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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봄, 여름호-생로병사의 비밀] 지키다-선비들의 장수비결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8-04 조회수 : 608
선비들의 장수비결
조선 시대의 평균수명은 얼마나 될까? 한국인의 평균수명을 처음 조사했던 1926년에 33.7세에 불과했으니 그 이전에는 30세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균 수명이 낮았던 것은 태어난 지 오래되지 않아 사망하는 아이가 많았기 때문으로 1930년대의 통계에 의하면 생후 5년 내에 사망하는 비율이 무려 41%나 되었다. 5년 넘게 생존한 경우 5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 보편적이었지만, 선비 중에는 70세 심지어 80세 넘게 장수한 분도 적지 않았다. 조선 말기 헌종 때 정리된 ‘기사제명록(耆社題名錄)’에 572명이 기로소(耆老所, 연로한 문신을 예우하기 위한 기구)에 입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70세 이상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정2품 이상의 관직을 거친 자로서 인품을 갖춰야 자격이 있었으니 ‘참 선비’라야 가능했다. 그 중에는 80세 넘어서도 관직에서 제 역할을 했던 황희, 이원익도 있고, 3대를 내리 기로소에 입소한 강백년, 강현, 강세황도 있다. 장수했던 선비에게는 어떤 비결이 있을까?
글 정지천(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한방내과 교수)
(2023봄여름호_2.지키다2_사진1)숙종의 천연두 완쾌와 성수(聖壽, 임금의 나이)가 50세 됨을 경하하는 연회장면. 「숭정전진연도(崇政殿進宴圖)」 부분, 1710년, 국립중앙박물관
공자(BC 551-479) 초상, 네이버 지식백과.
모든 선비들의 귀감이 되는 공자의 장수비결

공자는 2,500년 전에 무려 73세까지 생존했다. 70세가 넘은 부친에게서 태어났지만 당시로는 매우 드물게 키가 9척6촌(180cm 이상)이나 되었으니 건장하고 장수하는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건강장수를 인간이 취해야 할 주요 덕목으로 지적했고, 어질고 덕이 있어야 장수한다고 하였다. 사람에게 3가지 죽음이 있으니 사는 곳과 사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으면 죽고, 음식에 절도가 없으면 죽으며, 편안함과 피로가 지나치면 죽는다고 했다. 너무 안일하게 혹은 너무 고단하게 생활하지 말고 동정(動靜, 움직이며 하는 것과 고요하게 하는 것)을 균형 있게 하라고 했으니, ‘중용(中庸)’을 강조했다. 천체의 운행이 쉼이 없듯이 군자도 항상 움직이고 활동해야 건강하고 오래 산다고 역설했는데,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써서 실천했다. 제자들과 더불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사냥을 하고 낚시를 하며 무예를 연습하고 수영을 하였고 유람을 다녔다. 특히 등산을 제일 많이 했으며, 등산이 가장 좋은 운동이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음악을 매우 즐겨서 상중을 제외하고는 매일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으며, 악기를 연주하고 작곡도 300곡이나 했다. 공자는 56세에 재상에서 물러난 뒤 13년간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는데, 사실상 유랑 생활로서 숱한 고난과 박해를 당했고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기도 했다. 68세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음식 위생을 대단히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논어에 군자는 배불리 먹지 않고 편안한 곳에 살지 않는다고 했듯이 소식(小食, 음식을 적게 먹음)과 소식(素食, 채식 위주의 소박한 음식)을 실천한데다 음식을 매우 엄격하게 가려 먹었다. 팔불식(八不食)*이라 하여 8가지의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위생 상태가 워낙 열악했던 당시로서는 엄청 까다로울 정도로 철저했다.

*공자의 팔불식(八不食)

- 밥이 쉬어 맛이 변한 것
- 생선·고기가 상한 것
- 빛깔과 냄새가 나쁜 것
-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
- 제철이 아닌 것
- 썬 것이 반듯하지 않은 것
- 양념과 음식이 어울리지 않은 것
- 시장에서 사온 술과 육포

(2023봄여름호_2.지키다2_사진2)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26일 임인 4번째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중봉 조헌(1544-1592) 표준영정, 칠백의총관리소.(출처 : 전통문화포털)
면역력이 매우 강했던 조헌 선생의 비결

조선 시대에는 염병(染病, 급성전염병으로서 역병, 돌림병)이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자주 있었다. 선생은 46세 때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옥천에서 함경도 길주까지 2천 여리 길을 걸어가느라 발이 부르트고 피가 흘렀으나 조금도 의 기가 꺾이지 않았다고 한다. 유배지에 이르렀을 때 근처에는 염병이 크게 번져 10명 중 7, 8명이 죽었을 정도였고, 함께 따라온 아들은 겨우 죽음을 면했지만 아우는 죽고 말았다. 선생은 아우의 병간호에서부터 염습까지를 모두 직접 하고 아침저녁으로 널을 어루만지며 지극히 애통해 하였지만 아무 탈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강한 정기 앞에는 사기가 침범하지 못한다고들 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질병을 일으키는 나쁜 기운이 ‘사기(邪氣, 몸을 해치는 나쁜 기운, 세균·바이러스에 해당)’이고, 여기에 맞서 싸우는 것이 ‘위기(衛氣)’로서 면역력에 해당한다. 위기도 정기(正氣) 중의 하나이므로 정기가 충실하면 어떤 사기라도 방지할 수 있거나 싸워서 이길 수 있으므로 코로나19를 비롯한 감염증에 쉽게 걸리지 않는다. 정기가 강하다는 것은 면역력이 강하다는 의미로서, 폐장·비장·신장이 담당한다. 그 중 핵심은 신장으로서 신장의 정기가 생장, 발육, 생식, 노화의 모든 과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약 선생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우다 49세의 나이로 전사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90세 넘게 장수했을 것이다.
그토록 면역력이 강했던 비결은 첫째, 선천적으로 강한 정기 즉 강건한 체질을 타고났다. 무인 집안이라 강골을 물려받았던 것으로 매우 덥수룩한 수염이 증거이다. 수염은 신장의 정기를 반영하는 곳으로서 수염이 왕성하다는 것은 신장의 정기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신장의 정기는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다. 둘째, 운동을 많이 했다. 집안이 가난했던 탓에 주경야독으로 낮에는 손수 농사를 지었기에 엄청난 운동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농한기에는 멀리 떨어진 글방에 매일같이 공부하러 다니느라 저절로 운동이 되어 체력 단련이 되고 다리가 튼튼해져 정기가 길러졌다. 셋째, 의지가 강하여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나라의 기강과 시책을 바로잡고자 수도 없이 직언 상소를 올렸고, 특히 46세 때는 지부상소(持斧上疏,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표시하기 위해 작은 도끼를 들고 가서 올리는 상소)도 올렸는데 기가 왕성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강한 정신력이 있으면 면역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넷째, 면역기능을 높여주는 보양 음식을 먹었다. 아주 가난했기에 보양식이나 보약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양탕(.湯)’이 있었다. 율곡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산골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정진하였는데, 제자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푸줏간에 가서 당시에는 별로 먹지 않던 양(., 소의 위장)을 싸게 받아 오고 삼밭에서 얻어온 미삼과 대추, 밤을 넣고 끓여 먹였던 것이다. ‘양’은 비위장을 보익하는 작용이 커서 면역력을 강하게 하는 효과를 나타내는데,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속이 더부룩하거나 혹은 먹은 것이 내려가지 않고 응어리가 맺혀 있는 것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다.

(2023봄여름호_2.지키다3_사진3)다산 정약용(1762-1836) 초상, 네이버 지식백과
다산 정약용(1762-1836) 초상, 네이버 지식백과
오랜 귀양살이에도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

다산은 40세에 유배를 가서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는 등 중년에 큰 위기가 있었지만 그것을 잘 이겨내고 5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75세까지 장수했다. 그 비결에는 그가 뛰어난 한의사이기도 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다산이 한의학 공부를 많이 하게 된 데는 자녀 9명 중 6명이나 두창(痘瘡, 천연두)으로 잃었던 이유가 있었고, 63종의 의서들을 철저히 고증해서 마진(痲疹, 홍역)과 두창의 치료법에 대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지었다.

(2023봄여름호_2.지키다3_사진4)정약용의 『마과회통』 표지와 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약용의 『마과회통』 표지와 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대역죄인이 되어 천리 길을 걸어서 장기현(포항시 장기면)으로 유배를 갔는데 병석에 눕고 말았다. 무수히 고문을 당한데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자식들은 과거도 볼 수 없게 되어 심신이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숙소와 음식도 불편하고 습기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또 똑똑한 선비가 죽겠다고 여겼으나 다산은 집에서 보내온 의서 수십 권과 약초 한 상자로 약을 달여 먹고는 일어섰던 것이다.
다산이 장수한 요인에는 귀양 기간에 해당하는 갱년기를 건강하게 보냈던 탓이 크다. 남성갱년기는 55~65세 정도이지만 조선 시대의 40세는 요즘의 50대에 해당된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 ‘기러기 아빠’처럼 외롭게 홀로 지내며 성생활을 할 수 없었기에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길 수 있었지만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첫째, 사돈댁과 외가 등의 도움으로 고기를 비롯한 영양 섭취를 잘할 수 있었다. 동물성 단백질은 면역력 유지에 필수적이고 성인병 예방에도 중요하며 콜레스테롤 수치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콜레스테롤은 몸에 반드시 필요한 물질로서 세포의 활동을 도울 뿐만 아니라 부신피질호르몬, 성호르몬, 담즙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만약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으면 활력이 떨어지고 우울증이 나타나기 쉬우며 뇌경색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진다. 또 중년기 이후 성기능이 떨어지는 원인에 고기 섭취가 부족한 탓도 있는데, 단백질은 정액과 정자를 만들어내는 원료이다. 둘째, 허리와 하체의 근력을 강화시키는 운동을 했다. 다산은 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만덕산의 산길을 매일 걸었다. 셋째, 청상과부를 만나 함께 지냈다. 갱년기에도 적당한 성생활이 필수적으로서, 성생활이 부족하면 성호르몬 생성이 적어지고 갱년기장애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가장 중요한 비결은 다산이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로서 집념, 즉 끈기가 강하고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3가지 요소
- 혼인과 성생활

대개 15~18세에 혼인했는데, 어린 나이에 성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건강상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정(精)이 미숙한 상태에서 성생활을 하면 ‘방로상(房勞傷)’을 일으켜 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천적으로 허약하거나 혹은 오래 병을 앓아 쇠약해진 상태에서 성생활을 강행하면 정기가 지탱하지 못하여 허약한 증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게 된다. 더욱이 노년기가 되었는데도 절제함을 알지 못하면 정기가 허손해지고 음양이 균형을 잃게 된다. 성생활이 부족해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요즘 흔한 전립선염, 전립선비대증, 남성갱년기장애 등도 성생활 부족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 과거공부

대과에 급제해야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데, 벼슬은 사회적 위상의 상징이자 정치권력의 보루이며 수입의 원천이었다. 또한 3대가 연이어 급제를 못하면 명문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가문의 유지를 위해서도 급제는 필수적이었다. 선비들은 몇 세쯤부터 공부를 시작했을까? 다산의 경우 네 살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일곱 살에 오언시를 지었으며, 열 살에는 경서와 역사서를 공부하고 문장을 지었고 27세에 급제했다. 그런데 20대에 급제하는 경우는 드물고 평균 25~30년 정도 공부해야 급제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의 선비는 평생 공부하고 과거만 보면서 세월을 보냈기에 건강을 해친 경우가 많았다.
퇴계는 6세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는데,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주역’을 읽고 그 뜻을 밝히는 데 몰두하느라 몸이 크게 상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평생토록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편, 공기 맑고 경치 좋은 곳에서 공부하는 것은 심신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2023봄여름호_2.지키다3_사진5)퇴계 이황(1501-1570) 표준영정, 한국은행.(출처 전통문화포털)
퇴계 이황(1501-1570) 표준영정, 한국은행.(출처 : 전통문화포털)
- 귀양

생활하고 활동하던 본거지를 떠나게 하여 고독을 짊어지어 주는 형벌로서 ‘위리안치(圍籬安置)’처럼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시키는 가택연금도 있었다. 그러니 귀양으로 인해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항복은 63세에 북청으로 가서 5개월 만에, 이언적은 57세에 강계로 가서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년에 북쪽의 극변지방으로 갔기에 날씨가 매섭게 추운 데다 토지가 메말라 먹을 것도 귀했기 때문이다. 한편 귀양은 복잡한 관직생활과 극심한 당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심신을 편안케 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맑은 공기와 소박한 음식에다 매일 산책하며 유유자적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윤선도, 정약용, 김정희, 정온, 노수신, 조정철 등은 오랜 유배에도 장수했다.

선비들이 건강하고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

첫째, 건강한 체질을 물려받았다. 명문 집안 출신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선천품부(先天稟賦, 물려받은 건강인자로서 신장의 정기)가 강했다. 그리고 ‘가문’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졌기에 엄격한 가풍 속에서 성리학 공부를 통해 ‘마음 건강’을 지킬 수 있었고 재력도 뒷받침이 되었으므로 일반 백성들에 비해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는 밑바탕이 갖춰져 있었다. 집안에 내려오는 좋은 음식과 술도 도움이 되었다.

둘째, 양생법을 잘 지켰다. 비록 선천품부가 약하더라도 후천적으로 기운을 보충하면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었으니, 허약한 체질을 물려받았으나 장수한 선비도 적지 않다. 부친이 58세에 태어난 백사 이항복은 63세, 부친이 54세에 태어난 성호 이익은 83세, 칠삭둥이로 태어났던 한명회도 73세까지 살았다. 그 이유는 양생법을 잘 지킨 탓으로 볼 수 있다. ‘양생법(養生法)’은 ‘양(養)’이 보양(保養), 조섭(調攝)을 의미하고 ‘생(生)’이 생명활동을 의미하므로 생명을 보양하는 실천 방법으로서 질병을 예방하고 체력을 증강시켜 조쇠(早衰)·조로(早老)를 방지하고 건강 장수하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양생법의 범위는 매우 넓은데 크게 나누어보면 음식, 운동, 정신, 성생활, 기거(수면, 휴식, 노동), 환경, 계절, 기공 양생법 등이 있다. 선비들이 지은 양생서도 많은데, 퇴계의 『활인심방(活人心方)』,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중『보양지(.養志)』 등이다.

(2023봄여름호_2.지키다3_사진6)고산 윤선도(1587-1671) 표준영정, 고산유물전시관.(출처 전통문화포털)
고산 윤선도(1587-1671) 표준영정, 고산유물전시관.(출처 : 전통문화포털)

셋째, 건강관리를 잘 했다. 서애 유성룡, 미수 허목,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의 공통점은 탁월한 ‘유의(儒醫, 선비 의사)’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의학에 조예가 깊은 선비가 많았는데, 기본적으로 『의학입문(醫學入門)』이라는 의서 정도는 공부했기 때문이다. 『의학입문』은 기초 이론, 생리, 병리, 진단, 약물을 비롯하여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피부과 등 각종 질병의 병인과 치료법이 있는 종합 임상의서로서 한시체(漢詩體)로 되어 있어 선비들이 공부하기에 편리했다. 중산층 이상의 선비집안에는 대개 한약장이 있었는데,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 나오면서 필수 목가구가 되었고 유배를 떠날 때도 반드시 지참해 갔다고 한다.

(2023봄여름호_2.지키다3_사진7)추사 김정희 약방문, 한독의약박물관. (출처 e뮤지엄)
추사 김정희 약방문, 한독의약박물관. (출처 : e뮤지엄)
(2023봄여름호_2.지키다3_사진8-1)퇴계 이황의 활인심방 속 수련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3봄여름호_2.지키다3_사진8-2)퇴계 이황의 활인심방 속 수련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23봄여름호_2.지키다3_사진8-3)퇴계 이황의 활인심방 속 수련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퇴계 이황의 활인심방 속 수련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건강하게 장수했던 선비들의 공통된 생활습관

건강하게 장수한 선비들은 대부분 청빈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이황, 송흠, 허목, 송시열, 이익, 박지원, 강세황, 정약용 등이 그에 해당된다. 황희, 맹사성, 이원익, 김상헌 등 청백리에 선정된 분도 대부분 오래 살았는데, 소식하며 기름진 음식과 술을 즐기지 않고 여색을 탐하 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재물이 넉넉하면서 장수한 경우로는 집안이 부자였던 윤선도, 김정희 등이 대표적인데, 노년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재물은 필요하다. 노수신이 76세에 사망하기 전 2년 동안의 병상일지인 『정청일기(政廳日記)』에는 매끼 식사와 간식에 먹었던 음식의 이름과 양이 기록되어 있는데, 밥, 죽, 탕국, 고기, 생선, 떡, 과일, 음료, 술 모두 종류가 다양했다.

(2023봄여름호_2.지키다3_사진7)추사 김정희 약방문, 한독의약박물관. (출처 e뮤지엄)
(우)방촌 황희(1363-1452)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좌)표암 강세황(1713-1792)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또한 시문, 서예 외에도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여가 활동을 했다. 이익, 정약용, 서유구, 윤선도 등은 잡학에 능통했고, 송순, 이현보, 윤선도, 박지원 등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강세황은 문인화의 대가였고 김정희, 허목, 정약용 등도 그림에 조예가 있었다. 이항복은 해학과 풍자 즉 유머가 탁월했는데,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전해져 후손들이 장수했다. 웃음은 항산화제가 되고 부교감신경을 항진시켜 면역력이 증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氣)’가 강했다는 것이다. 힘든 상황에서도 그분들이 보여준 대단한 정신력과 집념의 원천도 역시 샘솟듯 솟아나는 ‘기’에서 나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기가 강한 선비는 스트레스에도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