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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봄, 여름호-생로병사의 비밀] 지키다-조선, 약차의 나라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8-04 조회수 : 690
조선, 약차의 나라
우리는 ‘약차’를 가벼운 음료 정도로 생각하지만, 조선 시대 왕실에서는 달랐다. 약차는 최고의 의사들이 그 선택에 목숨을 걸었고, 정승들이 책임지고 관리하며, 왕과 왕족이 병을 고치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마신 것이었다. 또한 보다 많은 조선 백성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던 새로운 의학 기술이기도 했다. 한국 한의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선의 약차 이야기를 해보자.
글 김종오(쌍계명차 차 연구소장, 한의학 박사)
(2023봄여름호_2.지키다2_사진1)숙종의 천연두 완쾌와 성수(聖壽, 임금의 나이)가 50세 됨을 경하하는 연회장면. 「숭정전진연도(崇政殿進宴圖)」 부분, 1710년, 국립중앙박물관
공자(BC 551-479) 초상, 네이버 지식백과.
차, 약차, 조선의 약차, 조선 왕실의 약차

한국인들은 ‘차(茶)’라는 글자의 의미를 아주 넓게 쓰고 있으므로, ‘조선’ ‘왕실’ ‘약차’를 정의하는 데에는 몇 단계가 필요하다. 일단 ‘다인(茶人)’으로 불리는 차 전문가들에게 ‘차(茶)’는 ‘차나무의 잎’을 가공하여 만든 음료다. 차나무와 그 잎으로 만든 마실 거리(녹차, 홍차, 백차, 흑차 등 나라마다 종류가 정말 많다)만을 ‘차(茶)’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커피 포함 나머지는 다 ‘대용차’다. 처음 ‘茶’라는 글자는 이 차나무와 차나무 잎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일리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진짜 차, ‘진차(眞茶)’라 하자. 일반인들에게 ‘차’는 곡류(율무차·옥수수차), 식물의 잎(두충차·감잎차), 과실류(유자차·모과차), 꽃(국화차·매화차)이나 뿌리·껍질(인삼차·도라지차), 여러 약재들의 조합(쌍화차) 등으로 만들어낸 기호 음료 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중국과 일본에서 차가 기본적으로 ‘진차(眞茶)’를 지칭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쌍화차를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한약인 쌍화탕을 음료로 만들면 그 안에 진차가 없지만 쌍화차라고 한다. 중국에도 쌍화차가 있는데 홍차와 은침차(銀針茶)라는 두 가지 차를 조합하여 만든 것으로 역시나 진차이기에 차라고 한 것이다. 우리만 예로부터 온갖 재료로 수백 가지 음료를 만들고 모두 ‘차’라 부른다.

차나무 잎의 수확.(출처 : shutterstock)
차나무 잎의 수확.(출처 : shutterstock)

‘약차(藥茶)’라고 한다면 의학과 관계된 차, 건강증진과 질병 치료를 위해 마시는 차라할 수 있다. 모든 약차는 뚜렷한 치료 목표가 있고, 예방 가능한 질병이 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한의학 역사 초기라 할 수 있는 당나라(唐) 이전의 문헌들을 제외하면 ‘차(茶)’라는 글자는 한약 처방의 제형(탕(湯), 환(丸), 산(散), 고(膏)와 같은)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보중익기탕’이 탕제라면, ‘오미자차’가 차제이며, ‘○○차’라는 이름을 가진 처방들이 약차인 것이다. 요즘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는 홍삼 제품이나 건강차들은 조선 약차의 후예들이며,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마실 거리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통일성 있는 음료군을 찾을 수는 없다.

한방에 쓰이는 약재와 약초.(출처 : shutterstock)
한방에 쓰이는 약재와 약초.(출처 : shutterstock)

의학서적에서 약차는 “진차를 만드는 방법과 같이 처방을 조제하거나, 진차를 마시는 방법과 같이 복용하는 처방”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약차의 모습은 진차 제조법과 음용법이 변화하면 이에 발맞추어 그 모습이 바뀌었다. 당나라 시대(唐代)의 약차는 약재를 갈아서 끓는 물에 넣고 다시 한번 끓여 가루까지 함께 마시는 처방(전다법, 煎茶法)이었고, 송나라 시대(宋代)의 약차는 물을 끓인 후 가루낸 약재를 타서 마시는 처방(점다법, 點茶法) 또는 약재를 물에 끓인 후 약재를 뺀 맑은 탕을 마시는 처방(자다법, 煮茶法)이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의서 속의 약차는 제법(製法)에 있어서 일관성을 갖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탕약은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모두 물에 끓여 낸 것인데 반해 약차는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차도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할 뿐 “진차를 마시는 방법과 같이 복용하는 처방”이라는 기준이 있는 것이다.

질병 치료에 쓰였던 탕약.(출처 : shutterstock)
질병 치료에 쓰였던 탕약.(출처 : shutterstock)

비교적 최근인 조선과 명·청시대에는 차를 가루 내지 않고 잎차를 물에 끓여서 마시는 자다법(煮茶法)이 유행하면서 약차 제조법이 탕제를 달이는 방법과 별 차이가 없어져 버렸다. 제형으로서 개성을 잃자 중국에서 차처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점점 더 많은 약차들이 만들어지고 쓰임도 늘어나면서 주요한 치료법으로 자리잡게 된다. 조선의 약차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실 약차는 말 그대로 조선 왕실에서 조제되고 마신 차를 말한다. 조선의 왕들만큼 약차를 많이 마셨던 이들은 드물다. 어의들은 왕이나 왕의 가족이 병에 걸리면 어떤 치료법을 쓸 것인지를 먼저 고민했다. 가벼운 경우는 죽에 약재를 가미해서 식사 대신 올리는 죽음(粥飮)으로, 강력한 개입이 필요할 때는 탕약을 썼다. 약차는 경증에서 중증까지 모든 범위에 활용되었다. 조선 왕실 용약 체계는 죽음(粥飮, 묽은 죽) - 약차(茶飮)- 탕약으로 볼 수 있다. 어의가 처방하고 왕이 마신 약차, 흥미롭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왕의 약차에 대해 알아보자.

커다란 보물상자 승정원일기, 빛나는 보석 왕실 약차

필자가 ‘조선왕실의 약차’에 대해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라는 세계에서 최고로 방대한 기록물 덕분이다. 건국 초부터 작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1623년(인조 1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 288년간의 기록 3,243책만이 남아있다. 『승정원일기』는 『실록』편찬에도 가장 기본적인 자료의 하나로 활용되었을 만큼 실록보다 훨씬 상세하다. 의료기록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병의 증상이나, 처방명, 처방을 투여하게 된 이유, 예후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숙종 42년 윤 3월 8일 정(.)이 이르길, 기축(己丑)년으로부터 이제 8년이 되었습니다. 8년 전부터 그래왔지만, 기축년 이후 사용한 약이 천여첩이고 계사(癸巳)년(3년 전) 이후에는 400여첩인데 약차(茶飮)까지 합하여 계산하면 600여첩이 됩니다.

『승정원일기』에서 ‘다음(茶飮)’은 약차를 말한다. 왕의 질병에 대한 가장 빈용 치료는 역시 탕약 처방이며, 그 다음이 약차다. 약차는 환·산(丸·散)제에 비해 훨씬 더 빈용되었으며 그 종류도 많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전체 처방 중에 1/3 가량이 약차인 것이다.

『승정원일기』 494책 숙종 42년 윤 3월 8일 무진 14/16 기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승정원일기』 494책 숙종 42년 윤 3월 8일 무진 14/16 기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약차를 처방하는 과정은 탕약이나 환제 산제를 처방하는 과정과 동일하다. 먼저 내의원 의원들이 입진(入診)을 하겠다는 계를 올린 후 진찰을 한다. 입진 중이나 후에 내의원들이 처방을 정하면 다시 왕께 허락을 구하여 약차를 올린다. 간혹 의학에 조예가 있는 왕(영조가 자주 그랬다)이 스스로 약차를 정해서 마시는 경우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약차는 병이 있을 때만 복용하는 의사의 처방이었다. 약차는 한약 처방치고는 아주 단순하다. 200여 종에 달하는 왕실 약차 대부분이 1개 또는 2개의 약재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약재를 선정하면 끝이다. 숙종 40년 4월 9일의 기사에 “약차(茶飮)의 부류는 끓여서(煮) 만듭니다”라는 언급과 같이 왕실 약차들은 대부분이 물에 넣고 끓여서 만들었다. 차를 만드는 방법으로 가장 많이 쓰인 술어는 ‘煎(전, 끓이다)’이며, ‘煮(자, 끓이다)’, ‘湯煎(탕전, 끓이다)’, ‘濃煎(농전, 진하게 끓이다)’ 등이다. 술을 담아 만드는 송절차와 약재를 가루낸 후 끓여서 차를 만드는 오피산차와 같은 예외가 드물게 있는 정도다. 약차의 복용 방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복약 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고 증상이 있을 때마다 자주 복용하는 것이다. 약차를 복용하는 방법으로 “때때로 올린다(茶飮時時進之)”거나, “자주자주 올린다(頻頻進茶飮)”, “약차와 같은 종류이므로 시간에 구애됨 없이 올린다(則乃是茶飮之類, 不拘時進御爲當云)”는 등의 표현이 자주 발견된다. 이에 비해 탕약은 하루 복용량은 1첩, 1회 복용이 기준이며, 증세가 심하거나 강도 높은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만 하루에 두 번, 혹은 세 번으로 첩 수를 늘렸다. 탕약에 비해 약차는 단순 약물의 대량 요법으로 볼 수 있다.

건강유지와 질병치료에 모두 쓸 수 있는 처방

경옥고나 십전대보탕 같은 보약은 평소 건강관리용일 것 같지만 이러한 중량감 있는 처방들은 주로 큰 병을 앓고 나서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되었다. 왕들은 평소 건강관리를 위해 약차를 이용했다. 대표적인 약차로 평소 기운이 허한 것을 보해주는 인삼차(蔘茶)와 노화와 쇠약함을 덜어주는 오미자차(五味子茶), 기운을 더하고 소화를 돕는 귤피생강차(橘薑茶) 등이 있다. 맛도 좋고 장복하기에 부담도 없다.

한국의집 오미자차, 한국문화재재단
한국의집 오미자차, 한국문화재재단

또한 약차는 예방, 치료, 회복의 전과정에 활용되었다. 계절에 따라 생기기 쉬운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약차를 복용한 경우도 있었다. 마통차(馬通茶)는 초여름이 되면 더위 먹는 병(暑病)을 예방하기 위해 매년 특정한 날짜에 복용하도록 정해져 있는 처방이었다. 하지만 마통차는 주 재료가 말똥이고 호초가 들어가기 때문에 극렬히 매웠다. 영조 15년에는 세자가 너무 매워서 마시지 못한 일이 있었고, 영조 38년에는 아예 마통차를 마시는 날을 폐지하려 했다가 그냥 두기로 한 일도 있었다. 더위로 인한 병을 예방하기 위한 처방으로 향유차(香.茶)와 생맥산(生脈散)도 있다.

병의 초기에는 탕약보다 약차가 자주 사용되었다. 증상이 심하지 않을 때에 탕약을 사용하는 것은 의관이나 왕에게 모두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가벼운 약차(輕輕茶飮)로 시험해본 후에 약차가 큰 효과가 없으면 탕약(湯劑)을 올리는 것이 좋다”거나 “약차의 종류를 복용하였으나 병이 낫지 않자 탕약(湯藥)을 복용하였다.”는 등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병이 나은 이후에 조리용으로도 약차를 사용하였다. 병세가 좋아지고 있는데 가벼운 외감이 있어 탕약을 쓰기에 과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약차를 쓰거나 병이 이미 나은 경우에 진찰은 하지 않고 약차를 정하여 올리기도 하였다.

의사와 환자에게 모두 좋은 치료법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사들은 종종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결과는 약을 먹어봐야 알 수 있으므로 처방을 선택하는 순간에는 항상 크고 작은 결단이 필요하다. 특히나 왕을 진찰할 때는 압박이 심하다. 왕의 앞에서 약방의 우두머리인 도제조(주로 우의정)와 다른 의사들과 함께 토론하여 하나의 처방을 선택해야 한다. 내가 주장한 처방이 잘못되어 왕이 배라도 아프면 큰일이 아닌가. 만약 맵고 쓴 약을 억지로 마시게 했다면 다음번 입진에는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다. 마통차와 같은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약차는 소위 맛과 향(氣味)이 가볍고 맑은(輕淸) 약재로 만들어진다. 기호 음료로서의 역할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왕들의 입은 아이와 같아서 약을 결정할 때 입에 쓰지 않다(非苦口)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약이 써서 못 먹겠다고 할 때마다 수십 명이 몸 둘 바를 모른다. 때로 약방 도제조는 왕의 복약 허락을 구할 때 “약차와 같은 (맛있는) 탕약입니다.” 또는 “약차와 다르지 않은 (쓰지 않은) 탕약입니다.”라는 말을 해야만 했다. 탕약이 입에 쓰다(苦口湯劑)는 이유로 약차로 교체된 예는 매우 많아서, 약차가 조선왕실에서 주요한 처방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로 왕과 왕족의 까다로운 입맛을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약차는 탕약에 비해 위험하지 않은 처방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힘이 부족하니 올린 약은 약이라기보다는 차에 가깝습니다. 올려도 몸이 상함(傷)이 없습니다.”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인식은 차가 탕약에 비해 부작용이 적은 처방이라는 공감대로 이어졌고, 처방하는 사람이나 복용하는 사람이나 부담이 덜했다. 그렇다고 약차의 효과가 약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래되고 낫지 않는 병에도 약차를 써서 치료한 경우는 많다. 한의학에서 가볍고 맑은(輕淸) 약들은 무겁고 진한 약만큼이나 쓰임이 많기 때문이다. 가볍고 맑은 맛과 효과를 고려해서 약차를 선택한 예로 영조 어머니의 왼쪽으로 넘어져서 몸이 당기고 아픈 증상(左邊跌倚有牽引之候)에 소목차(蘇木茶)를 쓴 기사가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32년 11월 23일
허추 : “신 등이 엎드려 들으면서 상세히 증후를 살펴보니 당귀수산(當歸鬚散)이 마땅한 처방으로 보입니다.”
이해 : “증후가 이와 같을 때에는 당귀수산이 적합합니다. 신의 뜻도 허추와 같으니 소견이 하나입니다.”
영조 : “이 약은 너무 과해서 어렵다.”
허추 : “동변(童便)이 좋을 듯합니다.”
영조 : “이 또한 쓸 수 없다.”
허추 : “소목차(蘇木茶)를 달여서 쓰는 것은 어떠합니까?”
이해 : “소목차를 달여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 : “이 약이 좋겠습니다.”
영조 : “소목을 가지고 오라.”
의관이 나가서 가지고 돌아왔다.
영조 : “『본초강목(本草綱目)』도 가지고 오라.”
의관이 나가서 가지고 오자 승지에게 소목방문(蘇木方文)을 읽게 하였다.
영조 : “좋도다. 약원(本院)에 소목이 있는가?”
허추 : “있습니다.”

당귀수산과 동변, 소목은 모두 어혈로 인한 통증을 치료하는 처방들이다. 당귀수산은 보통 크게 다쳤을 때 쓰고, 동변은 아이의 오줌이다. 나도 일단은 소목차를 먼저 달라고 했을 것 같다.

왕실 약차 BEST9

N0.1 인삼귤피차(蔘橘茶) 617회

·처방구성 : 귤피12g 인삼6g 생강5쪽. 인삼은 홍삼이 아니라 인삼을 그대로 건조한 것이다.
·효능 : 가슴이 막히고 소화가 안 되면서 기운이 없는 것을 치료한다.

No.2 인삼차(蔘茶, 人蔘茶, 獨蔘茶, 單蔘茶) 587회

·처방구성 : 인삼을 적당량(4-20g) 달인다.
·효능 : 원기허증, 양허증, 숨이 가쁜 증상, 생명이 위태로울 때 쓴다.

No.3 인삼복령차(蔘苓茶) 379회

·처방구성 : 인삼과 복령 적당량을 배합하여 끓인다.
·효능 : 어지럼증, 소변이 시원치 않을 때, 피로와 입마름에 쓴다.

No.4 금은화차(金銀花茶) 209회

·처방구성 : 인동초의 꽃인 금은화 적당량을 달인다.
·효능 : 해열 효과가 있다. 열이 심한 감염병, 갑갑한 갈증과 인후통을 치료한다.

No.5 인동차(忍冬茶) 120회

·처방구성 : 인동초 적당량을 끓인다.
·효능 : 가슴이 갑갑하고 열이 나는 것, 갈증을 치료한다.

No.6 귤피생강차(橘薑茶, 薑橘茶, 干橘茶) 117회

·처방구성 : 귤피12g 생강5쪽을 끓인다.
·효능 : 가슴의 가래와 감기로 인한 기침, 몸이 차서 생기는 소화불량을 치료한다.

No.7 소나무마디차(松節茶, 松茶) 102회

·처방구성 : 소나무마디, 오가피, 우슬을 진하게 달여낸 물로 술을 담는다.
·효능 : 모두 영조임금의 걷지 못하는 증상에 사용되었다.

No.8 생강차(薑茶, 淡薑茶, 生薑茶) 96회

·처방구성 : 생강을 적당량 끓인다.
·효능 : 구토, 소화불량, 어지럼증, 명치부 통증을 치료한다.

No.9 향귤차(香橘茶) 74회

·처방구성 : 정기천향탕(향부자 12g, 오약, 진피, 자소엽 각4g, 건강, 감초 각2g)에서 증상에 따라 불필요한 약제를 빼고 끓인다.
·더위를 먹어 구토하고 체한 증상, 복통이나 변비, 회충을 치료한다.

전에 없던 신선한 즉석 처방

환자를 볼 때 한의사들은 개개의 체질을 상세히 진찰하지만, 처방할 때마다 새로운 약재 조합을 만들어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한의사들은 여러 시대의 거두들이 만들어낸 명방들을 무기로 진료에 임한다. 허준의 동의보감도 그 구성과 논리 전개에 있어 손꼽히는 창의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처방의 99% 이상이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승정원일기에 언급되는 ***탕, ***환, ***산, ***고 등의 처방은 예외 없이 출전을 찾을 수 있는 검증된 처방들이었다. 조선의 어의들은 수천 개의 처방을 암기하고 있었고 진찰의 목적은 정확한 처방을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탕제와는 대조적으로 약차는 출전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소목차는 어떤 의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뭔가를 물에 끓여서 우려내면 ‘탕’이 되지만, 조선에서는 ‘차’가 되었다. 인삼을 끓이면 ‘삼차(蔘茶)’, 생강을 끓이면 ‘강차(薑茶)’, 쌀을 끓이면 ‘갱미음차(粳米飮茶·粳米=쌀)’, 귤을 설탕이나 꿀에 절여 만든 과자인 귤병(橘餠)을 끓이면 ‘귤병차(橘餠茶)’, 금은화를 끓이면 ‘금은화차’, 청국장을 끓이면 ‘두시차(豆.茶)’, 말의 분변을 끓이면 ‘마통차(馬通茶)’가 되었다. 심지어는 의서에 나오는 기존의 탕약으로 수시로 복용하는 약차를 만들기도 했는데, 삼자양친탕(三子養親湯)을 변형한 삼자양친차(三子養親茶)와 정기천향탕(正氣天香湯)을 간소화시킨 향귤차(香橘茶)가 그것이다. 약재의 구성과, 약재의 용량, 약재의 포제법, 탕전법, 복용법 등을 외부의 의원들보다 훨씬 더 엄격히 지켜야 했던 내의원 의관들에게 새로운 시도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통로가 약차였다. 조선 왕실에서 탕약과 약차는 ‘기존의 공인된 처방’과 ‘새로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처방’의 차이임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조선 후기까지 새로운 약차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어의들의 약차 연구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약(鄕藥)과 약차. ‘동의(東醫)’의 근본은 백성에 있다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의 아버지를 자처했는데, 적어도 의학 부분에서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의방류취(醫方類聚)』, 『동의보감(東醫寶鑑)』과 함께 조선 3대 의서로 꼽히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일견 다른 처방집들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의 비밀을 알게 되자 한국을 포함한 중국 일본의 의학자들이 모두 경악했다. 전문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처방들의 구성이 의도적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응당 감초가 들어가야 할 처방에 감초가 빠져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감초가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재였기 때문이었다. 한의학의 역사에서 감초을 비롯하여 마황, 육계와 같은 핵심 약재를 빼고 종합의학서적을 저술하는 것은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며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도 유례가 없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책은 모든 약재가 갖춰진 왕실과 도성 내의 양반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초 세종 15년에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 즉 향약(鄕藥)만으로 완성된 『향약집성방』이 편찬되면서 보통의 의사들이 국내산 약재에 관한 최신의 본초지식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향약의학의 발전은 단방처방이 조선에서 주요한 치료법으로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지방의 명의들이 펴낸 경험방서(經驗方書)들 중에는 단방처방만으로 치료하는 서적들이 많다. 단방(單方)은 ‘하나의 약물로 이루어진 처방’을 뜻이다. 한의사들은 한의학의 아주 초창기인 한나라 시대부터 복합방으로 병을 치료해왔다. 2000년 전에 쓰여진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要略)에도 완성도 높은 복합 처방들이 200여 개나 있다. 이후 군신좌사(君臣佐使)를 갖춘 처방이 개개의 약재들의 효능을 최대한 끌어내어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이론이 방제학(防除學)의 가장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향약의학이 주류가 되면서 한 개의 약초만으로 한 가지 질병을 치료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간단한 처방이 더 효과가 좋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향약집성방』의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序文] 민간에 사는 노인이 능히 한 개의 약초로 한 질병을 치료하면서도 그 효과가 매우 신묘한 것이 어찌 땅의 성질과 잘 맞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약과 병이 잘 맞아 떨어져 그러한 것이다.

[跋文] 처방에 군신좌사(君臣佐使)가 있은지 오래되었지만, 민간의 처방(俗方)이나 하나의 약재(單味藥材)의 효과가 더 빠른 경우가 있다. 요컨대 약물이란 것은 그 병에 합당하면 될 뿐이기 때문이다.

『향약집성방』 서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향약집성방』 서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 약차는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향약의학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실의 약차는 향약 단방을 활용한 치료의 가장 화려한 꽃이다. 『승정원일기』 영조 34년 12월 26일의 기사에서 영조와 대화 중에 “약재가 너무 많은 것은 약차(茶飮)를 쓰는 법이 아니니 약재의 개수를 줄이면 좋겠다”라는 언급이 발견된다. 이는 약차가 단순히 경증의 병을 치료하거나 탕약의 대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탕약보다 효과가 더 좋고, 낫기 어려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왕실의 약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독특하고 완성도 높은 치료법이다. 나아가 그것의 뿌리가 애민에서 비롯한 의료정책의 결과라는 점에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전통의료문화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