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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에 나오는 세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13 조회수 : 577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에 나오는 세계
이수광(1563~1628)은 태종의 아들인 경녕군의 후손으로 종실 출신이었다. 그는 당대의 주류 사상인 성리학을 수용하면서 불교나 도교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그는 아시아와 서양 국가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졌고, 『지봉유설(芝峯類說)』을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글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지봉유설』, 국립중앙박물관.(출처 : e뮤지엄)
『지봉유설』, 국립중앙박물관.(출처 : e뮤지엄)

이수광은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외국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는 1590년(선조 23년), 1597년(선조 30년), 1611년(광해군 3년) 세 차례에 걸쳐 조선 사절단의 일원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는 북경에서 안남(베트남), 유구(현 오키나와, 당시는 독립국), 섬라(태국)의 사신들을 만나 교류하였고, 북경의 서점에서 구한 서적을 통해 다른 국가들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서울에 살면서 인근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유하였고, 이들로부터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50여 개 국가에 대한 정보를 소개할 수 있었다.

명나라 말기의 국제 정세

이수광은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많은 군대와 비용을 동원하여 조선을 구원해 준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세 차례나 북경을 방문한 그는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해 준 것에 감사하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명나라와의 외교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수광은 명나라가 아름다운 풍속을 가졌고, 문장력이 뛰어나며, 일상생활의 제도에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명나라 제도에 장점이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정부가 재정 부족을 메꾸려고 조선 정부에 과도한 은을 요구하면서 조선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비판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조선을 방문한 염등(冉登)이라는 사신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은에 대한 욕심을 내었다. 그는 남대문에 은으로 된 사다리인 천교(天橋)를 만들고, 이 다리를 밟고 넘어와서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으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이수광은 중국 사람이 조선을 이해의 소굴로 생각하여 훗날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 걱정하였다. 당시는 만주 지역에 여진족의 통일국가가 등장하면서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시기였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1616년에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나라를 침략하였으며, 1625년에는 수도를 심양으로 옮기고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수광은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으로 밀려옴을 감지하였다. 그는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 지역에 살던 여진족들이 누르하치에게 흡수되는 것을 보면서, 이들이 사라지면 외적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 우려하였다. 과연 몇 년 후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후금(청)의 침략을 받았다.

양주 이수광 선생 묘 정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양주 이수광 선생 묘 정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일본의 풍속과 제도

이수광은 30대의 나이에 임진왜란을 겪었다. 그는 경상 방어사 조경의 종사관으로 전쟁에 참여하였고, 의주로 피난하는 선조를 호위하였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진위사의 자격으로 북경을 방문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참화’이고, 일본 사람은 ‘만세토록 잊을 수가 없는 원수’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일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수광은 일본 사람이 무예를 중시하고 사람을 쉽게 죽이는 풍습을 비판하였다. 그는 왜노(倭奴)들의 법이 혹독하여 사람 죽이는 것을 풀이나 잔디를 베는 것처럼 여기며, 그들이 전국(戰國) 시대의 풍습이 있는 것은 상벌을 가지고 공적을 세우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수광이 일본을 부정적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학문이나 문물에 유용한 것이 있으며, 편리한 제도는 도입할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하였다. 그는 일본 그릇과 접는 부채의 편리함을 칭찬하였고, 일본의 수차 제도를 배워서 사용하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이 승리한 것은 서역에서 전해진 조총의 위력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수광은 일본을 직접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가진 정보는 중국과 일본에서 나온 서적,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사람들의 경험담과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수광은 1589년에 일본을 다녀온 차천로와 친분이 있었고, 17세기 초에 일본을 다녀온 손문욱, 양만세, 박인전, 조완벽을 통해서도 일본 소식을 들었다. 이수광은 이들을 통해 일본에 대한 이해를 점차 넓혀갔다.

이수광이 『지붕유설』에서 언급한 나라들.
이수광이 『지붕유설』에서 언급한 나라들.
베트남에 대한 이해

이수광은 안남(베트남)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졌다. 그는 중국 서적을 통해 안남의 존재를 알았고, 안남 사신을 두 차례 만나서 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이수광은 조완벽을 통해 안남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들었다. 조완벽은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인물이었다. 조완벽은 해외무역에 종사하는 일본 상인에게 팔려 가서 세 차례나 안남을 방문하여 체험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597년에 이수광이 안남 사신 풍극관(馮克寬)에게 지어 준 시가 안남에서 유행한다는 소식도 조완벽이 알려주었다. 이수광은 안남이 조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안남의 정치적 변화가 조선에 직접 영향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안남의 물소와 코끼리를 주목하였다. 이수광은 안남의 물소가 낮에는 물속에 있다가 해가 진 뒤에 나오며, 물소의 뿔은 매우 커서 일본인이 구입한다고 하였다. 안남의 물소 뿔은 일본을 통해 조선으로 수입되는 무역품이었다. 또한 안남의 코끼리는 상아의 길이가 5~6척이나 되는 것이 있으며, 안남 국왕이 이동할 때는 코끼리를 타는데 사람이 올라갈 때 코끼리가 무릎을 꿇는다고 하였다. 이수광은 안남의 교육과 과거 제도가 상당한 수준인 것으로 보았다. 마을마다 학교가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들렸고, 아동들은 시문을 익히고 조총을 쏘는 법을 익혔다. 조완벽은 안남 학생들이 이수광의 시를 베껴서 외우는 것도 보았다. 과거 시험에는 문과와 무과가 있었다. 문과는 4차로 구성된 향시와 5차로 구성된 회시가 있었고, 회시의 마지막에 대책(對策)을 시험하였다. 무과는 5년에 한 번 있었고, 진법, 말타기, 코끼리 타기, 활쏘기 시험이 있었다. 이수광과 풍극관이 친밀하게 교류한 것은 한문으로 필담하고 시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조선과 안남이 공통된 문화를 가진 동문권(同文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상대국의 제도와 문화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곤여만국전도』, 수원광교박물관.(출처 : e뮤지엄)
『곤여만국전도』, 수원광교박물관.(출처 : e뮤지엄)
아시아 및 서양 국가의 이해

이수광은 중국을 통해 아시아와 서양 국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북경에서 안남, 유구, 섬라의 사신을 만나 시와 선물을 교환했고, 필담을 통해 각 나라의 위치, 크기, 물산, 풍속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회회국(아라비아) 사람이 머리에 터번이라 불리는 흰 천을 감은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수광은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와 『천형도(天形圖)』를 통해 서양 국가와 천문학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는 1602년에 북경에서 6폭의 병풍 지도로 인쇄하였다. 1603년(선조 37년)에 이광정은 북경에서 이 지도를 구해 홍문관으로 보냈고,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이수광은 이를 보았다. 이수광이 아시아 및 서양 국가를 이해하는 기본 정보는 중국 서적에 있었다. 『사기』, 『한서』, 『송사』, 『원사』와 같은 역사서에는 외국열전(外國列傳)이 있어 중국의 주변 국가를 이해할 때 참고가 되었다. 또한 명나라 때 간행한 『대명일통지』, 『오학편』, 『삼재도회』, 『속문헌통고』, 『완위여편』과 같은 책에는 명나라 지식인이 파악한 세계 정보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수광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조선을 말하는 본국(本國)이 제일 앞에 있고, 아시아와 서양 국가를 말하는 외국(外國)이 다음이며, 숙신, 돌궐, 금(여진)과 같은 북로(北虜)가 제일 마지막에 있었다. 이는 세계를 중심에 있는 중화(中華) 국가와 주변에 있는 이적(夷狄) 국가로 구분하는 중국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다만 이수광은 중국과 조선을 제외한 국가들을 ‘이적’이 아니라 ‘외국’이라 하여 더욱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수광은 아시아 국가의 풍속을 소개할 때 중화 문화의 기준을 적용하였다. 그는 섬라(태국)를 소개하며 “손으로 음식을 먹으며 중국 글자를 알지 못한다. 의관(衣冠)을 갖춘 나라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방갈라(벵골)를 소개하며 “음양술, 의약, 복서(점), 백공의 기예가 중국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또한 석란산(스리랑카)에 대해 “남녀가 모두 나체여서 야수와 같다”고 하였고, 우전대국(호탄)에 대해서는 “서로 만나면 꿇어앉으며, 편지를 주면 머리 위에 얹었다가 열어보 는 등 예절을 조금 안다. 얼굴 모양도 중국 사람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이수광은 서양 국가로 네 곳을 소개하였다. 그는 불랑기국(포르투갈)에 대해 “그 나라 화기를 불랑기라 부르는데 지금 군대에서 쓰고 있다”고 하였고, 남번국(네덜란드)에 대해서는 “만력 계묘년(1603)에 왜인을 따라 우리나라 국경에 표류한 일이 있다. 그 눈썹이 속눈썹과 통하여 하나가 되었고, 수염은 염소수염 같았다. 그가 거느린 사람은 얼굴이 옻칠한 것처럼 검어 형상이 더욱 추하고 괴상했다”고 하였다. 영길리국(영국)에 대해서는 “근년에 일본에서 표류하여 흥양에 도착하였다. 배가 매우 높고 커서 층루가 있는 큰집과 같았으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깨뜨리지 못하고 물러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포르투갈은 불랑기라는 화포를 통해서, 네덜란드와 영국은 조선에 표류한 사람을 통해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수광은 구라파(유럽)를 하나의 국가로 알았고, 마테오 리치가 쓴 『곤여만국전도』의 서문을 통해 구라파의 문자가 한자인 것으로 보았다. 마테오 리치의 서문은 한자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은 세계를 향해 열린 시각을 가졌다. 그는 『오학편』에 기록된 국가를 모두 수용하지는 못하나 이 책에 기록되지 못한 국가도 많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 경험으로 실재를 인정할 수 있는 세계라면 언제든 수용한다는 개방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마테오 리치(1552~1610).
마테오 리치(1552~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