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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봄, 여름호-생로병사의 비밀] 싸우다-조선 시대 국가 의료시설과 공동체의 질병 대응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8-04 조회수 : 1369
조선 시대 국가 의료시설과 공동체의 질병 대응
조선은 기본적으로 국왕이 다스리는 국가이며, 사회지배층은 신분제의 최상위에 있었던 왕실과 함께 양반으로 구성되었다. 질병에 대처하기 위한 의료시설 또한 이러한 조선의 사회구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거기에 국왕이 거처하는 수도 한양과 지방간의 차이도 존재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조선 시대에 운영되었던 의료시설을 구분하자면, 국가라는 공적 영역과 개인 혹은 공동체의 사적 영역, 그리고 중앙의 한양과 지방의 범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의료기구를 설치하고 운영하는 원리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이 크게 작용하면서도, 동시에 국가가 의료를 운영해야 한다는 원칙이 작용하였다. 따라서 초기에는 사적 영역이 국가의 통제 아래 성장하지 못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점차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공공의료라고 할 수 있는 국가의 의료시설을 운영하는 제도의 문란이 아닌, 의료의 영역이 보다 넓어지면서 나타난 사적 의료의 확대에 따른 운영실태가 변화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글 김성수(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조교수)
중앙의 국가 의료 기구

조선의 중심적 의료시설은 국가 중심, 그리고 한양을 위주로 마련·운영되었다. 이는 조선의 건국 직후 태조와 관료들이 정한 관제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이때 제정된 기구는 전의감(典醫監), 혜민국(惠民局), 그리고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이었다. 그리고 1397년(태조 6년)에 제생원이 설치되었고, 다시 세종 때에는 전의감에서 내의원(內醫院)이 독립하였다. 한양에는 왕실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이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구들이 마련된 것이었다.

창덕궁 내 내의원 ⓒ김성수.
창덕궁 내 내의원 ⓒ김성수.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의료기관은 단연 왕실의 의료를 관장하였던 내의원이었다. 왕실 전담의 의료기관인 내의원의 전신은 고려 목종(穆宗)이 설치한 상약국(尙藥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 전후 전의감(典醫監) 안에 내약방(內藥房)으로 존재하였다가, 제도 정비과정에서 1433년(세종 15년)에서야 독립하였다. 내의원의 역할은 현재 창덕궁 내에 있는 내의원의 현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라고 하여, 임금이 드시는 어약을 짓고 왕실의 건강을 보호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데, 내의원의 명칭은 1895년(고종 32년) 전의사(典醫司)로 명칭이 변경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좌) 왕실 휴대용 약상자, 한독의약박물관. / (우) 왕실의 약을 보관하던 그릇. 청자 음각 「상약국」명 운룡문 합, 국립중앙박물관.
(좌) 왕실 휴대용 약상자, 한독의약박물관. / (우) 왕실의 약을 보관하던 그릇. 청자 음각 「상약국」명 운룡문 합,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의료행정 및 의학교육의 중추 기관으로서 내용(內用) 약재의 조달과 왕실 및 조관(朝官)의 진료, 약재의 사여(賜與), 약재의 재배와 채취, 외국 약재의 구입 및 판매, 의서 편찬, 의학교육 그리고 의관 선발을 위한 시험인 취재(取才) 등을 관장하였던 전의감을 들 수 있다. 전의감에서는 조관, 즉 관료들에게 약을 제공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사실상 조선의 주요 의료사업을 전부 관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할 의생(醫生) 50인도 교육하였다. 한편 관료가 아닌 일반 백성들이 접할 수 있는 의료기관은 혜민국(혹은 혜민서)이었다. 그 성격과 운영방식은 정도전(鄭道傳)이 1394년(태조 3년) 편찬하였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조항에서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혜민전약국(혜민서의 전신)을 설치하여 국가가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데, 오승포(五升布) 6천 필을 지급하여 이것을 자본으로 약물을 갖추고, 환자들은 필요로 하는 약을 구매하도록 하였다. 그는 혜민전약국이 “나라에서 사람들을 살리고자 하는 큰 뜻[국가호생지덕, 國家好生之德]”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그 운영을 철저히 함으로써 영원히 지켜나가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혜민전약국이 약을 판매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면, 약을 확보하고 백성을 치료하는 기관으로 제생원(濟生院)이 1397년에 설치된다. 제생원은 특히 향약을 이용하여 치료할 뿐만 아니라, 빈자의 구료 및 의녀를 교육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460년(세조 6년)에 혜민서와 병합되었는데, 그 기능은 혜민서에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혜민서에서는 진료 외에도 의생 30명을 교육하였고, 치료에 필요한 약재 공급을 위해, 향약재의 관리를 맡았으며, 종약전(種藥田)에서 약재를 재배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 제생원은 현재 종로구 계동 인근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데, 혜민서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현재 중구 을지로 2가 주변인 남부 태평방(太平坊)에 혜민서가 위치하고 있다. 또한 『혜국지(惠局志)』에 따르면 상당히 넓은 면적에, 대청을 포함하여 약을 판매하는 전매청(典賣廳), 의녀를 교육하는 의녀청(醫女廳)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생원 터 표석,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제생원 터 표석,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혜민서의 운영을 기록한 『혜국지(惠局志)』,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혜민서의 운영을 기록한 『혜국지(惠局志)』,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활인서(活人署)는 통상 활인원이라고도 불리는데, 태조가 건국한 이후 관제를 정할 때 전의감·혜민국과 함께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에서 비롯하였다. 동서대비원은 고려의 제도로써 진휼을 담당하면서 특히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이의 구료 업무를 담당하였다. 활인서는 초기에는 활인원 혹은 대비원으로 불렸는데, 도성의 동·서에 나뉘어 있어서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혹은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으로도 불렸다. 활인서의 주요 기능은 전염병 환자의 치료였지만, 실상은 전염병이 한양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격리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었다. 동서활인원의 연혁, 위치와 역할은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해서 일부 드러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활인원【동소문 밖에 있다.】과 서활인원【서소문 밖에 있다. 옛 이름은 대비원이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의원과 무당을 두어서, 서울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곳에 모아 놓고, 죽·밥·국·약을 주며, 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 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 활인서에 의한 치료와 진휼책은 시기에 따라 그 운영에 기복이 있었지만, 활인서의 설치와 구료 정책이 거둔 실효는 컸다. 세종 때 서울에서는 전염병 환자 가운데 80~90%가 치료를 통해 살아났지만, 외방에서는 사망한 사람이 4,000명이나 되었는데, 그 결정적인 차이는 활인서에 있다고 말해질 정도였다. 이러한 의료기구 이외에 땀을 내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증소를 마련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양 도성 내부와 동서활인원에 각각 설치되었는데, 특히 세종 때에 집중적으로 지원·이용하였지만, 이후로 국가에서 별도로 주목해서 관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에 설치된 의원

고려에서는 지방에 의료기구를 설치하거나 의원을 파견하였는데, 서경(西京)에 의학원(醫學院)을 두었고 기타 지역에는 의학박사(醫學博士)나 의학(醫學) 등을 파견함과 동시에 약점(藥店)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유제를 조선에서도 거의 그대로 실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성리학적 인정을 베풀겠다는 의지에서 찾았던 만큼, 지방의료에 대해서도 더욱 확대된 정책을 취했다. 1393년(태조 2년) 전라도 안렴사였던 김희선(金希善)이 계수관(界首官)마다 의원을 설치하여 생도를 교육하고 지방민을 치료할 것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앞서 고려에서는 서경에만 설치되었던 것에 비하면, 계수관 즉 팔도의 큰 고을마다 의원을 설치하자고 한 것은 의료가 한층 확대된 것이었다. 그리고 세종 때에는 수령들이 의원의 생도들을 잡무에 복역시키지 말고, 의업만을 전념하도록 조치하면서 의료에 더욱 전념토록 하였다. 특히 예종 즉위년에는 이인휴(李仁畦)가 도(道)마다 의원을 세 곳에 설치하여 퇴거한 의원과 의생 중에서 의술에 정밀한 사람을 골라서 의관을 삼도록 건의하였다. 아마 김희선이 말한 계수관에 의원을 설치 운영하자는 의견이 바로 실행되지 못했던 상황을 보여주는데, 그와 별개로 정부에서 여전히 지방의 의원설치를 강력히 추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지방에 몇 개의 의원이 설치되었는지, 그 운영 방식은 어떠했는지를 알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의료의 현장에서 활동하였던 의관이나 의생에 관한 기록만이 보일 뿐이다. 그것을 정리해보면, 지방 의료를 담당하였던 것은 의학교유(醫學敎諭) 심약(審藥) 의생이었다. 교유는 교수와 같은 직책으로, 지방 의료의 중심적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각 도에 설치된 의원에 1명씩 파견되어 1년에 두 차례씩 순회하면서 의생을 교육하고, 백성의 치료를 담당하였다. 다만 교유가 의원의 선발을 위한 취재에서 차석한 사람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그 의술의 능력에서는 중앙의 의관보다 부족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의생의 교육과 지방민의 치료, 약재의 채취의 일까지 담당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경국대전』 권3, 생도조. 지방관의 크기에 따라 의생이 배정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경국대전』 권3, 생도조. 지방관의 크기에 따라 의생이 배정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편 심약은 전의감과 혜민서 소속의 의관으로 각 도에 파견되어 약재 채취에 종사하던 의관으로, 그 직무상 지방 의료에서 역할은 크지 않았다. 실제로 지방의 의료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은 의생이었다. 교유나 심약이 도에 1명에서 많게는 3명 정도의 매우 적은 수가 책정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국에 3,000여명 정도로 배정된 의생이야말로 지방 의료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은 의학교육을 받는 이외에 교유를 보좌하여 지방민의 질병치료를 직접 담당하였다. 그러나 외방에서 상납하는 약재를 운반하기도 하였으며, 잡역에 동원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서 의료의 실제 일을 담당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세종은 삼의사에 의생이 공부할 의생방(醫生房)을 설치하여 제약과 의서를 익히게 하고, 의술에 능통한 다음에 의과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이외에 약초를 캐는 채약인(採藥人)으로서 약부(藥夫)가 있었다. 1478년(성종 9년) 각도의 채약인으로 큰 관아에는 5호, 작은 관아에는 3호씩을 배정하여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약재만을 채취도록 하였다. 그들이 약초 캐는 일을 대대로 전하도록 함으로써 향약(鄕藥)의 채취와 보급에 노력하였는데, 이때 정한 채약인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약부(藥夫)로 정하여졌다.

약장, 한독의약박물관.(출처 : e뮤지엄)
약장, 한독의약박물관.(출처 : e뮤지엄)

개인과 공동체의 대응

조선 정부에서 설치한 의료기구가 중앙에 집중되었던 까닭에 지방 의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지방의 사족을 중심으로 하여 의학에 관심을 가지는 인물들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일부는 의학을 익히고 실제 의료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사람들을 유의(儒醫)라고 불렀다. 즉 유학자이면서 의학에 뛰어난 존재라는 의미였다. 이와같이 자발적으로 의학을 익힌 경우가 있었지만, 한편 국가에서 의학을 진흥하기 위해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이라는 제도를 마련하여 장려하면서 더욱 촉발되었다. 의서습독관은 연소하고 재능이 있는 양반의 자제를 선발하여 의서를 익히게 하는 제도로, 세종 때 만들어진 습독관 제도에서 의학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이들은 의서만 익힌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의생을 교육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진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학이 중인의 학문으로 폄하되는 상황에서 의서습독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1455년(단종 3년), 1462년(세조 8년), 1463년(세조 9년), 1472년(성종 3년), 1489년(성종 20년) 계속해서 의서습독관을 권장하고 학업이 부진하면 처벌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의학이 지식인의 교양이라는 인식, 지방 의료가 부족하다는 사회적 필요성, 의서습독관 제도의 운영 등으로 유의의 등장과 활동은 더욱 확대되었다. 대표적인 유의로 중종 때에는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안국(金安國)이 『벽온방(.瘟方)』 『창진방(瘡疹方)』 등의 의서를 언해하여 보급하였고, 1542년(중종 37년)에는 아예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을 편찬하는 작업에도 직접 참여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인 김정국(金正國)도 형과 유사하게 황해도 관찰사 시절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을 직접 편찬하기도 하였다. 의서 편찬과 관련해서 유성룡(柳成龍)도 명나라의 의사인 이천(李.)이 편찬한 『의학입문(醫學入門)』을 열람하면서, 그 장점과 조선의 의료현실을 감안해 『의학변증지남(醫學辨證指南)』 『침구요결(鍼經要訣)』 같은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의서습독의 제도는 조선 후기에 운영되지 않았지만, 유의들의 활동은 계속되어서 의약동참(議藥同參)이라는 제도를 통해 왕실의 진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정약용은 69세 때에 세자의 치료에 동참했고, 73세 때에는 순조의 중병 진료에 참여하라는 분부를 받았기도 했다. 유의가 개인적인 의료활동이었다면, 각지에서 공동체가 의료시설을 정비하여 대응하는 방식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경상도 영주의 제민루(濟民樓), 상주의 존애원(存愛院)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현재 알려진 바로는 충청도의 청주, 전라도의 무안 등지에도 지방관과 재지사족, 또는 유의를 중심으로 해서 지방의 의료시설이 확충·운영되고 있었다. 이들이 대부분 재정의 악화로 설치된 이후 오래지 않아 퇴락하기도 하였지만, 200여 년 이상 지속된 강릉의 약국계(藥局契)도 존재하였다. 이들 가운데 지방 공동체의 의료시설로 존애원과 강릉의 약국계를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존애원.(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존애원.(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상주에 존애원이 설립되게 된 경위는 성람(成灠), 조익(趙翼),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의 교유에서 시작되었다. 정경세가 논의를 주도하였으며, 운영에 중심이 되는 진료는 성람이 맡았다. 이준이 남긴 「존애원기」에 따르면, 이들은 계를 조직하여 재원을 마련해서 약재를 구비하고 의료에 참여하였다. 계를 통해 공동체적으로 의료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책으로써 존애원의 설립은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한계도 분명하였다. 즉 1602년 존애원의 설립 당시 구성원은 11개 가문의 총 30인이었다(1599년 계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 24인). 문제는 존애원은 이들 가문과 구성원들에게 한정된다는 사실이었으며, 존애원을 통해 약재를 구하는 편은 수월해졌으나 실제 진료를 맡을 의원의 존재와 약값을 효과적으로 받기 어려워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한계가 여전하였다.

은침통, 허준박물관.
은침통, 허준박물관.

존애원과 달리 200여 년이라는 오랫동안 유지된 강릉 약국계는 1603년(선조 36년) 본관을 강릉에 둔 사족을 중심으로 설립되었으며, 계원은 25명 정도로 운영되었다. 약국에는 의관 및 의생, 약초꾼, 창고지기 등을 두었고, 일정액의 급료가 지불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고사촬요(攷事撮要)』의 약값을 기준으로 책정하고, 관원과 계원, 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차등적인 가격으로 약재를 판매하였다. 즉 관원과 계원들에게 우선 혜택이 돌아가도록 운영한 것이다. 또한 진료를 담당하는 의생들이 의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의서를 구비하였는데, 『동의보감』이 완성된 직후 이를 입수할 정도였다.

악연기, 대구약령시한의학박물관.
악연기, 대구약령시한의학박물관.

강릉 약국계는 초기 지역민들에게 개방적이었지만, 점차 계원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즉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원의 수가 25인을 넘어서 늘어나지 않도록 하는 한편 계원의 혜택이 본인을 넘어 처자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지역에 사설약국이 들어서고, 재정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약국계는 명맥을 잃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