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월간문화재

[2023 봄, 여름호-생로병사의 비밀] 싸우다-조선 중종 19~20년의 평안도 유행병과 다양한 대응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8-04 조회수 : 402
조선 중종 19~20년의 평안도 유행병과 다양한 대응들
지금으로부터 거의 500년 전의 일이다. 1524년, 그러니까 조선 중종 19년 7월 7일, 평안도 관찰사 김극성의 보고서가 국왕에게 도착했다. 용천 지역에 여역(.疫) 즉 유행병이 돌아서 이미 670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평안도 전역과 황해도까지 유행병이 전파되면서 이듬해 가을까지 사망자는 23,000명에 달했다. 중종대 인구가 400만명 내외로 기록되었으므로 전 인구의 0.5%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현재의 남북한 인구 7,000만명에 대입한다면 2년 만에 35만명이 사망한 셈이다
글 이경록(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연구부교수)
평안도 유행병의 발생과 그 실체

조선전기에도 유행병은 지속적으로 발생했지만 중종 19~20년의 경우에는 그 피해가 유별나게 참혹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유행병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유행병 발생과 확산은 발생 지역과 피해 규모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된다. 즉 중종 19년 1~8월 평안도 서부에서의 유행병 발생, 중종 19년 9월~20년 1월 평안도 내륙으로의 유행병 전파, 중종 20년 2~10월 평안도 전역에 걸친 유행병의 치성이다. 사망자 역시 눈덩이처럼 커지자 유행병에 대한 대응도 그 강조점이 달라졌다. 평안도 유행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앞서 말한대로 중종 19년 7월 7일의 용천 지역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유행병 발생 시점이 7월인 것은 아니었다. 기록들을 검토해보면 이미 중종 19년 1월에 곽산에서 유행병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 유행병의 실체는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유행병 때문에 이듬해에 편찬되는 『간이벽온방(簡易.瘟方)』에 그 단서가 있다. 『간이벽온방』에서는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이라는 처방 명칭에서 잘 드러나듯이 승마(升麻,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풀)나 갈근(葛根, 칡 뿌리)을 활용하였다. 승마와 갈근은 온역장기(溫疫.氣)와 온병(溫病)에 잘 듣는 약재들이다. 반면 조선 전기의 다른 유행병에서 흔히 사용되는 시호(柴胡)가 『간이벽온방』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시호는 상한(傷寒) 관련 유행병에 주로 처방된다. 이처럼 『간이벽온방』에 등장하거나 등장하지 않는 약재들을 통해서, 당시 의학자들은 이 유행병을 상한이 아니라 온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유행병은 모질게 심각한 발열이 주된 감염증상인데, 유행병으로서는 드물게 겨울인 1월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이 유행병은 장티푸스·발진티푸스와 같은 티푸스성 질환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시기의 유행병 발생 지역을 지도에 표시하면 <지도 1>이 만들어진다. <지도 1>에서 의주 - 용천 - 철산 - 곽산 - 구성 - 삭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따라 유행병이 번지는 장면을 살필 수 있다. 유행병 초기에는 의주와 용천의 피해가 가장 컸고, 점차 구성과 삭주까지 6개 지역으로 유행병 전파 범위가 넓어졌다.

지도1. 중종 19년 1~8월 유행병 발생 지역.
지도1. 중종 19년 1~8월 유행병 발생 지역.

정례적인 대응과 그 변용

평안도의 유행병 발생을 보고받자마자 중종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구휼(救恤)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의술에 밝은 의관(醫官)들에게 약을 가져가서 구완하도록 조치하였다. 의관 파견은 당시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미 문종대 기록에서도 의생들의 유행병 치료 효과가 크다고 평가되었다. 그런데 의관 파견·약재 분급은 말할 것도 없고 구휼 역시 조선 국초부터 관례화된 대응방안이었다. 유행병 창궐시의 구휼 규정은 이미 『경제육전(經濟六典)』(1397)과 『속육전(續六典)』(1413)에 실려 있었다. 굶주리는 백성들에 대한 구휼 조치는 환자들의 질병 저항력을 강화시키며, 시체 매장 조치는 병원체 전파를 차단하여 유행병 억제에 효과적이다.

여제를 거행한 여단(.壇), 『해동지도』에서 송도 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여제를 거행한 여단(.壇), 『해동지도』에서 송도 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편 『경국대전』에서는 치료 외에도 종교적인 대응이 상례(常例)로 규정되어 있었다. 바로 여제(.祭) 즉 여귀에 대한 제사였다. 여제는 유행병 창궐시에 흔히 실시되었다. 여제 규정은 조선 국초부터 정해졌는데 여귀 가운데는 유행병으로 인한 사망자(天災流行而疾死者)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안도 유행병 소식이 전해진 중종 19년 7월에 이미 장순손은 여제 실시를 건의하였다. 몇 달 뒤에 유행병이 심해지자 결국 여제가 평안도에서 실행되었다. 12월 13일에는 황효헌과 허관이 여제 헌관으로 평안도의 두 지역에 파견되며, 12월 25일에는 평안도 지방관들에게도 자신이 맡은 고을에서 별도의 제사를 봉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서울에서는 중앙부서가 여제를 담당하고, 유행병이 극심한 평안도 두 곳에는 중앙에서 여제 헌관을 파견하며, 나머지 평안도 지역에서는 지방관들이 제사를 맡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때 종교적인 대응 가운데 여제를 제외하면 불교 수륙재(水陸齋)와 도교 초제(醮祭)는 등장하지 않는다. 원래 중종 자신부터 재변에 대한 불교와 도교의 대응 방식에 부정적이었다. 또한 유행병이 극심해지자 중종은 역대의 대응책을 세밀히 조사하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다. 이때 신하들이 옛날에는 초제 역시 시행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고도 중종은 초제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결국 중종 19~20년의 유행병 창궐시에 도교적인 대응과 불교적인 대응은 실시되지 않는다. 중종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사회의 유교화가 강화되자 유행병 대응에서도 유교적 입장이 강조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유행병의 확산 과정

중종 19년 8월 이후 유행병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두 달쯤 지난 10월 28일에 구성 지역 21명의 사망 기록이 등장한다. 하지만 실상은 유행병이 조금씩 내연(內燃)하고 있었다. 11월에 들어서자 유행병은 본격적으로 확산일로를 걸었다. 11월 6일에는 선천 18명, 곽산 30명, 정주 19명, 철산 1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보고되었다. 10월부터 12월 초까지는 총 220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망자 숫자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유행병 범위가 확장되는 양상이다. 벽동 등 10개 고을에서 고을별로 최대 60여명이 사망하였다. 기존에는 6개 지역이었는데, 9~11월에는 선천, 정주, 창성, 벽동까지 동쪽으로 확대된 것이다. 12월부터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8월까지의 사망자는 1,831명이고, 12월 초까지 추가로 220명 정도가 사망했으므로, 누적 사망자는 2,000명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12월 25일의 기록에서는 누적 사망자가 3,88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렇지만 12월보다는 이듬해 1월의 피해가 더 컸다. 1월 3일 361명의 사망 기록을 비롯하여, 1월 13일 20개 지역 888명 → 1월 20일 14개 지역 781명 → 1월 30일 25개 지역 1,496명이 사망하였다. 중종 20년 1월말까지의 유행병 사망자 누계는 34개 지역에 걸쳐 7,432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중종 19년 12월에는 2,000명 가량이 사망하고 다음 달에는 3,526명이 사망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유행병에 대한 정례적인 대응이 완전히 무력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종 19년 8월 이후 유행병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두 달쯤 지난 10월 28일에 구성 지역 21명의 사망 기록이 등장한다. 하지만 실상은 유행병이 조금씩 내연(內燃)하고 있었다. 11월에 들어서자 유행병은 본격적으로 확산일로를 걸었다. 11월 6일에는 선천 18명, 곽산 30명, 정주 19명, 철산 1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보고되었다. 10월부터 12월 초까지는 총 220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망자 숫자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유행병 범위가 확장되는 양상이다. 벽동 등 10개 고을에서 고을별로 최대 60여명이 사망하였다. 기존에는 6개 지역이었는데, 9~11월에는 선천, 정주, 창성, 벽동까지 동쪽으로 확대된 것이다. 12월부터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8월까지의 사망자는 1,831명이고, 12월 초까지 추가로 220명 정도가 사망했으므로, 누적 사망자는 2,000명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12월 25일의 기록에서는 누적 사망자가 3,88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렇지만 12월보다는 이듬해 1월의 피해가 더 컸다. 1월 3일 361명의 사망 기록을 비롯하여, 1월 13일 20개 지역 888명 → 1월 20일 14개 지역 781명 → 1월 30일 25개 지역 1,496명이 사망하였다. 중종 20년 1월말까지의 유행병 사망자 누계는 34개 지역에 걸쳐 7,432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중종 19년 12월에는 2,000명 가량이 사망하고 다음 달에는 3,526명이 사망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유행병에 대한 정례적인 대응이 완전히 무력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도2. 중종 19년 9월~20년 1월 유행병 발생 지역.
지도2. 중종 19년 9월~20년 1월 유행병 발생 지역.

조선 정부에서는 서울로의 유행병 전파를 막고자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격리가 불가능하였다. 게다가 유행병이 노약자에서 장실(壯實)한 자에게까지 번지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국왕 스스로 구완방법을 모르겠다고 실토할 지경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서 바로 『간이벽온방(簡易.瘟方)』이 편찬되었다.

『간이벽온방』편찬과 그 효과

『간이벽온방』은 중종 20년(1525) 1월에 간행되었다. 『의방유취』에서 유행병 처방을 읽은 중종이 『간이벽온방』 편찬을 지시한 것이었다. 서둘러 진행된 덕분에 불과 5일 뒤에는 의서가 완성되어 필사본 형태로 지방에 배포되었으며 정식 인쇄는 5월에 완료되었다.『간이벽온방』은 그 서문에 나와있듯이 김순몽, 유영정, 박세거가 여러 의서를 검토하여 편찬한 책이었다. 그런데 『간이벽온방』의 저본으로는 『향약집성방』도 활용되었다. 의술사의 측면에서 살피자면 세종대에 집대성된 의학지식이 대중들이 이용하도록 보편화되는 과정이 바로 『간이벽온방』의 편찬이었다. 그렇다면 『간이벽온방』의 치료/치유 효과는 어떠하였는가? 우선 위약효과(僞藥效果)가 있었다. 예컨대 『간이벽온방』에서는 역기(疫氣)를 치료하고 예방하기 위해 대황, 길경, 촉초 등으로 만든 도소주(屠蘇酒)를 정월에 마시도록 처방하였는데, 이미 서거정이나 김시습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정월에 도소주를 복용하는 풍속은 오래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동지에 붉은 팥으로 쑨 죽을 먹어 역질을 없애라.”는 처방도 백성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동지 팥죽으로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다는 벽사(辟邪) 풍속은 요즘도 남아있지만, 성종 20년(1489) 동짓날 팥죽을 서로 주고받았던 김종직의 시(詩)처럼 오래된 풍속이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간이벽온방』의 친근한 처방들은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아울러 『간이벽온방』의 실제적인 치료 효과도 존재했던 것이 틀림없다. 몇 가지 처방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또 다른 처방.
집에 유행병이 들었을 때는 처음에 병든 사람의 옷을 빨아 정결하게 하여 밥하는 시루에 찌면 감염 걱정이 없어진다.
또 다른 처방.
동쪽으로 난 복숭아 가지를 잘게 잘라서, 이것을 달인 물로 목욕하라.
또 다른 처방.
5월 5일 한낮에, 미리 모아두었던 제철 약재를 태워 역기(疫氣)를 물리치라.

『간이벽온방』(언해).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간이벽온방』(언해).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인용문에 등장하는 옷을 삶거나 훈증하는 조치는 실제로 소독 효과를 나타낸다. 또한 목욕함으로써 위생 관념을 제고하거나 환자 집에 들어가기 전에 약재를 물에 끓이는 조치도 환자와의 접촉을 자제시킴으로써 감염을 예방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위약 효과이든 실제 효과이든 『간이벽온방』은 당시 사람들에게 유행병과 맞서 싸우는 무기가 되었다. 중종대 이후에도 『간이벽온방』을 계속 활용했던 것은 『간이벽온방』이 그 효능을 인정받았던 데서 말미암은 현상이었다. 예컨대 석웅황은 그 이후에도 유행병 퇴치에 실용되었으며, 『고사촬요』의 향소산·십신탕은 『간이벽온방』의 향소산·십신탕과 치료 목적이나 복용법이 동일하다.

유행병의 치성 양상

유행병은 중종 20년 2월 이후에 더욱 극렬해졌다. 새로이 덕천, 은산, 강동, 자산, 개천, 맹산, 중화, 상원이 추가되어 평안도 전역의 백성들이 유행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지도 3>은 이 시기의 유행병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사망자 역시 폭증하였다. 사망자 누계가 중종 20년 2월 4일에는 7,724명인데, 3월 12일 기록에는 12,425명으로 증가하였다. 불과 5주만에 4,701명이 사망한 것이다. 중종 19~20년에 걸쳐 사망자 총계에 관한 주요 기록을 모아 표로 만들어 보면 중종 20년 2월 4일 7,724명에서 8월 1일 22,349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약간씩 겹치는 사망 기록을 보정하면 중종 20년 10월 13일 최종 기록까지의 사망자수는 공식적으로 22,972명이 된다. 중종 20년에는 42개 지역에서 유행병 사망자 기록이 등장하였다. <지도 3>에서 보이듯이 이 유행병은 평안도 전역을 빼곡하게 뒤덮으면서 매듭지어졌다.

지도3. 중종 20년 2~10월 유행병 발생 지역.
지도3. 중종 20년 2~10월 유행병 발생 지역.
중종 19~20년 유행병의 누적 사망자 추이.
중종 19~20년 유행병의 누적 사망자 추이.

천인상응론의 강조와 군신간의 대립

중종 20년 유행병이 극심해지는데 반해 여제·구휼·매장이 별다른 효과를 보이지 않게 되자, 형벌 사면과 부세 감면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의 부담과 민심을 안정시킴으로써 여기(戾氣, 나쁜 기운)를 가라앉힌다는 명분이었다. 그 배경으로는, 유행병이란 화기(和氣)가 손상된 탓에 여기가 생겨서 나타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말하자면 군주·사족 등의 지배층이 잘못하여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어 여귀가 되거나 백성이 유리 궁핍해지면서 유행병이 발생한다는 천인상응론(天人相應論)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감세(減稅)와 사면(赦免)의 진행은 더디기만 하였다. 먼저 부세 즉 전세(田稅), 공물(貢物), 진상(進上)은 1월 9일부터 감면을 검토하였다. 이 가운데 진상은 곧바로 축소시켰지만 전세 감면은 사망자 현황을 먼저 조사하기로 논의하였다. 그리고 공물은 햇수를 한정해 감면하고 실태를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억울한 형벌을 피하기 위한 사면 역시 2월 초부터 의논하였지만, 신료(臣僚)들은 사면에 반대하였다. 상황이 악화되자 2월 14일에 중종은 사면 대상의 확대를 검토하도록 다시 지시하였다. 결국 이튿날 신료들은 사면을 유행병이 창궐하는 평안도에서만 시행하자고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계속된 중종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신료들이 완강하게 전세 감면을 반대한 이유는 국가재정의 악화 때문이었다. 영의정 남곤을 비롯한 신료들은 연도가 지나서 징수가 난망해진 환자(還上) 감면에 동의하는 정도였다. 또한 사면에 대해서 신료들은,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화기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에 중종 20년 2월에 들어서야 평안도 지역에 한정하여 도형 이하의 가벼운 죄를 사면하고 공부를 감면하는 것에 군신(君臣)이 합의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신료들 주장의 이면에는 건전한 재정문제나 엄격한 법치 시행을 넘어선 논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유행병이 왜 생기는가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신료들이 판단하기에, 여기(戾氣) 횡행은 천지의 화기가 어그러지기 때문이고, 화기가 어그러진 책임은 하늘을 대리한 군주에게 있었다. 유행병이 악화되자 신료들이 사면 대신 군주의 공구수성(恐懼修省)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이유였다. 대표적으로 중종 20년 5월 정옥형과 홍언필 등은 동중서(董仲舒)를 계속 인용하면서 중종을 압박하였다. 신료들의 주장에 중종은 강하게 반박하였다. 중종은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면 조세 감면이나 사면 실시가 유용하다고 판단하였다. ‘신료들의 잘못’으로 조세(租稅)와 형정(刑政)이 과도해진 탓에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원억(.抑)이 발생했으므로, 군신 모두의 반성을 통해 바로잡자는 게 중종의 인식이었다. 심지어 중종은 대표적인 국왕의 수성 조치인 감선철악(減膳徹樂)조차 철회하여 버렸다. 국왕 자신의 잘못은 없다는 의미였다. 군신간의 이러한 대립은 유행병이 창궐하는 동안 계속 되풀이되었다. 기후 불순이라는 자연 현상을 ‘화기(和氣) 손상(損傷)’이라는 관념으로 해석하는 순간, 기후 불순으로 생기는 유행병의 문제는 어떻게 화기를 회복할 것인가라는 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된다. 군주와 신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천인상응론을 상이하게 해석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천인상응론은 유 행병 등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정치적인 영역에서 해결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 각주 : 이 글은 필자가 예전에 작성한 다음 글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경록『, 조선 중종 19~20년의 전염병 창궐과 그 대응』『, 中央史論』 39집, 2014『( 조선전기의 의료제도와 의술』, 역사공간, 2020에 재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