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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가을, 겨울호-걸어서 세계속으로] 식민지 시대 경제학자의 세계여행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1-13 조회수 : 805
식민지 시대 경제학자의 세계여행
2022년 현재 인플레와 미 연준의 금리상승, 미국의 자국 산업 보호조치와 이로 인한 반도체 등 한국 주요 산업의 행방 같은 이슈들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탈냉전 이후 유지된 세계화의 종말, 미·중 패권전쟁 속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와 한국경제의 미래 생존문제는 최근 가장 핫한 뉴스이다. 그런데 “기존까지 유지되어온 세계경제 체제의 급격한 전환, 그 속에서 우리의 경제적 생존을 모색하기”라는, 이 자명한 명제를 2022년이 아닌, 90년 전 그러니까 1932~1934년 무렵으로 옮겨본다면 어떨까? 그때 세계는 어떤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을까? 세계경제는 어떤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을까? 그때 당시의 ‘우리’가 지켜야 할 핵심 가치인 ‘경제적 생존’을 위한 선택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글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긴급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세계여행을 한, 식민지 시대의 경제학자 효정 이순탁의 여행기 『최근 세계일주기』를 살펴보려고 한다.
글 차혜영(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이순탁 교수, 통일부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이순탁 교수, 통일부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이순탁 교수의 세계여행 경로.
이순탁 교수의 세계여행 경로.
대공황의 후유증을 관찰한 경제학자

당시 연희전문 상과 교수였던 이순탁의 세계여행은 안식년 기간(1933년 4월 22일~1934년 1월 20일) 9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 그는 1945년 미군 정부 입법회의위원, 1946년 연희대학교 초대 상경대학장을 지냈다. 특히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度立法議院) 관선의원으로 활동하며 중도적 토지개혁법을 제안했고, 대한민국 초대 정부 기획처장으로서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해방기 대한민국 경제정책의 기초를 마련 하기도 하였지만,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이순탁이 세계여행을 하고 여행기를 쓴 1933~1934년은 1929년 대공황의 후유증이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세계 각국이 공황 타개와 경제위기 대응에 부심 하면서 무역에서의 환율인하, 관세장벽 등의 보호무역주의로 인해 대립과 분열을 거듭하던 시기이다. 영국, 프랑스 등 구제국은 보호무역주의를 선언하고, 식민지 권역을 갖지 못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파시스트 체제를 통한 국가주도의 경제회복에 성공하면서도, 유럽 강대국의 블록경제로 인한 국외 확장 불가능성이 부딪히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후발 자본주의 국가 독일이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고 재군비를 선언한 것이 1932년, 일본 역시 서구열강의 만주국 승인 불가를 계기로 국제연맹을 탈퇴한 것이 1933년이다. 독일이 베르사유체제를 깨뜨렸고, 일본이 워싱턴 체제를 깨트림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어오던 평화체제와 자유무역질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경제학자인 이순탁은 출발부터 대공황, 파시즘, 블록경제가 만들어내는 세계경제의 행방을 예민하게 주시하면서 새로운 상황을 관찰하고 미래를 모색하겠다는 방향성을 분명히 갖고 여행을 시작했고, 「조선일보」 연재 이후, 단행본을 낼 때도 ‘최근’을 표나게 강조하며 출간했다. 짧은 지면이나마 그의 여행을 따라가 보자. 참고로 식민지 시대 세계여행은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육로-철도여행’의 경우 경성, 신의주, 만주의 안동(단둥)을 거쳐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유럽의 북쪽으로 진입하는 방식이 그 하나이고, ‘해로-선박여행’의 경우, 부산에서 일본 국제항인 요코하마를 출발해 인도양을 통해 동남아시아 지역의 경유지를 거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을 통해 유럽의 남쪽으로 진입하는 경로가 그 하나이다. 이순탁의 경우 후자의 경로를 택했었다. 1933년 4월 24일 시작된 여정은 도쿄 - 요코하마 - 상하이 - 홍콩 - 싱가포르 - 피낭 - 콜롬보 - 아덴 - 이집트(카이로) - 이탈리아 – 스위스 - 프랑스 – 벨기에 - 네덜란드 - 독일 - 영국(런던- 옥스퍼드- 리버풀) - 아일랜드 - 미국(워싱턴 – 로스앤젤레스 - 샌프란시스코 – 하와이)을 마지막으로 이듬해 1월 20일 요코하마로 귀항하면서 마무리된다. 경유지였던 동남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항구 즉 홍콩·싱가포르·스리랑카를 지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서 목적지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관찰, 판단, 해석, 기록한 것은 유럽과 미국이다.

이탈리아, 독일, 미국

공황 타개에 부심하는 각국의 정치·경제 상황을 관찰한다는 목적에서, 그는 유럽의 첫 관문이자 파시스트 체제를 통해 경제위기 극복에 성공하고 있던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의 경제적 성공을 꼼꼼하게 관찰 기술한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즉시 그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일상을 옥죄고 있는 모습, 사상탄압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파시즘 덕분에 사회기강과 질서가 바로잡힌 성과를 긍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이태리는 걸인이 많다는 말을 들었는데 대도시 어디서든지 걸인 하나를 보지 못했다. 이것이 뭇솔리니의 군대와 순사가 부정을 보면 이를 탄압하기 때문에, 사회와 정의와 공도(公道)가 의회정치의 시대보다도 현저히 나타난다고 한다.” 한편 이순탁이 여행한 시기(1933.4.22~1934.1.20)는 독일의 히틀러가 1933년 3월 총선거에서 압승한 후 집권한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 독일을 방문하고 쓴 그의 기록은 독일 히틀러 집권 초기의 분위기, 독일 대중의 정서를 전하고 있다. 특히 나치의 경제정책을 소상하게 소개한 그는, 공업 부문에서의 기업의 사회화, 국유화, 약소기업의 보호 등을 통제경제의 장점으로 설명한다. 이를 통해 경제위기 상황에서 절대적 국가권력의 통제가 국민대중의 경제적 생존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다고, 따라서 ‘금융자본가로 지목된 유대인 배척’이 ‘노동자·기업가·다수 독일 국민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알려주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생존해야 하지만, 강대국(영국, 프랑스 등)들이 만들어놓은 족쇄에 갇혀있는 유럽의 피해자, 약자의 생존을 위한 탈출구를 모색하는 독일, 그 탈출구로서의 전쟁 가능 국가로의 전환, 이런 강력한 국가에 대한 대중의 지지와 동원, 그 이후의 전개된 역사를 알고 있는 지금의 우리의 관점에서 돌이켜 보면 낯설지만, 그 시기 가능한 선택지로 여겨졌던 국제정세와 경제위기, 경제적 생존 전쟁의 복 잡한 실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독일, 이탈리아와 유사하게, 아니 더 강하고 더 성공적으로 국가주도로 공황 타개와 경제위기 극복에 국력을 총동원하던 나라는 미국이다. 이순탁이 유럽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 직후, 그가 목격한 것은 바로 그해에 대통령에 당선된 루스벨트가 뉴딜정책을 밀어붙이며 공황 후유증 해결 및 경제 회복에 몰두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뉴욕에 도착하던 다음날인 9월 13일은 뉴욕에 있어서의 대규모 NRA(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국가경제회복기구)행사 날이다. 오후 2시부터 8시에 이르기까지 행렬을 하는데, 이에 참가한 인원수는 25만이요, 관객은 약 150만이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대 행렬이다. ....하늘에는 비행기의 행렬이 있고, 지상에는 형형색색의 가장행렬이 있으며, 공중에서는 폭죽 소리가 요란하고, 옥상에서는 오색의 테잎들을 자꾸 던진다. 행렬지대에는 상점이나 공장이 전부 휴업하고, 전차버스 등도 전부 운행이 중지되었다. 이때 NRA에 대한 시민의 인기가 비등한 바 실로 금일 미주에는 어디든지 상점이나 공장에는 NRA회원인 것을 표시하는 푸른 독수리(청독) 그린 포스터를 안 붙인 곳이 없다. 포스터에는 ‘we do our part’라고 씌어 있어서 제각기 자기의 몫을 다한다는 표시를 하였다. -학민사, 『최근 세계일주기』, 255쪽

앞서 이순탁이 유럽에 도착하는 즉시 이탈리아에서 ‘흑의대(黑衣隊)’를 목격하고, 독일에서는 ‘갈의대(葛衣隊)’를 목격한 바 있다. 흑의대는 검은 군복을 입고 무솔리니를 호명하며 행진하는 이탈리아의 군인의 집체 행렬이고, 갈의대는 갈색 제복을 입고 ‘히틀러’를 호명하며 행진하는 독일 군인의 집체 행렬이다. 그들의 헌법을 초월한 권력과, 거리에 동원되어 환호하는 대중들의 지지를 목격한 바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밑줄 친 바와 같이 비행기 행렬, 오색 테이프, 폭죽으로 장식된 거대한 행렬, 헌법을 초월한 무소불위의 힘, 그것에 대한 대중들의 인기를 목격하고 있다. 심지어 무솔리니의 휘장, 히틀러의 배지처럼, 루스벨트 하의 NRA의 푸른 독수리 문장마저 유사한 형태를 목격한다. 바야흐로 세계는 이런 파시스트적인 집체, 군중 동원, 의회와 헌법을 초월한 경제발전 대책기구의 절대 권력화, 그것이 이룩한 경제위기 해결의 가시적 성과, 이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와 동원, 호응이 말 그대로 ‘전 세계적 대세’인 시대이다. 이순탁의 여행기는 이 동시다발적 서구의 현상을 눈에 그리듯 선명 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대공황기 뉴딜이 실시되는 초창기 미국 풍경에 대한 한국인의 목격담으로는 매우 드문 사실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일보」 1933년 4월 23일자 신문.(출처 : 동아일보) 『최근 세계일주기』(1997년 발행, 학민사).(제공 : 통일부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동아일보」 1933년 4월 23일자 신문.(출처 : 동아일보), 『최근 세계일주기』(1997년 발행, 학민사).(제공 : 통일부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프랑스, 영국

그렇다면 이 시기 동일한 공황과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영국과 프랑스 등의 구 제국은 어땠을까? 아니 그러한 영국과 프랑스 등 기존의 강대국들을 이순탁은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참고로 식민지 조선인의 세계여행 여로에서의 인도양 경유지들, 즉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콜롬보 등은 오랜 시간 영국의 식민지들이다. 이 경유지 관광에서 여행자들은 근대화된 도로, 서구식 건축물, 식민청, 서구인과 동남아시아인의 인종적, 경제적, 문명적 차이를 목격했었다. 거의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경유하는 서구로 가는 40여 일의 선박여행, 그 물리적 뱃길 자체가 사실은 거대 제국 영국의 식민통치의 위용을 목격하는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근대의 힘=영국의 힘=서구 문명의 힘’을 인식하는, 선박경로 자체가 만들어내는 ‘심상지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순탁이 여행기에서 프랑스와 영국을 기술하는 태도는 매우 특이하고 예외적이다. 먼저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주의자 이순탁은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바스티유 감옥과 혁명의 광장 콩코드를 보면서 “앙모의 마음”을, 영국 하이드 파크에서 사상의 자유의 현장을 보면서 감동과 부러움을 표현한다.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나날이 펼쳐지는 다양한 이념의 연설들, “공산주의 문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올드윗치나 킹스트릿트나 촤링크로스 로드에 있는 서점”, “하이게이트의 세미 트리에서 편히 잠들어있는 칼 맑스의 분묘”, 거기에 오는 수백 명의 참배객들을 보며, 그는 영국이 품고 있는 민주주의 정치, 사상의 자유에 한없이 감격한다. 그러나 이런 사상의 자유와 별개로, 1933년 당대 상황에서 영국의 경제적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180도 다르다. 보통 3~4일 정도 머물며 유명 관광기념물 중심으로 구경하는 관광객의 시선으로는 포착될 수 없었던, 장기 체류 이방인1의 눈, 특히 세계적 경제위기에 대한 각국 비교라는 명확한 관심을 가진 동양의 경제학자의 눈으로, 1933년 런던 현재의 일상, 거리의 보통 사람들을 상세히 묘사한다. 그가 충격적으로 묘사한 런던의 보통 사람들의 삶은, “걸친 의복은 남루하기 짝이 없으며, 피부가 더럽기 또한 비할 데 없다.”, “걸인이 서있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쫓아와서 페늬를 청하는(Penny Please) 아이들”로 넘치고, 거리나 음식점들은 “시은(施恩, 남에게 은혜를 베풂)을 청하는 걸인”들, 그들의 “실크햍 쓰고 구두 닦기, 훈장차고 쓰레기통 뒤지기”로 넘쳐난다. 대로상에는 “빈 궐련갑을 주워서 벌려보는 사람, 쓰레기통 뒤져보는 사람 등 조선서 보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는 “하이드팍에나 트래팔가 광장에나 후와잍 채펄(화이트 채플) 거리나 런던 브릿지 위를 지나 보라. 실업자 군이 얼마든지 있다”라고 일갈한다. 스모그로 더러워진 런던의 건물들을 ‘새까만 검뎅이’, ‘흑인같다’고 치를 떨며 혐오감을 표현하고, 공적영역에 진출한 런던의 직업여성 군에 대해서도 제1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 피폐화의 산물로 해석하는 등, 냉정함과 혐오감을 숨기지 않는다. 이순탁 역시 인도양에서 같은 경유지를 거쳤고, 영국제국의 위력과 역사의 위용을 확인했으므로, 그가 1933년 런던 거리의 빈곤과 기아를 목격했을 때의 충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익숙하고 낯선 우리

이처럼 이순탁의 여행기는 한국근대 해외여행기 분야에서, 기존의 문화나 관광의 관점과는 다른 특이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특이함은 서두에서 언급한 세계 경제 체제의 ‘전환’ 속에서 ‘우리-경제공동체’의 생존 모색이라는 관점에서 연원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 경제공동체의 단위로서의 ‘우리’란 누구일까? 이 ‘우리’는, 흔히 식민지 시대 조선인으로 쉽게 상상되는 억압당한 피해자 조선민족과 곧바로 등치될 수 있을까? 아마도 범박하게 일본 국가 시스템하에서 산업을 일구고 경제활동을 하는 경제단위로서의 조선이라고 할 때, 둘이 꼭 일치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세계적 위기와 분열의 끝에 몇 년 후, 독일과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그 결과를 알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매우 낯선 ‘우리’일 것이다. 90년이 지난 오늘의 데자뷔 같은 세계경제의 위기, 전쟁으로 치달을 것 같은 분열과 대립, 그리고 익숙하게 긴급한 우리의 경제적 생존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이순탁의 『최근 세계일주기』(1934)는 익숙하고도 낯선 우리의 모습, 우리의 시선을 마주 보게 만든다.

1 그는 런던에서 하숙을 얻어 50일을 체류하며 런던대학의 ‘외국학생을 위한 하기강습회’에 1933년 7월 21일~8월 17일까지 참가해, 어학강습과 수학여행 등 영국사정을 시찰할 기회를 갖기도 했고 영국의회, 미술관, 박물관, 케임브리지 대학, 런던 교외의 궁성을 여행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가졌다.

참고문헌
  • 이 글은 차혜영, <1930년대 자본주의 세계체제 전환과 동아시아 지역패권의 지정학-이순탁의 {최근세계 일주기}를 중심으로>(비교한국학2016.12)>를 참조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