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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봄, 여름호-생로병사의 비밀] 싸우다-역사 속 명의와 의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8-04 조회수 : 408
역사 속 명의와 의녀
시대에 따라 의학 수준이 달라졌어도 문명 시대로 들어선 이래 늘 명의가 존재했다. 그리스 시대의 히포크라테스나 중국 고대의 편작이나 화타는 전설적인 명의였다. 서양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고대부터 시작된 명의 전통의 계보가 뚜렷하게 확립되어 존숭(尊崇)받았다. 과거 명의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의술의 출중함은 기본이었으며 뛰어난 의서 편찬으로 지식이 오래 전해질 수 있도록 학문을 정립해야 했다.
글 신동원(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의원의 진료 모습, 불암사 감로탱화대기근.(출처 : 조선의약생활사 - 환자를 중심으로 본 의료 2000년, 신동원 지음, 들녘 출판)
의원의 진료 모습, 불암사 감로탱화대기근.(출처 : 조선의약생활사 - 환자를 중심으로 본 의료 2000년, 신동원 지음, 들녘 출판)
천하의 명의들

조선 후기 연경행 사절은 천단 북녘의 약왕묘라는 곳을 꼭 들렀다. 명나라 말엽에 세운 사당이다. 1780년 사행 일원에 낀 천재 문필가 박지원(1737-1805)이 『열하일기』에서 그곳 방문 기록을 빼놓았을 리 없다. 그가 약왕묘 안을 둘러 보니 전각 속에는 이른바 전설 속의 삼황 의성인 복희씨, 신농씨, 헌원씨를 중앙과 좌우로 모셨고, 주변으로 이른바 10대 명의가 배향되어 있었다. 손진인(당의 손사막)을 비롯하여 기백, 편작, 갈홍, 화타, 왕숙화, 위진인(당의 위자장), 태창령 순우의, 장중경, 황보사안 등이 그들이었다. 조선에는 이런 대중적인 약왕묘 사당이 없었기에, 조선의 사절은 이에 흥미를 나타냈었다. 물론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삼황과 10대 명의는 익숙한 존재였다. 이들의 이름은 사서나 문집에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명의를 들먹일 때 으레 기백이나 편작, 화타나 손사막 등을 떠올렸다. 조선의 저작물 가운데 천하의 명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은 1635년 중간본 『의림촬요』의 『역대의학성씨』다. 여기서는 천하의 명의 224명을 2명을 실었다. 이 가운데 215명은 1590년 무렵 수입되자마자 국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명대 의학자 이천의 『의학입문(1575)에서 전재했으며, 7명은 『동의보감』의 『역대의방』에서 보완했으며, 나머지 두 명은 『의학입문』 초간본 교정을 본 양예수(?-1600)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1539-1615)이다. 천하의 명의는 상고의 성현 13명, 유의(儒醫) 41명, 명의(明醫) 103명, 세의 28명, 덕의(德醫) 18명, 도가 또는 승려 의사 19명, 본국의 명의(明醫) 2명 등으로 분류되었다. 이런 분류에는 유교 중심적인 관점이 녹아 있다. 여기서 본국의 명의로는 양예수와 허준둘만을 목록에 올렸다.

양예수와 허준

『의림촬요』의 『본국명의』는 짧지만, 국내 명의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전기다. 소설가 이은성이 『소설 동의보감』에 양예수와 허준의 대결이라는 가상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전기를 보도록 하자. 양예수의 경우 “의술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의림촬요』 8권을 편찬했다.”고 짧게 적혀 있다. 허준에 관한 서술은 이보다 더 길다.


허준은 본성이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박식했다.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어서 신묘함이 깊은 데까지 이르렀으며, 사람을 살린 일이 부지기수이다. 그의 관직이 숭록대부, 양평군(陽平君)에 이르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동의보감』 25권·『언해두창집』 1권·『언해태산집』
1권·『언해구급방』 1권·『신찬벽온방』 1권

이 두 전기에서 명의(明醫)의 조건을 읽을 수 있다. 의술의 출중함은 기본이거니와 뛰어난 의서 편찬으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의술로 한 시대를 풍미했을지라도, 인술을 펼쳐 수많은 인명을 구했을지라도, 삼세 가업을 이어 뛰어난 의술을 펼쳤을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널리, 오래 전해질 수 있도록 학문을 정립해야 한다. 양예수와 허준 두 사람은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인물이었다. 당대인은 양예수가 기인으로부터 의술을 배웠음을 말한다. 이수광(1653-1626)은 『지봉유설』(1614)에서 양예수가 장한웅이라는 은거 기인에게 의술을 배웠음을 말했는데, 허균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3대에 걸쳐 종기와 부스럼을 다루는 업에 종사했으며, 부친이 준 도교 서적을 수만 번 읽어 도술을 맘대로 부릴 수 있어서 학질 환자를 고치고, 심지어 죽은 물고기나 꿩도 단약으로 살려낸 인물로 도교 서적 10권을 지은 인물이었다. 오늘날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기인이사로부터 의술을 배운 명의의 탄생 과정을 이 양예수의 사례에서 엿볼 수 있다. 허준의 서사에는 스승이 나와 있지 않다. 『본국 명의』에서는 허준의 “본성이 총민하고 어 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박식했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의학을 메타적인 수준에서 볼 수 있는 기본 자질과 소양을 갖췄음을 말한 것이다. 사상과 역사에 대한 높은 식견,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인 문장력이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인문적 사유가 짙게 깔린 『동의보감』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까. 『본국 명의』에서는 조선 의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정1품까지 추증받은 허준의 관직 성취도 적었다. 게다가 바로 허준의 저작 5종 서술이 이어진다. 거기에는 걸작 『동의보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동의보감』과 서갑, 허준박물관.
『동의보감』과 서갑, 허준박물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드날렸다. 1766년 중국판 『동의보감』을 찍어내면서 능어(凌魚)라는 인물은 서문에서 “이 동의보감은 곧 옛 명(明) 때 조선 양평군 허준이 엮은 것이다.······이 책은 이미 황제께 올려서 국수(國手)임이 인정되었으나, 다만 여태까지 비각(秘閣)에 간직되어 세상 사람이 엿보기 어려웠었다.······[이제 이 책을 찍어내] 천하의 보물을 마땅히 천하와 더불어 하고자 한다.”며 이 책을 극찬했다. 1780년 박지원이 북경의 서점가 유리창에서 발견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는 제법 긴 능어의 서문을 읽고 나서 이를 베끼기 시작했다. 돈이 없어 이 책을 사지는 못했지만, 이런 내용을 조선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열하일기』에 담았다.

허준 표준영정, 허준박물관.
허준 표준영정, 허준박물관.

동국 명의의 전통

양예수, 허준 이후 의술과 의학에 두각을 나타낸 명의를 두 명 더 선정하라면 누가 될까? 대부분 의학사학자는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방약합편』을 쓴 황도연(1808-1884)과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1837-1900)를 꼽는 데 크게 주저하지 않을 것 같다. 혹자는 정조 시대 『동의보감』을 압축하고, 보완한 『제중신편』을 펴낸 어의 강명길(1737-1801)이나 홍역 전문 명저인 『마과회통』을 지은 유의 정약용(1762-1836)을 대신 추천할지도 모르겠다. 황도연(1807-1884)은 19세기 조선 최고의 임상가였다. 그가 지은 기존의 의서와 유언에 따라 아들이 편찬한 『방약합편』(1884)은 가장 흔한 증상에 대해 가장 효과가 큰 처방을 보약, 조화하는 약, 공격하는 약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기초적인 약재를 암기하기 쉽게 노래로 만들어 덧붙인 책이었다. 간명하면서도, 효과적이고, 응용하기 쉽다는 세간의 평가에 힘입어 이 책은 출간 직후부터 선풍의 인기를 끌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방약합편』,, 국립민속박물관.
『방약합편』,, 국립민속박물관.
『방약합편』,, 국립민속박물관.
(우)황도연 초상, 『의종손익』,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좌)이제마 초상.(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1901) 자신의 독특한 임상경험을 귀납하여 사람의 유형에 따라 잘 걸리는 병이 다르며, 따라서 치료하는 법이 다름을 주장했다. 그는 기존 한의학의 오장육부가 아닌 사장사부로 인체를 파악했으며, 인간형인 태양인, 소양인, 소음인, 태음인을 가정하며, 인간의 형태에 따라 잘 앓는 병이 다르며, 그에 대한 치료방법을 제시했다. 오늘날 모든 한의과 대학에서는 사상의학만을 전문으로 하는 교실이 존재할 정도로 수많은 후계자를 두었다. 조선 시대 이전에 명의로는 누가 있었을까.『고려사』 『열전』에서는 고려 전체를 통틀어 이상로, 설경성 등 2명의 명의만을 실었다. 이상로는 의종의 발에 난 병을 침으로 고쳐 등용되었다. 그는 어떤 기이한 승려로부터 의술을 배운 후 고관의 등창을 고치는 등 명성을 떨치다가 의종의 난치병까지 고쳐 출세의 길을 달린 인물이었다. 어의 설경성(薛景成, 1237-1313)의 경우는 명성은 고려를 넘어 원(元)까지 떨쳤다. 그는 신라 설총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의술을 업으로 삼아온 가문의 후손으로서 왕실 병원인 상약국의 말직 의좌(醫佐)로 벼슬을 시작하여 문관 고위직까지 지낸인물이었다. 충렬왕의 병을 도맡아 진료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1285년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의 중병 때 초빙되어 병을 고쳐 더욱 유명해졌으며, 원 성종인 테무르의 중병 때도 불려 가서 진료에 참여했다. 설경성 사례는 당시 고려의 의학 수준이 원에 필적할 정도에 도달해 있었음을 웅변한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명의를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헌덕왕 14년(822) 상대등 김충공의 병을 진료한 국의(國醫)의 존재가 잠깐 보일 뿐이다. 그는 충공의 병을 심장 계통의 병으로 파악하고, 용골(龍骨, 공룡의 뼈) 처방을 권했다. 이보다 수백 년 앞선 시기 삼국의 명의 이름은 일본의 기록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남아 전한다. 가장 이른 기록은 서기 414년이다. 이 해에 신라의 김무(金武)라는 양의가 일황 윤공제(允恭帝)의 고질적인 다리병을 고쳤다. 452년 일본에서 백제에 양의를 초청하자 백제에서는 고구려 의사 덕래(德來)를 보내주었다. 그는 일본 난파(難波)에 거하여 자자손손 의업을 행하며 난파약사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런 기록을 통해 5세기 무렵 삼국의 의술 수준이 일정 궤도에 올라 양의 또는 명의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에 편찬된 중국 사서 『주서(周書)』(636)에서는 백제의 의약이 중국과 하등 다르지 않다고 적혀 있다. 고대의 의원은 세습으로 이어진 것 같은데, 692년 통일신라에서 의학교인 ‘의학’을 설치하면서 공공적인 교육 체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민간의 명의들

민간에서 활약한 명의들의 자취는 이규상(1727-1799)의 세상과 더불어 재능을 떨친 서얼·천출·여성을 다룬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하층민의 삶이 다양하게 실린 작자 미상의 『청구야담』(19세기 중엽), 조선의 하층민 308명을 다룬 유재건(1793-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1862) 등에 보인다. 『병세재언록』에서는 18세기 후반에 활약한 종기 전문의 백광현(白光炫, 1625-1697) 이야기를 실었다. 백광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마의(馬醫)로서 침으로 말의 병을 잘 치료하다가 사람의 종창을 잘 치료하는 것으로까지 침술을 발전시켰다. 특히 난치병이던 종기의 뿌리가 깊은 증상을 잘 고쳤다. 그가 쓴 방법은 대침을 써서 환부를 찢고 독기를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즉, 외과수술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를 보여, 세상에서 신의라 일컬었다. 그는 궁중에 초빙되어 어의로도 활약했으며, 병을 고친 공로로 여러 지방관을 역임했다. 비록 미천한 출신이면서 심지어 글도 읽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의술로서 출세한 것이다. 『청구야담』에서는 1843년 이전의 인물인 충청도 홍주의 침의 조광일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침의로서 전혀 약을 쓰지 않고 오직 침만을 썼다. 동침, 철침을 썼고, 장침과 단침, 원리침 등 다양한 침을 썼다. 그는 “침으로 시험한 지 십여 년에” 수천 명을 고쳤다고 한다. 또 이 책에서는 19세기 전후 무려 이름을 떨친, 종 집안 출신의 종기 전문의 피재길(皮在吉)도 소개했다. 그는 약재를 모아 고약 만드는 법만 알고 있어서 감히 의원의 축에는 끼지 못했지만, 소문이 널리 퍼져 궁중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정조실록』에는 1793년 여름 정조의 머리에 부스럼이 생기자 불려 들어가 다른 의원이 고치지 못한 병을 고쳐서 그 공으로 피재길은 내침의(內鍼醫) 관직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향견문록』에는 유재건과 동시대 인물인 침의 신노인(申老人)이 적혀 있다. 신노인은 “의술에 능통하였으며 침구의 법을 더 잘하여서 당시의 양의로 일컬어”진 인물이었다. 그가 사용하는 침의 모습을 보면, “원리침은 순금으로 가늘기가 까끄라기 같고, 삼릉침은 날은 쇠이고 자루는 금으로 만들어져, 여느 침과 달랐다.” 이 침은 그의 스승이 일본에 갔을 때 선물로 얻어 온 침이었다. 또 이 책은 글자는 한 자도 모르는 천한 종의로서 정조가 앓는 병의 치료에 참여한 바 있는 인물인 이동(李同)이란 인물에 관한 이야기도 적었다. 이동은 종기를 치료할 때 침법, 뜸법 이외에도 손톱·머리털·오줌·똥·침·때 등 모두 사람 몸에서 나는 것들을 약으로 썼다. 그는 사람 몸속에 스스로 좋은 약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이동은 임국서라는 의원에게서 배웠는데, 이후 과감하게 여러 약재, 특히 사람 몸에 있는 것을 써서 병을 고치는 시도를 하여 효험을 봤다.

태평성시도에 그려진 약방 모습_도시풍경(태평성시도, 太平城市圖) 3단 상단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태평성시도에 그려진 약방 모습_도시풍경(태평성시도, 太平城市圖) 3단 상단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명성을 떨친 의녀와 여의들

의녀 대장금은 텔레비전 드라마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이 덕택에 사람들이 조선 시대에 ‘의녀’라는 제도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 허준에 나오는 의녀 출신의 예진 아씨는 작가가 꾸며낸 허구의 인물이지만, 대장금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1515년부터 1544년까지 9개의 기록이 보인다. 이로부터 대장금이 무려 30년이나 내의원에서 근무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는 보통 의녀와 마찬가지로 관에 딸린 여종 출신으로 10대 중·후반에 혜민서에 들어와서 의학을 학습했고, 거기서 성적이 가장 뛰어나 내의원 의녀 정원에 결손이 생겼을 때 그곳에 선발되었고, 거기서도 성적이 출중해 1515년 무렵 임상에 투입되는 차비대령의녀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의 행적은 9개의 실록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비의 병을 돌보고, 왕후의 해산을 돕고, 남자 의관과 함께 대비나 왕의 병에 쓸 약에 대해 논하고, 구체적으로 왕의 소·대변불통을 진료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그림 속 의녀의 모습, 『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속 의녀의 모습, 『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의녀는 가부장적 유교이념이 완강했던 조선 사회의 산물이었다.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 부인의 진료를 남자 의원한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 초부터 천한 계층의 여아를 교육하여 의녀로 활용한 것이었다. 의녀의 주된 고객은 누구였을까? 『조선왕조실록』 등 정부의 공식 사료에 나타난 의녀 활동에 관한 통계를 보면, 전체 259건 중 243명이 궁중의 여성이었다. 나머지는 왕 등 궁중 남성 진료가 7건, 사족 여성이 5건, 사족 남성이 1건, 기타 2건이었다. 이를 보면, 의녀의 주된 고객이 궁중의 여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제약 속에서도 의녀는 자신의 전문적인 위치를 확고히 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가운데에는 대장금같이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인물이 적지 않았다. 대장금 이외에도 수많은 의녀가 실록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소비, 백이, 귀금, 장덕, 분이, 영로, 사랑, 개금, 강금, 신비, 은비, 계금, 열이, 의정, 선덕, 애종, 송월, 수련······의녀가 되지 않았으면, 이름 모를 관비로 역사에 뒤안길로 사라졌을 그런 존재들이다. 이 가운데 장덕은 세종의 충치를 고쳐 이름을 날렸으며, 애종은 선조 때 의술이 특별히 뛰어난 의녀로 평가받았고, 송월은 영조 때 침술로 이름을 떨쳤다. 누가 이들의 의술을 가볍게 여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