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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봄, 여름호-생로병사의 비밀] 싸우다-18세기 양반 여성들의 삶, 질병, 죽음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8-04 조회수 : 536
18세기 양반 여성들의 삶, 질병, 죽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질병을 겪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다. 조선 시대 양반 여성의 삶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살면서 최소한 한번 이상 겪는 질병의 경험은 개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를 테면 16세에 결혼해 남편과 함께 59년을 함께 살다 노환으로 75세에 삶을 마감한 정씨가 있다. 다른 한편 결혼한 지 23일 만에 1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 이씨의 삶도 있다. 매우 간단히 축약해 서술했음에도, 두 여성의 삶이 상당히 달랐으리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개인 질병의 유무는 개인 삶 전체의 의미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두 여성의 결혼 연령을 보면 현대 한국 사회 여성들의 삶과 다른 측면도 눈치챌 수 있다. 18세기 여성들은 어떤 질병을 겪으며 어떤 삶을 경험했을까?
글 문현아(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학연구소 책임연구원)
부자집마누라외행츌입모양, 김준근 作.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모사복원품, 국립민속박물관.
부자집마누라외행츌입모양, 김준근 作.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모사복원품, 국립민속박물관.
여성들의 삶과 죽음을 더듬어 찾는 기록

조선 시대 여성들이 어떤 병에 걸려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를 알려면 어떤 자료를 찾아야 할까? 자료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조선 시대 여성들이 스스로에 대한 기록을 남긴 예는 흔하지 않다. 여성이 남긴 일기, 교훈서, 철학서 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록에서 본인이나 가족의 질병과 관련된 일상의 상황을 자세하게 적어 남긴 경우는 흔하지 않다. 예외적으로 풍양 조씨의 『자기록』(1792)에는 어머니의 질병과 죽음, 그리고 남편이 병에 걸려 지내다 세상을 뜨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그러나 본인의 삶이나 다른 가족들의 생로병사에 관한 내용은 상세히 담겨져 있지 않다. 조선 시대 ‘글쓰기’는 주로 남성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남성들이 남긴 기록에는 여성들, 특히 가족 내 여성들의 생로병사가 담긴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일기나 개인 문집에 실린 글, 특히 ‘비지전장(碑誌傳狀)’류, 즉 전(傳), 행장(行狀), 비문(碑文), 제문(祭文) 등의 글을 통해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남성 본인의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친인척 여성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가까운 배우자 남편이, 특히 아내보다 오래 살아 아내의 죽음을 기록하는 경우, 아내인 여성의 삶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내용이 정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는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중 여성에 대한 글을 모아 정리한 『18세기 여성생활사자료집』 중, 특히 남편이 남긴 아내에 관한 기록을 중심으로 당시 양반 여성들이 경험한 질병과 삶의 편린을 더듬어보려고 한다.

양반 여성의 질병과 생애

75세까지 삶을 누린 동래 정씨(1723-1797)와 19세에 생을 마감한 경주 이씨(1711-1730)의 삶을 비교하면 얼마나 서로 다른 생애과정이 펼쳐질까? 수치상으로만 보아도 수명이 차이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지만, 두 사람의 수명 연한은 5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오누이, 윤덕희 作, 서울대학교박물관.
오누이, 윤덕희 作, 서울대학교박물관.

동래 정씨는 홍양호의 부인이다. 어린 시절 비교적 건강해서 별 탈 없이 잘 자랐으며 17세가 되어 결혼을 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상당히 어린 나이 같지만, 18세기에는 오히려 25세가 넘어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드물었으니 정씨는 18세기의 관점에서는 결혼 적령기에 맞추어 결혼한 셈이다.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당시의 당연한 유교사회 규범에 따라 임신을 했고 출산을 했다. 낳은 자녀들이 장성해서 결혼을 했고, 그들이 또 자녀를 낳아 손자녀를 얻었다. 손자녀도 결혼을 하고 그 손자녀가 다시 자녀를 낳아 할머니였던 정씨는 75세에 증조 할머니의 역할도 부여받았다. 한편 조관빈의 계배(繼配, 두번째 부인)였던 경주 이씨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와 효성이 있었다. 여덟 살에 이미 뛰어난 바느질 솜씨를 익혀 자랑할 정도였다. 열 살도 되지 않아 이미 유교 규범을 익숙하게 익혀 타의 모범이 될 정도였다. 또한 독학으로 공부해 이백과 두보의 시를 좋아하는 똘똘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정씨에 비해 조금 늦은 19세에, 가격(家格,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이 내세울 정도가 아니었는지, 초혼이 아닌 둘째 부인 자격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둘째 부인은 첫째 부인의 사망으로 인해 순서상 두 번째가 된 것이지, ‘첩’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렇게 정식 결혼을 했지만 병으로 인해 한 달도 채 같이 살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1730년은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심했던 시기로 이씨도 이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남겨진 기록에는 사망 원인이 ‘병’이라고만 적혀 있다. 병은 조선 시대 사망 관련 자료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이다. 병, 지병, 고질병이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사망 원인으로 꼽히는데, 그만큼 그 시대에 원인 모를 병이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굳이 자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사람이지만, 한 사람은 증조할머니가 되기까지의 삶을 이어갔고, 한 사람은 안타깝게 짧은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다른 많은 조선 시대 양반 여성들은 이 두 여성이 살았던 수명의 평균치 정도의 삶의 연한을 살았을 것이다.

책 읽는 여인, 윤덕희 作, 서울대학교박물관.
책 읽는 여인, 윤덕희 作, 서울대학교박물관.

전염병이나 원인 모를 병으로 인한 죽음

“당신은 기질이 맑고 약했지만 평소에
건강하여 병이 없었기에 이렇게 갑자기 떠날 줄
몰랐소. 그런데 해산한 지 하루 만에 천연두에
연이어 걸렸으니 아무리 명의라도 손을 놓고
어찌 하지 못하였을 것이오.”

‘천연두’는 두창(痘瘡)으로 불리며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숙종대에 크게 유행했다. 2020년과 더불어 인류에 닥친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떠올리면, 18세기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인해 겪었을 공포와 위력이 더 실감날 것이다. 전염병이 휩쓸어 손을 쓸 수 없던 상황에 세상을 떠난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권씨도 그로 인해 1693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 중 하나였다. 권씨(1656-1693)는 22세에 남편 조덕린과 결혼해서 3남 1녀의 자녀를 낳았는데, 아이를 낳자마자 면역력이 약해있어 전염병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5일에 출산을 하고 16일에 천연두에 걸렸다가 20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신의 병은 이미 위독해져셔 여섯 달을
연명했지만 날로 더욱 위태롭게 되었소. 그래도
병이 회복되어 오랜 병을 치료할 수 있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약 먹이고 뜸 뜨는 방법을 잘
몰라 죽음을 갑자기 재촉하게 되었소.”

이건명의 부인 김씨(?-1714)도 ‘평소에 기력을 자부하던’ 건강한 사람이었다. 요즘 세상에서도 원인 모를 병으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의사 수도 턱없이 부족하고, 적절한 약을 구하지 못하거나 어떤 약이 잘 맞는지를 파악하지 못해 병이 심해져 죽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김씨는 결혼해서 28년을 남편과 같이 살았고, 자녀는 아들 셋, 딸 둘이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일반화된 통계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기록도 충분하지 않고, 왕과 양반에 대한 기록을 제외하고 그 이하 신분, 특히 양인이나 노비에 대한 자료가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연령을 확정하긴 어렵지만, 18세기 자료집만을 토대로 생애주기를 고려해 대략적으로 상상하면 여성들은 10대 중반-2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출산은 결혼과 더불어 지속되어 40대 초반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0-50대에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의 빈도가 많았다는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 현대의 시점으로 보면 결혼은 상당히 빨랐고, 40대의 사망은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권씨는 천연두에 걸려 40세 전에 세상을 떴고, 김씨는 대략적으로 40대 후반까지는 살았던 것으로 보아 양반 여성의 평균적인 삶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건강했던 사람도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도 대체로 50대를 넘기기는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셈이다.

출산, 그리고 여성의 삶과 죽음

평균이라는 숫자를 근거로 삶의 면면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황윤석의 아내 창원 정씨(1729-1776)는 21세에 결혼해서 48세로 삶을 마감했다는 점에서는 숫자상으로 18세기의 평균적 삶에 부합해 보인다. 그런 정씨의 출산 관련 경험은 여성들 삶의 중요한 또 다른 일면을 알려준다. 정씨는 기록에 따르면 총 열 번을 임신했고, 마지막 임신은 42세였다. 이 중 두 번은 유산을 했다. 그러니 낳은 아이는 아들 셋과 딸 다섯, 총 8명이다. 그런데 8명 중 어려서 사망한 자녀가 셋으로 남은 아이는 5명이다. 연령으로 따지면 48세로 평균적인 수명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삶의 상당 부분은 임신과 출산으로 채워져 있으며 자녀의 탄생과 죽음이 연달아 얽혀 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21세부터 42세까지 20년의 기간 동안 10회의 임신을 한다는 건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그것도 남아를 낳아야 한다는 유교사회의 규범도 작동했을 테지만, 임신의 절반 정도만 살아남는 상황도 고려하면, 여성들의 평균적 삶은 ‘출산’과 중요하게 맞물려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채용신 필 운낭자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채용신 필 운낭자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거듭 아이들을 잃고 곡을 하니 당신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깊이 상처받았고, 작년 여름에
그대는 종기가 돋은 병이 있어 여러 번 걱정했으나
나는 한가히 의사의 치료를 돌보아주지 못하고
아이를 해산할 때 또 대궐에 들어갔다가 급히
돌아와 보니 당신은 이미 죽어 있었소.”

아내 이씨(?-1701)를 보낸 뒤 남편 김진규가 기록한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이씨는 아이를 계속해서 낳았는데, 자녀 중 일부가 미처 성장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기록된 자녀는 1남 4녀인데,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임신을 하고 결국 출산을 하다 삶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결혼해서 남편과 29년을 살았던 이씨도 잦은 임신과 출산을 이어가다 결국 고령의 나이가 된 40대 말 혹은 50대 초반 무렵 출산하다 세상을 떠났다.

“임신한 지 8개월이 되어 병이 났는데,
해산하다가 아이가 죽었다. 이것 때문에
슬퍼하고 애도하고 탄식하여 병이 점점
위급해졌다가 그 해 10월 8일 마침내 죽었으니
20세였다.”

이덕수의 아내 최씨(1674-1693)의 경우다.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때 사망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더군다나 아이를낳다가 산모가 사망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양반 계층이어도 태어나자마자 아이가 죽는 경우 도 상당히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다가 여성이 죽는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특히 20대에 사망한 여성의 사례를 보면, 대체로 출산과 관련된 경우가 많았다. 양반 여성들에게 출산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과정임과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여성 당사자가 죽을 수도 있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최씨는 해산하다가 아이도 죽고 결국 산모도 죽게 된 경우인데, 그때 나이가 겨우 20세였다.

채용신 필 남녀초상, 서울대학교박물관.
채용신 필 남녀초상, 서울대학교박물관.

아프지 않고 오래 살며 ‘오복(五福)’을 누린 여성의 삶

홍양호는 자신과 결혼해 59년을 살다 75세에 세상을 떠난 아내 정씨를 떠나 보내며 “어렵고 험난한 일을 맛볼 만큼 맛보았고 기쁨과 슬픔을 모두 함께 하였지요.”라고 적었다. 그러면서『홍범구주(洪範九疇)』에 기록된 오복을 인용하며 아내 정씨의 삶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수(壽). “75세까지 살”았으니 ‘수’를 누렸다.
둘째, 부(富). 집안이 아주 부유하지 않았지만, “40여 년 동안 국가로부터 녹봉(祿俸)을 받아 살았으니 이 정도면 ‘부’를 누렸다.”
셋째, 강녕(康寧). “평생 질병없이 늙을 때까지 시력과 청력이 쇠하지 않았으니” 몸이 강건하고 평안했다.
넷째, 유호덕(攸好德). “정숙한 용모와 곧은 절조, 자애로운 성품까지 친척들이 효성스러움과 화목함을 칭찬하고 이웃 사람들까지 검소한 것에 감복하고 종들도 자애로움에 감동”하니, 덕이 있는 삶을 살았다.
다섯째, 고종명(考終命). “죽던 날에도 일상처럼 먹고 자다가 갑작스레 운명”했으니 편하게 마무리된 삶이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당시에, 혹은 현대에서도 이처럼 ‘오복’을 누리며 살았다고 평가받는 여성은 드물 것으로 생각된다. 드물긴 했지만,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기는 했다.

짧게만 살펴본 양반 여성들의 삶이다. 전염병에 걸리기도 하고, 아이를 낳다 죽기도 하고, 오래 장수한 경우도 있다. 현대 사회와 비슷한 면도 있지만, 상당히 다른 면도 있어 보인다. 이 글은 18세기를 살아갔던 많은 여성들 중 아주 미미한 일부의 경험만을 소개했다. 질병을 통해 조선 시대 여성들의 삶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소개된 여성들은 대부분 성(姓)으로만 구별되며, 그것도 남편의 아내로서의 위치를 통해 신분 증명이 가능한 여성들이다. 이름없는 삶을 살았지만, 질병의 경험을 통해 그 삶의 과정이 그래도 입체적으로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성만 있던 양반 여성들에 비해 오히려 성은 없지만, 양반으로부터 불림을 당해야 했기에 이름을 가졌던 노비들의 삶과 질병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양반 여성들과는 다른 결을 살았을 중인이나 양인, 노비 여성들의 질병과 그들이 경험한 죽음은 양반 여성과 비슷한 면도 있을 테지만,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신분을 망라한 여성들의 다층적인 삶의 내용이 채워질수록 우리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일상으로 조금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인류의 삶과 질병, 그리고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 문현아. 2019. “조선후기 양반 여성의 질병과 죽음에 대한 사례 연구”. 『여성과 역사』 30.
  • 풍양 조씨. 2014(1792). 『자기록』 김경미 역주. 나의 시간.
  • 황수연 외. 2010. 『18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 1권 ~ 8권. 보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