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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주미공사의 미국살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13 조회수 : 531
주미공사의 미국살이
1887년 8월, 조선 최초의 서양 주재 공사원들이 임명되었다.주미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하영, 서기관 이상재, 번역관 이채연, 공사 수행원 강진희, 참찬관 수행원 이헌용, 하인 이종하, 알렌의 종자 김노미, 하인 허용업으로 구성된 조선인들과 이들의 안내를 맡은 알렌(Horace N. Allen)이 미국 파견을 명받은 것이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알리기 위해 파견된 이들의 행적을 공사 박정양의 『미행일기(美行日記)』와 『미속습유(美俗拾遺)』1 에서 그 기록들을 돌아본다.
글 이효정(협성대학교 웨슬리창의융합대학 조교수)
마운트 버넌을 방문한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 일행,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마운트 버넌을 방문한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 일행,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조선 최초 서양 주재 공사의 파견

공사 박정양은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으로 메이지 일본에 파견되어 이미 근대를 시찰한 경험이 있었으며 고종의 신임도 두터웠다. 일행 중 이완용, 이채연, 이하영은 영어를 조금 할 수 있었지만 능숙치 않아 미국인 알렌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을 파견한 것은 미국의 형세 파악이란 목적도 있었지만, 조선의 자주독립됨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 의도도 있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淸)의 내정간섭은 한층 강화되었고,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조선 속방론을 주장하면서 종주권 회복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조선은 청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주미전권공사를 독자적으로 임명하여 서구 세계에 파견한 것이다. 그러나 과정은 수월치 않았다. 청은 조선이 청과 동등한 입장에서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전권공사가 아닌 영사급의 3등 공사로 임명하기를 요구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결국 11월이 되어서야 영약삼단(另約三端)의 조건을 붙여 겨우 파견에 찬성하였다. 영약삼단이란, 조선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자마자 청국공사관을 방문하여 청국공사와 함께 주재국 외교부를 방문해야 하고 외교 모임에 참석할 때도 청국공사의 뒤를 따라야 하며, 중대한 외교 문제를 교섭할 때도 청국 공사와 협의하며 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국공법이 통용되었던 근대 질서 속에서도 ‘조공관계’라는 전근대적 시스템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청국의 실제적 압박이 존재했던 엄중한 현실에서, 조선의 공사 일행들은 어떠한 견문과 외교 활동을 하였을까.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조선인의 눈에 비친 낯선 땅의 모습

공사 일행은 언어와 문자가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였다. 공사는 청국 공사관을 통하지 않고 고종의 국서를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에게 직접 전달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알렸다. 또 피서옥(The Fisher House)을 주미조선공사관으로 개설하여 대미외교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곳은 워싱턴 북서 O가 1513번지로 백악관과 가까웠고, 주변에 각국 공사관이 모여 있어 국제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다. 1888년 1월부터 1889년 2월까지 운영되었는데, 조선 정부가 서양 국가에 최초로 개설한 상주 공사관으로서 비록 셋집이었지만 독립국의 상징인 국기를 게양하는 등 어려운 국내외 상황 속 자주 외교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조선인들의 근대 견문은 도시에 집중된다. 자연을 극복하고 이용하는 기술, 철저한 개발만이 지향해야 할 근대식 ‘문명’이었다. 철도는 도시와 도시, 교역지와 교역지만을 빠르게 연결해주는 대신 메트로폴리탄 이외의 경관은 오히려 제한시켰다. 즉, 도시 간 네트워크의 발달은 결국 미국 내에서의 견문을 도시에만 국한되도록 하였으며 그에 따라 사행 기록 역시 특정 대도시만을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박정양도 수도 워싱턴에 머물면서 도시의 거리를 만드는 기술들, 보도와 차도, 가로수 등의 설비들을 관찰하며 도시 기반 시설의 효율성을 경험하였다. 번화한 거리에는 공원도 있어 잠시 쉴 수 있었다. 자연 속에서 휴식을 즐기고 싶었던 근대 도시인 또는 근로자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먼 길을 나서지 않아도 도시 안의 조성된 식물원이나 공원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도시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수집하였을 뿐 아니라 ‘문명’도 ‘전시’하였다.

박물관에 갔다. 바다와 땅에서 나는 물품, 날고 잠수하고 달리고 엎드린 동식물의 진품과 모형, 의복, 그릇 등이 종류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각국의 물품도 역시 모두 분류해서 배치되어 있다. (중략) 대개 널리 많이 모아서 인민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 널리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비된 것이 일본의 박물관에 미치지 못한다. - 『미행일기』, (음력) 1888년 1월 2일

아마도 이곳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Museum)이었을 것이다. 박물관은 동식물은 물론, 조선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물품을 모을 수 있다는 제국의 ‘힘’도 보여주었지만 각 물품이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되고 배열되는 과학적 합리성도 보여주었다. 더구나 ‘구태’와 ‘최신’의 문화가 한 공간에 배치되어 적나라하게 우열을 비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어떤 식의 견문을 할지는 자명하다. 조선에서 온 공사 일행조차 새로 생긴 미국의 박물관이 일본 박물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교판단을 직관적으로 내리고 있었다. 결국 박물관은 문명과 비문명, 퇴보와 진보를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모두가 같은 지향점을 갖도록 마음을 움직이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작용하였다. 박정양은 1881년 일본에 다녀온 경험 때문인지 즉물적이거나 단편적인 견문을 하기보다는 서양의 문화와 제도를 상세히 기록하는 등 비교적 확장된 견문을 하였다. 특히, 여성들이 노출된 복장으로 자유롭게 참석했던 무도회나 장례식, 크리스마스 등이 새로운 관심거리였다. 영화관에 처음 들어가 보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원형의 집으로 그다지 크고 넓지는 않은데 그 문으로 들어가 계단이 있어서 한층 올라가니 갑자기 사막이 나타 나 한눈에 바라보니 넓어서 끝이 없다. 석양이 산에 걸려 있고, 나무들이 울창한 개전장에서 포를 쏘는 자, 말 타고 달리는 자가 있다. (중략). 한쪽에서는 쓰러지거나 죽고 유혈이 흩뿌려져 솟아나며, 다른 쪽에서는 도망쳐 달아나 먼지나 휘날리며 어둡고 거무스름해지면서 전차가 뒤집히며, 칼리 번쩍이다가 갑자기 깨니 심신이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 『미행일기』, (음력) 1887년 12월 29일

하필이면 처음 본 영화 장면이 전쟁의 모습이었다. 싸움이 실제처럼 다가와 퍽 놀란 모양이다. 공사가 머물렀던 워싱턴은 오롯이 ‘미국’을 상징했다. 미국의 이전 수도는 필라델피아였지만 1800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을 딴 이곳으로 수도가 옮겨졌다. 워싱턴은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이 있어 미국의 정치적 대표성을 띠는 장소이기도 하였지만, 이름 그대로 ‘독립국가’ 미국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박정양은 미국 독립의 역사뿐 아니라, 전기(傳記)에 가까울 만큼 ‘위인’ 조지 워싱턴의 활약에 대해 많은 서술을 남겼고, 그의 생가인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에도 직접 찾아갔다. 100년 동안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에 감복하여 미국인들이 그를 추모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평하고 현지에서 독립기념일과 남북 전쟁 때 전몰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일(Mstrongorial day)을 지내면서 “이날들은 대개 옛사람의 혼령을 위안하고 현재 사람을 권면하는 의미”라 하였다. 워싱턴이라는 계획도시는 국민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상징들을 배치시켜 놓았고 이는 때때로 이념을 강화시키는 기재로 작용하였 다. 그리고 이 이념적 배치의 정점이 바로 워싱턴 기념비(Washington Monument)였다.

오직 워싱턴 기념비만 길이가 555피트로 허공으로 솟아서 다른 산과 비교하여 가장 높으며, 그 위에 올라가서 원근을 내려다보는 것이 장관이라 할 만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념비로 가서 (중략) 엘리베이터 위에 서니 갑자기 하늘 위로 날아 올라간 것처럼 느껴진다. 지하에서 출 발하여 비 위까지 이르는 데 12분 정도 걸리니 그 높이를 알 만하다. - 『미행일기』, (음력) 1888년 9월 9일

이 기념비는 약 170미터 높이의 석조 조형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오벨리스크(obelisk)였다. 이것은 공사가 도착하기 불과 3년 전에 완성되었는데, 너무 높아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서는 오르기 어려웠다. 하늘 위로 날아올라갈 듯이 웅장한 건축물에 오르면 사방이 5천 리까지 보이는 듯하였다. 워싱턴을 중심으로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눈을 돌리면 언제나 기념비를 볼 수 있었으며, 기념탑은 완성되는 순간부터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1915년에 찍은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출처 : Library of Congress)
1915년에 찍은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출처 : Library of Congress)
초대 주미전권공사로 발탁된 박정양이 워싱턴에서 활동했던 일기를 엮은 『미행일기』. (2015년 발행 도서 표지, 출처 : 푸른역사)
초대 주미전권공사로 발탁된 박정양이 워싱턴에서 활동했던 일기를 엮은 『미행일기』. (2015년 발행 도서 표지, 출처 : 푸른역사)
미국 최초의 대통령을 기념하는 워싱턴 기념비.(출처 : shutterstock)
미국 최초의 대통령을 기념하는 워싱턴 기념비.(출처 : shutterstock)
현재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모습(과거 주미공사관), 문화재청.
현재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모습(과거 주미공사관), 문화재청.
미국을 바라본 시각과 한계

조선 사람들은 미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 조선에서는 개항 이전부터 수입된 서양 인문지리서의 영향으로 유독 미국에 대해서만은 호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1882년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의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의 문구와 함께 조미수호조약 체결이 급물살을 탔고, 더욱이 조약의 거중조정(居中調整)안은 조선에게 한 가닥 희망처럼 보였다. 1800년대 후반 불안했던 조선의 지위와 미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미국을 더욱 긍정적으로 인식시켰다. 단적으로 박정양에 이어 서리공사가 된 이하영은 미국과 수교했던 이유를 “一曰 조선과 거리가 머려서 내국침입이 그다지 심하지는 안을 것이요, 二曰 황금의 부국이니 물질적으로 덕을 볼 것이요, 三曰 종교지상주의의 국가이니 도덕을 존중할 터이라 모욕과 야심이 적을 것”이기 때문으로 판단하였다. 여기에 더해 ‘민주국’은 미국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고종은 대통령이 접대할 때에 정말 악수만 하였는지 몹시 궁금해 했다. 박정양은 예절이 간편하여 오직 성심으로 대접하면 되기에 악수로 인사하였고, 대통령의 복장은 단출하고 관저는 소박하다고 답하였다. 한 번은 대통령 내외가 주최하는 연회에 초대되어 갔더니 내외가 문지방 안에 서서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영접하였는데, 박정양은 이를 ‘민주국’이기 때문으로 보고 높이 샀다.박정양은 실제 선거도 직접 목격하고 미국의 정치 제도와 각 기관에 대해 논하면서 선거에 기반을 둔 미국의 주권재민과 삼권분립의 공화정제도 정확히 인식하였다. 그는 ‘민주국’에 대해 국가의 권리가 주인인 백성에게 있는 나라라고도 하며, 미국은 주어진 신분에 따라 구별되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자주(自主)를 얻고 자주는 천부적이며 훼손할 수 없는 것이라 논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천부적 권리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사는 제3세계, 유색 인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와이를 경유하면서는 하와이가 미국에 보호를 의뢰했다면서 1875년 미국이 특혜권을 소유했던 불공평 조약을 은폐하였다. 미국 여기저기에서 원주민(Native American)을 보고는 ‘숙번인(熟蕃人)’이라 일컬으며, “홍인종은 본래 굼뜨고 둔해서 변화하기를 꺼리면서 고집스레 구습을 지키려고 한다”며 백인식 개조를 따르지 않음을 비난하면서 미국적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며 타자화하였다. 이는 『미속습유』의 ‘인종’이라는 항목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백인종은 (중략) 지식과 총명함, 재능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자주(自主)하여 미국 내에서 상등의 권리를 갖는다. 흑인종은 아프리카주, 인도 등 나라 사람의 후예이며, 그 수는 두 번째이다. 옛날에는 모두 노예로 백인종의 노복이었으며, 비록 수십년 전에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평민과 같은 지위가 되었지만, 재주와 지혜가 없고 어리석으며 예전의 풍습에 젖어 아직 자주의 권리를 얻지 못하였다. 홍인종은 본토의 야만적인 원주민 후예이며, 궁벽한 지역에 살면서 의복과 음식을 본래 자신들 풍습대로 하고 살면서 귀화하지 않는다. 미국 인민이 모두 금수처럼 여긴다. - 『미속습유』, 「人種」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백인들의 정복자적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곧 다가올 근대의 이민 문제, 인종 문제, 빈민 문제 등 문명개화된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직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공사 박정양이 지은 미국견문기 『미속습유』,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공사 박정양이 지은 미국견문기 『미속습유』,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근대 구상의 자양분이 된 10개월의 미국살이

박정양은 결국 영약삼단을 엄수하지 않았기에 중국 측의 압력으로 부임한 지 약 10개월 만인 1888년 11월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조선 정부는 박정양을 귀국시키면서 알렌을 대리공사로 임명하려 했지만, 박정양은 조선인 관원이 있는데도 외국인을 대리로 삼으면 매우 구차스럽고 다른 나라의 비웃음을 살 염려가 있다면서 알렌 대신 서기관 이하영을 추천해 임명의 허락을 받아내면서 조선의 자주독립됨을 위해 끝까지 노력하였다. 주미공사관원들은 이렇듯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국의 각종 외교 행사에 참석하고 주요 기관을 살피면서 경험을 쌓았다. 근대 전환기 조선 공사들의 주된 과제 중 하나는 미국과 같은 근대 국가의 부강함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부국강병’의 성취는 독립국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박정양은 미국의 부요함은 성공적인 수세와 근면한 국민의 창출에 그 요인이 있다고 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근대적 합리성, 즉 ‘실질’에 바탕을 둔 교육이 국가 제일의 정책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일까. 박정양은 1894년 학무·학부대신이 되었을 때 견문하였던 미국의 교육 내용과 제도를 참고하여 근대 교육 제도를 세우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정책 입안에 관여하여 그의 주미공사 경험은 근대 전환기 조선의 근대 구상에 밑거름이 되었다. 1 번역은 박정양, 『미행일기』, 한철호 역, 푸른역사, 2014; 박정양, 『미속습유』, 한철호 역, 푸른역사, 2018.를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