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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을, 겨울호-학교 조선시대]조선 시대의 예술교육 - 화원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4-01-02 조회수 : 456
조선 시대의 예술교육 - 화원 -
화원은 조선 왕실의 공식적인 기구인 도화서나 규장각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리는 일을 전 업으로 하던 화가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예조에 소속된 도화서의 화원과 정조부터 고종 때까지 규장각에 소속되어 국왕이 직접 관장하는 궁중 화원인 자비대령화원이 있었다. 왕 실에서는 도화서를 두어 화원을 양성하며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글 류재만 서울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단원 풍속도첩》
조선 후기 화원 김홍도(金弘道, 1745-미상)의 『단원 풍속도첩』 중 그림감상. 김홍도는 29세 때 영조와 왕세자의 어진을 그렸고 산수화, 풍속도 등 조선회화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국립중앙박물관.
화원의 역할

화원의 주요 역할은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어진과 각종 의궤도, 세화, 삽화·지도, 도자 그림을 그렸으며 해외 파견과 교류의 임무도 수행했다. 화원의 직무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을 그리는 것이었다. 어진은 국왕의 화상을 일컫는 말로 어진 제작은 도화서 화원들에게 가장 중차대했던 일이라 볼 수 있다. 의궤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의 절차와 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공문서이다. 의궤에 첨부된 그림인 의궤도는 화원들이 가장 많이 그려야 했던 그림이다. 화원들은 세화도 많이 그렸다. 세화는 일반적으로 ‘새해를 송축하고 재앙을 막기 위한 용도로 그려진 그림’으로 화원들이 임금에게 그려 주면 임금이 다시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던 그림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의례, 제도서, 교화서, 병서, 농업, 의학, 지리 등의 서적을 많이 간행하였다. 이러한 정부간행물인 책들에는 한두 장 또는 수십 장의 실물 모형도나 설계도, 실측도, 삽화 등이 첨부되는데, 이는 모두 화원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조선 시대 도자기는 청자와 달리 그림을 그려 장식한 것이 많다. 둥근 백자의 형태는 그림을 그리기 쉽고 도자기의 바탕이 흰색이라 조선 시대에 유행하던 형식의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백자에 장식된 걸작들은 사대부의 취향에 맞추어 화원들의 손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또한 화원들은 사행의 일원으로서 멀리 청나라나 일본에 파견되기도 했다. 매년 동지 때마다 화원이 중국에 파견되었으므로(동지사) 그 횟수는 수없이 많았고, 일본에는 선조부터 순조 때까지 통신사가 모두 12번 다녀왔는데 이때마다 다녀온 화원 14명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화원의 선발과 직제

도화서는 조선 시대에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운영한 국립미술 교육기관으로, 교육체계를 가지고 미술을 교육하였으며 유명한 화원들을 배출하였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화원 교육은 사회적 필요 때문에 국가가 제도적으로 전문 화가를 육성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도화서에서는 일정한 정원을 정해놓고 화원을 지망하는 이들 중에서 선발하였다. 화원 취재(선발)는 중인 계층을 대상으로 기능직을 뽑는 잡과 중 하나로, 매년 1월, 4월, 7월, 10월에 시행되었다.

화원 선발 채점 규정

화원 선발 채점 규정
과목 채점 규정
죽(1등 과목) 5분
4분
산수(2등 과목) 4분
3분
인물·영모(3등 과목) 3분
2분
화초(4등 과목) 2분
1분

『경국대전』, 『예전(禮典)』 ‘취재(取才)’조

화원 선발 시험 과목으로 화초를 4등, 인물·영모를 3등, 산수를 2등, 죽을 1등으로 하고 이 중 두 과목을 택하게 하였다. 채점 규정도 정해져 있어 가장 덜 중요하게 여겨진 4등 화초 과목의 경우 약(略, 보통 것)은 1분, 통(通, 잘된 것)은 2분으로 정해놓고 이것을 기준으로 과목의 등수가 3등, 2등, 1등으로 올라갈수록 1분씩 더해 주는 방식을 취했다. 이 채점 규정을 보면 죽이나 산수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사대부들이 지니고 있던 문인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인물을 3등 과목으로 책정한 것은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실질적인 면을 고려한 것이다. 또한 어진을 그림으로써 출세하기 유리한 과목으로 여겨져 점수는 낮지만 많은 화원 화가 지망생들이 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도화서의 직제

도화서의 직제
구분 품계 직명 인원 책무 비고
관장 당상관 제조 1 대표 후기: 예조판서 겸임
보좌관 종6품 별제 2 실무책임 후기: 폐지, 경교수로 대치
화원 종6품 선화(善畵) 1 20 장도화 후기: 30명으로 증원
종7품 선회(善繪) 1
종8품 화사(畵史) 1
종9품 회사(會史) 2
화원 15
생도 15 화학(畵學) 후기: 30명 증원
전자관 2 전각 후기: 신설
배첩장 2 표구(表具) 경공장 소속
차비노 5
노(奴) 근수노 2
49

김종태(1989). 한국화론, 일지사. 149쪽.

도화서의 조직과 구성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어 있다. 도화서는 국가가 필요로 했던 일체의 도화를 관장하는 기관으로서 그 구성은 정직인 경관직의 제조 1명과 종6품 의 별제 2명, 잡직인 화원 20명이 정원으로 되어 있었다. 화원 20명 중에 종6품 선화 1명, 종7품 선회 1명, 종8품 화사 1명, 종9품 회사 2명 등의 5명과 잉사화원(仍仕畵員)으로서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계속 근무하는 자) 3명(종6품, 종7품, 종8품)을 포함한 8명이 그림 그리는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밖에도 생도 15명, 차비노 5명, 근수노 2명, 배첩장 2명이 있었다.

고종 어진
고종 어진, 국립중앙박물관.
화원의 교육 목표와 내용

화원 교육의 목표는 정확한 묘사 능력의 육성이다. 국가 관리하에 도화서에서 화원들은 실용적이고 감계(鑑戒, 교훈이 될 만한 본보기)의 목적이 있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이들에게는 정확하고 생생하게 그릴 것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화원에 대한 평가는 정확한 모사를 해낼 수 있는 능력 위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정확한 묘사 능력이 화원 미술교육의 목표인 까닭은 사진이 없던 시대에 국가의 주요 행사나 일반 백성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정확하게 그림으로 기록해야 했기 때문이다. 화원들이 남긴 그림은 오늘날 우리가 조선 시대의 미술 문화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서 의의를 지닌다. 화원의 교육 내용은 장식적이고 실용적인 그림 그리기를 중시했다. 화원들은 직업 화가로서 당시의 사회적 여건으로 인해 예술적으로 격 높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궁정이나 귀족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장식적이고도 실용적인 그림을 그렸다. 화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예술인이 아닌 장인으로서 기능적인 면에 치중하였으며 그림의 내용과 형식에도 적지 않은 제약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양모(1985). 조선 전기의 화론, 한국의 미11. 중앙일보사. 182쪽. 화원의 교육 내용은 지배층이나 왕실의 요구로 인해 제약과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통해서 조선 시대의 미술가들을 양성했다는 것은 큰 의의를 가진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국립고궁박물관.
화원의 교육 방법과 평가

화원 교육 방법으로, 첫째, 화보나 명작 모사를 중시했다. 그림을 모사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었다. 좋은 그림이 들어왔을 때 선화가로 하여금 복사시키거나 같은 그림을 여러 장 배포하기 위해서 베껴 그리도록 하였다. 또 임화(臨., 그대로 본떠서 그림)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안평대군은 이룡근의 ‘삼미도’를 구했을 때 최경에게 모사시킨 일이 있다. 오세창(1970). 근성서화징. 서울 : 신한서림. 52쪽. 둘째, 실물 사생을 중시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의 기록을 통해 화원들의 주요 교육 방법 중 하나가 실물 사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에 역대 제왕이 권하여 본받을 만한 일들을 병풍에 그리라고 명한 것은 이를 보고 반성하도록 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 금수를 산 채로 보고 그리게 하시며 또 하필이면 궁중 내에서 그리하십니까? 성종실록, 권9, 성종 9년 8월 기해.

실물 사생에 대한 지나친 성종의 관심을 염려하는 조정 신하들의 간언을 통해 세종, 세조 때부터 실물 사생이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종실록, 권95. 이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화원 교육에서 개자원화전과 고씨화보 등 그림 책자를 모사하거나 오늘날과 같이 실물을 직접 마주하고 데생하는 수업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화원 교육의 평가 관점은 도화서 화원의 역할과 그들이 남긴 미술 작품, 화원의 취재 과정의 평가를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정확한 묘사 능력을 중시했다. 국가 관리하의 도화서에 있는 화원들은 실용적이고 감계의 목적이 있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이들에게는 정확하고 생생하게 그리는 것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화원에 대한 평가는 정확한 모사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위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전신론적인 사실성을 중시했다. 화원들이 많이 그렸던 어진이나 초상화는 전신사조(傳神寫照,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 묘사뿐 아니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초상화론)의 역할을 했다. 즉, 서양의 초상화나 현대의 인물사진처럼 어떤 개인의 외모를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위에 그 개인의 성격, 인품, 교양, 정기 등 이른바 정신세계를 초상화에 반영하여, ‘기운생동(氣韻生動, 표현된 대상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는 의미)’의 경지로 승화시켜야만 비로소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안휘준(2000). 한국회화의 이해, 서울 : 시공사. 37쪽. 화원 교육을 통해서 유명한 많은 화가를 배출했고 그들에 의해서 주도된 미술 문화는 오늘날 우리 미술교육에서 전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교육에서 지도되고 있다. 전통미술이 과거 우리 조상들의 미술 문화유산을 계승한 것이라고 볼 때, 계승은 바로 교육을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 화원들이 이룩한 미술 문화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오늘날 우리 미술 문화와 미술교육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때, 도화서의 화원 교육제도는 미술 교육적 의의가 크다.

백자청화운룡문호
백자청화운룡문호(靑畵白磁雲龍文壺), 국립중앙박물관.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국립중앙박물관.
사계절산수_전 안견
안견(安堅, 1410년경-1464 이후)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사계절 산수(四時八景圖)’, 안견은 조선 초기 독자적 경지에 오른 화원으로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립중앙박물관.