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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을, 겨울호-학교 조선시대]조선 시대 왕실 교육-왕관을 쓴 자의 무게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1-02 조회수 : 206
조선 시대 왕실 교육 - 왕관을 쓴 자의 무게 -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하고, 왕관을 쓰려는 자 또한 그 무게를 감내해야만 한다. 조선의 왕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자정호(元子定號), 즉 차기 왕위계승자로 지목되는 순간부터 왕좌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그들이 왕관의 무게를 견뎌내기 위해 받아야 하는 교육과정이 얼마나 엄격하고 치열한 것이었지를 알게 된다면 조선의 왕을 바라보는 시선과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이른바 내성외왕(內聖外王)을 구현하는 유교의 이상적인 모델이자,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 바로 조선의 왕이다. 때문에 왕실에서는 왕위계승에 부족함이 없는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최고의 교육환경과 교육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성장 과정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교육기관을 설치하였고, 각종 의례를 거행함으로써 그들에게 권위와 지도자로서의 소명 의식을 내면화시켜 나갔다.
글 육수화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왕세자탄강진하도 병풍(王世子誕降陳賀圖屛風)(국립고궁박물관 소장)(공공누리1유형)
왕세자탄강진하도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출산과 안태

왕실에서는 출산 과정에서부터 왕후와 후궁의 위상에 차등을 두었다. 비빈의 출산을 돕기 위해서는 산실청을, 후궁의 출산을 돕기 위해서는 호산청을 설치하였는데, 산실청의 경우 출산 예정 3개월 전에, 호산청은 출산 예정 1개월 전에 설치하였다. 왕위를 계승할 원자가 탄생하면 대사령과 감세 혹은 면세, 감역 등의 특혜를 베풀고, 별시를 거행하여 인재를 등용한다. 또한 종묘에 아뢰는 고묘(告廟)를 행하고, 백관의 진하를 받는다. 대군과 왕자군, 공주와 옹주의 경우에는 통상 고묘와 진하를 행하지 않는다. 아기가 탄생한 후에 태는 즉시 백자 항아리에 넣어 산실 내의 미리 정해둔 길방에 두었다가 세태하는 날이 되면, 도제조 이하가 흑단령을 갖추어 입고 산실의 뒤뜰에 차례대로 서고, 의녀가 태항아리를 받들고 나와서 세태를 하게 된다. 세태를 마친 후에는 ‘某年某月某日(매년매월매일) 中宮殿(중궁전) 誕生(탄생) 阿只氏(아기씨) 胎(태)’라 적고, 뒷면에 삼제조와 의관의 성명을 적은 후에 도두모 안에 넣고, 상모전으로 사이를 두고 덮개를 덮어 의녀가 봉지하고 다시 넣어 예정된 길방에 두었다가 태봉을 택하여 묻는다. 출산에서 뿐만 아니라 안태지 또한 차등을 두었는데, 원자와 원손의 경우에는 1등지, 대군과 공주는 2등지, 그리고 왕자군과 옹주는 3등지에 각각 태봉의 낙점을 받아 태를 묻었다.

산실배치도
비빈의 산실 배치도. [출처 : 김호, <조선 후기 왕실의 출산 풍경>, 『조선의 정치와 사회』(집문당, 2002년)]
조선 왕실의 보육
- 보양청의 설치

보양청은 조선 시대 왕실의 원자나 원손이 어릴 때, 그 보호와 양육에 관한 책임을 맡기기 위해 설치한 보육 기관이다. 시강원의 부설기구로 원자나 원손의 탄생 후에 설치하였으며, 다른 왕실 자손들을 위해서는 설치하지 않았다. 원자보양청에 관한 자료로는 현재 경종, 사도세자, 문효세자, 익종(효명세자) 등의 보양청일기가 전해진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보양청의 설치시기는 대개 3세 이전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정조의 경우에는 보양청일기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정조가 3살 되던 1754년(영조 30년) 원손보양청을 설치하고, 이듬해부터 『소학』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 보양관의 선발

보양관이라는 관직은 종래에 없었던 것인데, 1518년(중종 13년) 중종이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보양을 위하여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당시 삼정승이 보양관을 겸하였으므로 청호는 없었으며, 보양청이라는 청호는 1689년(숙종 15년)에 확정되었다. 숙종은 경종이 태어난 이듬해 1월에 경종을 원자로 정호하고, 7월에 보양관을 차출하였으며, 보양관이 소속된 아문을 보양청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원자보양청과 원손보양청은 위상에 차이를 두었는데, 원자의 보양관은 3명이었고, 원손의 경우는 2명이었으며, 보양청의 처소는 원자의 경우 시강원에, 원손의 경우 궐내 관청으로 정하였다. 보양청의 인신(印信)은 원자의 경우 시강원인(侍講院印)을, 원손의 경우 예조의 봉사인(奉事印)을 사용하였다.

- 유모와 보모의 선발

보양청 시절은 원자와 원손의 본격적인 교육이 이루어진 단계가 아니라 보호하고 양육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보양청이 설치되면 보양관이 임명되지만, 실질적인 보육은 유모와 보모 등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역할이 막중하였다. 유모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원자나 원손의 등극 후에는 대전유모로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는 봉작과 함께 외명부 종 1품의 직첩을 부여받았다. 유모는 성품과 기질이 온순하고 혈기가 충만한 사람을 선발하였다. 『태산요록(胎産要錄)』에 의하면, 유모는 정신이 맑고 건강하며, 성정이 온화하며, 살은 찌고, 아무런 질병이 없으며, 서늘하게 해야 할 때와 따뜻하게 해야 할 때를 알고, 젖을 알맞게 먹일 줄 아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조절하여 삼갈 수 있어야 하는데, 유모가 지닌 품성의 후박, 성정의 완급, 골육의 귀천, 덕행의 미악은 아이들이 빨리 닮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유모의 성품과 기질 그리고 건강 상태는 가장 긴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선발 과정이 매우 까다로웠다.

조선 왕실의 조기교육
- 강학청의 설치

앞서 언급하였듯이 원자와 원손이 태어나면 보양청을 설치하여 보육을 담당하였고, 이들이 글 읽기를 시작하면 강학청을 설치하였다. 이때 보양청과 강학청은 별개로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 보육을 위주로 할 경우에는 보양청을 설치하고, 글을 읽을 무렵이 되면 그대로 이어 강학청이라 하였다. 강학청에서 본격적인 조기교육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내시인 사약(司.)이 일상에서의 다양한 예절을 가르쳤다고 한다. 현재 강학청 관련 자료로는 규장각에 소장된 숙종, 순조, 완화군 등의 강학청일기가 전해진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숙종은 5세, 순조는 7세, 완화군은 9세에 강학청이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 원자를 위한 최초의 기구를 둔 것은 태종 대의 일이다. 1401년(태종 1년) 양녕대군을 세자로 정하고, 이듬해 유신들 중에 문행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좌우유선·좌우시학·좌우동시학 등 원자요속으로 삼았다. 그리고 성균관의 동북쪽 모퉁이에 원자의 학궁을 짓고, 경승부(敬承府)라는 원자부를 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강학청의 전신이다. 1404년(태종 4년)에는 공신의 자제들로만 결성된 원자시직을 증설하였다. 원자의 시직을 모두 공신의 자제로 임명한 것은 뒷날 원자가 보위에 올랐을 때, 보필할 수 있는 친위세력을 사전에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시학은 강학을, 시직은 배위를 각각 담당하였다.

- 보양관의 선발

[왕실자손 사부의 품계]
품계/대상 一品官 二品官 三品官 四品官 五品官 六品官 七品官 八品官 九品官
堂上 堂下 參上 參下
원자 사부
보양관
원손 사부
보양관
대군 사부
왕자군 사부
왕손 교부

왕실에서는 그 교육 대상에 따라 교육 담당자의 위상에도 차등을 두었다. 왕세자의 사부는 정 1품, 왕세손의 사부는 종 1품이며, 원자의 사부는 정 2품, 원손의 사부는 종 2품이다. 그러나 대군과 왕자군의 사부와 왕손의 교부는 모두 종 9품으로 왕위계승자들과는 현격한 차등을 두었다. 왕위계승자들을 위한 교육은 왕실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대군과 왕자군, 왕손의 교육은 종친부에서 주관하였다. 원자와 원손의 보양관은 대개 3세 이전에 두었는데, 원자와 원손을 위한 사부는 일찍이 두지 않았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 비로소 원자와 원손이 6세가 되면 사부를 두게 하였으며, 원자사부는 정 2품으로, 원손사부는 종 2품으로 정하였다.

- 교육과정

조선 시대 왕과 왕세자의 교육과정은 『열성조계강책자차제(列聖朝繼講冊子次第)』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는 효종의 동궁 시절부터 순종의 동궁 시절까지 247년 동안 14명의 조선 후기 왕들이 등극 전후 이수한 교육과정을 총망라한 책이다. 각각 원손, 왕세손, 왕세자 시절과 등극 후의 과정을 단계별로 구분하였고, 경연과 서연, 그리고 소대와 야대를 세분하여 시강, 필강, 겸강, 진강, 중강한 날짜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각 단계의 교육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서연은 보통 한 책만을 가지고 하는 단강으로 이루어지지만, 보충할 내용이 있을 경우 다른 책을 겸해서 하는 겸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열성조계강책자차제』에 나타난 조선 후기 왕들의 조기교육

『열성조계강책자차제』에 나타난 조선 후기 왕들의 조기교육
묘호/나이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진종 사도세자 정조 순조 익종 헌종 순종
3 孝經小學抄選解
4 孝經小學抄略
童蒙先習
5 孝經 孝經小學抄千字文 小學抄略
6 童蒙先習 千字 孝經
7 小學 孝經 孝經 童蒙先習 小學 孝經
8 童蒙先習
小學
小學 童蒙先習
孝經
小學
小學
史略
小學抄略
史略
小學 孝經
小學

왕실에서의 조기 교육과정은 효경과 소학의 초선류(抄選類)를 마치면, 『천자문』, 『효경』, 『동몽선습』 등을 이수하였다. 이후 과정은 통상 사대부가에서 이루어진 교육과정과 같이 『소학』을 배우고 이후 『대학』을 배우게 된다. 구체적인 교육 방법은 숙종의 예를 통해 볼 때, 진도는 대문(大文)을 중심으로 대개 한 절씩 나갔는데, 절의 문장이 긴 경우에는 통상 2~3번으로 나누어 진강하였고, 더 긴 경우에는 4~5번으로 나누어 진강하기도 하였다. 진강은 이틀에 한 번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성장함에 따라 매일 학습으로 변경되었다.

조선 왕실의 왕위 계승 교육
- 세손교육과 세자교육

왕위계승자가 세손으로 책봉되면 세손강서원에서, 세자로 책봉되면 세자시강원(별칭 : 춘방)에서 각각 교육을 전담하였다. 이 무렵 배위기관인 세손위종사와 세자익위사(별칭 : 계방)도 각각 설치하여 이들의 신변에 더욱더 만전을 기하였다. 세자익위사 소속의 관료들 또한 학식을 겸한 인물들이 많았는데, 홍대용과 안정복 등은 그들의 학식을 인정한 영조의 명령으로 정조의 서연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계방일기(桂房日記)』라는 이름으로 정조와 서연에서 주고받은 내용들을 별도로 기록하여 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왕위계승자를 미리 결정하는 이유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국의 혼란을 막고, 왕위의 공백을 최소화하여 전대 왕의 정치를 안정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예비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덕목을 쌓아 군주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함양하려는 교육적 의미가 더욱 컸다고 하겠다. “오직 어진 사람이고서야 높은 지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어질지 않은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 그 악이 아래로 파급된다.”는 맹자의 말씀은 지도자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준다. 교육 방법은 매일 아침·점심·저녁 정규적으로 진행되는 법강과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소대, 밤에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야대, 그리고 매달 2번씩 회강을 통해 교육 정도를 평가받았다. 교재는 법강에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과 같은 경서(經書)를, 소대에서는 역사서를 위주로 진강하였다. 법강에서의 경서 교육은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유학적 소양을 함양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고, 소대에서의 역사서 교육은 역대 군주들의 통치 이념과 통치 방법을 거울삼아 현실 정치에 반영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진강은 매일 이루어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될 경우에는 강의를 정지하였다. 개강 일자는 길일을 가려 정하였으며, 진강 책자의 선정은 임금이 특별히 지시를 하거나 강관들이 임금에게 아뢰어 정하였다. 때문에 교육과정에 있어서 왕의 영향력 또한 적지 않았다. 영조의 경우 정조의 세손 시절 교육과정에 있어서 구체적인 교육 방법까지 일일이 지정하는 열정을 보였다. 이처럼 왕위계승 교육에 만전을 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신하들을 압도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우선 확보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순조 태항아리
순조 태항아리, 국립고궁박물관.
- 강무와 대리청정 그리고 사신의 접대

왕위계승자에 대한 교육은 비단 강학에만 치중되는 것이 아니었다. 심신의 수양을 위한 교육과 정사(政事)를 논하는 자리에 배석하여 정책이 논의되는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경청하는 자세를 우선적으로 배우게 하는 등 리더십 함양을 위한 다양한 교육이 병행되었다. 병권을 장악하기 위한 군사훈련(강무)과 대리청정을 통한 정치 실무에 이르기까지 왕관을 쓰려는 자가 감당해야 할 무게는 실로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치열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사신 접대를 통한 외교 실무는 왕세자에게 또 다른 교육 실무의 장이었다. 특히 중국 사신인 조정사(朝廷使)에 대한 접빈 다례의 경우 국가의 의전인 만큼 외교적으로도 상당히 중차대한 의식이었다. 등극한 이후에도 경연을 통한 교육은 물론 종친 간의 친목과 군신 간의 화합을 통해 그 권위와 권력을 유지해야만 하였던 것이 바로 조선의 왕이다. 그들에겐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 있었고, 통제와 소외가 아닌 “통찰”과 “소통”의 리더십을 지향하였다. 이는 오늘날 최고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소양과 덕목이기도 하다. 통치자는 곧 결정자이다. 그 결정이 공공의 이익에 부응한 것인지, 사리사욕에 기인한 것인지 늘 자신을 성찰하고 다스려 인욕을 막는 것이 나라 다스림의 선결과제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한 가지 일로써 만단을 처리하는 것이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지혜임을 조선 시대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영조는 강조한 바 있다. 자고로 왕이 왕 노릇하기 쉽다고 여기고, 신하가 신하 노릇하기 쉽다고 여긴다면 이는 곧 나라가 망하는 징조이고, 왕이 왕 노릇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신하가 신하 노릇하기가 어렵다고 여긴다면 나라가 흥할 징조라고 하였다. 한비자는 “삼류의 리더는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고, 이류의 리더는 다른 사람의 힘을 사용하고, 일류의 리더는 다른 사람의 능력을 활용한다.”고 하였으니, 지금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떠한 리더인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열성조계강책자차제
『열성조계강책자차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