은 ‘보빙사’라 불린다. ‘보빙사(報聘使)’란 상대국에서 사절단을 파견한 것에 발맞추어 답례의 뜻으로 파견하는 외교사절을 뜻한다. 아더 대통령을 접견했던 조선인 사절단 역시 미국에서 대통령 명의의 친서를 전달하자 외교 관례에 따라 고종의 답장을 전하고자 파견되었기 때문에 보빙사라 불리는 것이다.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내정과 외교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이 분명해지자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대미외교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보빙사의 파견은 독자적인 대미외교의 가능성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데뷔 무대와 같았다. 조선은 이를 위해 전권대신 민영익을 필두로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유길준과 변수 등 20대 중반의 젊은 관료 8명을 선발하였다. 이들은 미국에 파견된 최초의 사절단으로서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 시카고와 워싱턴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뉴욕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9월 18일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 호텔에서 역사적인 국서 제정식(提呈式)이 열렸다. 아더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고종의 친서와 보빙사에 대한 신임장(信任狀)으로 구성된 두 통의 국서는 양국의 우호증진을 바란다는 의례적인 내용이었지만, 조선은 국서를 교환함으로써 조선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외교 관계를 맺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동아시아를 벗어나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근대적 외교 질서에 첫발을 내딛는 것은 커다란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조선이 건국된 이래 그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땅이었던 만큼 미국으로 가는 길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다. 사상 초유의 미국 사행은 태평양이 가로막고 있는 두 나라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보빙사 일행은 제물포에서 미국의 군함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간 뒤, 다시 요코하마로 이동해 홍콩과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정기여객선 아라빅호(Arabic)에 탑승했다. 보름이 넘는 항해 끝에 태평양을 가로지른 사절단은 지친 몸을 이끌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하지만 뉴욕은 샌프란시스코에서 4,800km나 떨어져 있었다. 보빙사 일행은 다시 대륙횡단열차에 올라타 열흘을 더 달린 뒤에야 아더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뉴욕에 닿을 수 있었다. 대륙횡단열차가 완공되지 않 았던 1860년대, 조선보다 한발 앞서 뉴욕을 방문했던 일본의 사절단이 파나마 운하를 지나 대서양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것에 비하면 보빙사의 여정은 한결 단축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에서 출발한 보빙사 일행이 뉴욕에 도착하기까지는 두 달 남짓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연행사와 통신사 등 수많은 사절단이 파견되었지만 지구 반 바퀴를 건너온 보빙사는 그 어떤 사행보다 먼 길을 달려온 셈이다.

미국에 도착한 사절단에게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언어의 장벽이었다. 조약을 맺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지만 조선에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외교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수행원 가운데 한 명이었던 고영철이 중국에서 1년 남짓 영어를 학습했지만 통역을 맡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보빙사를 영접하기 위해 일본어에 능숙한 해군 소위 포크(George C. Foulk)를 파견했지만 그 또한 조선어를 구사하지는 못했다. 결국 두 나라의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통역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교적 교섭을 위해서는 제3의 언어가 필요했다. 사절단은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유길준과 변수 등을 통해 일본어로 의사 를 전달한 다음, 일본인 통역관이 이를 다시 영어로 옮기는 이중통역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어를 일본어로 통역하고 이를 다시 영어로 옮기는 것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보빙사 일행은 언어의 장벽에 굴하지 않았다. 사절단은 공식 임무였던 국서 제정을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약 40일간 뉴욕과 워싱턴 및 보스턴을 오가며 미국의 다양한 시설과 제도를 시찰했다. 보빙사가 시찰한 곳은 재무부와 국무부, 조폐국과 특허청 등 연방정부의 다양한 행정부처뿐만 아니라 육군사관학교와 해군조선소 등의 군사시설, 방직공장과 철공소 등의 산업시설, 우체국과 전신국 등의 국가기반시설을 망라하고 있다. 연회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려 했다는 현지 언론의 평가가 말해주듯, 보빙사는 국서 전달을 위한 의례적인 외교사절에 머물지 않고 조선 최초의 미국시찰단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에 도착한 보빙사 일행. 앞줄 왼쪽부터 미국인 참찬관 로웰, 부대신 홍영식, 전권대신 민영익, 종사관 서광범, 중국인 통역관 우리탕, 뒷줄 왼쪽부터 수행원 현흥택, 일본인 통역관 미야오카, 수행원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출처 : 고려대학교 박물관)
미국에 도착한 보빙사 일행. 앞줄 왼쪽부터 미국인 참찬관 로웰, 부대신 홍영식, 전권대신 민영익, 종사관 서광범, 중국인 통역관 우리탕, 뒷줄 왼쪽부터 수행원 현흥택, 일본인 통역관 미야오카, 수행원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출처 : 고려대학교 박물관)
보빙사와 아더 대통령의 만남을 소개한 미국의 주간지 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1883.09.29.).(출처 : Hathi Trust)
보빙사와 아더 대통령의 만남을 소개한 미국의 주간지 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1883.09.29.).(출처 : Hathi Trust)
제물포에서 출발해 미국 뉴욕에 도착한 보빙사의 이동 경로.
제물포에서 출발해 미국 뉴욕에 도착한 보빙사의 이동 경로.
“문명의 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시다”

보빙사의 눈에 비친 미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미국에서 먼저 돌아온 홍영식은 고종에게 사행 결과를 보고하며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라고 소개했다. 몇 달 후 사절단을 이끌었던 민영익이 6개월간의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하자 고종은 다시 한번 물었다. “미국의 부강함이 천하제일이라 하는데, 과연 그러하던가?” 민영익의 답변 역시 홍영식과 다르지 않았다. 민영익과 홍영식 모두 보빙사 파견에 앞서 일본을 시찰하며 근대 문명을 경험했지만 그들 에게 미국의 부강함은 일본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보빙사 일행에게 미국의 첫인상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는 경이로운 힘으로 각인되어 있다. 불과 2년 전 일본으로 떠나는 사절단이 부산까지 가는 데만도 한 달 가까이 걸렸던 반면 보 빙사 일행을 태운 증기선은 직선거리로 9,000km가 넘는 태평양을 단 16일 만에 가로질렀고 대륙횡단열차가 아메리카 대평원을 지나는 데에는 채 열흘도 걸리지 않았다.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근대 사회의 본질을 ‘증기세계’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으로 향하는 기선과 기차 안에서 ‘교통혁명’을 생생히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에 도착한 보빙사는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압도적인 위용의 근대 도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끝도 없이 줄지어선 고층 건물과 깨끗하게 정비된 도로, 그 위를 오가는 수많은 인파가 뿜어내는 뉴욕의 화려함은 사절단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홀로 거리를 거닐다 길을 잃기도 했던 유길준은 뉴욕의 고가철도(Elevated Railroad)를 보며 ‘천하의 장관’이라 감탄할 정도였다. 영국에서는 땅속을 누비는 지하철이 개통된 지 오래였지만, 그는 오히려 지상 3층 높이에서 움직이는 고가철도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열차에 직접 탑승했던 유길준이 구름을 뚫고 달리는 것 같았다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밝힌 것을 보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뉴욕의 스카이라인은 보빙사의 경험 세계를 벗어난 신세계에 가까웠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스트강을 가로질러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초대형 현수교 역시 보빙사에게는 시각적 충격이었다. 1,800m에 달하는 다리가 강철끈에 매달린 채 40m 높이의 허공 위에 떠 있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놀라운 광경이었다. 보빙사 일행이 보았던 현수교는 지금까지도 뉴욕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남아 있는 브루클린 다리이다. 140년 전 뉴욕에는 자유의 여신상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없었지만, 미국 최대의 도시가 연출하는 ‘문명’의 풍경은 ‘근대’에 대한 의구심을 일소해버릴 만큼 압도적이었다. 짐작건대 ‘문명’의 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실 정도라는 홍영식의 감탄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빙사가 방문했던 1883년의 뉴욕 시가지.(출처 : Hathi Trust)
보빙사가 방문했던 1883년의 뉴욕 시가지.(출처 : Hathi Trust)
유길준이 감탄했던 뉴욕의 고가철도.(출처 : New York Public Library)
유길준이 감탄했던 뉴욕의 고가철도.(출처 : New York Public Library)
보빙사가 보았던 뉴욕 브루클린 다리의 위용.(출처 : New York Public Library)
보빙사가 보았던 뉴욕 브루클린 다리의 위용.(출처 : New York Public Library)
부강의 원천을 찾아서

미국이 이룩한 근대 문명은 경험하는 순간 얼어붙게 만드는 압도적인 감각을 선사했다. 하지만 보빙사 일행이 ‘문명’의 빛에 현혹되어 정신을 잃었던 것은 아니다. 보빙사는 건국한 지 불과 100년 만에 세계적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미국 사회의 저력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와 시설을 시찰했고 조선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 했다. 40여 일간의 시찰을 통해 보빙사가 내린 결론은 미국을 부강하게 만든 원동력이 그들의 교육제도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길준은 한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시찰한 것 가운데 조선으로 가져가고 싶은 것이 있냐는 질문을 받자 곧바로 미국의 교육제도라고 답변했다. 유길준은 미국의 부강과 번영이 교육 의 결과이며 미국의 교육제도를 조선에 도입할 수 있다면 조선 역시 미국처럼 부강해질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피력했다. 근대화의 여정에서 시찰단의 파견이 중요한 까닭은 낯선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목격한 ‘문명’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조선에 드리운 ‘어둠’은 더욱 짙어 보일 수밖에 없다. 보빙사의 미국 체험은 한 세기에 걸쳐 이어질 ‘문명’에 대한 오랜 동경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