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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봄, 여름호-생로병사의 비밀] 들어가며-‘위생(衛生)’, 건강을 지키고 병마와 싸우는인간의 삶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8-03 조회수 : 441
‘위생(衛生)’, 건강을 지키고 병마와 싸우는인간의 삶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 네 가지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숙명으로 인간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위생(衛生), 건강의 보전과 증진을 도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유에 힘써왔다. 과거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병에 걸리는 것은 절망적인 일이었다. 절망을 극복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마음을 수양하고, 신에게 빌고, 경험과 지혜를 모았다. 공동체를 위해 지식을 나누고 활용하여 병마와 싸운 과거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코로나19와 싸운 토대였고 그 안에는 더 나은 삶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담겨있다.
글 김호(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교수)
위생(衛生)의 방편

조선 후기의 학자 성대중(1732-1809)은 통신사 일행으로 뽑혀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일본인들은 풍채 좋은 성대중에게 젊음의 비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늘그막에도 홍안(紅顔)을 자랑했던 그는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정조 임금조차 불그레한 안색을 유지하는 특별한 양생법이 있는지 물을 정도였다. 성대중은 보양의 기술이 있지 않다고 말하고 건강의 지름길은 어려서부터 번잡한 생각과 이러저러한 욕심을 줄인 것 정도였다고 답했다. 수많은 조선의 유학자들은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마음의 수양을 꼽았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조절하고 음식의 절제야말로 최선의 방도였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화를 참고, 욕심을 억제하며, 말을 줄이고, 음식을 삼가는 네 가지야말로 양생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마음의 안정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선초(鮮初)의 학자 홍귀달(1438-1504)은 1472년 호남을 방문했다가 그만 병이 들었는데 친구로부터 태화탕(太和湯)이라는 처방을 받았다. 퇴계 이황도 즐겨 읽었던 『활인심방(活人心方)』의 중화탕(中和湯)이었다. 처방 속 30가지 약재는 구입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약재 이름이 모두 청심, 과욕, 인내, 유순, 지족, 신독(愼獨) 등이었기 때문이다.

(2023봄여름호_1.들어가며_사진1)물가 바위에 앉아 폭포를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송하관폭도, 이인상 作, 국립중앙박물관.
물가 바위에 앉아 폭포를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송하관폭도, 이인상 作, 국립중앙박물관.

물론 마음의 안녕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좋은 처방이었지만 모든 병을 마음의 안정만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경북 예안의 사족 김광계(1580-1646)는 지역의 서원과 유향소 업무 그리고 집안 문중의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끊임없이 손님을 대접하고 또 손님으로 자주 모임에 나가야 했다. 젊어서부터 ‘기가 약하다’고 걱정하던 그는 음주로 인한 것인지 과로인지 평생 잦은 설사와 복통으로 고생했다. 그가 찾은 의원과 복용한 약물의 종류가 다양했다. 1627년 한 해의 ‘병력(病歷)’을 대략 살펴보아도 일년 내내 병을 달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해 3월에는 몸에 붉은 발진이 돋아 사라지지 않았다. 침을 맞았지만 별 효과도 없었다. 5월에는 소화가 안 되더니 잦은 설사와 복통이 발병했다. 힘이 없어 모든 사무와 공부를 전폐하다시피 했다. 가을이 되자 학질에 걸리고 말았다. 오한과 신열이 오락가락하더니 그만 혼절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깨어난 그는 침을 맞고 회복했지만 후유증은 겨울로 이어졌다.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이불이 젖을 정도였다. 결국 그해 겨울 그는 문중 제사에 참석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듬해 김광계는 하는 수 없이 인근 절의 온돌방을 찾아 양생에 전념했다. 아울러 봄부터 여름동안 금주를 단행했다. 그는 꽤나 부유한 양반 사족인지라 주변의 의사들을 만나 처방을 받아 약물을 복용하고 산사에 올라 몸조리를 했다. 하지만 그도 학질과 같은 뜻밖의 역병은 피하기 어려웠다.

역병의 유행

조선 시대에 가장 두려운 역병은 학질이나 온역(瘟疫)을 포함하여 이른바 마마로 통칭되는 두창(천연두)과 홍역이었다. 대개 피부에 나타나는 발진과 흉터(딱지)의 크기에 따라 두창은 큰 마마로, 홍역은 작은 마마로 불렸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던지 이들 역병에 ‘마마’라는 존칭이 따라 다녔다. 제대로 된 치료법이 없고 예방조차 불가능했던 마마를 피하려고 많은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다가 마마신(痘神)을 전송하는 굿판을 벌였다. 마마신은 서쪽에서 왔다고 여겨졌는데(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성질이 예민한데다 신경질적이어서 쫓아내려고 하면 더욱 화를 냈기에 가능한 떡이나 술 그리고 음식 등을 차려놓고 잘 대접하여 별 탈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숙종대 장희빈은 세자가 두창을 앓자 무당의 말을 듣 고 붉은 떡과 여자아이 옷을 마련하여 두신(痘神)에게 빌었다. 18세기 김매순이라는 학자 역시 어린 딸이 마마에 걸리자 밥과 술을 준비하고 살려달라는 제문을 바쳤다. 한 나라의 왕조차 두신에게는 공손했다. 궁궐에 마마가 유행하자 정조는 직접 ‘마마를 전송하는 글[송두신문(送痘神文)]’을 지었다. 글에는 마마신을 극진히 대접하려는 왕의 모습이 여실하다. 마마신에게 빌어봐야 소용없다는 반론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홍씨 성을 가진 한 노인은 늘그막에 세 아들을 얻어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유행하던 마마에 걸리고 말았다. 노인은 세 아들을 잃지 않으려고 마마신에게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올렸다. 안타깝게도 큰 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마저 마마로 죽게 되었다. 화가 난 노인은 마마신을 대접해봐야 소용없다고 원망하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 잘 먹고 난 막내아들이 병에서 회복되자 마마에는 곰탕이 특효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마가 유행하는 해에는 여지없이 고기 값이 앙등(昻騰)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2023봄여름호_1.들어가며_사진2)천연두신을 ‘호구’라하였고 천연두신을 모시는 굿거리이다.『무당내력』 속 호구거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천연두신을 ‘호구’라하였고 천연두신을 모시는 굿거리이다.『무당내력』 속 호구거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역병이 발생하면 환자를 피해 도망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여유 있는 양반들은 곡식을 싸들고 산속의 절로 피하거나 친·인척 혹은 친구의 집으로 대피했다. 여의치 않으면 집안의 안채나 사랑채에 따로 환자를 격리하기도 했다. 사회활동 역시 자제했다. 18세기 경남 고성의 양반 구상덕(1706-1761)은 아들이 역병에 걸리자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집안을 단속했다.향교에 공부하러 가는 일을 멈추고 친구들과의 시회(詩會)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지방의 사또는 역병에 걸린 환자들이 마을에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관아 한 구석에 피막(避幕, 일종의 격리보호소)을 마련하여 병자들을 수용했다. 서울로 모여드는 환자들은 도성 밖의 활인서에서 격리했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는지 활인서가 아니라 사인서(死人署)라고 불릴 정도였다. 역병의 공포는 정확한 원인을 몰랐기에 그만큼 대처가 어려웠다. 가난한 자들은 약물을 쓸 여력이 없었고 곰탕이라도 먹으면 다행이었다. 정부는 격리와 치료 대책뿐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다. 전쟁에 희생되거나 정치적 반란에 연루되어 죽은 이들이 역병의 귀신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들을 위로하는 제사[.祭, 여제]가 필요했다.

(2023봄여름호_1.들어가며_사진3)두통을 쫓기 위해 환자의 형상을 땅에 베껴 그리고 이마 부분에 낫을 찔러 놓은 사진. ‘두통을 쫓는 주술’, 서울역사박물관
(2023봄여름호_1.들어가며_사진4)마마신을 퇴치하기 위한 주술적 방법으로 짚으로 망태기 모양을 만들어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진. ‘마마신 퇴치’, 국립민속박물관
(좌)두통을 쫓기 위해 환자의 형상을 땅에 베껴 그리고 이마 부분에 낫을 찔러 놓은 사진. ‘두통을 쫓는 주술’, 서울역사박물관.
(우)마마신을 퇴치하기 위한 주술적 방법으로 짚으로 망태기 모양을 만들어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진. ‘마마신 퇴치’, 국립민속박물관.

1730년 구상덕은 당시 유행하던 역병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집안의 노비들이 차례로 괴질에 걸려 몸져누웠다. 온몸에 통증을 동반한 괴질을 치료하고자 사람들은 연신 소고기를 삶아먹고 그도 못하면 소똥즙이라도 달여 먹었다. 괴질의 통증은 팔다리에서 시작하여 두통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사람들이 생각해 낸 역병의 원인은 다름아닌 딱딱 소리를 내는 ‘..귀(鬼)’였다. 역귀(疫鬼)가 칼이나 깃발 등 병장기를 쥐고 수백 명씩 딱딱 소리를 내며 마을을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를 보면 즉사한다는 것이다. 딱딱귀를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은 징이나 꽹과리 등을 두들겨 먼저 역귀를 쫓는 방법이었다. 몇 해 전 악몽과도 같았던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의 희생자가 다시 나타났다는 비어(蜚語)가 돌았다. 매일 밤 사람들이 무리지어 징이나 북을 두드리며 괴귀(怪鬼)를 좇는다며 돌아다니는 일이 다반사였다. 조선 최고의 명의 허준은 마마를 치료하는 『언해두창집요』를 집필하면서, 조선의 인구가 늘지 않는 이유로 역병이 유행하면 역귀를 쫓는다며 굿판을 벌리거나 반대로 마마신을 극진히 대접하는 풍속을 지적했다. 의사답게 그는 적극적인 예방법과 약물 치료를 권장했다. 신생아가 태어나자마자 입 안의 오물을 닦아내면 두창을 예방할 수 있다고 알려주고, 돼지꼬리의 피로 만든 저미고(猪尾膏)를 개발하여 보급하는 일 등이었다.

(2023봄여름호_1.들어가며_사진5)과거 콜레라에 걸리면 쥐에 물린 증상과 비슷하다고 하여 대문 앞에 고양이 부적을 붙여두었다고 한다. 샤를 바라(Charles Varat)의『조선기행(VOYAGE EN COREE』
과거 콜레라에 걸리면 쥐에 물린 증상과 비슷하다고 하여 대문 앞에 고양이 부적을 붙여두었다고 한다. 샤를 바라(Charles Varat)의『조선기행(VOYAGE EN COREE』.
의서의 보급

국가는 기본적으로 의약 지식을 정리하여 인민들에게 보급할 의무가 있었다. 『의방류취(醫方類聚)』와 같은 거질의 의서를 널리 보급하기는 어려웠다. 평소에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간편 의서들의 간행이 절실했다. 1489년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의 서문을 쓴 허종은 “병은 중요한 것들을 취하되 급한 것을 우선하고, 약은 적게 하되 구하기 쉬운 것에 힘썼다. 내용은 반드시 정밀하게 해서 소략하지 않았으니 이를 언해하여 사람들이 쉽게 알도록 했다. 다량으로 인출(印出)하여 각 도에 나누어 주고, 널리 배포하여 집집마다 천금의 비결로 삼아 사람마다 큰 효과가 있도록 했다.”라고 주장했다. 백성을 직접 대면하는 지방관은 의서 간행의 중요한 주체였다. 조선 전기 이래 국가의 대규모 의서 간행 사업을 제외하면 간편 의서의 인간(印刊)은 지방관의 몫이었다. 1423년(세종 5년) 전라도 창평현감 박흥생은 목민관의 참고서인 『촬요신서(撮要新書)』를 편찬한 바 있다. 책의 상당 부분은 의학과 구급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보다 몇 년 앞선 1417년(태종 17년) 의흥현감 최자하는 자신이 소장하던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중간(重刊)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023봄여름호_1.들어가며_사진6)『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 중풍 부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 중풍 부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편 세조의 명으로 내의원 어의 전순의가 편찬했던 『식료찬요(食療撰要)』를 1487년(성종 18년) 경상감사 손순효가 상주에서 재간했다. 1497년 의성 현령 이종준은 까치마늘을 이용한 구급처방으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으니 『신선태을자금단방(神仙太乙紫金丹方)』이라는 긴 이름이 의서였다. 지방관의 의서 간행은 어진 정치(仁政)의 주요 수단이었다. 16세기에도 지방관의 의서 편찬은 계속되었다. 1541년 전라감사에 부임한 안현(安玹)은 명대의 『활인심법(活人心法)』을 재간했고, 기묘사화로 경기도 고양에 은거하다 1538년(중종 33년) 전라감사에 복직했던 김정국의 첫 사업은 고양에서 활용했던 의학 지식을 정리한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의 간행이었다. 역병 관련 의서의 보급도 불가피했다. 1517년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은 『창진방촬요언해(瘡疹方撮要諺解)』를 경주에서 출판했다. 그는 이미 창진방이 언해되어 간행되었지만 널리 배포되지 않아 마마로 인한 사망자가 많다고 비판했다. 백성들의 삶에 필수적인 역병 의서나 구급방을 지방에서 인쇄하여 널리 보급해야만 했다.

(2023봄여름호_1.들어가며_사진7)『벽온신방』 언해원간본 추정, 국립한글박물관
『벽온신방』 언해원간본 추정, 국립한글박물관.

16세기 후반에 그동안 수입된 명대 의서의 치료법이 반영된 의서가 필요했다. 첫 번째 결과물이 허준의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1608)였다. 허준은 자신의 책을 ‘마마 고칠 중요한 비결을 모은 처방’으로 정의했다. 그는 편목을 나누어 두창 치료의 원인과 구체적인 치료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언해하여 가능한 많은 이들이 활용하도록 했다. 한편, 온역에 대처하기 위한 의서 간행도 선초(鮮初)부터 활발했다. 중종대 평안도에 온역이 창궐하자 『간이벽온방(簡易.瘟方)』이 간행되었다. 『의방류취』에서 온역 치료법을 찾던 중종은 『벽온방』 편찬을 지시했고, 단 5일 만에 간단한 역병 치료서가 완성되었다. 1525년(중종 20년)의 일이었다. 1542년(중종 37년) 함경도에 온역이 창궐하자, 김안국은 왕명을 받아 내의원 의사들과 함께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을 간행했다. 이 책은 선초의 『간이벽온방』을 기본으로 여러 의서에서 온역 치료법을 보충하여 각각 진양법(鎭禳, 기도로 온역을 물리치는 법), 전염되지 않는 법, 약물 복용법 등으로 정리한 의서였다. 책의 말미에 향약재의 이름과 채취방법 등을 첨부하여 향촌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 전기의 온역 치료법은 17세기 초 허준에 의해 다시 한번 정리되었다. 1610년 『동의보감』을 완성한 이후에도 허준은 역병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70대의 노숙한 허준은 1612년부터 161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온역(瘟疫)과 독역(毒疫, 성홍열)을 치료하기 위한 역병 의서를 편찬했다. 1612년(광해군 4년) 12월 승정원은 함경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성과 전국이 여역(瘟疫)으로 걱정이라고 진언했다. 이듬해 봄 광해군은 허준을 불러 『신찬벽온방(新纂.瘟方)』을 주문했다. 이듬해 1613년 봄 온역이 잦아들었지만 가을이 되어 다시금 독역이 발생했다. 이에 10월 광해군은 다시금 독역 치료법의 편찬을 명하였다. 허준은 쉬지도 못한 채 『벽역신방(.疫神方)』을 집필했다. 1613년 겨울 완성된 허준의 이 책은 성홍열로 추정되는 역병에 대처한 세계 최초의 의서였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온역 치료법의 증보가 한 차례 더 이루어졌다. 1653년 간행된 내의원 어의 안경창의 『벽온신방(.瘟新方)』이 그것이다. 1653년(효종 4년) 봄 황해도 지방에 여역(.疫, 전염성 열병)이 창궐하여 사망자가 부지기수였다. 효종은 내의원의 약물을 황해도에 보내 구료(救療)하도록 하는 동시에 기왕의 온역 처방을 증보하여 새로운 의서를 편찬하도록 했다. 서문을 쓴 채유후는 “먼 시골과 벽촌의 무지한 백성 및 부녀자들이 모두 이해해서 역병의 단계를 살펴 처방하고 변증에 따라 투약할 수 있게 하고 예방 및 주문법(.禳)을 뒤에 첨부했으니, 우리 백성들의 병이 거의 나을 것이다.”라고 칭송했다.

종두법 연구

18세기는 한마디로 마마의 시대였다. 정조대 가장 큰 역병 유행은 1786년에 발생했다. 1786년 4월부터 6월까지 수 개월간 계속된 역병은 의약이 소용없을 만큼 대단했다. 전국에 걸쳐 노출된 해골을 매장하도록 명하고 숫자를 파악했는 데 삼십만이 넘을 정도였다. 정조는 서울과 지방의 처방들을 모두 모아들이는 동시에 역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규칙을 준비했다. 서울을 둘로 나누어 서부·북부·중부는 전의감이, 동부·남부는 혜민서에서 담당하여 역병 치료를 담당토록 했다. 각각 의원 3명을 차출하여 관할 지역에서 환자가 발생하면, 중환자는 의원이 현장에 달려가고 가벼운 환자는 증세에 따라 처방전과 약물을 지급했다. 출동의 신속함을 위해 청파와 노원의 역마를 이용하도록 했으며 소용되는 모든 약물은 국비로 지원했다. 전의감과 혜민서는 5일에 한 번씩 환자 수와 사용한 약물 내역을 왕에게 보고했다. 정조는 홍역 치료에 특효가 있는 처방들을 전국을 모두 뒤져 수집하도록 명했다. 여전히 개똥을 소주에 타 먹는 방법이 유행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두창과 홍역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방법은 종두(種痘)법이 유일했다. 1797년 36세의 나이로 곡산부사에 부임했던 다산은 『마과회통』(1798)을 편찬하여 마마 치료에 앞장섰다. 그만큼 그는 근본적인 치료법인 종두법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열의는 주변의 동료들과 학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남인 이기양(李基讓, 1744-1802)은 다산과도 막역했는데 특히 북학의 이용후생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아들 이총억이 1799년 연행사를 따라 중국을 다녀오면서 종두법 관련 의서를 입수했다. 바로 정망이(鄭望.)의 「정씨종두방」으로 청나라 의학자 섭계(葉桂, 1667-1746)의 『임증지남의안(臨.指南醫案)』속에 수록된 두 페이지 짜리 처방전이었다.

(2023봄여름호_1.들어가며_사진8)『마과회통』의 권말에 부록으로 실린「종두심법요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과회통』의 권말에 부록으로 실린「종두심법요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씨종두방』을 열람하던 다산은 박제가로부터 또 다른 종두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대 의서 『의종금감(醫宗金鑑)』에 수록된 『종두심법요지(種痘心法要旨)』였다. 정약용은 두 처방을 연구한 후 하나로 정리했다. 1800년 봄, 정약용이 작성한 『종두요지(種痘要旨)』는 인두법에 관한 조선 최초의 저술이었다. 『종두요지』가 완성되자 정약용은 영평현령(포천)이었던 박제가에게 이를 보내 종두법 실행을 논의했다. 시급한 문제는 접종에 필요한 두묘(痘苗)의 확보였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두묘 제조법을 논의했지만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수십 일 후에 박제가는 다시 정약용을 방문하여 두묘를 완성했으며, 당시 영평현에서 이를 실험하여 성공했다고 밝혔다. 조선에서 종두법이 처음 시행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1800년 6월 정조가 사망하자, 다산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다산은 유배기간 동안 그리고 해배 후에도 종두법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전의 종두법(인두)보다 안전한 우두법에 대한 소식을 접한 다산은 1828년 북경에서 간행된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의 우두법 책자를 입수할 수 있었다. 1805년 6월 중국 광동에서 초판되었던 『영길리국신출종두기서(英.利國新出種痘奇書)』는 20여 년이 지나 북경의 규광재(奎光齋)에서 재간되었는데, 다산은 기필코 이 책을 구득하여 종두에 관한 연구를 지속했다. 서양의 학문과 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젊어서부터 많은 고초를 겪었던 그였지만 종두법을 통해 마마를 극복하려 했던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다산은 유학자이면 동시에 의학에 밝은 유의(儒醫)였다. 그는 의학 지식을 주로 공공의 목적에 사용하고자 했다. 아들이 의원이 되려 할 때 한사코 만류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의술이 사익이 아닌 공익의 도구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유의(儒醫)의 활동

조선의 지방 의국은 공공의 실천에 앞장섰던 유의들의 활동처였다. 선초 이래 조선 정부는 각 도에 두세 군데에 의국을 건립하고 심약을 파견하여 진상 약재를 검사하거나, 의생을 양성하여 지방 의료를 담당하도록 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의국의 운영이 쉽지 않았다. 의생을 공노비와 다름없이 대접했기 때문이다. 이에 지방의 사족들은 약계(藥契)를 결성하여 약재를 구득하고 계원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부조 조직을 갖추어 열악한 지방 의료의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족들만의 약계나 약국이 아닌 향촌 공동체를 위한 의국과 약계가 절실했다. 16세기 이래 지속되었던 소학(小學) 운동 등 이른바 도학(道學)의 실천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이후 치국이 중앙의 관료가 아닌 ‘향촌 내 공공 실천’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만들어 내었다. 전직 관료는 물론 다수의 초시(初試) 합격자들은 향촌에 남아 공공의 활동에 종사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향약을 시행하거나 서원 및 향교에서 교육 활동을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사문(斯文) 의식의 확장과 지식인의 역할’을 둘러싼 변화는 유의들로 하여금 지방 의국에서 자신의 의술을 베풀도록 자극했다. 16세기 전반 경북 영주의 제민루(濟民樓) 의국에서 활동한 이석간(1509-1574)을 비롯하여, 1602년 상주 의국 존애원(存愛院)의 건립에 동참하여 지역민들 위해 의술을 베풀었던 성람(1556-1620) 등이 그러하다. 허준 역시 호남과 서울 등지에서 유의로 활약하다가 내의원에 천거되었던 인물이다. 지방 의국은 유의들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운영을 도맡을 관리자도 필요했다. 17세기 초 강릉 약국을 운영했던 진사 심장원(1531-1607)을 비롯하여, 17세기 중엽 제민루(濟民樓, 조선 시대 의약소 역할을 하던 곳)의 운영을 정상화시키는 데 많은 애를 썼던 삼락당 박종무(1582-1664), 그리고 존폐의 기로에 선 상주 존애원(存愛院, 조선 시대 사설 의료기관)을 맡아 부실한 경영상태를 바로잡았던 이신규(1600-1681) 등 지방의 사족들은 이른바 환난상휼(患難相恤)을 위한 호혜의 토대를 유지하고자 공공에 앞장 섰던 사문(斯文)이었다. [출처] [생로병사의 비밀] 들어가며 / 위생(衛生)’, 건강을 지키고 병마와 싸우는인간의 삶|작성자 월간문화재

(2023봄여름호_1.들어가며_사진9)침이나 뜸을 뜨는 위치를 그린 그림(경혈도), 국립중앙박물관
침이나 뜸을 뜨는 위치를 그린 그림(경혈도), 국립중앙박물관.

16-17세기 공공 의료 활동에 앞장섰던 유의와 지방 사족들의 실천은 18세기에 많은 부침을 겪으면서 점차 사라지는 듯 보였지만, 19세기 초 서울 양반 홍길주(1786-1841)의 용수원 구상으로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펼쳤다. 당시 홍길주의 뜻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의학 지식과 이를 둘러싼 제도를 사익만이 아닌 공익을 위한 장으로 만들려 했던 의지는 분명했다. 홍길주는 유의들을 한데 모아 의학을 연구하고 환자를 치료하며 의서를 편찬하는 공공의 플랫폼을 제언했다. 그는 ‘누가 나의 뜻을 이루어 주겠는가?(孰遂念, 숙수념)’라고 푸념하면서도, 세상을 떠도는 이재민들과 병들어도 의사에게 치료받을 수 없는 인민들을 위해, 복지기구 삼재원을 만들고 자선의국 용수원을 만들고자 했다. 많은 유의들과 함께 당시까지 출판된 중국과 조선의 의서를 모두 수집하여 총서 발간을 기획하기도 했다. 정조의 『수민묘전』이 떠오르는 그의 『수민전서(壽民全書)』 편찬은 무려 380권에 달하는 방대한 의서를 발간하는 계획이었다. 중국 의학의 경전인 『난경』, 『소문』, 『영추』는 물론 상한론의 핵심 『금궤요략(金.要略)』을 기본으로 여러 가지 의서들의 장점을 취해 붙이고, 여기에 조선의 경험방을 수록할 생각이었다. 조선 사람은 누구나 수신제가로부터 치국평천하의 꿈을 키웠다. 자신과 집안 식구들의 건강을 위해 공부했던 의학 지식은 개인이나 가문에 한정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었다. 관료가 되어 국가를 위해 복무하듯이, 향촌의 지식인으로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야했다. 이것이 군자의 도리였다. 재난에 처한 백성들의 고통에 공명하고 공공의 실천을 도모하는 현장이 곧 지식인의 활동처였다. 의료는 개인의 위생을 넘어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될 때 비로소 ‘광거(廣居)’를 실천하는 도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