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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신여성의 구미(歐美) 여행기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13 조회수 : 718
신여성의 구미(歐美) 여행기
여행은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공간’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여행기는 새로운 공간에서 매혹된 것을 서술한다. 국내여행과 국외여행을 구별하면, 전자는 ‘익숙한 공간’에서 후자는 ‘낯선 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기차와 기선 등 대중교통 수단의 발달로 인해 근대의 세계여행은 한국인에게 일본과 세계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세계여행이 쉬워진 1920~30년대에도, 세계여행은 식민지 상황과 막대한 비용 때문에 그 기회는 쉽지 않았다. 1926년에 6개월간 세계를 일주한 허헌은 집 두 채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당대 세계 일주 여행과 여행기를 남긴 신여성은 나혜석(1896~1946), 박인덕(1897~1980)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서양을 직접 만나며 여성 개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 나아가 동양인을 대변했다.
글 류시현(광주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스페인 항구」,(나혜석 작), 개인 소장.(출처 : 네이버 미술백과)
「스페인 항구」,(나혜석 작), 개인 소장.(출처 : 네이버 미술백과)
익숙하지만, 쉽지 않은 세계여행

개항 이후 한국은 세계와 본격적으로 교류하면서 세계에 관한 지식을 축적해나갔다. 1895년 출판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저서로 활용되었다. 이 책은 서양의 문물을 기록하고 서양인의 풍속을 논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할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서유견문』은 당시 서양을 이해하는 입문서 역할을 담당했다. 서양에 관한 지식은 언론매체를 통해 확산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정리된 세계에 관한 지식이 신문과 잡지를 통해 번역되었다. 세계에 관한 다양한 정보 소개는 신문보다 잡지가 효과적이었다. 잡지는 제한된 지면에 최대한의 정보를 담아 압축적이면서 동시에 사진과 해설을 추가해서 입체적으로 정보를 전달했다. 활자화된 세계 정보는 1920~30년대 들어가면서 직접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세계여행으로 바뀌었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세계에 관한 지식과 직접 체험으로서의 세계여행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전에는 근대 서양의 새롭고 신기한 문명에 관해 추가 설명이 동반되었다. 초인종을 “사람 부르는 종”, 전등을 “저절로 켜지는 등”이란 주석을 달았다. 반면 1920~30년대는 이미 세계에 관한 정보가 상당 분량 축적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직접 체험에 기반한 세계여행에 관한 글쓰기는 최신 정보를 바탕으로 생생한 현장감을 보여주었다. 세계 일주 여행을 하고 이를 기행문으로 남긴 신여성 나혜석, 박인덕은 경제적으로 세계여행이 가능한 계층이었다. 나혜석은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했고, 박인덕은 1930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화가 나혜석은 외교관인 남편과 동행했고, 교육계 인사인 박인덕은 미국 유학생이자 교수 신분으로 세계 일주 여행을 했다. 나혜석은 자신의 경험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으며, 박인덕은 『세계일주기』(1941)라는 저서로 출간했다. 이들의 세계여행 기간과 경로를 표로 살펴보자.

<표> 세계여행 기간과 경로

세계여행 기간과 경로 여행가, 직업, 기간, 여행 경로 정보를 제공하는 표
여행가 직업 기간 여행 경로
나혜석 서양화가 1927.6~1929.3 부산 → 신의주 → 하얼빈 → 유럽 → 미국 → 태평양 → 일본 → 부산
박인덕 유학생 1928~1931 (1차) 미국 → 대서양 → 영국 → 유럽 → 러시아 → 지중해 연안 → 인도 → 귀국
교수 1935~1937 (2차) 조선 → 미국 / 캐나다 → 귀국

현지를 직접 방문한 세계여행에 관한 체험은 지적(知的) 권위를 지녔다. 박인덕은 “비록 반도의 일개 여자로 태어났을망정 … 남의 인정, 풍속, 문물, 경채(景彩)를 보고 그 본 바 얻은 바를 색채(色彩)나게 그리고 글로 써서 읊고도 싶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들은 식민지 조선을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출발했다.

나혜석의 세계여행 경로.
나혜석의 세계여행 경로.
나혜석(1896~1948).(출처 :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박인덕(1896~1980).
나혜석(1896~1948).(출처 :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박인덕(1896~1980).
첫걸음, 동양이란 경계 넘기

세계여행은 국경을 넘는 월경(越境)부터 시작되었다. 세계 각국에 관한 정보가 축적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행가는 불안감을 느꼈다. 세계여행을 준비하면서 나혜석은 “화가인 측면에서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인간의 측면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성의 입장에서 남녀는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여성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서양 여행을 통해 찾고자 했다고 밝혔다. 계속해서 물음을 제기한 것은 미지의 상황에 대한 불안감의 반영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세계로의 월경은 대륙과 바다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기차를 통해 신의주를 출발해서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을 가는 방식과 부산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경우로 나뉠 수 있다. 나혜석은 대륙을, 박인덕은 바다를 경유해서 세계를 일주했다. 동양과 서양을 구별하고, 동양을 벗어난 지점은 어디일까? 철도를 통해 유럽을 갈 때 경계선은 시베리아와 연결된 하얼빈이었다. 반면 태평양과 인도양을 건널 경우, 일본의 고베, 요코하마 등의 항구가 경계였다. 월경을 통해 이들은 동양을 넘어 서양과 조우했다. 세계여행을 통해 서양을 만나면서 이들은 한국인과 동양인임을 동시에 느꼈다. 나혜석은 하얼빈을 “북으로 유럽과 러시아 및 유럽 각국과 통하여 세계적 교통로가 되어 있고… 세계인의 출입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해서 소통과 번화함에 주목했다. 그리고 “서양 냄새가 충분히 나는 것 같고 내 몸이 이제야 서양에 들어온 것 같은 감이 생겼다”라는 표현처럼, ‘진짜(眞)’ 유럽으로 들어선다는 느낌은 러시아와 폴란드의 국경을 넘어갈 때 생겼다.

화실에서 나혜석(1931년).(출처 :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화실에서 나혜석(1931년).(출처 :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여자미술학사에서 작업 중인 나혜석(1933년).(출처 :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여자미술학사에서 작업 중인 나혜석(1933년).(출처 :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식민지 신여성의 서양과의 조우

1920~30년대 직접 체험의 세계여행은 이전보다 ‘생생한’ 정보를 제공했다. 실제 현장을 방문했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발언은 지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들은 선입관을 배제해야 했다. 아울러 여행가 자신은 물론 글을 읽는 독자에게 놀랄만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했다. 서양 및 외국을 대상으로 한 기행문은 감탄사를 사용하거나 ‘놀라움’, ‘상상 밖’, ‘생각할 수 없었던’ 등의 표현이 주로 사용되었다. 나혜석은 프랑스 지하철을 “땅 밑으로 4층으로 차가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일선(一線)은 세느강 밑으로 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든지 곧이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강물 밑으로 지하철이 다니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유럽에 관한 여행가의 정서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누구는 프랑스 파리의 깨끗함을 주목했다. 반면 나혜석은 “파리라면 누구든지 화려한 곳으로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파리에 처음 도착할 때는 누구든지 예상 밖인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선 일기가 어두침침한 것과 여자의 의복에 흑색을 많이 사용한 것을 볼 때 첫 인상은 화려한 파리라는 것보다 음침한 파리라고 안할 수 없다”라고 해서, “어두침침함과 음침함”이란 전혀 다른 소감을 밝혔다. 여성 지식인 세계여행기는 젠더 문제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나혜석은 영국에서 여성 경찰의 존재와 “런던에는 주장(酒場)이 많은데 손님의 반수는 여자의 출입이 많다”라는 점을 부각하면서 서양 여성의 사회활동에 주목했다. 그리고 박인덕은 서양의 교육제도와 여성교육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들이 직접 체험으로 만난 서양과 서양인은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다층적인 존재였다. 유럽 안에서도 강국(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소국(스위스, 아일랜드 등)을 구별했다. 유럽이라는 공통적 요소 안에서 프랑스인, 영국인, 독일인 등을 구분했다. 영국은 신사(紳士), 프랑스는 예술, 독일은 육군과 과학·철학의 나라, 미국은 실용성 등으로 대표되는 각국에 관한 전형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서유럽과 남부와 동부 유럽을 구분해서 이해했다. 스페인에 관해 나혜석은 “도로에 흙먼지가 많아 유럽 중에는 보지 못하던 동양적 색채가 있으며, 마차가 많고 노동자가 많으며 걸인이 많다”라고 보았다. ‘동양적 색채’란 표현처럼, 스페인은 일반적인 서양의 이미지와 달랐다. 한편 서양에 관한 긍정적 이미지 혹은 ‘환상’이 해당 지역을 직접 관찰하면서 교정되었다. 1920~30년대 직접 체험한 세계여행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비판했다. 나혜석은 영국 런던을 방문해서 “식민지에서 빼앗아 온 것으로 시가지 시설이 모두 풍부하다”라고 보았다. 제국 영국의 비판은 일본 제국주의 비판을 염두에 두어진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을 상대화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단일한 존재로 표상되는 서양을 직접 방문해서, 이들 여행가들은 국력의 우열을 기준으로 유럽 각국을 서열화했다. 서양을 하나의 단위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물질문명으로 대표되는 서양으로부터 ‘압도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서양의 장단점을 파악함으로써 이들은 식민지 한국 사회의 변화와 발전 가능성을 찾았다. 나혜석은 스위스의 자연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강원도 일대를 세계적 피서지로 만들 필요가 절실히 있다. 동양인은 물론이요, 동양에 있는 즉 상해, 북경, 천진 등지에 있는 서양인을 끌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스위스에서 우리나라의 관광 발전이란 희망을 찾은 것이다.

제네바에서 이왕(영친왕) 전하와 함께(1927년).(출처 :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제네바에서 이왕(영친왕) 전하와 함께(1927년).(출처 :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미국에서 귀향시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상에서(1929년).(출처 :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미국에서 귀향시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상에서(1929년).(출처 : 『정월 라혜석 전집』, 국학자료원)
구미(歐美)의 구분, 주목한 미국

서양이란 큰 범주에서 구분되는 중요 경계선은 유럽과 미국이었다. ‘구미(歐美)’는 유럽과 미국을 함께 호칭한 것이다. 한국인 여행가가 서양에 관한 비판적인 안목을 지녔지만, 유럽 안의 가장 상위 국가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근대 물질문명과 문화를 부정하기 어려웠다. 이들 국가를 상대화할 수 있는 계기는 서양 일반과 미국을 대비함으로써 가능했다. 나혜석은 미국의 대도시 뉴욕을 표현하면서 ‘제일’이란 용어를 여섯 번 사용했다. 뉴욕은 인구가 900만 명 되는 세계 제일 대도(大都)인 동시에 3인 앞에 자동차 1대씩 있다는 자동차 많기로도 세계에 제일이요, 집 높기로도 세계에 제일이며, 돈 많기로도 세계에 제일이어서 세계의 제일 되는 것이 무수하며 세계에 제일 되는 것을 자랑하는 곳이다. 미국의 이미지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미국과 유럽을 등가(等價)로 표현한 구미라는 용어에 균열이 생겼다. 한말부터 유럽과 달리 미국은 다른 나라의 영토에 대해 야욕이 없는 국가로 인식되었다. 연장선상에서 1920~30년대 미국에 관한 긍정적인 이미지는 연속되었다. 물론 부분적인 비판은 존재했다. 박인덕은 어떤 한 기차역에서 모든 시설이 흑백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보고 미국의 인종주의에 주목했다. 세계에게 가장 앞선 물질문명을 이룬 미국에 관해 ‘물질 지상주의’, ‘향락의 나라’ 등의 표현처럼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귀환과 정체성의 재확립

세계여행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활동이지만 결국은 민족공동체의 공간으로 귀환이 전제된 것이다. 출발할 때 이들은 미지(未知)의 공간을 간다는 불안감과 함께 조선과 서양을 대비해서 현재 상황에 대한 비관과 장래에 관한 희망을 함께 피력했다. 이들은 짧게는 10개월 길게는 2년에 걸친 세계여행을 한 후 식민지 조선으로 귀환했다. 귀국하는 시점에서 이들 여행가는 식민지 조선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서양에서 조우한 다양한 현상은 식민지 사회와 대비되었다. 나혜석은 스위스에서 관현곡을 들으면서 “행복스러운 운명에 감사 아니 드릴 수 없었고 삶에 허덕이는 고국 동포가 불쌍하였다”라고 보았다. 또한 그녀는 ‘자유연애’를 예로 들면서, 식민지 조선은 유럽에 비해 심지어 3세기가량 뒤졌다고 평가했다. 나혜석은 거듭 1년 8개월간의 유럽 여행에서 느낀 ‘유쾌함’이 귀국 후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 못하는 것처럼” 고통과 비애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물론 이러한 여행가의 불안감을 민족공동체 구성원에게 여과되지 않은 채 그대로 전달할 수 없었다. 박인덕은 서양의 경험을 식민지 사회에 적용해서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고자 했다.

실로 남의 것을 보는데서 내 것의 호불호(好不好), 편불편(便不便)을 알 수 있고 그 진가와 귀천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의견이 생겨 좋은 것은 모방하고 불편한 것은 개량하고 없는 것은 창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녀 청년들은 자기를 스스로 가두는 심적 경계선을 뚝 떠서 … 생각과 생활의 범위가 넓어져서 너그러운 생(生)을 살게 되어야 할 것이다.

외국을 체험하고 이루어진 세계여행기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된다. 따라서 이들이 직접 체험한 서양에 관한 경험은 한국 여성에 대한 계몽에 활용 되었다. 나혜석은 서양 여성이 한국 여성에 비해 ‘선진적’이며, 서양 여성을 “존경하는 동시에 우리의 지위를 찾고자 하노라”라고 밝혔다. 서양 여성은 한국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킬 가까운 미래이자 기준이었다. 이들의 세계여행은 제국 일본을 상대화하고 비판하는 데 활용되었다. 서양의 근대 물질문명의 발전 여부를 기준으로 삼았다. 세계를 일주한 후 나혜석은 일본의 요코하마와 한국을 서양과 대비해서 누추하다고 표현했다. 서양에 비하면 식민지 모국인 일본이나 식민지 조선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토대를 조성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1920~30년대 세계여행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비유럽사회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가 된 일본은 자신을 제외한 동양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일본의 도쿄가 ‘동양의 런던’이라고 불리는 한 서양과 동양의 계서열적 관계는 바뀔 수 없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인 신여성 나혜석과 박인덕 두 사람의 세계여행기에서는 서양을 표준으로 일본의 근대와 문명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스페인 해수욕장」(나혜석 작), 개인 소장.(출처 : 네이버 미술백과)
「스페인 해수욕장」(나혜석 작), 개인 소장.(출처 : 네이버 미술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