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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을, 겨울호-학교 조선시대]500년 인재 산실, 한국의 서원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1-02 조회수 : 207
500년 인재 산실, 한국의 서원
인간이 집을 짓지만 집은 인간의 삶을 길들인다. 건축은 인간의 사상이 집약된 화석이다. 한국의 서원은 어떻게 조선 500년의 인재를 키우는 산실이 되었을까?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사상은 어떻게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공간, 한국의 서원을 설계하였을까? 2019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곳의 서원에는 퇴계를 비롯한 한국의 대표적인 학자 9명의 사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 미래의 인재를 키우는 비밀이 담겨 있었다. 또한 9곳 서원은 제각각 장소와 공간의 모습은 다르지만 제향자의 철학과 사상에 맞추어 독창적인 서원 공간을 유지하고 있다.
글 김희곤 건축가,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 저자 / 사진 김희곤, 미술문화
혁명적인 교육기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꾀하는 한국의 서원 탄생 비결은 무엇일까? 공자의 위패를 모신 조선 시대 공교육기관, 향교는 점차 과거급제를 위한 출세 수단으로 전락했다. 평민이 양반이 되는 길은 과거급제뿐이었다. 평민 출신 과거시험 합격자가 전체의 40~50% 수준이었다. 18세기 중반 정조 이후 평민 출신의 급제자 비율이 크게 증가했으며 고종 때에는 60%에 육박했다. 오늘날 고등학교가 ‘대입 수능 서열화’ 선별장치로, 대학은 ‘취업 도구’로 전락하였듯이 말이다. 이런 연유로 출세 수단이 아닌 인격과 덕성을 함양하는 새로운 학교 모델이 요구되었다. 이를 인식한 학자 주세붕(1495-1554)은 1541년 풍기 군수로 부임하자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1243-1306)을 모시는 사당(문성공묘)을 세웠다. 또한 1543년 강학 공간을 겸비한 조선 최초의 백운동 서원은 소백산 비로봉 아래 태백산 신선이 노닐던 마을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당시 백운동 서원은 안향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중심이고 서원은 단지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에 불과하였다. 독자적인 조선 서원이 정착되고 보급된 것은 퇴계 이황(1501-1570)에 의해서였다. 이황 선생은 교육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백성과 사림으로 나누고 교육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의 풍속과 관습을 바로잡고 학문을 올바른 방향으로 설정하는 것에서 기한다고 보았다. 이후 선조 대에 ‘동방 5현’으로 불리며 대표적 사림 출신인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문묘(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시는 성균관의 사당) 종사가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조선 서원은 마침내 제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서원 건축을 주도한 성리학자들은 우주론적 인식과 인성론을 근간으로 한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에 심취하였다. 이는 과거시험을 통해 성장한 사대부들이 경전자구해석에 치중하였던 종래의 유학(훈고학)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자구책이었다. 그들은 서원을 단순히 교육공간만이 아니라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수양처[藏修(장수), 책을 읽고 학문에 힘씀]로 이해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9개의 서원은 모두 다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왕조 500년의 사상적 초석 위에 민족정기를 세운 인물들이다.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영주 소수서원, 함양 남계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장성 필암서원, 달성 도동서원, 안동 병산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 돈암서원은 하나같이 독특한 배치와 건물구조 및 디테일로 선각자의 사상을 담고 있는 건축백화점이다. 조선의 서원은 중국의 백록동서원을 모델로 하였으나, 한국만의 독자적인 서원으로 꽃피웠다. 우리나라 김치가 배추는 중국에서, 고춧가루는 일본에서 들여와 독창적인 발효식품이 되었듯이 한국의 서원 역시 중국에서 수입해 우리 민족만의 독창적인 교육기관으로 발전되었다. 이 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9개 서원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 필자가 쓴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등재 9개 서원은 하나같이 제향자의 사상을 건축공간 속에 독창적으로 투영하였다. 산수가 빼어난 곳에 터를 잡았지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였다. 여유(노는 것)와 긴장(공부하는 것)을 들숨과 날숨처럼 반복하며 선각자의 학문 세계로 날아갔다. 건축의 주인은 인간이다. 역사의 주인도 인간이듯이 서원의 주인은 배움의 주체인 젊은이들이다. 우리는 그동안 압축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 챙기다 소중한 가치를 놓쳐버렸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 깨달은 진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것이다. 가장 세계적인 창조는 우리 문화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술은 표절이 아니면 혁명이다.”라고 했던 고갱의 말처럼 한반도에도 혁명적인 교육기관이 탄생한 것이다. 그 혁명적인 사상이 숨 쉬던 공간은 바로 한국의 서원이다.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우리 교육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는 오래된 미래이기도 하다. 한국의 서원만큼 빛과 그림자가 선명한 건축도 드물다. 그러나 빛은 그림자에 쌓여 있을 때 더욱 빛난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원에 제향된 9명의 인물은 하나같이 암울한 그림자 속에서 민족의 방향을 제시한 선각자들이자 우리 민족의 미래를 밝히기 위해 기꺼이 등불이 된 인물들이다.

한국건축의 매력, 시중(時中)의 건축

서원의 전형은 이 시기 사람의 영수이던 퇴계 이황 선생에 의해 정립되었다. 퇴계는 기존 향교와 차별화되는 서원을 제안하였다. 향교가 마을에 자리 잡아 번잡한 것과 다르게 서원은 산수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학이라 지방관으로부터 불필요한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과거나 이권에 거리를 둘 수 있다고 믿었다. 성인의 학문인 도학(주자 성리학)을 배우고 의리와 덕성을 함양할 인재(사림)를 양성하는 장소로서 서원이 제격이라 믿었다. 때문에 퇴계가 풍기 군수로 부임하는 순간 서원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퇴계가 구상한 서원구조는 강당과 서재로 대표되는 강학 공간과 학문의 사표가 되는 인물에 대한 제향 공간인 사묘(사당)로 이루어졌다. 자유로운 강론 중심의 학습 방식, 배운 것을 익히고 덕성을 함양하는 학습규칙을 제정하였다. 자기 주도적인 학습으로 학문을 수련하는 장수(藏修)공간으로서 실천규정을 정립하였다. 그 속에 독서법, 서원운영과 관련된 제반 규칙을 조목조목 수록하여 조선 서원의 체계를 마련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마침내 휴식(유식), 공부하는 교실(강학), 멘토(제향)를 기리는 3가지 공간으로 이어지는 조선만의 서원이 탄생할 수 있었다. 서원의 배치와 공간구성은 주변 산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국의 서원은 자연의 숨구멍이다. 서원이 자리한 산수 경관은 건축과 자연을 하나의 문맥으로 연계하며 그 장소만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주변 자연경관과 건축을 하나의 유기체로 엮어냈다. 건축 배치에서 중심축이란 공간의 질서를 잡아주는 중심선이다. 그 선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는 것은 고대 신전에서부터 이루어진 건축 수법이었다.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은 중심축을 따라 누각, 중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게 줄을 서고 있다. 도동서원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중심축은 나머지 8개 서원에서도 나타나지만 그 내용은 조금 다르다. 기본적으로 중심축을 따르지만 대지의 여건과 제향자의 사상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유연함이 우리 건축의 매력이다. 그 매력을 시중(時中)의 건축이라 부른다. 모든 터가 대칭과 중심축을 구현하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대칭구조를 수용할 수 없는 터에 무리하게 중심축과 대칭을 강요하다 보면 오히려 더 어색할 수 있다. 산과 구릉이 많은 지형 조건에서 개념적으론 중심축을 받아들되 지형 조건에 따라 부분적으로 축을 비틀고 깨뜨리면서 조화를 꾀한 것을 시중의 건축이라 부른다. 전체적인 구도를 유지하면서 단위 건물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한국건축의 매력이다. 부분적으로 축에서 자유로운 균형의 건축을 시중의 건축이라 부르며, 시중의 건축은 한국 서원의 진정한 매력이다.

강세활필 도산서원도(1970)_국중박
강세황의 도산서원도(1751년), 국립중앙박물관.
퇴계의 사상이 머문 곳
1. 한지 창문으로 햇살이 굴러다니는 안향 선생의 소수서원 紹修書院

소수서원의 배치는 크게 유식 공간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강학 공간, 제향 공간, 기타 시설로 나뉘어 있다. 소나무 보호림 속에 담장을 두른 소수서원은 평지에 아늑한 배치로 앉아 있다. 그에 비해 유식 공간은 죽계의 자연을 앞마당으로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강학 공간, 제향 공간, 기타 시설들은 모두 고려 시대 숙수사 주초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소수서원
소수서원, 동서남으로 열린 명륜당.
2. 자연에 그린 퇴계의 마음, 이황 선생의 도산서원 陶山書院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 직접 지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그리고 퇴계 사후에 지은 도산서원이 융합되어 있는 이원 구조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평생 자연을 아끼고 사랑한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설계 도면을 그리고 지은 도산서당이 퇴계 사후 도산서원으로 확장되었다. 도산서당은 퇴계의 자연관이 개방되어 있지만 도산서원은 담장으로 막혀 자연으로 흐르는 시선축이 차단되어 있다. 그럼에도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은 교묘하게 서로의 역할을 수행하며 화계를 축으로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퇴계가 그의 생각을 접고 또 접어 수없이 망치질하여 지은 도산서당은 작지만 옹골차고, 볼수록 치밀하다.

도산서원 도산서원
도산서원, 도산서당과 서원을 이어주는 화계.
3. 병산을 홀로 마중하는 류성룡 선생의 병산서원 屛山書院

퇴계의 제자이자 정치가겸 학자인 서애 류성룡 선생이 터를 잡은 곳에 병산서원이 대범하게 병산을 마주 보며 서 있다. 병산서원은 건축적인 완성도에서 보면 가장 완벽한 건축물이다. 군더더기가 없이 단순한 공간으로 자신의 할 말을 다하고 있는 건축이다. 병산서원의 장점은 전통 풍수의 관점에서 보면 강 건너 병산 살이 막고 있어서 서원 자리로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만대루가 구조적, 공간적, 예술적으로 완벽하게 자리하여 병산서원만의 독창성을 완벽하게 발휘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대지의 단점을 건축 공간적으로 완벽하게 역전시킨 건축이다. 자신을 비워 병산을 품은 만대루를 바라보면 9회 말 만루 홈런을 친 느낌이다.

병산서원
병산서원,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병산.
죽음으로 지조를 지킨 곳
1. 천지간의 좀벌레 정여창 선생의 남계서원 .溪書院

천지간의 좀벌레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시는 남계서원은 고고한 학 한 마리가 남계로 부리를 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소나무 숲 사이 남계서원이 도드라지게 앉아 있는 남계서원은 한 마리 학이 남계 들판에 부리를 세우고 있는 듯하다. 연화산 끝 줄기에 앉아 소나무 숲을 날개 삼아 남계 들판 너머 지리산을 굽어보고 있다. 남계서원의 배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언덕 위의 사상 영역과 언덕 아래 유식, 강학 공간이다. 이는 강학 영역을 먼저 짓고 사당을 나중에 짓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타난 배치 형식이다.

남계서원
남계서원, 풍영루에서 바라본 강학 공간.
2. 봉황의 둥지 이언적 선생의 옥산서원 玉山書院

도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이 생전에 살았던 독락당 아래 자계 변 세심대 위에 봉황이 알을 품은 모양으로 옥산서원이 앉아 있다. 옥산서원은 자계를 외면하듯 몰래 품고 있다. 옥산서원의 공간구성은 자계로부터 철저하게 차단하며 목적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풍수에서 말하는 봉황의 둥지를 만들기 위해 모든 건물은 벽으로 존재한다. 막고 막지만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시선 하나를 열어두었다. 강당의 대청마루에 오르면 마침내 자옥산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언적 선생의 사상을 시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옥산서원
옥산서원, 구인당에서 무변루 지붕 위로 드러나는 자옥산 봉우리.
3. 사상의 축에 안긴 김굉필 선생의 도동서원 道東書院

의리의 유학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은 은행나무에서 시작된 진입 축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장 사당으로 이어진다. 극도의 긴장 속에 발산하는 생기가 층층 계단으로 흐른다. 도동서원은 곧게 뻗은 사상의 축에 모든 건축물이 대칭으로 안겨 있다. 이는 의리의 유학자 김굉필 선생의 사상을 서원 배치에 담아낸 것이다. 죽음 앞으로 지조를 지키며 꿋꿋하게 걸어간 학자의 삶을 서원 공간에 실현해놓았다. 환주문 사모 지붕의 정점이 곧장 낙동강으로 날아가는 개구리 섬은 김굉필 선생이 도달해야 하는 이상 세계였다.

도동서원 도동서원
도동서원, 일자축 진입로 마중하는 환주문 뒤의 중정당.
초야에 은거하며 인재를 길러낸 곳
1. 고개 돌려 사당을 흠모하는 김인후 선생의 필암서원 筆巖書院

평지에 앉아 있는 필암서원은 도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호남 학맥의 본산으로 예를 실천하는 도장이었다. 필암서원은 평지에 배치되어 있어서 외부에서는 내부공간의 구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필암서원 배치의 가장 큰 특징은 확연루와 강당이 남쪽으로 바라보는 듯하지만 공간적으로 사당으로 열려있다는 것이다. 이는 김인후 선생이 평소 주창한 예의 공간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스승의 사상을 공간 속에 실현하기 위해 확연루와 청절당이 북향으로 앉아 있는 것이다.

필암서원
필암서원, 청절당이 북향으로 열려 우동사를 바라보고 있음.
2. 민가에 둘러싸인 최치원 선생의 무성서원 武城書院

산수풍경이 빼어난 곳에 자리한 일반 서원과 다르게 무성서원은 민가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홍학과 교화를 목적으로 지어진 무성서원은 9곳 서원 중에서 유일하게 마을 가운데 앉아 있었고, 서원 앞마당은 마을로 열려 있었다. 무성서원은 이 지방에서 선정을 베푼 통일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을 모시고 있다.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에 비해 그 규모가 조촐하였다. 이는 마을에 기대 서원이 유지되었기에 서원 부속시설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무성서원
무성서원, 마을 가운데 현가루 뒤로 보이는 명륜당.
3. 3대 문화가 공존하는 김장생 선생의 돈암서원 遯巖書院

평지에 나른하게 배치되어 있는 돈암서원은 우리나라 예학의 종장 사계 김장생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그 모습이 마치 호수 위에 배가 떠 있는 듯 아늑하다. 돈암서원은 9곳 서원 중에서 3대 문화가 공존하는 유일한 서원이다. 넓은 대지에 듬성듬성 건물이 서 있어서 전체적으로 긴장감을 자아내지 못하였다. 응도당은 홀로 떨어져 있지만 서원의 으뜸 건물로서 그 웅장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양성당은 소박하지만 그 낭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무성서원
돈암서원, 웅장한 응도당의 측면 눈썹지붕.
위기지학의 한국 서원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은 한국의 서원을 우리 땅에 정착시킨 퇴계 이황 선생이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한 문장이다. 누구라도 산수 빼어난 곳에 자리한 한국의 서원을 찾아가면 현실 너머 이상 세계를 꿈꾸며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 이상 세계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 속에 있음을 한국의 서원 건축이 말하고 있었다. 한국의 서원은 세속적인 인물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면을 통찰하여 스스로 성장하는 인물로 키우는 조선 시대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21세기 디지털 플랫폼에서 모든 지식을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과 닮았다. 9명의 독자적인 사상의 집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갔던 사상의 발전소이자 자연 속의 아름다운 학교였다. 한국의 서원 건축 9곳은 그 장소마다 독특한 자연을 억지로 틀거나 조정하지 않고 그 장소만의 가치에 가장 적합한 건축공간을 조영하여 젊은이들을 성장시켰다. 한국의 서원 건축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 소나무의 옹이처럼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서 다시 일어서서 그 충만함으로 타인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21세기 한국 교육의 비밀이 한국의 서원에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