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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을, 겨울호-학교 조선시대]조선 시대의 전문교육 - 역학, 의학, 율학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1-02 조회수 : 253
조선 시대의 전문교육- 역학, 의학, 율학 -
조선 시대는 통치 이념으로 유교적 질서를 선포했고, 국가에서 유학적 이념을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다. 조선 시대의 학교에는 관학(官學)으로 성균관, 향교, 사학(四學)이 있고, 사학(私學)으로 서당, 서원이 있다. 이런 학교를 통해서 성리학적 윤리에 입각한 관료를 양성했고,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유교 윤리를 보급했다. 그러나 조선은 유교 사회이므로 유학 이외의 학문을 잡학(雜學)이라 통칭했다. 잡학은 전문기술과 관련된 학문으로 역학, 의학, 율학, 산학 등이며, 오늘날 외국어, 의학, 법학, 수학 등과 같은 전문교육 영역이다. 특히 조선 시대는 유학을 숭상했던 양반 관료 사회였기 때문에 국가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전문기술직 관료의 선발마저 잡과(雜科)로 분류하면서 등한시했다. 잡과에는 역과, 의과, 율과 등이 있고, 선발 절차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로 구분했다. 초시는 각 부문의 관청에서 제조(提調)와 예조당상(禮曹堂上)이 실시했고, 복시는 예조에서 감독했다.
글 이동기 영남대학교 천마학부대학 교양학부 교수
조선 통신사 행렬도_부분 조선 통신사 행렬도
조선 통신사 행렬도 속 역관(譯官), 1636년(인조 13년), 국립중앙박물관.
사역원을 통한 외국어 전문인 양성

조선 시대의 외국어 교육은 역학(譯學)이었다. 역학은 역관의 양성과 공급, 그리고 외국어 번역 등에 종사하는 인재를 양성했다. 역학은 고려 시대의 통문관(通文館)에서 비롯되었고, 공양왕(恭讓王)에 이르러서 사역원(司譯院)으로 개칭되었다. 사역원이 조선 시대의 역학교육을 담당했으며, 역학에는 한어(漢語), 몽어(蒙語), 왜어(倭語), 여진어(女眞語) 등이 있었지만 한어가 가장 중요했다. 왜냐하면 한자는 지배 계층이나 귀족들의 의사 전달에 중요한 수단이었고, 대외 관계에 있어서 외교 문서를 작성하고 사서(史書)를 편찬하는 데에 중요한 언어였기 때문이다. 외국어 전문인을 양성하는 역학은 역과(譯科)로 선발했다. 선발 인원은 초시에서 한학 23명, 몽학·왜학·여진학 각 4명으로 전체 35명이었고, 복시에서 한학 13명, 몽학, 왜학, 여진학 각 2명으로 전체 19명이었다. 특히 국가에 경사가 있을 경우에 선발하는 대증광시(大增廣試)에서 사학(四學) 생도를 각 2명씩 추가로 선발했다. 응시 자격은 제한이 없었지만 주로 중인층이 응시했다. 사역원의 교육과정은 오늘날의 강독인 강서(講書), 필사하는 사자(寫字), 번역하는 역어(譯語)의 3개 영역으로 구분되었다. 강서 교재는 유학 경전인 사서(四書)와 외국어 교육에 필요한 전문교과인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 직해소학(直解小學) 등이며, 강서 방법은 임문(臨文)과 배강(背講)으로 구분했다. 임문은 책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는 교과였고, 배강은 과제로 제시된 책의 내용을 암송하는 교과였다. 강서에는 날마다 강독하는 일강(日講), 열흘마다 강독하는 순강(旬講), 보름마다 강독하는 망강(望講), 한 달 만에 강독하는 월강(月講)이 있다.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한학에는 사자(寫字)과목이 없었고, 몽학, 왜학, 청학에는 강서가 없었다. 한학의 사자는 한자이고, 몽학, 왜학, 청학은 그 자양(字樣)이 특이하기 때문에 그 내용도 다양하여 의도적으로 제외시켰다. 역학교육의 효율성을 최대한으로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가 시행되었다. 즉 교육 방법에는 서종법(書從法), 철저한 회화 훈련, 출석 독려, 공동 학습과 분담 지도, 엄정한 평가와 누가기록(累加記錄)의 활용 등이었다. 『대전속록(大典續錄)』에 의하면, 서종법은 독서 권장과 그 실적을 평가하는 방법이었다. 서종법은 매일 또는 매월 독서 목표량을 정하여 필독하며, 때로는 독서한 내용을 임의로 추출하여 매월 평가하여 그 평점과 독서 분량을 개인별로 기록했다. 개인별 기록에 따라 독서의 한도를 어긴 자나 독서에 태만한 자는 처벌하고, 실적이 우수한 자는 근무평정이나 승진에 반영했다. 오늘날에도 외국어 교육은 교재 읽기가 중시되기 때문에 서종법은 역학교육에 중요한 방법이었다. 또한 역학교육은 출석을 중시했다. 출석은 성균관 유생의 원점법(圓點法)에 근거했다. 원점법은 성균관 유생이 아침과 저녁에 식당에 비치된 명부에 도기(到記)하여 날인하면 1점을 부여하던 제도였다. 출석점수인 원점을 부여하여 응시 자격을 허락하거나 취재 및 서용(敍用, 관직을 줌)에 반영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무단 결석자나 핑계를 이유로 출석하지 않는 자는 정도에 따라 가동(家., 한 집안의 종을 이르던 말)을 구속하거나 취재와 서용의 불허 및 충군(充軍, 군역에 복무함) 등으로 엄격하게 처벌했다.

전의감을 통한 의학 교육

조선 시대의 의학 혹은 의술에 관한 교육은 고구려의 시의(侍醫)와 고려의 태의감(太醫監)에서 비롯되었다. 시의는 왕의(王醫)였고, 태의감은 의약 제조와 치료를 담당했다. 조선 시대의 의료기관은 삼의사(三醫司)인데, 바로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暑)였다. 그중에서도 전의감이 의학행정의 중추적 기관이었으며, 의학 생도의 교육과 의학 습독관의 훈련을 담당하는 주무관청이었다. 조선 시대의 의관은 의과와 취재로 나눌 수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의과는 초시에 선발 인원이 18명(대증광시는 22명)이었고, 복시는 선발 인원이 9명(대증광시는 10명)이었다. 의학의 교과목에는 손목의 맥을 짚어 보아 병을 진찰하는 진맥법인 『찬도맥(纂圖脈)』, 침술과 뜸을 뜨는 일을 기술한 『동인경(銅人經)』, 집맥(執脈)에 관한 『직지맥』(直指脈), 강서의 교재인 『득효방(得效方)』, 여성의 질병에 관한 『부인대전(婦人大典)』, 산부인과 계통의 처방인 『태산집요(胎産集要)』, 위급한 환자의 병명과 치료법을 수록한 『구급방(救急方)』 등이 있다. 조선 시대의 의학교육은 현재처럼 전문별로 세분화되지 않았지만, 각 의서의 성격으로 판단할 때 의학원론, 진맥, 조제, 응급치료, 부인병, 천연두, 약리, 침구 등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다. 의서의 습독(習讀)은 일재강독(一齋講讀)의 방법이 아니라 성균관이나 향교의 학생처럼 개별학습이 기본적인 형태였다. 그 이유는 교육기관마다 정원은 있었지만, 수업연한이 없으므로 등제(登第), 승진(陞進), 타직 제수 등에 의하여 학생 구성원이 수시로 변동되었기 때문이다. 의학교육의 진흥책에는 엄격한 교육과정을 적용하여 개인별 독서 기록을 남겼고, 출사(出仕)를 독려하기 위해 취재나 응시에 원점법을 적용했다. 또한 의서 습독의 편의와 제약(製藥)의 기술을 수련하기 위해 의생방제(醫生房制)를 실시했고, 전문적 의관의 훈련제인 분문강습법(分門講習法)을 활용했다. 즉 의술의 수련을 위해 진맥, 용약(用藥, 조제), 점혈(點穴, 침구) 등의 실습 훈련과 숙련된 의관의 치료에 의생(醫生)이 수행하여 임상을 견습했다. 의학교육의 평가 방법은 의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의술에 대한 전문적 기술로 나누었다. 의학에 대한 학업 평가는 사맹삭(四孟朔, 1·4·7·10월) 또는 매월 정기적으로 성적을 평가하여 기록한다. 평가 기록에 따라 우수자는 실직 서용, 현관 제수, 승진의 특전을 주었다. 그러나 성적 불량자나 태만한 자는 임명 취소, 파면, 군역 부담 등으로 처벌했다.

禮曹啓 : “世宗大王朝所撰《醫方類抄》備載諸方, 但卷秩浩穰, 卒難刊行, 姑將簡要方書分門講習.” 從之. 예조에서 아뢰기를, “세종 대왕조(世宗大王朝)에 찬술(撰述)한 『의방류초(醫方類抄)』는 여러 방서(方書)를 싣고 있지만, 권질(卷秩)이 호양(浩穰)하여 졸지에 간행하기 어려우니, 우선 간요(簡要)한 방서(方書)를 가지고 분문강습(分門講習)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려사
통문관 설치와 관련한 『고려사』 기록, 영남대학교도서관.
사회변혁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한 중인

중인은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재물과 권력을 획득했고, 또한 조선 후기의 사회 변혁을 도모한 핵심 세력이었다. 즉 중인은 전문적 지식을 가계(家系)로 전수했고, 기술 관직을 세전(世傳, 대대로 전함)하여 새로운 계급으로 등장했다. 아울러 중인 교육의 교육과정이 선진한 외국 신서(新書)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 문물의 도입과 정보에 민첩했고,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현실적이며 실용적임으로 전통 유학에 고루(固陋)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인은 개화운동의 선구자나 한말의 고위직 관료로 진출하는 사례가 허다했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서학, 즉 천주학이나 신학문의 발전에 중인의 역할이 지대했다. 예컨대, 역관 출신의 김범우(金範禹, 미상-1786)는 서학을 동전(東傳)하는 데 공헌했고, 또한 역관 출신인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은 중국의 신서(新書)를 구입하여 개화사상으로 발전시켰다. 결국 중인 신분에 의해 통상과 개화를 이룰 수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중인이 조선 후기의 새로운 지배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갑오개혁의 내각이나 독립협회의 간부로 진출했다.

번역노걸대
『번역노걸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찬도방론맥결집성
『찬도방론맥결집성』,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세조실록 12권
분문강습법과 관련된 기록. 『세조실록』 12권, 국사편찬위원회.
경국대전
『경국대전』,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