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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봄, 여름호-생로병사의 비밀] 싸우다-조선 시대 가장 흔한 다섯 가지 질병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8-04 조회수 : 2249
조선 시대 가장 흔한 다섯 가지 질병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문제였다. 때문에 인류는 늘 건강을 해치는 질병과 사투를 벌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현대인들에겐 그저 해마다 겪는 일상으로 여겨지는 감기조차도 조선 시대엔 무서운 질병으로 여겨졌을 정도이니,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질병으로 고통 받았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감기뿐 아니라 지금은 죽음을 생각하기엔 너무나 경미한 질병의 하나로 치부되는 종기가 온갖 의료 혜택을 다 받았던 왕실 사람들과 양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병마였다는 사실도 매우 낯선 일이다. 이렇듯 지금 의학에선 너무나 간단하게 치료하는 질병들이 조선 시대엔 모든 사람들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무서운 병마였다. 이런 조선 시대의 10대 질병을 나열하자면 지금도 우리가 가장 흔히 걸리는 감기를 비롯하여 치질, 중풍, 종기, 소갈증, 학질, 염병, 홍역, 천연두, 나병 등인데, 이 중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조선인들을 가장 괴롭힌 다섯 가지 질병에 얽힌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글 박영규(메디컬조선 저자)
의외로 심각한 질병으로 인식된 감기

10대 질병의 첫 번째 자리에 있었던 감기는 조선 시대 사람들을 괴롭힌 대표적인 질병이었다. 특히 조선 시대엔 감기와 독감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감기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세종 시절의 형조판서 김점이 어전회의에서 아들이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며 어의를 보내줄 것을 청하다가 세종에게 질타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사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감기와 독감을 구분하지 못한 까닭에 감기를 몹시 두려워했다. 더구나 감기는 전염성이 강한 병이기 때문에 감기에 걸린 사람을 만나는 것을 무척 꺼리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심지어 왕도 그런 문화에 편승하여 만나기 싫은 사람을 회피한 경우도 있었다. 세종도 그런 왕들 중 하나였다. 세종 13년 8월12일의 실록 기록을 보면 열병이 전염되고 있던 상황에서 명나라 사신들에게서 열병이 오를 것을 염려한 세종이 사신 일행을 기피하는 이유로 감기에 걸렸다는 핑계를 댔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의서 『증급유방』, 문화재청.
조선 전기에 간행된 의서 『증급유방』, 문화재청.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감기에 걸렸을 때 어떤 대증요법을 썼을까? 우선 감기 초기에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땀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 파뿌리와 메주, 그리고 생강을 넣고 달여 마신 후에 땀을 내면 금방 낫는다고 생각했다. 또 파뿌리를 잘게 썰어 따뜻한 술에 담갔다가 마시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감기에 걸렸을 때, 금기 사항으로 여기는 것들도 있었다. 우선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는 것을 피하고, 머리를 빗거나 세수를 하는 것도 피했다. 그리고 말을 너무 많이 하거나, 주변 일에 신경을 쓰는 것도 금했다. 말하자면 오직 감기를 낫게 하는 데만 집중했던 셈이다. 그래서 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관리들도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옮길 것을 염려한 측면도 있고, 감기가 심해져 다른 큰 질병으로 확대될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천민에서 왕까지 쉽게 피해갈 수 없었던 치질(痔疾)

조선 시대엔 치질환자가 없는 집은 드물었다. 지금보다 훨씬 거친 음식을 많이 먹었고, 주로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천민들은 거의 태반이 치질을 앓았고, 평민들도 대다수가 치질을 앓았다. 또한 양반 중에서도 치질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고, 심지어 왕들 중에서도 치질을 앓은 왕들이 있었다. 그만큼 치질은 조선인들에게 흔한 질병이었다. 조선 시대 서인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도 치질환자였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치질이 생겨 고생이 심했던 모양인데, 그래서 세간에서 쓰는 여러 약을 사용해봤지만 결코 치료가 되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등의 편찬에 참여했던 조선 초기의 대학자 노사신도 치질환자였다. 그는 왕에게 치질 때문에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로 갈 수 없다며 서거정을 대신 원접사로 내보낼 것을 청하기도 했다. 이들 대신뿐 아니라 문종이나 성종 같은 왕들도 치질로 무척 고생했다. 문종은 부왕 세종이 죽고 나서 초막 생활을 하다가 치질을 얻었는데, 이후로 툭하면 치질이 재발하여 애를 먹었다. 그리고 성종은 원래 술을 워낙 좋아하여 치질에 걸렸는데, 치질을 앓고 있는 중에도 술을 자주 먹어 늘 치질 치료를 받아야 했다.

우암 송시열은 치질환자로 알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우암 송시열은 치질환자로 알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이렇듯 조선 시대엔 천민에서 왕까지 치질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마땅한 치료약은 없었다. 송나라 사람 당신미가 지은 『증류본초』에서는 치질 치료제로 토끼 똥을 추천한다. 토끼 똥은 완월사(玩月砂)라고도 하는데, 그 모양이 보름달 같고, 입자가 모래처럼 고운 특징 때문에 생긴 별칭이다. 이 토끼 똥을 몇 가지 약제와 섞어서 항문에 잘 바르면 치질에 효험이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특효약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조선 시대엔 마땅한 치질약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치질을 고질병으로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경사증류대관본초』에는 치질 치료제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경사증류대관본초』에는 치질 치료제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걸리면 인생 종쳤다고 생각했던 중풍(中風)

흔히 뇌졸중으로 불리는 중풍은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아주 심각한 병이다. 조선 시대엔 중풍은 풍(風)병의 한 종류로 생각했다. 풍병이란 바람이 몸속으로 들어와서 일으키는 병을 통칭하는 것이었는데, 그 종류만 해도 무려 42가지가 있었다. 현대 의학에서 보면 풍병이라는 하나의 범주 속에 묶일 수 없는 많은 질병들을 모두 바람에 의해 일어나는 병이라고 믿었던 셈이다. 예컨대, 머리에 비듬이 생기는 것을 두풍이라 했고, 얼굴에 종기가 생기는 것을 독풍이라 했으며, 건망증과 함께 잘 놀라는 것을 심풍, 바람에 쐰 후에 콧물이 흐르고 목이 쉬는 감기 증세를 상풍, 문둥병으로 알려진 나병조차도 풍병의 하나로 보고 대풍이라고 했다. 그래서 풍병을 만병의 근원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풍병이라고 하면 대개는 중풍을 지칭했다. 중풍에 걸리면 흔히 ‘풍 맞았다’는 표현을 썼는데, 대개는 손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거나 입과 눈이 한쪽으로 쏠리는 증상이 생길 때 이런 말을 했다. 그래서 대개 조선 시대엔 누군가에 대해 ‘풍 맞았다’고 하면 더 이상 운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심지어 중풍은 대개 누워 있다가 죽는 병으로 여겼다. 그래서 중풍을 앓다가 회복하면 거의 죽은 사람이 소생한 것처럼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중풍은 신하들이 사직을 청하는 좋은 핑계거리가 되기도 했다. 조선 초의 중신 권맹손은 중풍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는데, 사실은 권맹손이 아팠던 것이 아니었다. 실제 아픈 사람은 권맹손이 아니라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당시 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권맹손은 자신이 중풍을 앓고 있다고 핑계를 대고 사직을 청해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그만큼 중풍은 사직하려는 관리에겐 좋은 핑계거리였다. 중풍 치료약으로 주로 쓰인 탕제는 속명탕이었다. 속명탕은 수명을 연장하는 탕약으로 알려져 있는데 『구급이해방』엔 소속명탕이라는 이름으로 적혀 있으며, 주로 반신불수 또는 입이 돌아가고 말이 어눌할 때 쓰는 탕약이라고 씌어있다. 소속명탕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선 매번 물 한 잔 반에 생강 다섯 쪽, 대추 한 개를 넣고 한 잔이 될 때까지 달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복용은 식전에 조금 뜨거운 상태에서 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세종과 황희를 평생 괴롭힌 종기(腫氣)

종기는 치종청이라는 별도의 관청을 뒀을 정도로 조선인들에겐 흔하면서도 심각한 질병이었는데, 왕들 중에서도 종기로 고생한 사람이 많았다. 세종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세종은 여러 병에 시달린 것으로 유명한데, 종기도 그 중 하나였다. 세종의 몸에 종기가 처음 발생한 것은 1419년이었다. 이때 세종은 왕위에 오른 직후였는데, 발 위에 종기가 나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종기는 다른 부위에도 퍼졌는데, 이 때문에 세종은 늘 종기 치료를 받아야 했다. 때론 종기가 심해져 사신 접대를 세자에게 맡기는 상황도 있었다. 세종 시대의 대표적인 정승 황희 또한 종기에 시달렸다. 그는 종기 때문에 몇 번이나 사직을 청하기도 했다. 그가 처음 종기로 사직을 청한 때가 56세 때였다. 당시 황희를 힘들게 했던 종기는 면종이었다. 면종(面腫)은 얼굴에 생긴 종기를 말하는데, 종기 중에서 치료가 쉽지 않은 부위였다. 종기는 발생 부위에 따라 이름을 따로 붙인다. 얼굴에 난 종기는 면종, 엉덩이에 생긴 종기는 둔옹, 아랫배나 고환 안에 생긴 종기는 낭옹, 발 끝에 생겨 살을 썩게 만드는 것은 탈저 등등이다.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복장유물 명주적삼이다. 현재까지는 종기로 고생한 세조의 피고름이 묻은 옷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복장유물 명주적삼이다. 현재까지는 종기로 고생한 세조의 피고름이 묻은 옷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그렇다면 조선 시대엔 이런 종기에 어떤 약재를 사용했을까? 종기는 주로 고약을 만들어 치료했는데, 가장 많이 쓴 약재 복룡간과 국화였다. 복룡간은 오래된 아궁이의 바닥에서 채취한 누런 황토를 말한다. 이 복룡간을 계란 노른자나 식초로 개서 종기에 붙이거나 또는 마늘을 갈아서 함께 붙이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국화는 주로 발가락이나 사타구니에 나는 종기에서 사용했다. 국화의 잎과 줄기를 찧어서 붙이는 형태인데, 역시 종기의 고름을 빨아내는 구실을 했다. 이 외에도 마늘이나 달래를 찧어 참기름으로 반죽한 후에 종기에 붙이는 방법도 썼다. 이 경우 종기 때문에 생기는 통증이 많이 사라진다. 익모초나 흰봉선화, 입속의 침, 식초, 붉은 팥 등도 종기 치료에 사용되었다. 이런 고약 외에도 동물을 통해 종기를 치료하기도 했다는데, 대증요법으로 많이 쓰인 것이 거머리를 잡아 종기의 피를 빨게 하는 방법도 썼다.

드라마 '마의'에 나온 치종청.(출처 : mbc 드라마 '마의' 캡쳐)
드라마 '마의'에 나온 치종청.(출처 : mbc 드라마 '마의' 캡쳐)
살아서 죽음의 고통을 맛보는 학질(瘧疾)

학질은 한의학에서 해학(痎瘧)이라고 하는데, 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증상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병이다. 현대에 와서는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말라리아를 학질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반복적으로 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증상이 나타나는 모든 병을 학질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제대로 된 학질은 역시 모기에서 비롯된 말라리아였을 것이다. 학질은 대개 모기에서 비롯되는 병이므로 학질이 주로 나타나는 계절은 여름에서 초가을까지였다. 『조선왕조실록』의 학질에 대한 기록도 대부분 이 기간에 집중되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학질은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걸리는 유행병으로 조선 시대엔 굉장히 두려워하던 질병이었다. 특히 어린아이는 학질에 걸리면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때문에 학질은 손이 귀한 집에 대를 끊어놓는 질병이기도 했다. 또한 노인들도 학질에 걸려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숙종 대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이현일은 학질에 걸렸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는 학질을 앓고 있는 자신을 ‘산송장’에 비유하기도 했다. 열이 오르내리는 통에 운신(運身)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입맛도 없는 탓에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학질의 지독한 병증에서 유래된 말이 ‘학을 뗀다’라는 표현이다. 괴롭고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느라 진이 빠지거나 질리게 된 상태를 학질에 비유한 것이다. 그만큼 학질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학질에 한 번 걸리면 몇 년이고 낫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산 정약용의 아내도 학질에 걸려 고생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하필 임신 중에 학질에 걸려 정약용의 애를 태웠다. 그래서 정약용이 누차에 걸쳐 의원을 불러 아내에게 탕약을 먹이고 낫기를 염원했는데, 좀체 아내의 학질 증세가 낫지 않았다. 이에 정약용은 답답한 나머지 의원에게 학질을 물리치는 노래를 지어 주기까지 했다. 정약용이 이씨 성을 쓰는 의원에게 이 시를 주고 나서 다행히 그의 아내는 학질에서 벗어났다. 임신한 몸으로 무려 백일이나 열병을 앓은 끝에 가까스로 ‘학을 뗀’ 것이다. 하지만 학질을 앓은 그의 아내는 여덟달 만에 조산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불행히도 아이는 태어난 지 4일째 되는 날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이 1781년 신축년이니, 정약용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훗날 정약용은 자신의 문집에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렇게 썼다.

내가 모두 6남 3녀를 낳았는데, 산 애들이 2남 1녀이고 죽은 애들이 4남 2녀이니, 죽은 애들이 산 애들의 두 배이다. 아아,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잔혹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할 것인가?

정약용은 여러 권의 의서를 쓸 정도로 의학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학질엔 속수무책이었고, 그래서 애타는 심정으로 학질을 쫓는 노래를 지어 하늘에 빌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피첩』,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책. 문화재청.
『하피첩』,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책. 문화재청.

학질에 걸리면 열이 많이 나고 추위에 떨게 된다. 그래서 찬물만 마시게 되는데, 이런 학질 증세에 대한 대처법으로 당시 의학에선 우선 음식을 줄이는 것을 급선무로 보았다. 음식을 줄이는 이유는 음식이 체내에 종양을 유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관계와 음주는 반드시 피해야 하며, 돼지고기와 쇠고기도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학질에는 쇠무릎이나 칡, 박쥐 똥, 마황, 반하, 지모 등이 약재로 쓰였다. 특히 쇠무릎은 장기간 지속되는 학질에 효과적이라고 했다. 쇠무릎의 사용에 대해서는 우선 물과 술을 절반씩 섞어서 쇠무릎을 달여 마시는 방법을 택했다. 칡뿌리도 주로 달여 마시게 했고, 박쥐 똥은 가루를 내어 식힌 차에 타서 먹었다. 열만 오르고 땀이 나지 않는 학질엔 마황을 달여 먹였고, 열이 심한 학질엔 지모를 달여 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