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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을, 겨울호-학교 조선시대]여훈서, 조선 여성 교육의 아이러니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1-02 조회수 : 224
여훈서, 조선 여성 교육의 아이러니
조선 시대 여성 교육에 접근하기 위한 요긴한 통로는 바로 ‘여훈서(女訓書)’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같이 여훈서는 순종적인 ‘태도’와 성실하게 집안일을 수행하는 ‘기능’을 여성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여훈서의 한 단면일 따름이다. 순종적이고 희생적으로 가족의 유지와 재생산에 복무하는 여성을 양성하고자 했던 여훈서는 역설적으로 여성이 ‘문자’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문자의 습득은 새로운 지식과 교양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작으로, 이것은 여훈서에 기반한 조선 여성 교육이 갖는 아이러니이다.
글 성민경 부산대학교 여성연구소 연구원
사람의 일생(평생도平生圖)
사람의 일생[평생도(平生圖)] 중 서당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가정교육으로서의 여성 교육

조선 시대의 여성은 궁녀나 기녀처럼 직역을 가진 특수한 여성을 제외하면 모두 ‘가정 내’의 존재였다. 때문에 조선 시대의 여성 교육은 애초에 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가정교육의 일환일 수밖에 없었다. 교육의 목적 및 내용은 시대정신에 기반한다. 주지하듯이 조선을 지배했던 이념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이 지향하는 사회구상은 향촌 사회를 기반으로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사람들의 참여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이다. 이를 위해서 사대부 남성들은 향촌 사회를 올바른 방식으로 이끌 도덕적 지도자로 활동해야 하고, 도덕적 지도자가 될 사대부 남성은 끊임없는 지적, 도덕적 수양과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종족집단과 학문적 네트워크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성리학의 사회구상은 ‘가(家)’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여성은 ‘가’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성리학의 여성 교육은 결국 사대부의 이상적인 사회상의 기초가 되는 ‘가’를 위해 여성을 어떻게 배치하고 여성이 어떻게 복무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핵심을 이룬다. 성리학의 사회구상은 여성 교육의 내용을 규정하기 이전에 ‘가’라는 단위를 배제하고서는 여성이라는 개념과 범주 자체에 대한 상상을 제한했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 여성 이해의 기저가 된다. 그러면 조선 시대 여성은 가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교육받았을까? 조선 후기의 농서(農書)로 알려진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수신에 대한 규범 및 가정 운영에 필요한 실용적인 지침을 다루는 「가정(家政)」편이 있는데, 거기에 ‘딸 가르치기[교여아(敎女兒)]’라는 항목이 있다.

딸자식은 열 살 안에 한글을 알도록 가르치고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베껴주어 윤리를 알게 할 것이며, 가을과 겨울에는 베를 짜고, 봄과 여름에는 누에를 치게 하여 잠시도 쉬게 해서는 안 된다.

- 유중림(柳重臨), 「가정·교여아(家庭·敎女兒)」,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권21

우선 딸에게 가르쳐야 하는 내용으로 한글을 들고 있다. 조선 시대에 여성이 문자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지만 여성에게 제한적이었던 것은 한글이 아닌 한자와 한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양반 여성들은 한자와 한문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한글은 편지 작성이나 소지, 단자, 의례 문서 등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글 교육은 집안 경영을 담당해야 하는 여성에게 필수적이었다. 이어서 윤리 교육으로는 『삼강행실』을 언급하고 있으며,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여공(女功)을 가르쳐서 잠시도 쉬지 않도록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딸 가르치기’는 조선 시대 여성 교육의 내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여공’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되는 직접적인 ‘기능교육’과 여성으로서 지녀야 할 덕성에 관계되는 ‘윤리교육’이다. 한글 교육은 기능교육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윤리교육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투나 용모뿐만 아니라 가정 내 일상에서 시부모를 모시거나 남편을 대할 때 등 구체적인 상황에서 지녀야 하는 태도와 마음가짐 등 성품에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다. 전근대 유교 문화권에서 여성으로서 갖춰야 하는 네 가지 덕[四德]인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용(婦容)’, ‘부공(婦功)’ 역시 부공이 기능교육, 나머지 세 가지는 윤리교육에 해당한다. 기능교육은 실제 현장에서 구술과 시범을 통해 이루어진 비중이 크기 때문에 현재 그 실상을 자세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윤리교육의 경우 다양한 문헌을 통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 실제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여성 독서 지형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단연 수신서이다. 수신서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조선 시대 여성 교육의 핵심은 윤리교육이었다. 여성 윤리교육의 요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신서 중에서도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제작된 ‘여훈서(女訓書)’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삼강행실도언해본
『삼강행실도언해본(刪定諺解三綱行實圖)』 임씨단족(林氏斷足),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조선 시대 여훈서의 전개

여훈서는 ‘성리학에 기반하여 여성의 존재에 대한 규정이나 행위의 규범을 체계적으로 담은 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여훈서의 사적 전개는 송시열의 『우암션.계녀셔』[이하 『우암계녀서(尤庵戒女書)』]를 기준으로 그 앞을 전기, 이후를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우암계녀서』가 기준이 되는 이유는 가장 유명한 여훈서일 뿐만 아니라 『우암계녀서』가 등장한 이후로 민간에서 다양한 사대부 여훈서가 속출하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는 국가 주도의 활발한 교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유교적 여성규범이 정립되고 정책적으로 전파되는 시기이다. 그 선봉에 있는 것은 세종 16년(1434년) 이래 꾸준히 간행되고 보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이다. 『삼강행실도』는 남녀 공통의 덕목으로 ‘효’를, 남성의 덕목으로는 ‘충’을, 여성의 덕목으로는 ‘열(烈)’을 제시하고 있다. 즉 『삼강행실도』 중 여훈서에 해당하는 것은 『열녀(烈女)』편[이하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이다. 『삼강행실열녀도』는 중국 단대사의 ‘열녀편’과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을 인용하여 만들어진 편집물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사례가 덧붙여져 있으며, 텍스트와 아울러 도상을 배치하여 교화의 효험을 제고했다. 『삼강행실열녀도』가 강조하고자 한 여성상은 ‘아내’로서의 여성이 유일하게 공인된 성적 대상자인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거나 그 가문의 유지를 위해 신체의 일부, 혹은 전부를 희생[從死(종사), 따라서 죽음]하는 ‘열녀’의 형상이다. 『삼강행실열녀도』는 이러한 여성의 존재가 고대의 이상세계인 삼대(三代)에서부터 당대인 명과 조선에까지 간단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열행의 실천이 불변하는 진리의 체현과 같다는 것을 실증하고자 했다.

“임씨는 낙안군사 최극부의 아내인데, 왜적이 쳐들어와서 잡혀 겁탈하려 하므로, 힘껏 저항하니, 한 팔 베고 또 한 발 베어도 여전히 듣지 않으므로 죽였다.” 『삼강행실도언해본(刪定諺解三綱行實圖)』 임씨단족(林氏斷足),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해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고전데이터베이스

조선 전기 여훈서의 전개과정에서 『삼강행실열녀도』와 함께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소혜왕후(昭惠王后)의 『내훈(內訓)』(1475)이다. 『내훈』은 『소학(小學)』을 중심으로 『열녀전』, 『여계(女誡)』 등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곱 장으로 엮은 것으로, 조선 최초로 성리학에 기반한 여성관과 여성규범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여훈서이다. 건국 초기가 지나고 어느 정도 체제가 안정된 중종 대에 이르면 일상을 규율하기 위한 서적의 필요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소학』 및 중국의 여훈서들이 언해되고 간행된다. 이렇듯 조선 전기는 체제 유지를 유한 제도적·이념적 기초를 다지는 시기로서, 각종 법제적 정비와 아울러 국가-왕실 주도로 여훈서가 편찬되고 그것이 표방하는 유교적 여성상이 조선 사회에 유포되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여훈서의 주류는 사대부 여훈서이다. 사대부 여훈서란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주로 사대부인 작자가 집안 여성들을 대상으로 제작한 여훈서를 지칭한다. 사대부 여훈서는 결혼 후 거주의 형태가 부처제(婦處制, 처가살이)에서 부처제(夫處制, 시가살이)로 바뀌면서 본격화된 시집살이를 전제로 한다. 물론 조선 후기 한반도 전체에 시집살이가 제도적으로 균질하게 정착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종법이 고도화됨에 따라 가부장제가 강화되어가는 조선 후기의 사회사적 흐름으로 볼 때, 시집살이 담론의 증가는 혼인 후 생활의 중심을 처가에서 시가로 옮겨오려는 꾸준한 노력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교적 뚜렷하게 그 성과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대부 여훈서의 전개는 이러한 흐름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러한 흐름을 보다 강화하려는 적극적인 실천이다. 스스로 성리학적 이상 국가의 수호자를 자임했던 양반 지식층들에게 국가를 구성하는 기초 단위인 ‘가’는 우선적으로 정비해야 할 대상이었고, 여성은 국가 구성의 기초 단위로서의 상징적 ‘가’뿐만 아니라 그들이 직접적으로 생활하는 물리적 ‘가’의 구성과 유지에 핵심이 되는 존재였다. 여성이 본격적으로 시집살이를 하게 되면서 가장들은 자신의 집에서 여성들을 실질적으로 관리·감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환경의 변화로 인해 장차 시집가서 내 집안의 명예를 보존하게 될 ‘딸’들, 혹은 우리 집에 시집와서 내 집안의 번영을 책임질 ‘아내’와 ‘며느리’들을 대상으로 보다 구체적이고 실생활에 밀착된 여훈서를 자체적으로 제작·보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책 읽는 여인
책을 읽는 여인, 윤덕희, 서울대학교박물관.
사대부 여훈서의 세계

조선 후기 사대부 여훈서의 직접적인 저술 동기는 대부분 대상 여성의 혼인이다. 다른 집으로 시집가는 딸, 누이동생, 질녀 그리고 우리 집으로 시집오는 며느리 등 집안의 여성이 혼인 후 시집살이의 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시집살이 매뉴얼’이 사대부 여훈서의 기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대부 여훈서의 특성을 좀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사대부 여훈서가 여성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한 사람의 부지런함 여부가 이처럼 가도(家道)의 흥망 여부에 연결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한원진(韓元震), 「남당선생한씨부훈(南塘先生韓氏婦訓)·제8장 간가무장(幹家務章第八)」, 『남당집(南塘集)』 권26

남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자기 집을 망치고, 여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남의 집을 망친다.
- 이덕무(李德懋), 「사소절(士小節)·부의(婦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27

여자의 선악에 시댁의 흥망이 매여 있고 친정의 영욕이 달려 있다. 한 몸이 두 집안에 관계되니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 박윤원(朴胤源), 「가훈(家訓)·여계(女誡)」, 『근재집(近齋集)』 권23

아! 인가의 성쇠는 부인의 현불초에서 말미암지 않은 적이 없다.
- 노상직(盧相稷), 「여사수지서(女士須知序)」, 『여사수지(女士須知)』

위와 같은 논조의 말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여훈서는 여성을 일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리고 사대부 여훈서는 여성을 남편에게 전적으로 종속된 존재로 규정한다. 이것은 삼종지도로부터 유래하는 오랜 관념이지만, 조선 후기 사대부 여훈서는 특히 며느리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혼인으로 맺어지는 남편과의 관계가 보다 부각된다.

[1] 녀ᄌᆞ의 년 앙망이 오직 지아비라 지아비 셤기기ᄂᆞᆫ 을 어긔오지 말밧긔 업ᄉᆞ니 지아비는 단 그른 일 ᄒᆞ야 셰생 용납지 못ᄒᆞᆯ 일 밧긔ᄂᆞᆫ 그 을 만분미진ᄒᆞᆫ 일이 업게 ᄒᆞ야 하ᄂᆞᆫ로 하고 한말과 한일을 어긔지 마라
- 송시열(宋時烈), 「지아비셤기ᄂᆞᆫ도리라」, 󰡔우암계녀서(尤菴戒女書)󰡕. [띄어쓰기-인용자]

[2] 부인은 평생의 영광과 수치, 기쁨과 슬픔이 다만 그 남편의 어질고 못남에 달렸다. …(중략)… 한번 발을 옮길 때도 감히 남편을 잊지 않고, 한마디 말을 할 때도 감히 남편을 잊지 않으며, 밤낮으로 공경하고, 혹 가장에게 수치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 한원진(韓元震), 「남당선생한씨부훈(南塘先生韓氏婦訓)·제3장 사가장장(事家長章第三)」, 󰡔남당집(南塘集)󰡕 권26

[3] 군자는 하늘이요 부인은 땅이라. 하늘에서 우레를 내리면 땅의 초목이 죽나니, 부인의 평생고락이 군자에게 달렸으니, 군자는 부인의 하늘이라. 어찌 공경치 아니리요.
- 조준(趙焌), 「경군자제이편」, 󰡔녀계약언󰡕

[1]은 여자가 평생 우러러보아야 할 대상으로 지아비를 설정하고, 그 방법으로는 오로지 뜻을 어기지 않는 것을 들고 있다. 대단히 그른 일로서 세상에서 용납받지 못할 일이 아니라면 한마디 말, 한 가지 행동이라도 어겨서는 안 됨을 강조한다. [2] 역시 남편에게 종속된 여성의 지위를 천명하고, 그러한 현실에 속에서 다만 남편을 공경하고 매사 남편에게 수치가 되지 않을까 염려할 것을 피력하고 있다. [3]은 음양론에서 유비되는 남녀관계를 바탕으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이 자연법칙과 다르지 않음을 주장한다. 요컨대 사대부 여훈서가 규정하는 여성은 일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기능적 존재이며, 존재론적으로는 남편에게 전적으로 종속된 존재이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자연스레 여훈서의 구성과 내용에 반영되었다. 사대부 여훈서의 구성은 작품마다 다양하지만 그 내용은 크게 ‘기능’과 ‘태도’로 요약될 수 있다. 일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는 존재인 여성에게는 기본적인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가정경영 전반에 걸치는 ‘기능’이 요구된다. 시부모와 남편 섬기기의 기초가 되는 ‘의복·음식’, ‘자녀교육’, ‘노비부리기’, ‘근검절약하는 생활’, 그리고 ‘봉제사(奉祭祀)·접빈객(接賓客)’ 역시 이 ‘기능’ 부문에 해당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적으로 종속된 존재인 여성은 그러한 존재론적 기반에 알맞은 ‘태도’를 요구받는다. 그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오로지 ‘순종’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일차적인 종속 대상인 남편에 대한 순종은 자연히 시부모, 시동생, 시누이, 친족 등 시가 구성원들에게까지 확장되며, 순종의 덕목과 관계되는 언어사용 및 갖은 행동거지들이 ‘태도’에 포함된다.

내훈촬요
『내훈촬요(內訓撮要)』,이경엄(李景嚴), 국립한글박물관.
여훈서와 여성의 문자 습득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보면, 사대부 여훈서의 목적은 매사 순종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근면하고 규모 있게 집안을 다스리는 ‘며느리/아내’로서 집안 여성을 양성하여 부계 중심의 유교 가부장제 가족의 유지와 재생산에 철저히 복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에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여훈서를 이러한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동전의 양면 중 한쪽만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나라 풍속은 중국과 달라서 무릇 문자의 공부란 힘을 쓰지 않으면 되지 않으니, 애초에 부녀자에게 권할 만한 것이 아니다. 『소학』과 『내훈』의 등속도 모두 남자가 익힐 일이니, 부녀자로서는 묵묵히 헤아려서 그 말씀만을 알게 하고 일에 따라 훈계할 따름이다. 부녀자가 만약 누에치고 길쌈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먼저 독서에 힘쓴다면 어찌 옳겠는가?

- 이익(李瀷), 『인사문(人事門)』, ‘부녀지교(婦女之敎)’,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6

이익은 우리나라의 풍속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의 공부가 힘을 들이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부녀자에게 권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중국과 풍속이 달라서 ‘문자’의 공부가 힘들이지 않고는 익히기 어렵다는 언급으로 보았을 때, 이때의 ‘문자’는 ‘한자’임을 알 수 있다. 부녀자가 ‘한자’까지 익히다 보면 자연스레 여공에 힘쓸 시간이 줄어들게 되기 때문에 애초에 가르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여성에게도 가장 많이 권장되었던 수신서인 『소학』이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내훈』마저도 남자가 익힐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녀자는 수신서가 전하는 말씀의 내용 정도만 알게 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상황에서 깨우침을 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익의 이러한 주장은 여훈서가 ‘문자’ 특히 ‘한자’ 습득의 통로가 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자 학습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여훈서의 예시를 살펴보자. 『내훈촬요(內訓撮要』는 이경엄(李景嚴)이 새로 들어오는 며느리를 대상으로 소혜왕후의 『내훈』을 발췌하여 1629년에 만든 필사본 여훈서이다. 이 책은 먼저 한문 원문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자에 일일이 한글로 독음 표기하고 해독을 위한 한글 토를 붙이고 있다. 그리고 한 단을 내려 언해가 이어진다. 독자는 원문과 언해를 비교하며 독서를 진행하게 되는데, 원문에 붙은 독음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자를 익힐 수 있고, 한글 토의 도움을 받아 ‘한문’까지 익히는 성과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누이를 대상으로 박문호(朴文鎬)가 1882년에 초고를 완성한 『여소학(女小學)』 역시 한자와 한문 학습서로도 기능할 수 있는 여훈서이다. 『여소학』은 한문 원문에 한글 독음뿐만 아니라 뜻까지 함께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훈촬요』보다 한자 학습에 있어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원문에 뜻과 독음을 병기하다 보니 한글 토는 난상에 배치하고, 토가 자리해야 하는 곳에 붉은색으로 점을 찍어 위치를 표시했다. 여훈서는 그 내용만으로 보면 유교 가부장제 가족의 유지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며느리/아내’의 양성에 그 목적을 두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위의 형식과 같은 여훈서를 열심히 읽은 여성은 ‘문자’, 특히 ‘한자’와 ‘한문’을 이해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죽은 여성의 삶을 기록한 글에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도 한문에 능통하여 독서를 하고 그 지식을 자식 교육에까지 활용했던 사대부 여성들의 삶이 드러난다. 조선 후기 여훈서는 여성으로서 교양에 첫발을 내딛는 디딤돌이었다. 여훈서를 통한 한자·한문의 습득은 여훈서 밖으로 여성의 독서 지평을 넓힘으로써 여성에게 제한적이었던 지식과 교양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장시켜주었던 것이다.

여소학
『여소학(女小學)』, 박문호(朴文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