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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봄, 여름호-생로병사의 비밀] 지키다-조선 왕들의 건강과 질병, 내의원의 건강관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8-04 조회수 : 2449
조선 왕들의 건강과 질병, 내의원의 건강관리
조선 시대 왕들은 절대 권력과 더불어 풍요로운 의식주 생활과 의료혜택을 누렸기 때문에 그 시기의 일반인들보다는 훨씬 건강했고 장수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 역대 왕들이 사망한 나이는 불과 평균 46.0세로서, 그들 가운데 환갑을 넘긴 사람은 불과 5명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왕들의 수명이 현대인의 수명과 현격한 차이가 났던 주된 이유는 바로 건강에 불리한 생활 조건과 일부 감염병에 대한 미흡한 대처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왕실의 건강을 담당했던 내의원에서는 왕실의 무병장수를 위해 당시 최고 수준의 의학적 노력을 기울였다.
글 김정선(김정선한의원장, 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겸임교수)
(2023봄여름호_2.지키다2_사진1)숙종의 천연두 완쾌와 성수(聖壽, 임금의 나이)가 50세 됨을 경하하는 연회장면. 「숭정전진연도(崇政殿進宴圖)」 부분, 1710년, 국립중앙박물관
숙종의 천연두 완쾌와 성수(聖壽, 임금의 나이)가 50세 됨을 경하하는 연회장면. 「숭정전진연도(崇政殿進宴圖)」 부분, 1710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왕들의 수명과 질병

조선 시대 역대 왕이 사망한 나이는 평균 46.0세이다. 평균수명이 84세 남짓한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조선 왕들이 단명했다고 여기기 쉽지만, 조선 시대 왕자들의 향년을 살펴봐도 엇비슷하기 때문에 국왕들의 평균수명이 유독 낮았던 것도 아니다. 조선 시대 왕자들 가운데 생몰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평균 사망 나이를 계산하면 37.6세인데, 그 가운데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살해되었거나 20세 미만에 죽은 사람들을 빼면 평균 사망 나이는 44.3세이다.

조선 시대 역대 왕의 향년(享年)

조선 시대 역대 왕과 그의 향년(생몰연도)를 안내합니다
향년(생몰연도) 향년(생몰연도)
1. 태조 73 (1335-1408) 15. 광해군 66 (1575-1641)
2. 정종 62 (1357-1419) 16. 인조 54 (1595-1649)
3. 태종 55 (1367-1422) 17. 효종 40 (1619-1659)
4. 세종 53 (1397-1450) 18. 현종 33 (1641-1674)
5. 문종 38 (1414-1452) 19. 숙종 59 (1661-1720)
6. 단종 16 (1441-1457) 20. 경종 36 (1688-1724)
7. 세조 51 (1417-1468) 21. 영조 82 (1694-1776)
8. 예종 19 (1450-1469) 22. 정조 48 (1752-1800)
9. 성종 37 (1457-1494) 23. 순조 44 (1790-1834)
10. 연산군 30 (1476-1506) 24. 헌종 22 (1827-1849)
11. 중종 56 (1488-1544) 25. 철종 32 (1831-1863)
12. 인종 30 (1515-1545) 26. 고종 66 (1852-1918*)
13. 명종 33 (1534-1567) 27. 순종 52 (1874-1926)
14. 선조 56 (1552-1608) 향년의 평균 46.0세

* 고종은 양력으로는 1919년 1월 21일에 67세로 사망했다.

조선 왕들의 평소 질병과 사망원인 중 제일 많았던 것은 종기(腫氣)이다. 우리도 불과 수십 년 전 목욕을 자주 하기 불편했던 시절에 종기는 흔한 질병이었기 때문에 이명래 고약 같은 종기약을 상비약으로 여겼던 적이 있었다. 종기는 피부 모낭 주위 조직의 화농성 염증으로서, 옛날에 큰 종기는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문종이 세자 시절이던 36세 때 앓았던 종기의 증상은 길이가 30cm 가량 되는 무척 심한 것으로, 이후 계속 그를 괴롭혔던 질병이었다. 정조가 세상을 달리한 48세 때의 종기 증상은 “등골뼈[脊骨, 척골] 아래쪽부터 목 뒤 머리가 난 곳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그 크기가 어떤 것은 연적(硯滴)만큼이나 크다”라고 했으며, “잠깐 잠이 들어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요자리까지 번졌는데, 잠깐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라고 할 정도로 사망에 이르게 했던 심각한 것이었다.

“세자[문종]가 작년 10월 12일 등 위에 종기가 났는데, 길이가 한 자 가량 되고 넓이가 5, 6치[寸]나 되는 것이 12월에 이르러서야 곪아 터졌는데, 창근(瘡根)의 크기가 엄지손가락만한 것이 여섯 개나 나왔고, 또 12월 19일에 허리사이에 종기가 났는데, 그 형체가 둥글고 지름이 5, 6치나 되는데, 지금까지도 아물지 아니하여 일어서서 행보(行步)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의방(醫方)에 꺼리는 바로서 생사(生死)에 관계되므로 …
세종실록(世宗實錄) 卷127, 32年 1月 26日
(2023봄여름호_2.지키다2_사진2)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26일 임인 4번째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26일 임인 4번째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조선 왕들의 사망원인을 살펴보면 단연코 세균성 감염증이 제일 많다. 27명의 조선 왕 가운데 적어도 3분의 1에 가까운 문종, 성종, 연산군, 중종, 선조, 현종, 영조, 정조, 순조 등이 세균성 감염증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조선 왕들의 단명 요인

전근대 시대에는 영·유아사망율이 높았기 때문에 평균수명이 지금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며, 어린 시절을 건강하게 무사히 보냈다고 하더라도 환갑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의식주 생활과 최고의 의료혜택을 누렸던조선 왕들의 수명이 50세를 넘기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 역대 왕 중에서 60세 이상 장수한 왕은 태조, 정종, 광해군, 영조, 고종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을 보면 유년기에는 세자에 책봉되지 않았다가 나중에야 왕위에 오른 사람들이다. 즉 대다수의 국왕들과 달리 어느 정도 기간까지는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고 지나치지 않은 식사와 적당한 운동을 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건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조 최장수 임금인 영조는 다른 임금들과 달리 특별한 점들이 있다. 영조는 노령기에도 불구하고 건강 상태가 양호했었다고 전하는데, 74세 때는 신하들이 “피부가 청년 시절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에도 검정 머리털이 있었으며 미각도 좋은 상태를 유지했었다고 전한다. 그는 어린 시절 사가(私家)에서 자랐던 경험이 있어 자유롭게 운동하고 검약한 생활을 익힐 수 있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금주령과 사치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는데, 이는 그의 신조에 따른 것으로 스스로도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즐겼다. 당시 영조의 침실 안에는 “화려하고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이 여항(閭巷)의 호귀(豪貴)한 집에 견주어 도리어 뒤떨어진 것이 있었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가 71세 때 겨울에 말하기를 자신은 평상시 자기 몸 기르기를 심히 박약하게 하기 때문에 창호(窓戶)에 틈을 바르지 않은 것도 그대로 둔 채 참고 지낸다고 하였다. 운동 부족과 영양과다가 되기 쉬운 궁궐 내 생활환경에 비추어볼 때 영조의 검약한 생활철학이 오히려 그를 조선조 왕 가운데 제일 장수하게 했던 한 가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2023봄여름호_2.지키다2_사진3)조선 역대 왕중 장수한 왕 태조와 영조 어진.조선태조어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조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역대 왕중 장수한 왕 태조와 영조 어진.
조선태조어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영조어진, 국립고궁박물관.

한정된 공간 속에서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활동적이고 검약한 생활이 건강에 이롭다는 사례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황제들도 대부분 단명했다. 진시황(秦始皇) 이래 335명의 제왕 중에서 남북조시기(南北朝時期)의 5호16국(五胡十六國)과 오대시기(五代時期)의 십국(十國)의 군주를 제외하면 그간 제왕의 수는 235명이다. 그들 가운데 수명이 확실하지 않은 11명을 제외하면 224명의 평균 수명은 39세이다. 서한의 문학가인 매승(枚乘)은 중국의 황제들이 단명하는 원인에 대해 그들이 출입할 때 모두 가마를 이용하여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몸에 마비가 오고, 깊은 궁 안에서 생활하니 몸에 한기와 열기가 음습했으며, 미녀들에 둘러싸여 방탕한 생활을 하고, 술과 기름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위장을 해쳤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역대 중국의 황제들은 주색을 즐겼으며 이로 인해 몸을 망친 이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들 중에서 70세 이상 장수한 황제의 공통점은 천하를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용맹한 군주였거나 정권을 손에 넣기 위해 노력한 군주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사욕을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던 후대 황제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023봄여름호_2.지키다2_사진4)창덕궁 내 인정전 옆에 위치한 내의원, 동궐도, 고려대학교 박물관
창덕궁 내 인정전 옆에 위치한 내의원, 동궐도 중 일부, 고려대학교 박물관

피부의 종기와 같은 세균성 감염증이 심해져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은 현대에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지금과 다른 질병 양상이 생기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의학사 분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현대인의 평균수명 증가의 주요한 원인과 배경은 의학이나 약학의 진보라기보다는 주로 생활 환경과 조건의 개선과 향상이다. 한편, 인구성장의 관점에서 볼 때, 의과학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기여는 단지 몇몇 종류의 전염병을 부분적으로나마 조절했고, 따라서 유아 사망률이 대폭 감소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료기술은 비교적 값이 싸고 기술 자체가 간단하여 거의 모든 곳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이러한 의과학이나 공중보건의 공헌이 있기 전부터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왔다는 것이다. 인구가 계속 증가했다는 것은 이전보다 영유아 사망률이 낮아지고 장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마스 매큐언(Thomas McKeown)에 따르면,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의학이 사망률 감소에 따른 인구 증가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에서 18세기 초부터의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고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의 감소가 인구증가를 가속화했다고 주장했다. 감염성 질환이 감소하게 된 요인에 대해서는 영양상태와 위생상태의 개선 등을 들었다. 요컨대 그는 18세기 이후 인류의 평균수명 증가와 사망률 감소에 미친 영향으로 영양증진과 위생개선 등의 환경요인, 생활행태, 의학적 치료 등을 들었는데, 이 가운데에서 사망의 예방이나 평균수명의 증가에 임상의학이 기여한 정도는 다른 요인보다 작았다고 주장했다. 의학의 역할에 대해서는 죽음의 예방과 지연, 고통의 경감과 같은 비치명적인 질병의 치료에 기여한 업적이 있다고 평가했을 뿐이다. 실제로 옛날에는 잘못된 보건 개념으로 인한 불결한 위생 습관이 질병이 발생하는 데 한몫을 했다. “죽을 사람에게는 이(蝨)가 없어진다”고 하듯이, 조선 중기의 사대부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그의 저서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 몸에 이가 많이 생기는 것을 기쁘게 여겼던 것이다. 그는 “내 몸에 이가 많아졌다 적어졌다 하며 끊이지 않으니 기쁘다”고 하면서, “내가 평소에 이가 많은데 근래에 와서 보기가 드물어 의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전일부터 이제까지 다시 많이 생기니 염려가 없겠다”며 이가 많아지는 것을 건강의 징표로 여겼을 정도였다. 한편, 유희춘은 목욕을 자주 하는 것도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녁에 내가 흥문(興文)에게 자주 목욕을 하지 말라고 훈계를 했다”며 목욕을 자주 하는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2023봄여름호_2.지키다2_사진5)주칠(朱漆)을 한 왕실용 약장(藥欌), 국립고궁박물관
주칠(朱漆)을 한 왕실용 약장(藥欌), 국립고궁박물관

이전에는 일반인이 그렇듯, 왕도 목욕을 자주 하지 않았다. 날씨가 쌀쌀할 때 옷을 벗으면 풍기(風氣)가 침입하여 병이 생긴다고 여겼다. 더구나 온천욕은 진액(津液)이 크게 빠져서 원기(元氣)가 손상되어 해롭다고 생각했다. 조선 시대 왕들은 이러한 잘못된 보건 개념을 남들보다 더욱 철저히 지켰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종기와 같은 감염증이 자주 발병하기 쉬웠으며 때때로 패혈증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기에는 당시 최고 수준의 의료로서도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점이 조선 왕들이 현대인들보다 단명했던 주요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 왕들의 수명이 현대인과 비교하여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이유로서는 의학의 한계, 비위생적인 생활습관, 영양의 과다섭취에 비해 적은 운동량, 과로 등이 왕의 수명을 재촉했을 것이다. 조선의 왕들은 잘못된 생활습관 하에서 감염증과 성인병 같은 질병이 자주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질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보건 개념이 미흡했던 것이다.

왕실 전용 병원, 내의원의 일상적인 진료업무 : 국왕에 대한 문안

조선 시대에 왕과 그 친족의 건강관리를 담당했던 기관은 내의원(內醫院)이다. 내의원에서는 책임을 맡은 도제조 이하 50명 남짓한 여러 관리가 주로 국왕의 건강을 위해 일했다. 내의원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5일 간격으로 국왕에게 글로 쓴 “계사문안(啓辭問安)”을 올려 국왕과 그의 친족의 건강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이 문안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내의원 제조 ○○○와 부제조 ○○○이 아뢰기를, “복미심(伏未審) 요 며칠 사이 성체(聖體)는 어떠하셨으며, 침수(寢睡)와 수라[水刺]는 어떠하셨습니까? 신들이 어의들을 거느리고 서둘러 입진(入診)하여 성후(聖侯)를 자세히 살펴야겠습니다. ○○○의 기후(氣候)는 어떠하시며, ○○○의 기후는 어떠하며, ○○○의 기후는 어떠합니까? 저희들이 구차스러운 염려를 이기지 못하여 감히 와서 문안드리며 아울러 이렇게 우러러 여쭙니다.”

대개의 경우, 내의원이 위의 문안을 올리면 임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 ○○○의 기후는 한결같으시고, ○○○과 ○○○의 기도(氣度)도 평순(平順)하니, 경들은 입시(入侍)할 필요 없다.”

이상의 정형화된 문안 내용은 5일 간격으로 반복된다. 신하가 진찰을 청하고 왕이 필요 없다고 하는 형식으로 일상적인 문안이 이루어졌다. 문안은 국왕에게 건강 상태를 물어보아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고 어의들의 진찰을 받아 세밀한 건강관리를 받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본다면, 문안은 진료의 한 형태로서 자각증상의 변화를 문진(問診)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전반적인 컨디션과 함께 수면과 소화기관의 상태에 대해 묻는데, 평소 건강할 때 최초의 문진 내용으로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의관이 자주 국왕의 옥체(玉體)에 손을 대면서 진찰하기는 큰 실례였으므로 문안은 왕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가장 기초적인 진찰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정기적인 계사문안 외에도 왕과 세자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미령(未寧)시의 문안,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봉위(奉慰)의 문안 또는 간혹 날씨가 매우 덥거나 추울 때와 친제(親祭) 후의 문안 형식도 위와 비슷하다. 그런 경우에는 위 문안 내용의 초반부에 상황에 맞게 덧붙이는 말을 넣기도 한다. 특히 미령시에는 수시로 계사문안 또는 말로서 구전문안을 올려서 국왕의 건강 상태를 자주 확인했다.

(2001봄여름호_2.지키다2_사진6)내의원의 편액으로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 영조 어필. 보호성궁(保護聖躬), 국립고궁박물관
(좌)내의원의 편액으로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 영조 어필. 보호성궁(保護聖躬), 국립고궁박물관.
(우)내의원의 편액으로 ‘임금의 약을 조제한다’ 영조 어필. 조화어약(調和御藥), 국립고궁박물관.
내의원의 일상적인 건강관리 : 인삼속미음

평소 내의원의 건강관리 방법 가운데 하나는 때때로 보양식인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을 국왕에게 처방하는 것이었다. ‘인삼속미음’이란 인삼과 좁쌀을 물과 함께 끓여서 체에 걸러낸 것으로 죽보다 묽은 유동식이다. 좁쌀은 성질이 서늘하여 비위의 열을 없애고 기를 북돋는 작용을 하므로 인삼과 더불어 기력을 보충하는 건강식의 재료로 쓰였다. 내의원에서 인삼속미음을 처방한 주된 이유는 미리 보양식을 섭취하여 영양공급과 더불어 슬픔이나 피로로 인한 질병을 예방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왕실에서는 선대 왕과 왕비들의 장례 때 매우 복잡한 절차를 치르는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많은 국가 제례를 주관하느라 분주한 일정이 늘 짜여져 있었다. 따라서 국왕은 과로에 시달릴 가능성이 많았고, 이에 적절하게 대비할 방법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2023봄여름호_2.지키다2_사진8)내의원의 진료기록. 『약방일기(藥房日記)』 1권(철종 1년, 1850),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내의원의 진료기록. 『약방일기(藥房日記)』 1권(철종 1년, 1850),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 시대 법령집인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내의원에서 인삼속미음을 올리는 규정이 실려있다. 국휼(國恤), 소상(小祥)과 대상(大祥), 천릉(遷陵), 내전(內殿)의 사친상(事親喪), 국기일(國忌日) 등에 인삼속미음을 올리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각각의 경우마다 속미음에 들어가는 인삼의 분량과 복용하는 기간이 다르게 규정되어 있다. 대개는 국휼이나 사친상 때 받는 스트레스가 보다 크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인삼의 분량과 복용기간을 늘리도록 했던 것이다. 인삼속미음을 복용하는 이유는 상중에 효성을 표현하기 위해 음식을 줄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국왕은 상중에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소선(素膳)을 하게 되는데, 반면에 신하들은 왕의 식사가 부실하여 건강을 해치게 될까 염려하여 되도록 전처럼 식사를 하도록 간청하는 형식을 취했다. 소선에서 신하들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왕이 고기반찬을 들지 않으면 건강이 나빠질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왕은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바로 이전처럼 수라상을 들지 않았으므로, 이와 같은 신하들의 요청을 뿌리치기 일수였다. 따라서 상중이나 제사 때처럼 체력이 저하되기 쉬운 경우에 인삼속미음을 통한 영양공급과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방법이 정착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삼속미음은 일상 건강관리 목적으로 사용한 내의원의 대표적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이 생기고 난 뒤에 치료하기보다 질병을 미리 예방하는 것이 더 좋은 법이다. 내의원에서는 국왕의 건강이 염려될 경우에 미리 보양식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질병을 예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어의들의 진찰 : 입진

입진(入診)은 왕이 진찰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국왕이 내의원의 문안을 받을 때, 자신이 진찰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내의원 의관들의 진찰을 허락하게 되는데, 이때 비로소 내의원 의관들이 입진을 하게 된다. 입진할 때 의관들은 내의원의 책임자인 도제조의 지시에 따라 왕의 양 손목에 맥진(脈診)을 하고 물러나 엎드려서 맥후(脈候)를 왕에게 말하도록 되어 있다. 이때 국왕과 대화하며 증상을 묻는 것은 도제조의 몫이고, 의관은 단지 맥진을 하고 결과를 알려주는 역할이었다. 국왕의 건강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내의원의 도제조는 영의정이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료에 있어서 국왕은 자율성이 철저하게 존중되는 존재였다. 아무리 국왕의 건강이 좋지 않고 그에 걸맞는 좋은 치료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왕이 싫다면 그만이었다. 국왕의 건강에 이상이 있을 때마다 내의원에서는 입진을 여러 차례 간청하기 마련이지만, 때때로 국왕의 허락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끔 국왕들은 가벼운 증상에는 내의원의 입진을 허락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약을 구하게 하여 복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무래도 국왕 나름대로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번거로운 입진을 받기보다는 사적으로 약을 복용하는 편이 더 편했을 것이다. 입진절차가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병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대신들은 내의원의 입진을 받도록 계속 강하게 청했는데, 이유는 왕실과 국가의 사체(事體) 즉 사리와 체면때문이었다. 임금은 나라의 상징적 존재이며, 국왕의 건강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국왕은 정해진 형식에 따라 엄밀한 건강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리에 걸맞는 국왕의 건강관리

조선 시대에는 사리와 체면을 중요시했다. 성리학적 국가이념과 대의명분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국왕의 건강관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은 상중(喪中)에는 효성을 크게 표현해야 했으며, 궂은 날씨에도 행사를 자주 주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마다 내의원은 국왕의 건강을 염려하여 식사와 휴식에 힘쓰도록 계속 간청했으며, 왕은 못 이겨서 들어주는 형식을 취했다. 임금은 까다롭고 품위 있는 건강관리를 받아야 사리에 맞고 국가의 체면이 선다는 논리였다.

참고문헌
  • 『內醫院日記』 서일·박종연, 역. 『질병의 기원』. 동문선; 1996.
  • 『眉巖日記』손명세·정상혁, 역. 『의학의 한계와 새로운 가능성』. 한울; 1994.
  • 『六典條例』허유영, 역. 『중국 황제 어떻게 살았나』. 지문사; 2003.
  • 『朝鮮實錄』황상익, 편. 『문명과 질병으로 보는 인간의 역사』. 한울림; 1998.
  • 王霜·向斯. 『中國帝王宮廷生活』. 國際文化出版公司;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