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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중화(中華)를 넘어 세계로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13 조회수 : 660
중화(中華)를 넘어 세계로
1896년, 조선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고종은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을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하여 대관식에 참석하라 명하였다. 대외적으로 그의 임무는 대관식 축하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조선에 궁궐호위 병사를 파견하고 군사교관을 보내주는 등 5개 사항에 대해 요청하고 그에 대한 승낙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글 강지혜(선문대학교 문학이후연구소 전임연구원)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라우리츠 툭센 작).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라우리츠 툭센 작).
니콜라이 2세 황제.
니콜라이 2세 황제.
황제 대관식을 위해 떠난 러시아

당시 조선은 친러정책을 펼쳐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다. 러시아의 조선 내 영향력이 점차 커지자 일본은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자신의 비가 살해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고종은 친일파 대신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일본의 조선에서의 영향력은 약해졌고 살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일본의 조선 침략의 위험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종은 민영환에게 특별한 외교 임무를 부여했다.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1896년 민영환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 축하 사절단의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尹致昊, 1865~1945), 김득련(金得鍊, 1852∼1930), 김도일(金道一, 1886~1919)과 함께 러시아로 향한다. 4월 1일 제물포를 출발하여 상하이, 요코하마, 밴쿠버, 뉴욕, 베를린 등을 거쳐 러시아에 도착한다. 러시아에서 외교 업무를 마친 민영환 일행은 모스크바,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토크, 부산을 거쳐 10월 21일에 제물포로 돌아온다. 러시아로 갈 때와 달리 시베리아를 경유하는 길을 선택하여 돌아온 민영환 일행은 조선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인물들이 되었다.

민영환 일행의 세계일주 경로(1896.4.1.~10.21.)
민영환 일행의 세계일주 경로(1896.4.1.~10.21.)
세계일주의 기록, 『해천추범』과 『환구일기』

민영환은 당시 사행의 과정과 체험 등을 『해천추범』을 통해 자세히 기록으로 남긴다. 당시 참서관(參書官)의 신분으로 사행에 참여했던 김득련의 경우에도 당시의 경험을 『환구일기』와 『환구음초』를 통해 기록했다. 『환구일기』는 사행의 여정과 사건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며 『환구음초』는 사행의 과정에서 느낀 감회를 시로 남긴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민영환과 김득련의 기록이 상당히 많은 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김득련이 민영환의 명으로 여행의 일정과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 『환구일기』이고 인칭을 바꾸고 자신의 경험과 느낌 등을 추가한 것이 『해천추범』이기 때문이다. 『환구일기』는 명에 의한 기록이었기에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은 기록할 수 없었기에 시를 지어 자신의 감회를 남긴 것이다. 서구로 나아가 새로운 문화와 문물을 접한 민영환과 일행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이를 눈여겨본다. 당시 조선은 국호를 개방하고 근대로 나아가고자 했기 때문에 민영환의 여행은 이전의 외교를 목적으로 한 사행과 달랐다. 서구의 근대 문명과 문물을 자세히 살피고 조선에 어떻게 적용할까를 고민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민영환은 풍물, 풍속, 역사, 정치, 종교, 예술, 경제,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였다. 그는 여행에서 경험했던 각 국가의 도시 모습, 교통수단, 문화시설 등을 체험한 일을 자세히 남겼는데, 조선에 없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조선의 것과 비교하여 기 록했다.

『환구음초』, 대한민국역사박물관.(출처 : e뮤지엄), 『해천추범』.(2007년 발행 도서, 출처 : 책과함께)
『환구음초』, 대한민국역사박물관.(출처 : e뮤지엄),  『해천추범』.(2007년 발행 도서, 출처 : 책과함께)
세계관의 변화와 근대적 시간 인식

조선은 조선 초기부터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고종은 각국에 공사를 파견하여 중국을 벗어나 세계로 나아 간다. 서구와의 국제 교류를 통해 세 계정세를 파악하고 그들의 발전된 문명과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함이었다. 이전의 해외체험은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내 한정적 교류로 이어져 왔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교류는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공통 언어 또한 한자였다. 그러나 국호를 개방한 뒤, 조선인의 해외체험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확장된다. 이러한 세계관의 확장은 근대적 시간 개념의 변화와 연결된다. 민영환의 기록에는 이전의 기록물과 달리 양력을 사용하여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양력을 기준으로 일정을 적고 음력 일을 함께 기록해 두었다. 조선은 1895년 11월부터 양력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음력 1895년 11월 17일은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해졌다. 따라서 1896년 4월 사행을 떠난 민영환은 이를 따라 양력으로 날짜를 기록하고 음력을 병기(倂記)하였다. 이것은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직후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력을 사용하고 있어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에는 양력과 음력, 러시아력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민영환은 태평양을 건널 때, 지구의 자전에 의한 밤과 낮의 변화를 경험한다. 갑판에서 만난 서양인에게 들으니 아시아와 아메리카는 발꿈치와 발가락이 서로 접하여 낮과 밤이 반대가 된다고 하였다. 그 서양인은 민영환에게 밤낮이 바뀌게 되는 것, 낮과 밤이 서로 반대이기에 이틀이 같지만 사실은 하루라는 점을 설명해준다. 또한 어느 지점에 이르면 어제와 오늘이 합쳐서 하루가 되는 날짜변경선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민영환은 근대적 시간의 변화를 여행을 통해 체험하게 된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 지구의 동과 서의 밤낮의 차이, 각국의 시차 등은 천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전부터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 서적이 조선에 유입되었으나 큰 힘을 얻지는 못 했다. 민영환은 당시 사행을 통해 지구 원형설을 직접 체험하는 동시에 세계지리와 근대적 시간 개념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 문물의 상징, 철도와 기차

근대의 가장 큰 변화는 과학 기술의 발달이다. 민영환 또한 서구 근대 기술에 주목했다. 그중 철도와 기차에 대한 기록이 상당수이다. 민영환이 조선인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철도와 기차가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내 이동 수단이었던 말이나 마차로 서구를 여행한다는 것은 거리, 시간, 금전 등의 문제로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유럽은 영국을 시작으로 몇 십 년 전부터 철도와 기차가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민영환은 기차의 빠른 속도와 가파른 산을 오르는 모습을 묘사하며 철도의 이동성과 속도감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기차 안에서 아침 식사를 한 일과 터널을 지날 때 열차 내부가 어두워지 지 않도록 등을 사용하는 등 내부의 편의시설의 편리함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그에게 철도와 기차는 편리한 교통수단인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민영환이 철도와 기차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은 새로운 형태의 빠르고 편리한 이동 수단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시를 번화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여행을 통해 각국의 중요 도시를 이동했다. 사람들이 오가게 되는 곳은 이용객의 편의를 위한 건물들이 생겨났다. 상점과 호텔 등의 건물이 생겨나고 이러한 건물들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 특히 영국의 수도 런던에 대해서는 ‘상점이 있고 철로가 있고 차와 말이 오가니 그 번성함이 천하에 최고이다1’라고 표현했다. 민영환의 이러한 인식은 이만(Iman)에 대한 기록에서 잘 나타난다. 민영환 일행은 러시아의 요청으로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와는 다른 경로로 조선에 돌아온다. 처음에는 동일한 경로로 귀국할 계획으로 러시아 측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조선 내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여러 번 권유하였고 민영환은 공사의 신분으로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시베리아 철도 공사가 한창이어서 민영환과 그의 일행들은 기차에 내려 배를 타고 이동한 뒤 다시 기차에 타는 일이 많았다. 또한 길이 험해 기차 바퀴가 망가져 예상했던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리거나 추위가 심해 날씨로 고생했다. 그러나 이 여정이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사람에게 들으니 이만 땅은 본래 황량한 곳이었으나 철로가 생긴 뒤에 번화하게 되었다고 했다. 철로가 놓여 사람들이 오가게 되 고 그 주변으로 이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 집과 상점 등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에 이를 적용한다면 상업을 통해 백성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고, 국가 또한 부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의 발전과 근대화는 근대의 문물을 어떻게 적용하고 활용하는가에 달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1901년 러시아 바칼역의 기차 모습.
1901년 러시아 바칼역의 기차 모습.
정치와 경제, 부국강병의 꿈

민영환은 여행을 통해 유럽 국가들의 부강함을 체험한다. 번성함이 천하의 최고라고 했던 영국에 대해서는 여황(女皇)이 즉위한 지 50년 만에 넓은 토지를 개척하여 나날이 부강해져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득련은 런던에 대해 정치가 훌륭하고 번화함이 마치 신선들이 사는 곳과 같다고 표현했다.2 독일에 도착했을 때는 육군의 강대함과 의술과 예술이 매우 뛰어난 점에 대해 남겼다. 5월 18일 민영환 일행은 러시아 경계에 들어서게 된다. 폴란드의 옛 수도였던 바르샤바에 도착한 그는 이곳을 경계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가장 개화했던 국가였던 폴란드가 벼슬아치들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세 나라에 땅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즉, 조선 또한 서구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벼슬하는 이들이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경계의 거울로 삼아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발전된 기술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서구의 정치를 배워 백성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민영환은 네바강 주변에서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을 보게 된다. 그는 그 기마상의 외형을 묘사하며 표트르 대제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민영환은 ‘개화되지 않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인물’이라는점에 주목했다. 표트르 대제는 유럽 전역을 돌며 배운 내용을 러시아에 적용한 인물로 고국으 로 돌아와 토지를 개간하고 수도를 세웠으며 정치를 위해 힘썼다. 표트르 대제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러시아는 영토를 넓힐 수 있었고, 국가를 발전시키고 국민을 개화시킬 수 있었다. 민영환은 이처럼 폴란드와 러시아의 모습을 통해 조선이 나아갈 방향,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국가가 발전했다고 할지라도 정치에 힘쓰지 않으면 쇠퇴하고 발전이 늦다고 할지라도 정치에 힘쓴다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이 비록 개화되지 않은 나라지만 러시아처럼 나라를 다스리고 국민들의 삶을 평안하게 하는 일에 힘쓴다면 부유하고 강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 표트르 대제 기마상.(출처 : shutterstock) 2 189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습. 3 19세기에 그린 네바강의 모습.
1.표트르 대제 기마상(출처 : shutterstock),  2.189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습,  3.19세기에 그린 네바강의 모습
중화를 넘어 세계로

19세기 말, 조선은 일본의 침략 위협을 받고 있었고 쇄국정책으로 인해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시기였다. 근대를 받아들인 일본은 몇 십 년 만에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조선은 여전히 18세기 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조선이 문화를 전파해 주었던 오랑캐의 나라 일본. 그들은 조선보다 앞서 근대화를 이루고 대륙으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조선을 위협했다. 조선은 문화강대 국이라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동시에 국가적 위기를 느끼게 된다. 19세기 말에 이루어진 사행은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국제 사회로 나아가고자 한 개혁의 의지가 담겨 있던 것이다. 나라가 부유하고 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문화강대국이었던 조선이 일본에게 뒤처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민영환은 그에 대한 답을 서구의 문명과 문물을 통한 근대화에서 찾았다. 개화되지 않은 조선을 발전시켜 부강하게 만드는 것은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영국의 무력에 의해 서구를 받아들인 중국은 국가적 위기가 찾아왔다. 유럽의 국가 중 가장 빠르게 발전했던 폴란드는 정치를 잘못하여 주변국들에게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개화에 힘쓰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 유럽 국가들은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민영환이 사행을 통해 경험한 서구의 근대 문명과 문물을 자세히 기록한 이유는 조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자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구 국가들을 통 해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경계하며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 안에는 자주적인 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1 민영환, 『해천추범』, 조재곤 역, 책과함께, 2007, 54쪽.
2 김득련, 『환구음초』, 허경진 역, 평민사, 2011, 42쪽.

참고문헌
  • 강지혜, 「근대전환기 조선인의 세계기행과 정치 담론」, 『문화와융합』 40(3), 한국문화융합학회, 2018.
  • 강지혜, 「근대전환기 조선인의 세계기행과 철도 담론」, 『문화와융합』 35(3), 한국문화융합학회, 2017.
  • 구사회, 「근대전환기 조선인의 세계 기행과 문명 담론」, 『국어문학』 61, 국어문학회, 2016.
  • 민영환, 『해천추범-1896년 민영환의 세계일주』, 조재곤 역, 책과함께, 2007.
  • 김득련, 『환구음초』, 허경진 역, 평민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