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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을, 겨울호-학교 조선시대]조선조 사회 학동(學童)의 교육적 성장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1-02 조회수 : 196
조선조 사회 학동(學童)의 교육적 성장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배우지 않으면 사람 노릇 못한다”(人生斯世 非學問 無以爲人).

율곡 이이(1536-1584)의 『격몽요결』(1577) 「서문」의 첫 문장이다. 비슷한 취지를 담은 다음 글은 율곡의 간단한 문장을 조금 더 상세하게 풀이한 듯 여겨질 정도이다. “인간이라면 양육·훈육·지육·덕육 등의 단계를 거치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 인간은 단지 교육이 형성한 존재일 뿐이다”(1776). 이는 칸트(1724-1804)의 교육에 대한 강연록인 『교육론(Uber Padagogik)』(1803) 제1장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200년 시차를 갖고 있는 이 두 문장은 거의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권고는 동서를 막론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공자·맹자·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 등 선현들이 유사한 권고를 남겼다. 칸트의 말보다 200년 앞선 율곡의 언명도 율곡 개인의 창작이 아니다. 당시까지 선현들이 남긴 글 가운데 시대를 불문하고 지향할 만한 것들을 편집한 것이다.
글 김경용 한국교원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아희강밧는모양
아희강밧는모양, 김준근(기산 김준근 풍속화 모사복원품), 국립민속박물관.
‘가르칠 만한 자’에게 열린 배움의 길

유학사(儒學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한유(韓愈, 768-824)의 글[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자. 『권학문』의 일종으로 유명한 글이다.

欲知學之力(욕지학지력) 배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싶다면,
賢愚同一初(현우동일초) 현명한 이와 어리석은 이가 처음에는 같았음을 알면 된다네.
由其不能學(유기불능학) 잘 배우고 못 배우고 바로 그것에 따라서
所入遂異閭(소입수이려)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서게 된다오.
兩家各生子(양가각생자) 두 집에서 각기 자식을 낳았는데
提孩巧相如(제해교상여) 안고 키울 때 애들은 재주가 서로 비슷하고
少長取嬉戱(소장취희희) 조금 성장하여 모여 놀 때도
不殊同隊魚(불수동대어) 무리지어 헤엄치는 물고기들과 다를 게 없지만,
年至十二三(년지십이삼) 나이가 열두 세 살 즈음 되면
頭角秒相疎(두각초상소) 두각을 나타내는 게 조금 달라지며,
二十漸乖張(이십점괴장) 스무 살이 되면 점점 더 벌어지니
淸溝映迂渠(청구영우거) 맑은 냇물과 도랑의 구정물처럼 다르게 되고,
三十骨觡成(삼십골격성) 서른 살에 이르러 골격이 갖춰지면
乃一龍一豬(내일용일저) 하나는 용, 다른 하나는 돼지처럼 된다네.

현명한 인물이 되느냐 아니면 짐승만도 못한 이가 되느냐, 이는 배움에 달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뜻을 담은 슬로건을 내거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노릇 제대로 하려거든 잘 배워라!”는 권고를 수용하고, 이런 배움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과 제도를 갖추어 일상에서 실천하느냐에 있다. 평화를 희구했던 칸트의 염원을 정면으로 배반한 1·2차 세계대전을 상기하면 권고는 있으나 실천이 결여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다. 조선조 사회의 학동들에게는 배움의 길이 어느 정도 열려 있었을까? 대강 영조 대 이후 조선조 사회의 교육체제를 간략히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조선 후기 경향의 교육체제
조선 후기 경향의 교육체제

한성이나 각 지방에 서당이 있었고, 지방의 향교에 해당하는 한성의 교육기관은 사학이었다. 또한,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태학)이 한성에 있었고, 각 도(道)에는 관내의 유생들 가운데 출중한 인물을 선발하여 교육하는 도단위 교육기관 영학(營學)이 있었다. 경상도의 경우 대구의 낙육재(樂育齋)가 그것이고, 전라도의 영학은 전주에 자리 잡은 희현당(希顯堂)이었다. 현재 전주시 신흥중고등학교가 희현당 자리에서 개교한 신식학교의 후신이다. 그 교정에 전라도 영학인 희현당에 대한 2개의 사적비가 남아 있다. 한성과 지방의 유생을 가릴 것 없이 과거의 일종인 생원·진사시험(소과)에 입격하면 성균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경향(京鄕)의 교육체제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중앙의 사학이나 지방의 향교에 하부단위 교육시설인 서당이다. 여기에서 공부하는 인원은 일부 계층의 소수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는데, 본인이 능력만 갖춘다면 천민을 제외하고는 학업 참여에 제한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1732년(영조 8년)에 전국에 반포된 「권학절목」의 각 지방 면학(面學) 생도에 대한 규정에 “사족·평민을 막론하고 ‘가르칠 만한 자’(可敎者)라면 인원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면훈장이 담당하여 가르치라”(居齋儒生外 毋論士族中庶 各面 勿限數.擇其可敎者 使各面訓長 分掌敎導)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규정에, 면훈장이 담당할 교육대상자를 ‘가르칠 만한 자’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정 계층의 자식이나 별다른 집안의 후예라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르칠 만하다면 가르치라는 것이다. 이런 기조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야 형성된 게 아니라 매우 오래된 것이다. 주희(朱熹, 1130-1200)와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이 편집하여 1175년 경 출간한 『근사록』에 “옛날에 8세가 되면 소학에 들어가고 15세가 되면 대학에 들어갔는데, 재주가 ‘가르칠 만한 자’를 가려서 대학에 모으고 ‘못 미치는 자’[불초자(不肖者)]는 다시 농토로 돌아가게 했다”(권11 「교학류」)고 적혀있는데, 문구에 그친 허울뿐인 지향점이 아니라 조선 초에도 엄연히 지킨 대원칙이었다. 이런 문구는 우리 선조들이 남긴 문집에도 흔히 등장한다. 조선 후기 채지홍(蔡之洪, 1683-1741)의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학교에 들이지 않은 이가 없게 한다. 참으로 그 재주가 가르칠 만한 자는 가르치고, 재주가 없어 가르칠 수 없는 자는 농토로 돌려보내어 농부가 되도록 한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선비와 농부[士·農]가 구별되는 것이다[『봉암집(鳳巖集)』 권11, 잡저]. 이는 조선왕조 개창 직후 태종조에 성균관 대사성 권우(權遇, 1363-1419) 등이 올린 상소문에도 나타나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8세가 되면 왕공 이하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에 들어가던 법에 의하여, 1품으로부터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학(部學, 사부학당)에 들어가게 하여 소학의 책을 가르치기 시작 하고, … 평민들 가운데 ‘준수한 자’라면 태학에 들어갈 수 있던 법에 의하여, 대소인원 및 서인의 자제들 가운데 부학에 있는 자들은 식년마다 … 그 나이 15세 이상으로 이미 『사서』와 일경(一經, 오경 중 일경)을 읽고 … 자를 택해 다시 고시하여 입격한 자는 예조로 올려서 생원시에 나아가도록 한다(『태종실록』 1413.6.30.).

그런데, 당시에 한자를 익히고 경전을 풀이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에, 명나라든 조선이든 학교에 나아가 공부하는 인구 규모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다가 조선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훈민정음(한글) 창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기 명나라나 조선에서 한문을 익히는 것이 서로 다를 바 없었지만, 한글 창제·반포 이후에는 조선의 학동들에게 이전과는 획기적으로 달라진 문자 학습 조건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학습 조건의 혁명을 이끈 훈민정음

어문학자 최세진(?-1542)은 한글(언문)의 공효(功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대를 『훈몽자회』(1527년, 중종 22년)의 권두 「범례」에 적어 놓았다.

시골 변두리 지역 사람들 경우에는 언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많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 (이 책에) 「언문자모」를 함께 적어 놓았으니 그들로 하여금 먼저 언문을 배운 다음 이 『훈몽자회』를 공부하게 하면, 대체로 밝게 깨우치는 데 유익할 것이다.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역시 모두 언문을 배우고 『훈몽자회』를 알면, 비록 스승의 가르침이 없더라도 한문에 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번다한 「훈민정음해례」를 간략하게 정리한 「언문자모」를 익히고 『훈몽자회』 등의 문자 학습서를 『훈몽자회』 출간 이전에도 세조 대에 어명에 따라 문자학습서 『초학자회(初學字會)』가 작성되었다는 기록이 있고(『세조실록』 1458.10.15.), 분명히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훈몽자회』의 주(註)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초학자회』보다 앞서서 『문종어석(文宗御釋)』이라는 문자학습서가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으나(藻: 조 海ㅡ 又水草 文宗御釋말왐조 初學字會同) 현전하지 않는다. 공부하면 독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글의 창제·반포 이후에 조선의 인민들은 종래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전혀 다른 문자학습 조건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훈몽자회』의 권두에 제시되어 있는 「언문자모」는 『삼강행실도』(언해)(1482년, 성종12년 추정)나 『번역소학』(1518년, 중종 13년)·『여씨향약』(언해)(1518년, 중종 13년) 등 각종 언해서가 활발하게 출간되던 시기에 출간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핵심적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초학자회』·『훈몽자회』 등 한글설명 표기가 된 문자학습서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한자 학습 과정에서 한자를 아는 사람이 한자를 배우려는 학습자에게 1:1로 한자의 음(音)과 훈(訓, 뜻)을 가르치는 일을 반복했을 것이지만, 한글 창제·반포 이후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망각했더라도, 한글이 병기된 『초학자회』나 『훈몽자회』·『천자문』 등을 보면 그 한자의 음과 뜻을 상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최세진의 기대처럼, 한자를 가르쳐 줄 교수자가 없더라도 한글(언문)을 익히고 나면 『훈몽자회』 등 문자학습서에 한글로 표기된 음과 뜻을 더듬어 이해함으로써 한자를 어떻게 소리 내어 읽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헤아리는 독학(獨學)이 가능해졌다. 이런 문자학습 조건이 조성되었기에 『경국대전』에 “『삼강행실도』를 언해하여 전국 각 지역의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가르치라”는 법규를 넣을 수 있었으며[『경국대전』 「예전(禮典)」 장권(.勸)], 『여씨향약』(언해)은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충청도에서 가르치고 어린아이들까지 읽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중종실록』 1518.4.1.). 조선 전기에 마련된 이런 학습조건 덕분에 조선 후기에 학동들의 문자학습이나 경전공부는 가족이나 마을 어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앞서 소개한 「권학절목」(1732년, 영조 8년)의 면훈장·가교자 운운하는 조항 다음에 아래와 같은 규정이 이어진다.

각 면에 비록 훈장이 있지만 한 면의 거리가 멀게는 수십 리 가까워도 8·9리가 넘으니 학도들이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며 수학할 수 없으며 훈장도 학도들을 일일이 가르치기 어렵다. 평소 공부는 각기 부형(父兄)이나 근처에 사는 숙사(塾師, 소규모 향촌 교육시설 ‘향숙·리숙’의 교수자)한테서 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 두 차례 서원이나 산당(山堂)에 모여서 (면)훈장과 학도들이 경전에 나타나 있는 의미를 강론하여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평가하고 그 결과를 본관(수령)에게 보고한다(一. 各面雖有訓長 一面遠或數十里 小不下八九里 學徒不可朝夕往來受學 訓長亦難人人口授 各其父兄或比隣塾師 逐日課授 每月朔望兩次 約日期會於書院或山堂等處 訓長·學徒講論文義 考其勤慢 講紙報于本官).

「권학절목」에 면 단위로 담당 훈장[면훈장]을 정하여 학도들을 가르치도록 한다고 규정하였지만, 면훈장과 학도들이 매일 만나서 교수·학습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는 부형이나 숙사에게 배우다가 한 달에 두 차례 면훈장이 주관하는 모임[강회]을 가지라는 것이다. 면훈장, 숙사를 거론하는 이러한 규정은 교수자와의 접근성이 양호하지 않은 인원에 대한 배려를 담고 있으며, 학도들을 가르칠 만한 교수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도처에 편재해 있지 않고서는 설정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부형이 웬만한 교수자 역할을 할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인근에 학동을 가르치는 숙사들이 평소 교수활동을 하고 있음을 당연시 하고 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학동들은 평소 자기의 부형이나 인근의 숙사에게서 가르침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이들은 1차적으로 가족 또는 우리 마을이 가르친다는 것이다.

훈몽자회
『훈몽자회』(1527년, 중종22년) 「언문자모 <俗所謂反切二十七字>」의 일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초학자회필사본
필사본 『초학자회』(1458년, 세조4년)의 일부, 국립한글박물관.
향촌 교육의 실태

리-면-군(향교)으로 이어지는 교육계통에서 군 단위 교육기관인 향교에 학도들이 채워지려면 각 동·리에서 공부하는 학동들이 학업을 지속하면서 실력양성에 매진하고 있어야 하는데, 조선조 사회는 이에 필요한 교육시설과 교수요원을 갖추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향교에 시선을 두기 이전에 먼저 주목해야 할 교육시설이 동·리의 서당인데, 조선 후기 향촌 교육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앞서 말한 가교자뿐만 아니라 귀농자 역시 기본 교육수준 정도는 갖추도록 했기 때문이다. 조선조 말기에 한반도의 가장 벽지라고 할 수 있는 함경도에서 활동했던 인물 안교익(安敎翼, 1824-1896)의 기록을 보자. 함경도 지역에서 이랬다면 조선 전역이 이와 마찬가지였다고 추정해도 무방하다.

옛 법에 8세가 되면 모두 소학에 들이고 15세가 되면 그 가운데 준수한 자를 선발해서 대학에 들어가게 했다. 가르칠 수 없는 자는 농토로 돌아가게 하되 삼로(三老)가 가르치니, 삼대(三代)에 배우지 않은 자가 없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즉 지금 향약의 규약에 따라서 귀농한 백성을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치군요의(治郡要義)』 「각사리규모(各社里規模)」). 비록 자질이 거칠어서 귀농(歸農)하여 역(役)을 지게 된 자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여력을 다해서 독서하도록 해야 한다(『치군요의』 「권유교임첩(勸諭校任帖)」).

조선조 사회에서 학동들에게 교수활동을 했던 인물은 부형으로서 가족도 가르쳤고 숙사로서 인근의 학동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런 실례에 해당하는 인물이 남긴 일기를 근거로 조선 후기 학동들이 공부했던 교육과정(학습의 차례와 방법)을 살펴보겠다. 아들 삼 형제와 손자 및 인근의 학동들을 가르친 김인섭(金麟燮, 1827-1903)은 「권학절목」에 규정된 교수활동을 하는 부형·숙사 역할을 동시에 했던 인물인데 58년간 유지된 일기(『단계일기』)를 남겼다. 여기에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교수·학습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다. 김인섭은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몇몇 관직을 역임하다가 귀향하여 경상도 단성군 일대에서 후진양성으로 여생을 보낸 인물인데, 아들·손자는 물론 인근이나 멀리서 온 친인척 내지는 지인들의 자제 또는 전에는 모르던 내방인들을 자택이나 법계서숙(法溪書塾) 등의 서당에서 가르쳤으며, 비슷한 연배의 인물들과 토론·작시를 하며 교유하였다. 또한 서신으로 물어오는 질문(問目)에 대해 응답하는 일에도 성실했다. 숙사 역할뿐만 아니라 향교·양사재에 초빙되어 강회(講會)나 제술(製述)을 주재하는 강장(講長)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숙사로서 그의 활동에 특이한 것은 친척 동생(박복록)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 아비(박주로)도 가르쳤다는 점이다. 아저씨가 조카한테 배움을 청하였다. 1856년 1월 겹외삼촌 박주로에 대한 『십구사략』 강독을 김인섭이 진행했다. 종제(從弟) 김진기는 소과 초시에 입격한 적이 있는 인물인데 『한문공집(韓文公集)』과 『초사(楚辭)』를 김인섭한테서 수학했다. 친구한테 배우는 장면이 이채롭다. 심운택이라는 친구는 『대학』·『논어』·『시경』 등을 김인섭한테 배웠다. 심지어 권인성(字贊壽, 1827-?)은 1852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인물인데 김인섭에게 의문나는 점을 묻고 있다. 동갑인 이들은 전에도 『주서백선』을 함께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권인성이 1858년 한관(閑官)으로 고향에 머물 때 김인섭을 찾아 문답 토론한 것이다. 사돈총각(이갑징)과 두 사위(이기호·최병모)를 김인섭이 가르쳤다는 것도 이채롭다. 이갑징은 사돈을 맺은 이듬해인 1876년 2월부터 김인섭의 집에 기거하며 『통감』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소학』·『대학』을 익히는 데에 이르기까지 귀가와 체류를 반복하며 4년간 수학하였다. 김인섭은 이갑징이 학업에 부진할 때 질책하며 가족처럼 가르쳤고, 이갑징도 김인섭의 차남 기로와 어울려 형제처럼 지냈다. 김인섭은 아들·손자들의 공부를 돌보고 있는 터에 찾아온 인물을 더불어 가르쳤던 것이다. 김인섭의 교수활동에 등장하는 서책은 『십구사략』·『통감』·『소학』·『대학』·『논어』·『맹자』·『시경』·『주역』·『주서백선』·『초사』·『한문공집』 등이다. 김인섭을 찾은 학동들이 『천자문』을 익히는 등 기본적인 문자학습은 자기 집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밀양향교_명륜당_전면
밀양향교 명륜당.(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전주향교
전주향교.(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천자문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까지 학습 과정

김인섭이 학동들을 가르친 과정이나 자식을 가르친 과정이 서로 다를 게 없으므로, 장남인 김수로가 공부한 내력을 보면 당시에 학동들의 학습 과정을 헤아릴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경용(2023). 『시험의 나라, 조선』 은행나무. pp.91-126 . 참조. 김수로는 만 6세부터 『천자문』을 익히기 시작했고, 『천자문』을 모두 외운 다음에는 조부(김령, 1805-1865)가 손자들의 문자학습을 위해 장만해 둔 『역대천자문』을 공부했으며 틈나는 대로 『고문진보』와 글씨쓰기도 익혔다. 그다음에 공부한 책이 『동몽선습』이다(만 8세). 『동몽선습』은 왕세자 교육에도 활용되었다. 왕이 될 인물이나 일반인의 아들이나 공부하는 서책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숙종도 세자 시절 마찬가지로 공부했다.

왕세자 서연(書筵)을 열기 시작했는데 『동몽선습』을 강하였다(『현종실록』 1667.2.22.). 왕세자는 … 나이 12세에 『동몽선습』과 『소학』에 통달하였고, 작년부터 『소미통감』을 배워 문리가 날로 진보하였다(『현종실록』 1672.6.23.).

『동몽선습』은 삼강오륜과 중원대륙의 역사에 이어 한반도의 역사도 서술하고 있으며, 말미에 “조선의 문물과 제도가 중국의 것을 좇아 풍속이 아름다우니 중국인들이 조선을 일컬어 소중화(小中華)라고 한다”라고, 조선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조선의 선비들이 ‘소중화’를 자처했다고 말하지만, ‘소중화’는 조선의 선비들이 한 말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조선을 가리켜서 한 말이다. 중국인들이 조선을 일컬어 ‘소중화’라는 별칭을 붙인 것은 부러움의 소산이었다. 김수로가 9세에 『동몽선습』을 마치고 나서 접한 책은 『통감』이다. 이는 송나라 휘종(徽宗, 재위 1100-1125) 때 강지(江贄)라는 학자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지은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을 간추려 정리한 『소미통감절요』를 말한다.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이든 『통감』이든, 그것은 문자 학습과 문리를 깨우치는 것을 겸하면서도 역사 인식을 촉구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아동교육에 있어서 출발이 기본적으로 역사서 강독 위주였다는 점, 윽박지르는 식의 암기 강요가 아니었다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또한 김수로는 『통감』을 익히는 도중이나 이전에 『당음(唐音)』이나 고풍(古風)·두시(杜詩)· 연주시(聯珠詩) 등 시 학습을 하였다. 경전 이해 능력뿐 아니라 문장력 내지 한시 작성 능력도 함께 배양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시부(詩賦)·사장(詞章) 학습은 『소학』이나 「사서」·「삼경」을 배우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곁들여 이루어졌다. 경학 공부 이외의 이런 학습은 여럿이 함께 모여 공부하는 하과(夏課)와 관련이 되어 있다. 김수로는 아비한테 배우는 가내(家內)학습 이외에 향촌 공동체에서 시행한 집체학습에도 참여했는데 하과가 바로 그것이다. 대개 5월 초순부터 7월 초순까지 주변 학동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함께 학습하는 것이다. 그 장소는 인근에 위치한 서당 또는 민가 등을 활용했으며, 자세한 교육과정은 확인할 수 없지만 시·부 또는 문장 학습 위주로 공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공부에는 중요한 구절을 초록(抄錄, 일부 주요 문장을 베껴 쓰는 것)하는 방식도 빈번히 이루어졌는데, 하과 기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런 초록 작업은 단순히 주요 부분을 발췌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더 중요한 의의를 갖는 공부 방법이었다.

무릇 글이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는다고 해도 결국은 손으로 써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손이 움직이면 마음이 반드시 따르게 되므로, 비록 수십 번 반복해서 읽고 외운다 하더라도 한 차례 공들여 베껴 써보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반드시 그 요점을 뽑아낸다면, 일을 돌보는 데 자세하지 못했을 때 용납하지 않게 될 것이고, 반드시 그 현묘함을 캐낸다면, 이치를 헤아리는 데에 정밀하지 못하면서도 그만둬 버리는 일이 없을 것 아니겠는가? 이러는 가운데 또한 같고 다른 점을 잘 살펴 의문스러운 점을 기록하고, 옳고 그름을 확연히 구별하여 그에 대한 변론을 덧붙일 수 있다면, 앎이 더욱 깊어지고 마음이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 [『사소절』 「사전3(士典三)」]

이상은 용촌 이광지(李光地, 1642-1718)가 자제들에게 권한, 글을 초록하는 방법이다. 김수로는 『통감』 공부를 마친 후 바로 『소학』 공부를 시작했다. 1870년(만 11세) 윤10월 14일 『통감』 제15권까지 읽은 다음 날부터 『소학』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후 5차례 반복해서 『소학』을 읽었다. 1차로 『소학』(전 5권)을 모두 읽고 12월 28일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해서 총 5차례의 반복 독서를 마친 것이 이듬해 3월 19일이다. 약 5개월에 걸친 학습 과정이었다. 이어서 곧바로 『대학』을 읽기 시작했다. 「사서」를 먼저 익히고 「삼경」은 「사서」를 어느 정도 섭렵한 이후에 공부했다. 『대학』-『중용』-『논어』-『맹자』 순서로 「사서」를 공부했는데, 중간에 반복 학습이 첨가되는 과정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수학 방식은 반복 학습과 ‘단순→심층’ 학습이다. 김수로는 1개월 만에 『대학』을 암송하게 되는데, 두세 번 반복해서 읽으며 내용을 암기하려고 했고 결국 『대학』 전체를 암송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중용』을 공부했는데, 『대학』의 경우보다 더 긴 기간에 걸쳐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었다. 『중용』을 보름 동안 한 차례 읽은 다음 다시 『대학』을 1개월 동안 공부하고 암송하였다. 이어서 바로 『중용』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40일가량 7차례나 반복해서 읽었고 이어서 『대학』·『중용』을 한꺼번에 암송하였다. 다음으로 『논어』(전 7권)를 8번 읽은 다음 일곱 권의 내용을 며칠에 걸쳐 암송하는 것을 두 차례 하였고 이어 『맹자』(전 7권)를 9번 반복해서 읽은 다음 전체를 암송하였다. 「사서」 모두를 암송하게 된 다음에는 『논어』 심층학습을 시작하였다(24일간). 이를 마치자마자 『대학』·『중용』 심층학습(16일간), 하과를 마친 후 『중용』 심층학습(43일간), 『논어』 심층학습(34일간) 후 암송(2일간), 『맹자』 심층학습(55일간) 후 암송(3일간) 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삼경」 공부로 넘어갔는데, 「삼경」 공부 도중에도 간간이 「사서」에 대한 심층학습을 병행하였다. 『논어』 심층학습 후 2일간 암송하고 바로 이어서 『맹자』 심층학습 후 3일간 암송한(12월 29일 종료) 다음, 이듬해 1월 9일부터 『주역』을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질릴 만큼 지독한 독서-암송-강독의 「사서」 공부 과정을 반복한 다음에 「삼경」 학습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 시기는 김수로가 16세(만 15년 6개월가량)였으므로, 「사서」를 공부하기 시작해서 「삼경」 공부로 넘어가기까지 3년 9개월 정도 소요된 셈이다. 「삼경」은 『주역』-『서경』-『시경』의 순서로 공부했는데, 그 과정은 「사서」를 익히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삼경」 공부와 함께 「사서」 심층학습을 수시로 병행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사서」·「삼경」에 대한 치열한 공부를 수행하고 난 다음에(만 22세) 김수로는 처음으로 문과에 도전했다. 이런 학습 과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반복 학습의 중요성이다. 반복 학습은 기억력 증진·유지 및 이해력 배양에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김수로가 『천자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몽선습』·『통감』·『소학』 등을 거쳐 「사서」·「삼경」을 숙달한 뒤에 문과에 도전하기까지 약 16년 소요되었다.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김인섭 집안이 결코 부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인섭이 과거에 급제할 즈음에는 가난을 면치 못하는 매우 곤궁한 처지였고, 이후에 농업경영을 착실히 하여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중산층 정도에 머무는 경제력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집안에서 16세에 「사서」을 섭렵하고 이어서 「삼경」까지 곁들여 두루 익힌 다음(동시에 시·부와 문장 실력도 갖추고) 23세에 식년문과에 도전하는 아들을 길러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16세, 즉 요즘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정도가 되었을 때, 틈틈이 농사일을 거드는 형편에 있었으면서도 김수로가 「사서」를 섭렵하는 게 가능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의 경전을 읽는 순서나 공부 방식이 나름대로 효과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학습해야 할 대상에 따라, 학습자의 수준에 따라 방식을 달리하는 수업이 이루어졌고, 반복 학습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도록 단순 반복과 ‘심층학습 후 암송’이 반복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런 과정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식의 혹독한 훈련이 아니었다. 책 한 권을 마쳤을 때나 연초에 방학 기간을 주었고, 여럿이 모여 공부하는 하과(夏課)를 마친 뒤에는 더불어 공부한 동번(同番)들과 함께 인근 명승지를 찾기도 하였으며, 부자가 함께 지리산을 유람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연날리기나 물고기잡이[천렵(川獵)] 등도 즐겼는데, 이런 여유를 가졌던 것 이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저들의 부지런함과 겸손함이다. 아직 웬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부지런히 배우려는 자세와 실천이 없었다면 같은 책을 반복해서 치열하게 공부하는 역정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몽선습언해
『동몽선습언해』 마지막 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육의 목적, 만세태평(萬世太平)

이제 이 글의 첫머리로 다시 돌아가 보자. “배우지 않으면 사람 노릇 할 수 없다!”
배워야 사람 노릇 할 수 있는데, 배움에 나설 때 뜻을 세워[입지(立志)] 공부하라고 했다.

배움을 시작하는 이는 반드시 먼저 뜻을 세우되, 모름지기 성인(聖人)을 기약하여 털끝만큼도 자신을 작게 여겨 물러서거나 핑계 대려는 생각을 두지 말아야 한다. 보통 사람이나 성인이나 타고난 본성이 똑같다(『격몽요결』 「입지(立志)」). 배우는 자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하는데 … 만세태평을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 … 분발하고 힘써서 기어코 성인(聖人)이 되고야 말 것이다(『학교모범』 「입지(立志)」).

시시하고 어설픈 데에 뜻을 두지 말고 성인이 되고야 말겠다는 지향점을 가지고 공부하라 권고하면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조건을 달아 놓았다. “만세태평을 표적으로 삼으라!” 후세의 불행을 전제하거나 예고하는 당대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가르침과 배움은 교육이 아니다! 약탈과 살육으로 얼룩진 암울했던 19~20세기를 딛고 나아가, 살 만한 세상 태평세월 21세기를 도모하려면 특정 지역에서 당대만의 영화로움을 도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고 온 누리 만세태평을 추구해야 한다. 그게 445년 전에 율곡이라는 한 인물의 언설을 빌어 터져 나온 우리 조상들이 꿈꾸고 도모한 세상이다. 저들이 추구했던 것을 그 후예인 우리가 못할 리 없다. 조상들이 살아온 역사 속에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내일이 깃들어 있다.

선비들의 모임
선비들의 모임,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